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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절집 선암사와 낙안마을 (화계 - 선암사 - 낙안)
코스거리 (총 64k)
화개 남도대교 - 간전 - 효곡 - 모전 - 황학교 - 괴목삼거리 - 월등 -
9k 5k 6k 4k 2k 5k 9k
도정 - 승주 - 선암사 - 석정 - 낙안
5k 4k 6k 9k
9시 화계를 출발하여 남도대교를 건넜다. 드디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간 것이다. 여기서 해남까지는 도 경계선을 바꾸지 않고 계속 전라남도를 걷게 된다. 화동에서 화계를 거쳐 구례로 빠지는 17번 도로는 차가 너무 다니고 갓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걷기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섬진강 건너편에 있는 길로 걷기로 한 것이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고 갓길도 잘 되어 있어서 걷기에 참 좋다. 똑같은 경치를 한적하고 안전하게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으니 이 도로가 더 낫다.
섬진강의 강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린다. 얼마쯤 가다가 눈만 나오는 털모자로 바꾸어 썼다. 금산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가다가 우연히 보고 3천원에 산 것이다. 3천원짜리 물건 치고는 그 효과가 너무 좋다. 3만원 어치도 더 되는 거 같다. 간전면사무소 화장실에서 내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복면강도의 모습이다. 총만 들면 팔레스타인 해방군 게릴라의 모습이다. 그러면 어때. 따뜻하기만 하면 그만이지. 얼굴은 어떻게 방어했는데 손이 시렵다. 짐 때문에 스키용 방한장갑을 집에 두고 온 게 못내 아쉬웠다. 지난 주에는 내내 가지고 다녔는데 날씨가 포근해서 그냥 두고 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테니스장갑을 하나 끼웠어도 손이 시려울 정도로 강바람이 차다.
한 노부부가 밭에서 무언가 일을 하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무얼 하시냐고 물었다. 밤 종자를 고른단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밤을 잔뜩 쏟아놓고 무언가 고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더러 땅을 사란다. 밭과 뒷산에 있는 땅이 만오천평인데 평당 5만원이란다. 전화번호까지 받아왔다. 이분 이름이 최향규씨이고 나이는 62세란다. 내가 국토종단 도보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니까 의미있는 일을 한다고 격려해 주신다.
11시 반쯤 간전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화장실에 들러 일을 보았다. 반갑게도 비데까지 있다. 요즘은 시골에도 비데가 많아서 좋다. 특히 겨울에는 엉덩이가 따뜻해서 좋다. 지리관이라는 중국집에 들어가서 볶음밥을 시켰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중간에 먹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도리가 없다. 기대 이상으로 맛이 좋다. 밥을 꼬들꼬들하게 잘 볶았다. 서울 우리 동네에서도 이렇게 볶음밥을 잘 볶는 데가 없는데.
화개에서 황전까지는 지름길이 없다. 구례로 돌아가거나 간전에서 효곡리로 해서 매재을 넘어 덕림리 모전리 황학리를 거쳐 황전으로 가는 길이 있다. 전자는 길은 짧고 좋으나 차량이 너무 많고, 후자는 길고 차량은 거의 다니지 않지만 지도를 잘 보고 가야 한다. 초보자는 힘든 길이다. 난 후지를 택했다. 결과적으로는 실망했다. 한적한 시골길을 걷기는 했지만 볼만한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861번 도로와 9번을 따라 구례1교까지 가면 오른쪽으로 계속 섬진강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데. 저녁에 지도를 놓고 계산해보았더니 거의 5킬로미터쯤 더 걸은 거 같다.
섬진강은 시골처녀처럼 수줍다. 수수하고 조용하게 흐른다. 요란스럽게 소리지르면서 흐르지 않는다. 지리산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흐른다. 그래서 많은 시인묵객들이 섬진강을 노래했나보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부터 이시영까지.
