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사는 근대정치사에서 재조명해야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본 조선의 역사는 비록 기록의 역사라고 하겠으나 정치역사적 견해로서 특히 학문적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고전적 박제품(剝製品)에 불과하다.
본 주장은 600년전의 정치제도하에 비롯된 기록이 500여년을 거치는 동안 전반적으로 전래의 형식에 따른 기전적은 기록으로 일관하여 현대 정치사적인 고찰에서는 사실의 전달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보아야 하므 로 학문적인 차원으로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朝鮮)은 200년이 채 못된 시기. 명종이후 적자(嫡子) 왕통이 끊겨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그간 도덕적 해이를 자초하여 민중으로 부터 신임을 잃고 추락한 왕권을 겨우 유지하며 근근히 대를 이어 갈 정도였다.
고려말 도학을 도입한 포은 정몽주를 정치목적으로 주살 한다음 이를 충신으로 박제(剝製)한 상태에서 사림에 의한 도학정치를 바탕으로 문무 귀족들은 순종하며 따랐다.
이로서 명맥을 이은 조선의 군주는 도학의 근본을 해치고 인간의 기본규율마저 배반한 왕실에 대하여 모멸감을 느끼고 경멸(輕蔑)을 서슴없이 던졌다.
군주제도하의 통치는 왕권의 확립이 필수요건임에도 이씨의 조선(朝鮮), 특히 후기에서는 도학을 하는 선비들이 명복상 왕권을 존치한 상태일뿐 실권은 각기 사림에서 참여한 조직력에 의하여 좌우되었을 따름이다.
1. 군주왕권의 수모(受侮)
1592년 임진년 왜놈의 침략과 동시 이미 조선의 왕을 계승한 왕이 요동으로 도망 가려 안달했으며 그 시호 선조(宣祖)는 "배풀다"는 의미로서 "빈껃대기"기같은 인상을 주는 명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시호는 왕이 죽은 후 신하들끼리 모여 업작평가를 하는 나머지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에 해당 왕이 집권당시의 인상을 요약한 문자로 평가된 것이다.
선조는 재위시에 동서 분당(東西分黨)을 조장하며 우유뷰단한 왕으로서, 신하들의 의견에 줏대없이 이끌려 군신간의 신의도 망실하고, 자손만대에 도리킬 수 없는 뿌리깊게 다툼을조장하였고 더구나 전대미문의 전란을 일말의 방비함도 없이 자초하여 참혹한 형벌을 민중들에게 안겨 준 죄악은 다시 뒤돌릴 수 없는 실수였다.
더구나 광해와 같은 걸출한 왕권수호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미 도학을 기조로하는 잣대로서는 광해같은 존재는 더 이상 사림들이 원하는 형태의 군왕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던 것이다.
더구나 가족관계에 있어서 내부 단속이 쉽지 않아 자신간의 분쟁도 막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비빈간의 알력과 이로서 왕통의 안정은 커녕 다더욱 왕권교체를 어렵게 하여 자손들간 골육상쟁의 비참한 결과가 끊이 없이 반복되는 천벌을 짊어 졌다.
2. 사림(士林)의 참여와 정치세력의 대두
선조 이전부터 이미 도학을 주창하는 사림(士林)의 대표들에 의하여 사색당쟁이 시작된 것을 보면 왕이라는 위치는 신하들의 주장을 제압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다는 모습을 역역히 증명하였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나타난 주도권이 무너진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며 그나마 각처의 의병들이 죽음으로 다시 새운 나라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곧 그 공적으로 후기조선이 삼노팔리(三奴八吏)의 계급타파와 일부 계파의 군주체제하에서 기묘한 공화정치(共和政治)가 진행된 것이다.
군주의 권한도 신하들의 양심적 양보에 의하여 권한 행사를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신하의 의향에 다라 좌우되었을 뿐이다.
모든 정치적 경제적 권한의 중심은 사림이며 특히 장기간 집권한 사림은 서인이라는 충청. 경기도 중심의 세력이 주도하였다.
