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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에서 띄우는 편지
도창회
허형!
시정(市井)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나의 소원이 번잡한 도심을 한 번쯤
떠나보았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라던 그 소원이 이루어져 인적이 끊긴 산속의 깊은 정적을 대하고 보니 내가 찾고 있던 행복이 무더기로 굴러온 셈이지요.
처음 녹음 속에 숨어 있는 이 산사를 찾았을 때는 마치 외국이라도 온 것처럼 경이감과 신비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바람이 바로 이게로구나 할 정도로 손가락 끝에 닿는 듯 구체화 되어 산정(山情)이 가슴 가득히 적셨습니다.
창호지에 잉크 물이 번지듯 산의 무거운 고요가 몸에 배고 또 산의 숲 향기가 코를 맵게 했습니다.
허형!
산정도 세정(世情)처럼 끝 간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산에 수초(樹草)의 다양함에 미처 인간의 관찰이 못 미침을 알겠고 산이 뿜어내는 그윽함에 심혼(心魂)마저 빨려들어가 나의 존재마저 망각해 버리듯 물아무간(物我無間)의 오묘한 순간을 느끼곤 합니다.
우선, 하 그리 하고픈 말들이 많았는데 이제 그 많은 언어들이 어디론지 입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허형!
언어를 잃은 지 오래되었지만, 헌데 사고의 불은 왜 꺼질 줄을 모르는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멈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일는지 모르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조용한 송림 속이라 할지라도 밖으로 향하는 나의 의식만은 잠재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허형!
사실 사고의 소유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여기와 생각해 보니 사고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게 느껴집니다.
조용한 곳과 조용한 시간을 가질수록 사고의 아픔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삶 – 의식 – 사유.
이 셋은 떨어질 수 없는 공동운명체인가 보지요.
사실 이 산사를 찾기 전에 세속에서 가졌던 생각들은 깨끗이 떨어 버리고 온다고 다짐했건만 끊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다니는 철부지지요.
나는 분명히 도승(道僧)은커녕, 사람조차 되긴 다 틀린 속물 임에, 틀림없습니다.
생각마저 명멸하는 무념지각(無念之刻)은 오랜 훈련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는 산사 스님의 어려운 말씀을 나로선 이해하기가 힘 드는 군요.
허형!
하루의 일과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이 나는지도 모르고 내닫는 세월에 몸을 맡겨 뛰었던 것이 도회지 마을의 삶이지요. 참 바쁜 생활이었습니다.
현대를 산다는 것은, 이렇게 고달프고 힘겨운 일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간다는 것처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허형!
허형과 나는 특히 남 같지 않은 가난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었지요. 둘이는 간혹 찻집에서 만나 우리들ㅇ의 빈 쭉정이 같은 삶의 현실에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지 서로 마주 쳐다보고 낄낄대며 웃었지요.
대도회 속에 조그마한 가정 하나를 꾸려나가는 게 그렇게도 대단한 것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참 사나이의 얼룩진 과거였다고나 할까요.
세상에서 벌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얇직하여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참 허탈하고 고독한 순간입니다.
허형!
지금 자리하고 앉은 내 곁에 철 늦게 핀 산수유가 방향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렇게 바쁘게 뛰고 있을 때, 이 산수유는 세월을 모르는 채 혼자서 피고 지고 해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정(靜)과 동(動)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입니다.
지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며, 또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귀며 뜨겁게 사는 길이 우리가 갈 길임을 믿었고 또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게지요.
허형!
찰나적으로 생의 무거운 피곤을 실감 나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몸속에 뼈마디 마디마다 스며드는 이 절실한 고달픔을 허형은 실감키 어려울 것입니다.
영고(榮枯)의 천연이 가져다주는 침묵 속에서 인생의 하중(荷重)을 가만히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허형!
우리 더 솔직히 말해봅시다.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것들은 조금도 특이한 것이라고는 없고 세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직업마저도.
