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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6장12~26절
제목 : 열두 사도와 하나님 나라의 복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나병 들린 사람과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6장에서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른 일과 손 마른 사람을 고치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하고 서로 의논할 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려 산에 가십니다.
산에서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중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평지로 내려오셔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평지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1. 기도하시는 예수님(12절)
“[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이 때에”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의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 12:15) '이 때'는 예수님께서 그 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갔습니다.
그 산이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생애에서 모든 중요한 사건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끝임 없는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막1:35).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의 공급선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죄인을 구속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애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려고 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성취할 모든 것을 위하여 자기가 죽은 후를 대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남에게 과시(誇示)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빌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는 현격히 대조됩니다(막 12:40).-(외식으로 길게 기도함)
*막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는 과학적인 생각을 하며, 지성적인 생각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깊은 확신을 갔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간구에 대하여 마태는 17번, 마가는 12번, 누가는 28번 기록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받은 은혜가 있고, 기도 외에는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며, 기도할 때만 받는 축복과 특권이 있습니다.
기도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기도로만 채워지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12제자를 택하여 사도로 세움(13~16절)
1)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13절).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 둘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완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2제자의 선택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초기 단계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종말론적 의미에서 복음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구약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유대 민족의 형성 과정상의 12지파가 암시하는 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택하여'는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주권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요15:16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입증해 줍니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선택의 주체는 분명히 예수님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열 둘을 택하여,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아포스텔로'('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특별한 명령과 권세를 받아 보냄을 받은 사절을 말합니다.
12제자를 말합니다.(막 3:13-19)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도적 권위와 선포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대변자로서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훈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열 두 제자의 이름입니다(14~16절)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본문(14-16절)은 사도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네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마10:2-4;막 3:16-19;행 1:13).
(1) 베드로 - 베드로는 비록 맨 처음으로 예수께 부름받은 자는 아니라 할지라도(요1:42) 열 두 사도의 목록 중에서 항상 맨 앞에 나옵니다.
이것은 그가 사도들 중에서 인정된 수제자(首弟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은 그의 본명으로서 '듣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신 후 붙여주신 이름으로서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1:42에서 그에게 붙여진 '게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서,
역시 '베드로'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를 나타냅니다.
(2) 안드레 : ‘시몬의 형제 안드레’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로서(막 1:16-18;요 1:44), 세레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됩니다(마 4:19,2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후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합니다(요 12:20-22).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주의 제자로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요 6:8,9;12:20-22;행 1:13,14).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소개합니다(요6:8,9).
안드레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남자'라는 뜻입니다.
(3) 야고보와 (4)요한 - 이들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던 세 제자 중의 두 명입니다.
마가는 이들에게 더 자세한 말을 덧붙여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더했습니다(막 3:17).
그러나 누가는 아무런 수식이 없이 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이미 5:10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로 언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의 뜻이고,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5) 빌립 - 안드레나 시몬의 고향과 같은 벳새다 출신입니다.
주를 처음 만난 후 친구 나다나엘을 주께 인도했던 자입니다(요1:45,46).
(6) 바돌로매 - 히브리식으로는 '바르-탈매'인데 이는 돌로매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바돌로매는 요1:46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7) 마태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그는 '레위'로 소개되는데(5:27-29;막 2:13,14) 그 의미는 '연합하다' 입니다.
아마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히브리식 이름인 '레위'에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로 바뀐 듯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픈 심정에서인지 자신을 '세리 마태'로 숨김없이 표현합니다(마 9:9,10).
(8) 도마 - 세 번에 걸쳐 이 이름 다음에 '디두모'라는 헬라식의 이름이 따라 나옵니다(6:14-16;마 10:2-4;막 3:16-19).
이것은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바로 이 '디두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마'는 히브리명으로'쌍동이'라는 뜻입니다.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작은 야고보'로 불리웁니다.
그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이름만 언급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10:3;막3:18). 다만 전설에 의하면 그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다는것과 십자가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전해질 뿐입니다.
(10) 셀롯이라 하는 시몬 -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 사람'이란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인'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나'에서 유래한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셀롯'이라는 헬라 명칭은 '열심당원'(Zealot)을 뜻하는데 시몬이 열심당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셀롯'이라는 이 한 마디 속에서 열심으로 불타는 열광적인 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열심당은 유대의 반로마적 애국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을 감행 했었습니다.
이들은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는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곤 했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몬은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11)야고보의 아들 유다 -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Thaddaeus)라고 부릅니다. RSV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12)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 졌습니다(요 6:71;13:2,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에 있습니다(수 15:25). 그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공관복음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습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게 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겼습니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출21:32).
*열 두 제자들은 상당히 이질적인 자들로 구성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안드레 요한은 어부였고, 두 쌍의 형제 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빌립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레위는 세리였지만, 셀롯이라는 시몬은 대단한 애국자로써 열성 당원이었습니다. 레위와 셀롯 시몬은 정치 이념이 완전히 상반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제자들은 정치적 이념과 기득권 편가름 등을 떠나 적대감을 허물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형제자매된 가족의 모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산 아래에서 치유하시다(17~19절)
1)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 왔습니다(17절).
