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鐵箭射法조선철전사법이 완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929년 책 「조선의 궁술」이 지어질 당시 6량전을 쏘던 鐵箭射法이 失傳실전되어 전할수가 없어서 체육에 유리한 유엽전 사법의 대개만을 노사와 숙무에게 물어서 전한다고 했는데, 필자 한산이 12년의 노력 끝에 鐵箭射法철전사법을 복원하여 세상에 전합니다.
한산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직 완벽한 상태는 아니고 여러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이나, 혼자서 철전사법의 전부 다를 완성하기에는 힘이 부쳐서, 여러 제현들의 관심과 참여로 완벽한 朝鮮鐵箭射法조선철전사법 복원을 희망하기 때문에, 서둘러 세상에 공표 하는 것입니다.
朝鮮鐵箭射法조선철전사법 복원의 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산이 처음에 턱밑살대 게발깍지 궁체로 활을 배워서 열심히 쏘므로 활병이 왔습니다. 그래서 활을 쉬는 동안에 여러 옛 궁술 문헌을 얻어 보고 턱밑살대 게발깍지 궁체가 전통궁술과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옛 문헌대로 朝鮮鐵箭射法조선철전사법을 복원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朝鮮鐵箭射法조선철전사법을 복원하기 위해서 일도 매진한 것은 아니구요, 인터넷으로 온깍지 사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온깍지 활쏘기 학교에 가서 전통궁술을 배울려고 신청을 했더니, 한산의 나이가 5학년이라서 안된다고 했는데, 한해 지나서는 5학년까지 받아준다고 해서 다시 신청했더니 5학년 1반이라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작년에 그 사유를 알았는데, 활선생의 나이가 한산보다 어려서 안 받아 줬다고 하네요. 주최측의 입장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해서 한산 혼자서 책 「조선의 궁술」을 기준으로 공부하며 쏘라는 대로 쏘니 북관유적도첩 8폭 병풍같이 고자채기 동작이 일어나며 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하고 무언가 빈 듯한 생각이 들어, 청교 장언식공의 「正射論정사론」을 책 「조선의 궁술」과 비교하면서 궁체를 공부하며 극한으로 맹렬히 쏘던 중, 수직방향 고자채기가 일어났는데, 이게 바르게 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있어 고민하고 망설이는 중에, 같이 공부하던 김귀혁 접장님이 풍석 서유구 선생의 사결에 있는 ‘극력견전’ 항목을 보여주어서, 아! 옛날 사람들도 이리 쏘았구나, 아하! 내가 바로 쏘고 있었구나. 하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확신을 갖고 보니, 책 「조선의 궁술」과 「正射論정사론」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산이 자기 스스로 궁체에 확신을 갖지 못하다 보니 퍼뜩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조시대에 활을 잘 쏘아 당상관까지 했던 웅천 이춘기공의 「射藝訣解사예결해」를 가지고 정사론과 교차검증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연구해 왔던 한산의 궁체가 1929년 책 조선의 궁술이 지어질 당시 失傳실전되었다던 ‘朝鮮鐵箭射法조선철전사법’이 맞다. 는 것을 확신하게 되어, 이제 세상에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게 된 연유입니다.
수정, 파일 추가 ) 2023년 3월 6일, 예기 사의, 사예결해, 정사론, 사결, 책 조선의 궁술 사법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정말로 멋진 궁체 입니다.
활의 달인들이셨던 조상님들께서 하늘에서 흐뭇해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그걸 더 완벽하게 발전시키고 세상에 널리 알려, 조상님들을 더욱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많은 유익을 끼치는 일에 뜻있는 모든 분들이 함께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댓글 쓰기 힘드네.
늙은이 고집은 이제 쉬엄쉬엄 사셔요.
동생들이 멋나게 철전사법으로 활판 뒤집기 할테니까요.
전투력 상승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조선의 궁술>에서, 철전의 묘법이 실전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문서로 남아 있지 않고, 구전과 몸짓으로만 전해진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 사법 서문중 관련 내용 :
오직 활쏘기의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전이 있었고, 편전이 있었고, 유엽전이 있었으므로
철전은 철전의 묘법妙法이,
편전은 편전의 기술奇術이,
유엽전은 유엽전의 신기神技가 다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묘법妙法과 기술奇術과 신기神技를 발휘하여
국위를 떨쳤음은 이미 널리 공인되었지만
이를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만 주었을 따름이고
문자로 전해지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므로 이제 노사와 숙무에게 체육에 가장 적합한 유엽전을 쏘는 법의 대개를 전하기를 청하야 아래에 기록하게됨이니라.”
결국은 '철전사법에 대하여 글로서 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고, 실전되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한탄하는 내용이지요.