가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보면 남동쪽으로 저멀리 지리산 연봉 중 몇 개가 아스라히 보인다. 어느 봉우리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자연스런 강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제발 자연 그대로가 더 좋은 것은 그냥 손대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더 좋겠다. 우리 인간이 개발을 해서 더 좋은 것이 있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이 있는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자연 그대로 놓아 두어라." 유엔개발기구(UNDP)에서 발간한 Our Common Future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효곡리부터는 구례에서 광양까지 가는 865번 도로가 새로 개통되어 있다. 내 지도에는 공사중으로 표시 되어 있었다. 마제 조금 지나서 덕림리로 빠지는 840번 도로도 잘 포장되어 있다. 모전리에서 황학리로 넘어가는 중간에 광양-전주간고속도로 다리 건설이 한창이다. 거대한 교량 밑으로 지나가는데 까마득한 저 위에서 사람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나 같으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을 못할 거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외국인 목소리도 들리는 거같고.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우리의 건설현장도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을 우리 품으로 따뜻하게 보듬을 때가 된 거 같다. 맨날 제일동포 처우개선만 외치지 말고. 우리부터 외국인에게 잘 좀 하자.
2시 50분에 매재를 출발했다. 내 지도에는 마재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매재마을인 거로 보아서 매재가 맞는 거 같다. 간전에서 황전까지 오는 동안 내 뇌리에서 계속 맴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마을들이 왜 이리 궁색하게 보일까? 그 지역에서 내가 본 마을들은 하나같이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에 얹은 스레이트 지붕과 엉성한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담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이 활기가 없고 침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느낌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들의 생활수준까지 확인해 본 건 아니니까.
이에 반해서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문경 상주 영동 무주 거창 함양 하동은 마을들이 밝고 활기차고 뭔가 생기가 도는 그런 모습이었다. 이 마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풍족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저렇게 칙칙한 지붕과 담장을 하고 있는 마을은 본 적이 거의 없다. 24번 도로 주변에 있는 마을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마을에 윤기가 있어 보였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 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 조그만 나라에서 지방 간에 저렇게 빈부격차가 크게 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니까 그 원인과 그 해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농어촌도 지역에 따라 마을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 보인다는 점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황학마을을 막 나오는데 기차가 굉음을 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세속의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도시에 있을 때는 속세를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이렇게 며칠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보면 속세의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아까 멀리서 아스라하게 기차소리를 듣고 아하! 이제 황전이 가까워 오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황전면 소재지인 괴목에서 조금 남쪽으로 있는 괴목역에는 구례에서 순천을 거쳐 여수로 가는 전라선이 지나간다.
6시에 황전면 중목 버스정류장 맞은 편에 있는 식당을 겸하는 주유소에 도착했다. 주인 아저씨가 괴목에는 여관이나 민박이 없단다. 승주도 마찬가지고. 선암사 입구에 모텔이 몇 개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선 순천으로 나가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한다. 바로 앞에서 탈 수 있는 시내버스가 많기 때문에. 저녁과 아침을 먹으면 여기서 좀 재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안된단다. 집으로 들어간다고.
주유소를 나왔더니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더 이상 걷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이 엄청난 차량에 언제 치일지 모른다. 용산에서 영동까지 가는 19번 도로에서도 이처럼 많은 차량의 홍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차량 소음 때문에 귀가 멍멍해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시내버스를 타고 6시 반에 순천에 도착했다. 내일 아침 버스를 타고 다시 그 자리까지 가야 한다. 버스를 올라 타는데 기사님이 반갑게 인사를 하신다. 33번 버스를 운전하시는 최규진 기사님이다. 아까 회룡리에서 나를 보았단다. 보통은 한적한 시골길에서 버스를 만나면 타기 마련인데, 내가 버스를 세우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단다. 그렇다고 등산하는 사람도 아닌 거 같고. 이 부근에 등산할 만한 산이 없으니까. 숙박할 데가 없어서 순천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다시 나올거라고 얘기했더니 자기가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뼈감자탕이다. 음식은 맛이 있었다. 그런데 손님이 너무 많아서 인지 서비스가 엉망이고, 아이들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거의 나 혼지 앉아서 밥을 먹다가 이렇게 번잡한 속세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니 금방 적응이 안된다. 맨날 그렇게 살았으면서 며칠 산길을 걸었다고 이런 일상이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지다니. 나만 그런 건지, 우리 인간이 다 그런 건지 그건 모르겠다. 순천역 앞에 있는 모텔에서 묵었다. 오늘은 약 32킬로미터쯤 걸은 거 같다. 어제 14킬로미터에 비하면 양호하다. 오늘 걸은 코스는 861번 도로를 따라 화개 운천리 양천리 간전 삼산리 효곡리 865번도로 매재 840번도로 덕림리 회룡리 모전리 황학리 죽동정류장까지다.