“[17]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그들'은 이미 택하신 열 두 사도들뿐 아니라 그 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까지 지칭합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산에만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택한 제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서 죄악에 빠진 영혼들을 구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셔야 했습니다.
(1) 평지에 서시니.
여기 언급된 '평지'는 마5:1의 '산 위'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지'는 반드시 저지(低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산 위의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고, 12제자를 선택하신 뒤 산 아래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오신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의 기록은 사방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를 향하여 올라간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의 두 일행이 산언저리의 어느 한 평평한 곳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2) 유대 사방과...많은 백성도 있더라.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5:1)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구절에서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온 많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평지에 멈추어서 가르치실 때,
그 주위에 몇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 두 사도들,
그들 보다 좀 많은 제자들의 무리, 그리고 일반 군중들이었습니다.
(3) 백성들이 허다하게 몰려든 목적은
예수님의 권능 있는 말씀을 듣고 또 그의 치유능력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각 지방의 이름은 곧 팔레스틴 지역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 각처에서도 행해졌습니다.
여기서 '유대 지방'이라함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동북쪽으로 베니게에 속한 항구 도시이며 이방 지역입니다.
따라서 팔레스틴 남.북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사방 각처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병고침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강조합니다.
한편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요단강 건너 지방까지 언급함으로써 팔레스틴 전지역을 서술적 형태로 표현해 의미에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2)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18절).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누가는 귀신들린 자들과 단지 육체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자들을 구별합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더러운 귀신에게'가 '고난 받는'과 연결될 수 있고,
둘째는 '고침을 얻은지라'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본절과 19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이적적 권능(power)과 고침(healing)에 관한 강조는 누가복음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기사는 평지 수훈 직전에 위치함으로써 그 가르침의 권위를 한층 더해주고 있습니다.
3)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씁니다(19절).
“[19]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알려지게 되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지기만이라도 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병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에 압도되어,
예수님에게 감히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만짐으로 병을 고치는 기사는 8:43-46에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예수님의 옷자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다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 몰려온 병자들의 무리 개개인이 예수님을 통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만진 병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은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시사합니다.
4. 산 아래에서 가르치시다(20~26절)
본문은 흔히 평지 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마5~7장)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산이 아니라
평지(17절)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복에서 시작해 지혜로운 건축가와 어리석은 건축자 말씀으로 끝나는 점에서 확실한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본문 24~26절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네려와 십계명을 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서 네려와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6장20절 이하의 말씀은 메시야의 계명이라고 할 만큼 매우 중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을 강조하지만,
평지수훈은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를 강조합니다.
특히 누가의 4복은 사회경제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복과 4복은 현재를, 2복과 3복은 미래를 표현합니다.
1) 네 가지 복(20~23절)
(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절).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눈을 들어. - 이 같은 표현은 마5:2의 '입을 열어'라는 말과 비교됩니다.
두 복음서 모두 어떤 한 행동을 취하기 전 예비 동작을 갖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마 5:3).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두 표현 간의 의미상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 항상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실제로 예수님 앞에 몰려온 자들을 보면,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빈곤한자요 병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이러한 사회적소외층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 의지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외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경건한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로 묘사됩니다(단 4:27).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 마태복음 평행 구절의 '천국'이라는 표현과 비교되는데 그 뜻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향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여
'천국'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믿음이 수반되는 곳에 '바로 지금'임할 뿐 아니라,
장차 주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그 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것임이요. - '너희 것이 될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은 완성되지 못한 축복의 영역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주린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우는 자는 웃을 것임이요(21절).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①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여 영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영적인 것에 항상 주려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할 때 주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 육체적 주림이 해결된다 해서 영적인 주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림입니다.
육체적 주림은 이 땅에서 음식물로서 배가 부를 수가 있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기갈 상태에 관하여 아모스 선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대언한 바 있습니다(암8:11).
'배부름을 얻다'는 것은 능동적인 획득의 의미가 아니라,
미래 수동태로 쓰인 것으로,
주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서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②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클라이오'('울다')는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도 현재 분사로서 지속적인 상태를 암시합니다.
마태는 이를 '애통하는'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을 꿀임 없이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마태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웃음은 영적인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특성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롬14:17).
(3) 의를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22절).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인자를 위하여. - '인자'는 본서 중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칭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9:26;11:30;17:2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인자)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로
'너희가 나를 인자 메시야로 믿고, 나를 고백하고,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제자들로서 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이 문구를 '나를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칭호와 관련되는 의미를 상세히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라는 칭호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것은 그의 신인적(神人的)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사입니다.
너희를 미워하며...버릴 때에는. -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點綴)되어있습니다.
곧 피로 얼룩진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박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박해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바입니다.
이 박해는 참 신앙인과 거짓 신자를 구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연단을 가져다주고 믿음의 인내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내적으로 충실했고, 선교는 더욱 활발했습니다.