세상에서 내가 동경하고, 사랑하고, 또 찬미한 것들이 과연 우리가 추구 해볼 만한 것들이었는지 오늘따라 회의를 일게 합니다. 그것들이 참 삶의 의미에 연결이 되는, 것인지 단정을 내릴 수 없어 애가 탑니다.
허형!
나는 인적이 끊긴 이 산사에 찾아온 후부터 나는 나를 고발하여 재판장 앞에 세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인적없는 공간에서 살며시 나의 가면을 벗겨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실은 내가 여기 오기 오래전부터 나는 나 아닌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둘로 쪼개어 긍정적인 나와 부정적인 나를 서로 전쟁시켜 놓고 나는 멀찌감치에서 바라보고 있었지요. 나는 이 두쪽의 나에게서 이해하지 못할 많은 속성을 발견하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가령 내 몸속에 위선과 교만 그리고 허영을 키우고 있으면서도 남의 위선과 교만 그리고 허영을 참지 못하는 그런 나를 발견하고 놀랐던 것입니다. 때로는 나는 내 자신이 밉고 무서운 생각마저 듭니다.
또 하나 나로 하여금 화나게 하는 일은 내면에 슬픈 에고(ego)를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무감정적 표정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장 감정 같은 것이 화가 난다는 말입니다. 속으로 울면서 겉으로는 웃는 것이지요. 결코 비젼 부재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선천성을 탓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허형!
지금, 이 시간까지도 영 실감 나지 않는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많이 늙었다는 사실입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 대 원칙에 입각해서 늙어가는 것이 하필이면 나 혼자만이겠습니까만, 하지만 어쩐지 늙었다는 사실이 영 바보 같게만 생각됩니다.
이 영원한 시간 앞에 내가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별 쓰잘머리 없는 일들에 집착하다 세월을 다 허비한 것인지나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시간의 낭비 앞에 뒤늦게나마 몸서리치며, 남모르는 고독을 절감하는 순간이지요.
그간 세월 속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 읽은 것들 또 느낀 것들로 인하여 이성이 굳어져 판단력마저도 흐려짐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익는다는 것(熟)은 곧 떨어진다는 것(落)을 말할런지 모릅니다. 정말 나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지나간 세월의 아쉬움을 이기는 데는 또 하나의, 이해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허형!
그간 쓰시던 학위 논문은 다 되었는지요? 너무나 현실을 충실히 살며, 남 같지 않은 잔정이 많으신 허형인지라 늘상 내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또 당신의 인간미에 존경을 보내고 있습니다.
허형!
소위 세상에서 벌었다고 하는 것이, 그 실은 잃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가 통하는 곳이 바로 이 산속의 환경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역(逆)의 논리를 세파 속에서 많이 들어 온 터이지만, 정작 현장감이 나는 것은, 바로 이 대자연의 마력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래서 미국 어느 수필가가 자연 속에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다고 했는지 모르겠소.
허형!
우리는 자연을 떠나 인간 속에 뛰어들면서 거짓말을 배웠습니다.
사실 우리가 얻은 지혜나 지식 들도 따지고 보면, 진실을 떠난 것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옆에 사는 인간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교만이나 긍지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 홀로 있게 되면 교만 내지 자부와 칭찬 같은 헛것들이 있고말고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인간들은 때때로 보람이나 희망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숲속에서 보면 그것들이 실체가 없는 허상임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속이 텅 빈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허형!
내 곁에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꽃에 꿀벌 한 마리가 찾아와 나의 사유(思惟)를 방해 합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여기도 분명히 인간계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같습니다.
꿀벌의 나래 소리가 사라진 다음 다시 고요가 밀려듭니다. 사방이 가려진 녹음 속이 마치 사방이 밀폐된 상자 속에 내가 들어있는 것처럼 나는 홀가분한 자유 같은 것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신체적인 방종을 허락해서라도 어떤 초월한, 자유 같은 것을 맛보고 싶은 그런 심정입니다.
허형!