8시20분에 순천을 출발하여 8시 40분 황전 중목마을에 도착했다. 어떤 마을 앞에서 아주머니에게 월전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2킬로 500.” 지금까지 나에게 길을 알려준 현지인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셨다.
월전면은 경상도 마을들처럼 전체적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산에 둘러 쌓인 분지에 자리잡았는데 아늑하고 여유있어 보였다. 어느 교회에서 확성기로 찬송가가 흘러 나온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다. 가락은 정확하게 알겠는데 제목과 가사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마누라가 항상 사이비신도라고 그러지. 길가에 선암사 30킬로라는 이정표가 서있다. 20킬로를 잘못 쓴 거 아닌가? 30킬로면 내가 오늘 어떻게 가라고.
월등면 소재지에서 뜻밖에도 상여 구경을 했다. 아니, 아직도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메고 장례를 지내는 지방이 있네. 상여는 마침 노제를 지내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상여를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그 사람들 눈에 안띄게. 조심스럽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사진을 담당해서 입관부터 하관까지 전과정을 사진으로 남긴 적이 있다. 상두꾼은 능숙한 노래솜씨로 상여를 이끌었다. 구슬픈 가락으로 친인적의 눈물을 뿌리게도 하고, 노자돈을 더 내라고 상여를 멈추기도 하고, 친구들의 추억을 회상하게도 만들었다.
둔대마을 앞에서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교회에 가신단다. 혼자 다니는 나를 염려하신다. 몸조심 하라고. 이름은 신동순. 나이는 83세로 우리 어머니와 동갑이다. 안색이 건강하고 허리도 꼿꼿하시다. 내 손을 잡으시면서 이렇게 추운데 고생이 많다고 걱정하신다. 어떻게 교회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교회에서 차가 온단다.
오후 2시에 승주 입구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중목마을에서 승주까지 18킬로 동안 식당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농원식당이던가? 추어탕을 시켰는데 밑반찬이 11가지나 나온다.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나는 좋아하는 배추김치, 무우김치, 파무침, 감장아찌, 매생이무침만 먹었다. 이렇게 편식을 하니까 내가 키가 작다고 아내는 맨날 구박이다. 추어탕은 함양추어탕과 비슷하다. 같은 전라도인 남원 추어탕보다 경상도식인 함양추어탕과 비슷한 게 신기하다. 여기선 방아와 지피 대신 부추를 넣었다. 월등썰매장에 식당이 있었겠지만 점심시간이 좀 일러 들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서 들렀어야 하는데. 아침에 괴목을 지나면서 순천 파리바게트에서 사 온 빵과 오렌지쥬스를 아침으로 먹은 게 전부다.
점심을 마치고 3시부터 선암사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7킬로를 더 가야 한다. 공양시간이 5시니까 점심을 너무 늦게 먹은 것이다. 또 실수를 했다. 선암사 3킬로 전방인 죽림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는데, 3킬로를 걷는 바람에 선암사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어둡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도착한 시간이 4시 40분이었다. 왕래하는 차량도 많아서 더 걷기가 힘들었다.