따라서 박해를 이기고 난 뒤의 결과는 영광과 기쁨의 승리인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멀리하다'(아포리조)는 '경계를 구분하다'는 의미인데
이말은 사회적 교제 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버리다'(에크발로)는 연극 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악하다 하여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종종 있었듯이 경멸과 조소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투옥이나 재판, 사형에까지 이르도록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23절).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①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 마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반면에 여기서는'뛰놀라'로 되어서 더 적극적이고 격렬한 태도를 암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앞 절의 박해와 고난을 당할 바로 그때에 기뻐하고 뛰놀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주님 때문에 받는 박해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극적(dramatic)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②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 박해를 받는 자들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상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의 큰 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마 5:10 주석 참조).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늘의 큰 상'을 말씀하신 것은 박해를 피해가거나 박해로 인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주를 배반하지 말 것을 격려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박해만큼이나 사람들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명예나 물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살기 힘든 세상에서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는 하늘 나라가 큰 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2) 네 가지 화(24~26절)
(1)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절)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①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여기서 '부요한 자'는 20절의 '가난한 자'의 반대 개념으로서 등장합니다.
본문의 의미가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상징적 의미로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자신만을 신뢰하고 자만하며, 자신들의 교육, 학문, 지혜만 자랑합니다.
더욱이 이들은 마음이 심히 완악하고 강퍅하여 그리스도의 경고의 메시지에 귀기울일 줄 모르며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기업이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삶의 모든 의미를 두고 허탄한 일만 일삼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심판 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임하게 될 것입니다.
②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부요한 자들은 미래의 영원한 축복 대신 현재의 육신적 만족을 스스로 택하였고 더욱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대가로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축복받은 자들과 잘 대조됩니다(23절). 여기서'받았도다'란 의미의 원어 '아페코'는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또는 '완전하게 수령했다'를 뜻하는 상업적 용어입니다.
(2)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25a)
“[25a]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배부른 자 -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영혼의 굶주림을 외면 한 채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여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이는 21절의 '주린 자'와 대조가 됩니다.
(3)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b)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여기서 웃는 자의 웃음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서 오는 육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심판 때 대가로 받을 울음은 영원한 것이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편 이 '웃는 자'는 21절의 셋째 축복 '우는자'와 대조됩니다.
이처럼 20절로부터 계속 묘사되는 일련의 역전(逆轉) 상황들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 인간의 완악한 본성에서 기인하는 진리의 역설(paradox)을 선명하게 노출시킵니다.
이와 같은 역전 상황 내지는 역설의 논리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테면, "자기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이나(마 10:3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는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고후 6:10).
(4)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26절)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 일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자들을 칭찬하기 쉽습니다.
예로부터 거짓 선지자는 항상 그들의 간사한 행위를 인하여 칭찬을 받지만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함으로써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칭찬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빛 가운데 백일하에 드러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22절의 넷째 축복 '핍박을받는 자'와 대조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하였느니라 - 본문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 당시의 왕실 선지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합왕과 왕후 이세벨의 귀에 즐거운 거짓예언을 일삼은 대가로 부를 누리며 칭찬을 들었습니다(왕상 18:19).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달콤한 통치자와 예언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며 나아가 그들을 우상 숭배에 빠뜨리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득세를 애통해 했습니다(렘 5:31).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로 표현하며 경계하셨습니다(마 7:15).
하나님의 가치와 이념과 그 질서를 지키고, 유지하고 그것을 확대하기 위해서 겸손하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참된 제자도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복을 체험하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11), 또 열두 사도를 세워야 하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십니다(12,13절).
그 밤처럼 캄캄한 현실에서 세상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능력(19절)을 덧입기 위해 기도하십니다.
때로 기도의 문이 막힐 만큼 기막힌 일이 닥치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또 유일한 일 역시 기도밖에 없지 않을까요?
2) 자신의 가르침과 권한을 이어받아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새 이스라엘의 초석이 될 열두 사도를 택하십니다(13~16절).
이들은 저마다 출신과 직업, 기질과 배경이 달랐지만 한 주 안에서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도 저마다 다른 자리, 기대, 욕망을 품고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한 생명, 한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이니 신실한 증인의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
3) 산에서 ‘내려오신’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얻은 능력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17~19절).
더 낮은 곳으로 더 많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 중에는 유대인만 아니라 저 멀리 이방 지역에서 온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디인만 아니라 이방인이든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희망을 예수님께두고 절박한 심정으로 주를 붙잡는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4)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의 ‘가난과 주림, 눈물과 핍박’은 복이 되지만, 이 세상에 취해 부하고 배부른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20~26절).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않을 만큼 편안하고 넉넉한 삶이 축복일 리 없습니다.
이렇듯 물질의 번영이나 고난 없는 삶을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의 왜곡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도 이 복과 화의 선언을 통해 내 삶의 가치와 목표를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5) 사람들의 거친 모욕과 언사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마십히오(22,23절).
세상으로부터 오는 박해는 내가 예수의 신실한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요, 내게 상(구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도리어 주의 길을 제대로 따라가면서도 고난이 없다면 이상히 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