세상에서 넘어선 안될 선까지도 넘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까지도 시사하는 곳이 바로 자연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자연 속에서 통용되는 법칙은 어떤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있을 법한 진리를 터득하는 순간이라고 합시다. 우리는 상상력마저도 억제당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역 환경으로 느낍니다. 바야흐로 이런 방자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만이 이 대자연에 배신자가 된 기분입니다.
허형!
사실 한 개인이란 전부의, 의미는 몸속에 오관(五管)이 길들이는 대로 자기타입을 형성해 가고, 그 주관적인 자기타입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지극히 직관적인 동물이 인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대단히 근시안적으로 자기 코앞의 사실들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인 것입니다.
허형!
서울서 이 산사까지는 불과 삼백 리 남짓한 거리밖에 안 되지만, 그러나 그간 한 번이라도 틈을 내기가 어려웠던 것은, 내 주변의 사소한 사건들에 얽매여 고개를 들고 멀리 바라다볼 줄을 몰랐던 것이 아니겠냐구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환경에 속아 사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사화라는 대 환경에 길들어버린 것인지, 어느 쪽인지 잘 분간이 안 됩니다.
이 산사에 살고 있는 승려들이 속가에 나가기 힘 드는 것처럼, 우리가 이 산사를 찾기가 힘 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가 되겠지요. 속가에 살고 있는 사람은 속가에서 할 일이 있고, 이 산속에 사는 사람은 이 산속에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하자면 서로가 인연이 닿은 연고지에서 할 일을 찾아 살다 죽게 된다는 지극히 평이 한 진리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할 일이란 것들이 별것도 아닌데.
허형!
허형이 살아온 처지를 내가 잘 알고, 또 내가 살아온 처지를 허형이 잘 알고 있는 터라 속일 것도 없습니다만, 우리는 대도회 한구석에 세월에 물려 살면서 우리 둘만이 아는 그런 아름다운 추억도 많았습니다. 남 보기에는 꾀죄죄한 것들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한량없이 아름다운 추억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남이 흉내 내지 못할 그러한 한편의 걸작도 있습니다. 생각 나시지요? 멀리 여행 가서...
원래 인간사(人間事)란 누구나 한편의 단편 소설이니까요.
허형!
오늘, 이 산사에는 어느, 누구 한 사람 찾아올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날 지켜볼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발 아래 산허리에 짙은 어두움이 깔리고 밤하늘에는 푸른 별들이 뜰 것입니다.
별빛 어린 창가에 앉아 내가 걸어온 서러운 발자취를 곰곰이 더듬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때늦은 얘기지만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새로 설계해 볼 작정입니다.
그리고 생을 주도하는 근원이 무엇인가도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월의 연속 앞에 모든 세재(世在)하는 가치 척도들이 변하고, 우리에게 오늘 소중하게 생각한 것들을 내일의 주역들이 업수이여길지 누가 압니까? 그리고 그 업신여김 받을, 모든 것들을 위하여 오늘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허형!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 성현들의「반드시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식의 Sollen들은 글을 통해서 배웠지만, 너무나 비판적인 것들이 많았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지녀야 할 지식이나 지혜가 많았습니다만, 정작 살아 가는 데 없어도 그만인 그런 것들도 많았다는 것을 솔직히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개인차나, 또는 세대차를 몰라서 하는 말도 아니며, 그리고 내가 무슨 agnostic(不可知論者)이 되어서도 아닙니다.
반복하고 순회하는 것이, 역사라고 토인비는 말했으니, 우리가 추구한 진리들도 반복 순회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십분 자위가 되겠지요.
허형!
생의 종말이 소멸(消滅)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왜 우리들은 자기 소멸 후의 일까지도 걱정하며, 또 욕심을 내는 것입니까? 일생, 동안 이루어놓은 자기의 행적(行蹟)들이 사후의 자기와 무슨 연관을 맺는다는 뜻인가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자기 포기는 일종의 죄악이라고 강하게 의식하는 생의 철학자들이 많습니다.