선암사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처럼 이제 절에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양미를 사서 공양간에 갖다 주고 저녁을 먹었다. 점심을 너무 늦게 먹어서인지 별로 맛있는 줄을 모르겠다. 김치와 쌈장은 맛이 좋았다. 나는 공양간에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겨우 5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었나? 5시 20분 쯤 갔으니까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공양간 벽에는 스님들의 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일반 신도들은 군대식 배식기에 밥을 먹는다. 식탁은 두꺼운 합판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오랫동안 사람의 손때가 묻어서인지 표면이 반빌반질하게 빛났다. 식탁은 스님석과 신도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오면서 후식으로 바나나를 한 개 들고 나왔다.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어디서 북치는 소리가 들린다. 스님들이 저녁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큰 북에 대여섯 명의 스님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차례로 북을 친다. 한쪽이 끝나면 맞은 편에서 치고, 또 끝나면 다시 맞은 편에서 치고. 맞은 편에서는 다른 스님이 북채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스님에 따라서 북치는 실력이 저마다 다르다. 나는 사물놀이를 배울 때 북을 쳐보았기 때문에 북소리가 얼마나 정확한지, 리듬을 타고 있는지, 강약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어떤 스님은 대단한 파워와 리듬으로 듣는 귀를 즐겁게 해준다. 어떤 스님은 힘이 약하고 박자도 안맞아서 더 배워야 할 거 같다. 북이 엄청나게 커서 키가 작은 스님들이 고전을 하신다. 소리가 힘에 부친다. 북이 끝나자 바라를 친다. 바라가 끝나자 목어연주를 한다.
그게 끝나자 종을 치기 시작한다. 나는 종 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종소리의 리듬에 맞추어서 당겼다가 있는 힘을 다해 통나무(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를 종에 부딛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종을 치는 스님은 옆에 붙은 무언가로 친 횟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당구 칠 때 점수를 매기는 것처럼. 큰 종이 끝나자 이번엔 누각 위에 있는 작은 종을 다른 스님이 치는 걸로 의식은 모두 끝났다. 절에서 처음 보는 재미있는 의식이었다. 옆에 서 계신 스님에게 물었더니 아침 저녁으로 매일 저런 의식을 한단다.
선암사에 왔는데 뒤깐(해우소)은 한번 가봐야지. 선암사 뒤깐은 우리나라 절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로 유명하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남녀 화장실이 한 공간에 있고, 두 공간을 구분하는 벽도 없이 툭 트여 있다. 중간에 넓은 공간이 있고 벽에 여자용 남자용이라는 표시만 있을 뿐이다. 각 칸마다 중국 화장실처럼 앞 문이 없고 옆으로만 허리 높이의 칸막이만 있을 뿐이다. 처음 이용하는 사람은 똥이 나오려다 다시 들어갈 것 같다. 그래서 일반인을 위한 현대식 화장실을 그 옆에 따로 만들어 놓았다. 잘 한 일이다. 시인 정호승은 이렇게 시까지 썼다.
선 암 사 - 정 호 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解憂所)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절을 내려오는데 연등에 불이 들어와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월초파일에 달아놓은 연등을 아직까지 그대로 둔 것이다. 올라갈 때는 어수선하고 엄숙한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니 캄캄한 밤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도 날이 밝을 때는 고적하고 단정해야 할 절집에 형형색색의 연등이 온 절에 걸려 있어서 좀 혼란스럽고 정신 사나워 보인다.
절 앞에 있는 선암여관에 들어갔다. 2만 5천원인데, 내가 첫 손님이서인지 방이 차다. 온 몸이 으스스 떨린다. 지금까지 여관방이 이렇게 춥긴 처음이다. 주인아줌마가 스위치를 넣고 한참이나 지나서 겨우 방바닥이 미지근해지기 시작한다. 침대에 깔린 전기장판 온도를 4에서 6으로 높였다. 다행히 온수는 잘 나왔다.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한 내 발을 마사지 해주었다. 어제 밤을 설쳐서 그런지 오늘은 발이 너무 아프다. 개콘을 보고 바로 잠을 잤다.