이러한 사림주도 정치는 간혹 고집쎈 왕의 출몰로 왕정회귀현상이 있는 듯 하였으나 결국은 사림을 빙자한 몇 몇 외척들에게 집중탄탈되어 모든 국가 권한이 외척들의 전군으로 넘어 갔고 이러한 현상은 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3. 사색과 신진 공신과 외척세력들간의 권력정치 쟁탈전(爭奪戰)
이후 후기 300여년은 후기조선으로 불려저 사색권세가(四色權勢家)들이 주동한 공화정시대와 흡사한 형태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조의 후기 역사는 사색중 서인 또는 노론(老論)이라는 독점정치 집단에 의한 정치가 전개 되는데 마치 17세기 영국 크롬웰의 공화정형태의 전제정치시대와 흡사하였다. 다만 달리 볼 것은 독제가 아닌 다수 사림들의 공동운영하는 형태의 정치체제였다.
임금은 허수아비이고 정권은 서인들에게 회전의자 처럼 돌아가면서 이용되고 있었다.
임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 치웠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훗날 한일합병도 이들의 소행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한국사대관의 매국노 이완용이 키운 인물에 의하여 왜곡된 역사는 곧 식민사관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조선후기 역사는 가식된 역사가 대부분이다. 그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쓰기도 한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를 관용하면 또 반복하여 보복으로 당하게 될 것이다. 이름만 군주국이고 실제는 영국 공화정시대와 같은 맥락이였다.
왕권은 없고 권문세가(權門勢家)가 좌우한 변태적 공화제인데 이는 곧 영국의 크롬웰 공화정 처럼 왕권을 배제한 형태의 통치체제였던 것이다. 역사의 기조는 왕실계보의 변천이 아니다. 민심의 발전을 따라서 기록되어야 올바른 사관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대한민국의 시대이다. 이 300년의 후기조선시대는 집권자들끼리 담합에 의하여 조작된 형식적 기록임으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지금이다.
4. 민중정치사상의 대두
특히 이 당시 민중속에서 발기한 정치사상을 관가하여서는 안 된다. 곳곳에서 일어나 민중봉기도 있었지만 일부 사대부들의 정치는 소외된 사대부가 주동이 된 민중사상을 무시 할 수 없으며 이들이 곧 동학이라는 거대한 물결로 승화되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주시하여야 한다.
역사를 쓴 사가들은 이조후기의 역사를 미화하여 양반귀족의 지배시대라고 하지만 양반귀족이라는 지위는 정치주변에서 권력을 좌우하는 자들이고 그 과정을 본다면 응당 공화정(共和政)의 모양과 흡사한 형태이다. 다만 전란의 일등공신인 민중이 소외된 점에서 차이를 둔다.
그후 차별받던 민중들의 반란에 이어 동학이라는 움직임과 각지 농민의 변란을 반란으로 보는 바람에 임진왜란처럼 의병들의 활동은 끝났고, 후기말 의병의 지원이 없는 독립운동은 곧 지도자들의 망명으로 자주독립의 여력을 잃었던 것이다.
5. 전제군주시대의 역사관을 멋어 나야 올바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다시 쓰지 않으면 앞으로 국난에 임하여 국민들의 참여가 저조하다기 보다 없을 수도 있다.
역사관을 올바로 잡는 다는 것은 이 나라가 국내외 정치적 사정과 국난을 대비한 여러 가지 대비를 고려 할 때 시급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재벌가와 정치가들중에서는 재산을 축적하여 외국으로 도피를 도모하려는자도 예상 할 수 있는 현실이다.
민중을 속이고 살아 남지 못하는 정부를 그동안 많이 보아 채험한 국민들이다.
불신의 끝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나라 역사는 역사를 조감하는 오늘의 기준에 따라 새로 정리해야 한다.
맹목적인 600년전 형식의 도학적 체제에 억제된 상태에서 벗어 나야하고,
민중들 가슴에 와 닿는 방식을 선택하여야한다.
이씨의 조선역사기록들은 한낟 박제된 문화유물 정도의 가치에서 머물게 할 수 없는것이다.
보다 더 민족의 앞날에 가치있는 정치, 경제 , 사회. 문화전반에 유용하게 써야 한다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