쇼펜하우어, 데카르트, 니이체, 키엘케골, 짐멜, 베르그송, 스팽글러, 쉴러, 하이덱거, 아스퍼스 그리고 프랑스의 장폴과 싸르트르 등 많은 삶의 철학자들이 생의 긍정자들인 것입니다.
허형!
우리 문도(文徒)들도 제 나름의 죽음을 정의 내리고 거기에 안거해 버립니다. 토마스 하디는 죽음을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했고, 톨스토이는 부활로 그렸습니다. 우리 사회도 점차 적으로 해브리아이즘의 사관(史觀)이 도입되고 있음은 주목할 사실입니다.
불교의 윤회사관(輪廻史觀)이나 유교의 천명사관(天命史觀)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시 죽음 앞에 놓인 나약한 인간이라 생의 구원(救援)을 갈망하게 되나보지요.
릴케(Rilke)의 시구처럼 「보라! 죽음은 한 양탄자의 실올들이 얽혀 있듯 하나로 짜여 저, 하나가 사라지면 하나가 생기는 법, 하나의 모습이 있을 따름이다.」
곧 삶 속에 필연적으로 죽음의 구성 성분이 함께 들어 있어, 삶의 매 순간마다 이미 작은 죽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그런 설명이다. 생과 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동일한 것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허형!
나는 이 숲속에서 작년에 죽어 떨어진 나뭇잎에서 올해 다시 돋아난 새잎의 탄생을 생각하고, 또 올해 무성하게 자라난 싱싱한 나뭇잎에서 다시 시들어 떨어질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생과 사의 자연 순환 법칙을 우리 인간만이 벗어날 수가 있을런지요? 만일 벗어날 수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큰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죽음이 있은, 이후 인간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란 불항거(不抗拒)를 이유로 우리는 절대존자(絶對尊者)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벨의 순수한 피든, 카인의 불결한 피든, 그들은 함께 이 세상에 살게 되었고 또 그들의 선과 악의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의식하게 되고, 또 그 무거운 죗값이 사망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인간 – 죄 – 사망
이 무서운 공포 앞에 인간은 전율하게 되고, 더운 피를 싸늘하게 식게 합니다.
허형!
깊은 밤 저 숲 밑에 흘러가는 힘찬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직 우리 가슴에 죽음의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더운 피가 혈관에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내일은 밝다고, 아니 밝을 것, 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 순박한 자연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의 사고는 때 묻지 않고 다시는 더 병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재평가받으리라고 믿습니다. 세상에 말은 만들면 되는 것, 그러나 저 위대한 자연을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생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 자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상황적인 강요에 의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은 살아지는 것을, 요구한다.(Life requires to be lived)」라는 글귀가 기억됩니다. 이렇게 되면 삶을 자기 의지로 다스린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허형!
이 말은 곧 신과 인간의 싸움에서 인간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면, 기적을 다스리는 운명론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 데도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숙명적이든 아니든, 인간 생명은 언제고 자연이 부르면 거부하지 못하고 따르고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허형!
우리 인간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그런지, 감동적인 것들을 동경하고 자랑하지요. 그러나 우리의 정신 속에 모순과 허위로 가득 차 있어 행, 불행을 가릴만한 이성 훈련이 되어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양심이라는 것도, 감정 위장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 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는 의미도 함께 경질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허형!
나는 이 산에 찾아온 손님 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동리에서 뒤집어쓰고 온 허울이 점점 벗겨진 듯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문화가 만들어 준 환상의 가면을 홀랑 벗어 버리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꾸밈이 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산속에 흩어져 있는 썩은 나무 그루터기 하나라도 놓인 그대로가 좋습니다. 내가 왜 이리도 꾸밈을 싫어하는지를 허형은 짐작할 것입니다. 지식, 권위, 돈... 홍진(紅塵)의 손때를 말끔히 씻고 자연아(自然我)로 돌아가는 섭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허형!
맑은 하늘 아래 맑은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인가에 살다 보면 금세 옆 사람에 물이 묻고, 때로는 흙탕물을 온통 뒤집어쓰는 수도 있습니다. 나쁜 본만 떠서 구덩이에 빠진 줄도 모르고 사는 가련한 인생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부터 그렇습니다.