아침 8시에 식사를 했다. 어제 밤에 주인아줌마가 8시 반 차가 있다고 해서다. 그런데 식당 안에 붙어 있는 버스시간표를 다시 자세히 보니 그건 순천 출발시간이고, 선암사 출발은 8시 55분이다. 그래서 느긋하게 아침을 먹었다. 청국장을 먹으라는 걸 시래기국을 끓여달라고 해서 김치하고 맛있게 먹었다. 3킬로 지점에 있는 죽림삼거리에서 내렸다. 어제 무리하게 선암사까지 걸어갔던 곳이다. 내 일정에 없는 코스는 버스를 타도 되는데, 선암사에 다 갈 때까지 버스가 안올까봐 그냥 걸었던 것이다.
죽림삼거리에는 선암사에서 벌교까지가 ‘조정래길’이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다. 이 지방은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이다. 보성 벌교 외서면 율어면 낙안면 등. 죽림삼거리에서 남정마을까지 상사호를 끼고 도는 857번 도로는 비경이다. 마치 동양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안개에 젖은 호수의 모습은 아늑하고 고요하다. 호수 위에는 철새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호수 건너 저 멀리에는 산봉우리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진다. 바람도 어제에 비해 그다지 차갑지 않다.
남정마을 입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성은 강가이고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나이는 일흔이 좀 안되었단다. 어떤 할머니들은 흔쾌히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지만, 어떤 분들은 그냥 ‘무슨 무슨 가’라고 성만 말해주거나, 나이도 대충 “일흔이 좀 안되었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선뜻 자기 신상을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허리가 아파서 벌교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신단다.
밤재까지는 오르막이다. 이제는 고개만 나오면 겁이 덜컥난다. 도보여행의 가장 큰 난적은 오르막 고개길이다. 물론 내려갈 때는 올라올 때의 고생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 상쾌함이 있지만 아무튼 가능하면 오르막은 피하고 싶은 게 길손의 마음이다. 밤재는 지도로 보면 300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데, 상당히 올라가기가 힘들다. 상대적인 높이가 가팔라서 그런가?
신전마을 버스정류장에서는 임영숙 아주머니를 만났다. 감기가 들어 보건진료소에 갔다 오는 길이란다. 이웃에 있는 목촌마을에 사는데 버스를 놓쳐서 한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쉬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지나가는 차를 세웠지만 아무도 태워주지 않는다. 내가 출발하고 한참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그제서야 차 하나를 얻어타고 나를 앞질러 가신다. 자기도 걸어가면 좋은데 감기가 들어 걷지 못한다고 괜히 미안해하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들판에 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평사리 정류장에서 여중생 둘을 만났다. 하동 악양면에도 평사리가 있는데. 바로 ‘토지’의 주무대가 평사리 아닌가. 낙안중학교 1학년인 김소희와 2학년인 김은하다. 소희는 평사리에 살고, 은하는 목촌에 산단다. 바로 옆에 붙은 동네에 살아서 학년은 달라도 학교에서도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지금 두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단다. 소화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버스를 놓쳤단다. 이런 시골에서는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밖에 없기 때문에 한번 버스를 놓치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더구나 이 추운 날씨에 은하는 슬리퍼만 신고 있다. 은하가 낙안면사무소에 봉사활동을 하러 간단다. 학교에서 하는 사회봉사 프로그램으로 방학 중에 6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아가씨들 사진도 찍고 내 사진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아가씨들과 이별을 고하고 한참 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았더니 소희와 은하가 따라오고 있다. 낙안까지 걸어가려고? 빨리 오라고 내가 소리치니까 둘이서 열심히 달려온다. 나는 뒤로 걸으면서 두 아가씨와 대화를 나눴다. 은하는 대학에 가지 않고 취직을 하려고 한단다. 소화는 외대에 가서 외교관이 되길 원한다. 내가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 꼭 외대를 갈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 은하는 취직을 하려고 작정은 했지만 어느 분야로 나갈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단다. 은하는 마라톤선수를 해서 걷는 데는 자신 있단다. 