허형!
칸트가「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다시 말하면「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바라는가?」,이 세 가지 물음을 던진 후 오늘까지 인간 연구가 많이 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아니 인간 연구는 르네상스 이후부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대보다 더 인간의 본질 과 인간의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때도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과학으로, 철학으로, 심리학으로, 생물학으로, 인류 역사학으로, 종교학으로, 사회학 등 수많은 분야로 직간접적으로 인간 연구에 접근해 보지만, 그러나「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정확한 대답은 가능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만큼 복잡하고 애매한 존재가 인간일 것입니다.
허형!
오늘날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마도 인간소외인 것, 같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선물인 셈이지요. 과학의 첨단인 컴퓨터 앞에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을 잃고만 셈이지요. 사실 이 소외(疏外)는 전근대(前近代)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죽음을 대신 죽을 수 없는 개인적 실존주의를 부르짖던 키에르케르고는 그 개인적인 고독을 신에게 구했던 것입니다. 이어 야스퍼스는 이 실존적 인간 고독을 무리 속에 보았던 것이 다릅니다. 이 실존은 어쩌면 현대 사회에 뿌리 내려온 과학기술 문화가 안겨다 준 외적– 물질적 – 영합(迎合)에 반발하는 엄숙한 내적인 양심의 반항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현대의 극대화 되어가는 이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길은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자주적으로 실현하는 적극적인 자유에로 전진하는데 있다고 엘리히프롬은 말했습니다.
허형!
God의 억류에서 모처럼 소생시킨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루소의 외침을 우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또다시 ‘인간’을 사망, 시켜야 하는 절박한 운명에 놓인 것입니다. 내가 있는 바로 이 깊은 산사에도 스님들이 살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든 옛 의인(義人)들의 외침만 되뇌지 말고, 현대 첨단의 과학 문명을 앞지를 만한 종교 교리의 최 근대화를 하는 작업이 시급하게 요청된다고 봅니다. 괜한 투정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사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기도 한 느낌을 버릴 수 없습니다.
「말세가 왔다!」라고 외치면서, 현재 인간이 누리고 있는 고도의 과학과 기계문명에 비해 정신적인 요소 즉 종교, 사상, 철학의 빈곤에서 문제가 발생하는지도 모릅니다.
허형!
생각해 보십시오. 도도하게 전진하는 과학을 무슨 힘으로 중단시킬 수 있으며, 중단시킨다고 중단될 일입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달리는 과학은 달리게끔 그냥 두고, 우리는 우리대로 정신의 근대화를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근대화 즉 말씀(가르침)의 근대화가 경건의 힘을 잃는다고는 나는 안봅니다. 종교(교리)의 근대화를 생활의 세속화로 오인,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근대화하되 세속 화, 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허형!
바라고 바라건대, 영육 양극으로 피곤한 현대의「인간」을 기어이 사망, 시키지 만 말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새 시대를 이끌고 갈 의인을 보내주십사 빌어보고 싶은 심정을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허형!
산사에는 밤이 점점 깊어만 갑니다. 사방이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저도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허형!
며칠 후면, 이 산사를 떠나 허형의 곁으로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아들딸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여기는 우리가 사는 시정에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계곡이 있고, 숲이 있고,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절묘한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만과 반목 같은 것은 없습니다.가난도 없습니다. 부지도 없습니다. 영원한 휴식의 무덤들이 있을 뿐 출근길 긴 자가용 행렬도 없습니다. 눈먼 장님이 동전통을 놓고 부는 슬픈 피리 소리도 없습니다. 또 빠진 것이 있습니다. 산에는 꽃과 각종 열매가 있습니다.
혈연을 끊고 온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절간이 있습니다.
고요와 평화가 있습니다.
허형!
장문(長文)을 용서하십시오. 돌아가 뵙는 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멀리 수도암(修道庵)에서 도창회 드림
註 : 이 서간 수필에 許 兄은 동국대 허천택 교수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