평사리에서 낙안까지 약 4킬로를 30분에 달린 적도 있다고 한다. 소화는 손이 시려워서 죽을 지경이다. 은하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라고 다그친다. 1킬로미터쯤 그렇게 셋이서 걷다가 버스가 와서 소화와 은하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선 버스를 타고 먼저 낙안으로 떠났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겨울 들판을 걷고 있노라니 언젠가 KBS TV문학관으로 보았던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이 연상된다. 김영동의 그 슬픈 배경 음악과 함께. 특히 지금까지도 김영동의 주제곡은 기억이 날 정도로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들판을 두 남자와 한 여자가 걸어간다. 영달은 떠돌이 막노동자, 백화는 도망친 술집 작부, 정씨는 출소한 전과자. 우리나라 산업화 시기인 1970년대에 소외계층인 이 세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가슴 찡한 드라마다. 눈 덮인 들판과 산천, 주인공들이 추위를 피하여 기차를 기다리는 쓸쓸한 시골 간이역, 비상금을 털어 기차표와 먹을거리를 사서 백화에게 건네주는 영달, 자기 이름은 ‘이점례’라고 알려주는 백화, 백화를 태우고 눈발 속으로 사라지는 완행열차, 듣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픈 주제곡 등이 기억에 남는다. 차화연, 안병경, 문오장의 연기가 소설의 리얼리티를 더 빛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 있을까? 낙안읍성마을을 2킬로미터쯤 남겨두고 금둔사(金芚寺)라는 절이 있다. 절집 입구에 쌓아놓은 돌탑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한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름난 절도 아니고 들어 본 절도 아니다. 단지 안내판에 석불비상과 삼층석탑이라는 보물 2점이 있다는 설명이 있어서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 특히 나는 서산마애불처럼 바위에 직접 새긴 석불을 좋아한다.
절집은 정말 하나 하나가 인공미가 없이 자연스럽게 잘 지어지고 관리되고 있었다. 석불비상으로 올라가는 돌길과 돌담은 얼마나 운치가 있는지 정말 감탄할 정도였다. 선암사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그런 아기자기한 멋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 한참 찍고 있는데, 구석에서 스님 한 분이 일을 하다가 일어서서 돌아보신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혹시 전에 선암사 주지스님 아니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때는 지허스님 이름이 기억나자 않았다. “네, 맞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말 기뻤다. 내가 만나고 싶은 스님을 뜻밖에 여기서 만나다니. 내가 이 절을 들어오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렇고, 이 넓은 절에서 동선이 스님과 일치한 것도 그렇고.
나는 스님을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다. 단지 옛날에 즐겨보았고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소장했던 ‘뿌리깊은나무’에 선암사가 소개되어 옛날부터 선암사를 꼭 한번 가보고 싶었고, 주지인 지허스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선암사에 갔더니 주지스님이 바뀌었다고 한다. 선암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몇 년 되었다고 한다. 내가 어제 저녁에 선암사에서 꼭 밥을 먹고 싶었던 것은 선암사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특히 김치가 유명해서다. 서울사람들이 많이 주문해서 먹곤 했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음식 맛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암여관에 내려와서 혹시 주지스님이 바뀌었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남기고 오늘 아침에 선암사를 떠나온 참이었다. 그런 스님이 여기에 계시다니. 멀리 못가셨구나.
스님은 차나 한잔 하고 가라면서 방으로 안내했다. 천강월(天江月)잎차다. 순수 자연산 한국차다. 비료를 주거나 농약을 일체 치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자연산 한국차다. 과거 뿌리깊은나무에서 판매한 ‘가마금잎차’와 같은 차인데, 브랜드만 바꾸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미 ‘지허스님의 차 : 아무도 말하지 않는 한국 전통차의 참모습’이라는 책을 김영사에서 2003년도에 출간했을 정도로 한국차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우리 차는 우리 문화와 소통되어 있어서 추사의 그림이나 정선의 그림에도 차의 맛이 배어 있다고 한다. 추사가 유배지에서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떼를 쓰는 것도 그런 차원이 아니겠느냐고 내가 거들었더니 그렇단다.
금둔사에서 생산하는 차나무는 활엽수를 이용해서 빛을 관리한다고 한다. 햇빛이 너무 강한 여름에는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주고, 햇빛이 필요한 겨울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차나무에 햇빛을 쏘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활엽수란다. 활엽수의 키나 너무 작아도 통풍이 잘 안되어 차나무에 해롭기 때문에 좋지 않단다. 자연적으로 키운 차나무는 한 가지가 일 년에 서너 잎만 내기 때문에 생산량이 너무 작아 값이 비싸다는 것이다. 자연산은 10평방당 100그램짜리 한 봉지를 생산하고, 개량종은 1평방당 100그램짜리 10봉지를 생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비료와 농약을 친다는 것이다.
선암사 주지로 있을 때, 언젠가 대영박물관관장이 찾아왔단다. 차를 대접했더니 “원더풀!”을 반복하더란다. 그래서 “어떤 원더풀이냐?”고 다시 물었단다. 구체적으로 무슨 맛인지를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자기는 “그 맛을 설명하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했단다. 그래서 스님이 설명해주었단다. “맑고 파란 가을 하늘에 새털구름이 피었을 때 느끼는 그런 맛이다”라고. “명경지수와 같은 맛과 향기 그리고 온화한 휴머니즘의 맛, 그것이 한국 전통차의 맛이다”라고 설명해주었단다.
나는 차에 대해서 잘 모른다. KBS 다큐멘터리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보면서 중국이나 티벳사람들은 보이차와 같은 발효차를 좋아하고, ‘하룻밤에 읽는 일본사’와 같은 일본역사책을 읽으면서 차분하고 담백한 간결미를 이념으로 하는 다선일치(茶禪一致)의 와비차를 집대성한 센노 리큐(千利休)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입어 천하제일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 그러나 점차 그 권위가 절대적이 되고 차에 대한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달라 1591년 리큐는 히데요시에 의해 할복을 강요당한다는 것, 이때 고가의 다구가 유행함으로서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을 데려다가 비싼 다구를 만들게 했다는 사실 등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다. 내가 차를 즐겨 마시지 않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 스님으로부터 강독을 받고 보니 자연차 하나 만드는데도 그렇게 심오한 자연의 조화와 지극한 사람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좋은 차를 다시 보게 되었다. 차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나에게는 엄청 비싼 값에) 차 한통을 외상으로 사가지고 나왔다.
절을 나와 조금 걸어 가니 길 오른쪽에 ‘낙안온천’이 있다. 온천할 시간은 없어서 3층 옥상으로 올라가서 낙안마을 전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산으로 빙 둘러쌓인 분지에 이렇게 넓은 농토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맞은 편에 있는 산이 아스라할 정도로 평평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 눈에 보아도 부자마을임을 알겠다. 온천에는 전세버스를 타고 온천욕을 즐기러 온 노인들이 많이 있었다.
1킬로미터쯤 더 내려가자 낙안민속마을이다. 오랫동안 와보고 싶었던 곳인데도 이상하게도 한 번도 와보지 못햇다. 이 마을의 관광지로서의 장점은 현지 주민이 자기 집에 직접 살고 있다는 접이다. 집이라는 것은 생물체와 같아서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도 쉽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온기가 없어진다. 역시
집이란 사람이 살 때만 가치다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천시의 문화재관리국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단 한 가지 큰 흠이 있다면 중앙통로에 시멘트를 깔아서 주위의 초가집이나 기와집 또는 다른 장승과 민속자료 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꼭 양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꼴이다. 집을 짓거나 관리하는 데는 엄청난 돈을 들이면서도 큰 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마을을 살릴 수 있는 데는 소홀하다. 시멘트를 걷어내고 흙길을 그대로 두거나 황토길을 만들면 마을 분위기가 한껏 생동감이 살아날 거 같다. 아름다운 길을 보려면 월정사 입구에서 상원사 주차장까지 깔아놓은 황토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낙안마을은 집집마다 감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아서 감이 달려 있는 늦가을에 오면 더 정취가 좋을 것이다.
5시에 낙안마을을 나와 공원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벌교까지 걸을 것인지, 아니면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가서 서울로 바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벌교로 가서 꼬막정식을 먹고 순천으로 가서 밤 늦게 올라갈 것인지, 머리가 복잡하다. 지허스님과 2시간 반 넘게 얘기를 나누느라 오늘 일정에 차질이 많이 생긴 것이다. 오늘 목적지는 벌교까지 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벌교까지는 6.2킬로로 한 시간 반은 더 걸어야 한다. 요즘은 6시면 날이 어두워져서 도중에 밤길을 걸어야 할 거 같다. 밤에 도로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그렇다면 버스로 벌교로 가서 아까 지허스님이 소개해준 국일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순천으로 이동해서 서울로 갈까? 벌교에서는 오후에는 서울 가는 버스가 없었다. 이렇게 헤매고 있는데 벌교 가는 버스가 들어온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벌교로 가보자. 걸어서는 한참인데, 버스로는 금방이다.
스님이 알려 준대로 국일식당을 찾아갔다. 스님 말대로라면 거기가 남도음식이 뻑적찌근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식당은 옛날집 그대로인 듯 정말 허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론에 자주 소개가 되었는지 유명인사들의 싸인과 소개 기사가 도배를 하고 있었다. 꼬막정식은 1인당 만삼천 원이었다. 나 혼자라니까 오늘은 예약이 있어 안된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낙안에서 바로 순천으로 갈걸. 하릴 없이 발길을 돌렸다.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부탁해서 순천발 서울행 6시 51분 기차를 인터넷으로 예매하고 핸드폰으로 발권을 받았다. 이런 건 처음 시도해 본다. 그런데 편리하고 신기하다. 내가 벌교에서 서울로 연락해서 서울에서 순천발 기차표를 끊을 수 있다니. 참 편리한 세상이다. 한국이 IT강국은 강국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이동해서 새마을호 기차를 탔다. 이번 도보여행 중 기차는 처음이다. 발매원에게 티켓을 어떻게 받느냐고 물었더니 혹시 역무원이 요구하면 그냥 핸드폰에 발송된 발권내용을 보여주면 된단다. 참 편리하다. 다행히 식당칸이 붙어있는 기차다. 바로 달려가서 소고기덮밥 도시락 하나와 맥주 한 캔을 샀다. 휙휙 지난 가는 밤 풍경을 보면서 창을 마주보고 앉아 도시락을 먹는 기분도 괜찮다. 그런데 식당칸에는 노래방에 인터넷, 게임기, 안마의자까지 구비되어 있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자료까지 정리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나머지 코스는 가능하면 기차를 이용할 생각이다. (2010년 1월 22-25일)
교통
남서울터미널에서 화개행 버스는 하루에 7회 운행되며, 첫차는 07:30, 막차는 19:30. 소요시간은 4시간 걸린다. 순천에서 서울 가는 버스는 아주 많다. 기차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숙박
화개에서 낙안마을 코스에는 숙박시설이 거의 없다. 화개와 구례, 승주와 선암사 입구, 그리고 낙안마을 입구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식당
화개의 재첩국과 참게탕 외에 별다른 음식은 드물다. 특히 간전과 괴목 구간에는 식당이 거의 없다. 선암사 입구와 낙안마을 입구에 먹을 만한 식당들이 있다. 벌교에 있는 국일식당이 꼬막정식(061-857-0588)으로 유명하다.
주변 관광지
섬진강과 선암사 그리고 낙안마을 외에는 별다른 관광지가 없다. 선암사에서 조계산을 넘어 가면 송광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