철전사법이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철전사법을 전하지, 왜 유엽전 사법을 전했겠습니까?
철전사법이 살아 있었는데 유엽전만 전했다. 이러면 이거는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온깍지의 정진명접장이 국궁에 관한 책을 쓰면서, 정사론의 유무를 몰라서 책 조선의 궁술만이 유일한 국궁 저서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정사론도 있었고, 뒤에 나온 사예결해도 있고, 또 서유구선생의 사결과 사법비전공하도 엄연히 국궁에 관한 저술이지요.
온깍지에서 너무 국궁을 강조하다 보니 책 조선의 궁술 이외에는 국궁책이 아니다 이렇게 단정하다 보니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져 지금 헤어나오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온깍지는 책 조선의 궁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궁체거든요.
외연을 좀 확장하면 왕거의 사경 또한 우리의 국궁 저술로 봐야 하는데, 이건 세상사람들이 역사인식에 오류가 있어 아직 인정을 못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수의 양광이나 당의 이연이 동이족인거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왜 수와 당이 중국이 되어야 하는걸까요?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이 인류사의 역적질로 만든 108년밖에 안된 나라인데, 600년대 수와 당이 구지 중국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 수와 당의 사람들이 '나는 중국사람이다.' 이러고 살았을까요?
현대의 잘못된 역사상식과 인식오류를 가지고 과거 역사를 재단하고 그 연장에 국궁 사법의 오류를 이어간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반대합니다.
작년 말에 국문연에 제안했던 조선철전사법에 대한 세미나를 한번 기획하시면 제가 정리한 것을 보고하고 여러 제현의 지혜를 덧붙여 조선철전사법을 더더욱 완벽하게 완성하는 단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서울쪽에 계시는 홍접장님이 한 번 주선해 주시지요.
@한산 홍접장님 의견처럼 철전사법이 1920년대에 아직 실전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당시 생존했던 성문영 공도 무과급제자이므로 아마도 철전사법을 알고 있었겠지요. 다만, 이제는 무과나 전쟁이나 사냥에서 철전사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당시 궁사들이 굳이 책으로까지 써서 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육량궁도 결국 같은 구조의 복합각궁이기에 유엽전 사법이 근본적으로 철전사법과 다르진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궁술>도 당연히 철전사법의 바탕 위에 쓰여졌으리라 봅니다. 특히 줌손과 활장이 반드시 불거름으로 져야 한다는 구절은 굳이 가벼운 유엽전에선 안 써도 되는 동작을 묘사하는
@하늘서기 게 아닐지요(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아쉬워서 밝히셨을 수도..^^). 암튼 1920년대 당시 <조선의 궁술>을 저술한 분들은 <정사론>이나 '사예결해'나 '사결' 같이 철전사법을 전한 문헌자료의 존재는 몰랐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실전되었던(혹시 북한 쪽에 남아있을 수도 있을까요?) 조선시대의 철전사법이 여러 문헌 자료를 토대로 21세기 초에 다시 복원되었다는 사실이겠지요.
@하늘서기 정확한 판단입니다.
1929년 조선의 궁술이 지어질 당시 철전사법이 분명 있기는 있었을 것이나, 그것을 문자로 전할만큼 명확하지 아니한 상태로까지 퇴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그 전세대에 육량전을 쏘기보다는 알량한 장전으로 쏘아 맞추어 명성을 얻고 벼슬길에 오르려 한다고 한탄하는 글이 보이니 말입니다.
어째거나 오늘날 철전사법이 완전히 명맥이 끊긴게 사실이고, 각고의 노력끝에 철전사법의 외형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하는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선사님들과 합심해서 아직 완벽하게 짜 맞추지 못한 철전사법의 퍼즐을 완전히 복원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철전사법 궁체를 선 보인 것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온깍지 궁체
책 조선의 궁술에 거궁시 양냥고자와 눈을 수평으로 하라고 한다고 줌손 손목을 꺽어 만작도 하기전에 이미 흙받기줌으로 시작하니 조선의 궁술에 완전히 위배되는 쏘임을 가져가며,
줌 손목이 꺽여있다 보니 만작시 아랫장이 많이 휘어서 하삼지가 풀리고 범아귀가 밀리면 살이 덜간다는 부분도 위배되고,
발시후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떨어져야 한다고 하는데 화살이 다 날아가고 관객이 탄성을 지르고 난 이후에 줌손과 활장이 옆구리로 떨어지니 이러고도 책 조선의 궁술을 충분히 만족하는 궁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nua6TPuAI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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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깍지궁사회는 이른바 '전통'에 대한 좁은 관점에 얽매여 1930~40년대 이후 집궁한 구사들에게 주로 궁체의 근거를 찾다가, <조선의 궁술> 해석에서도 오류를 빚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요즘의 활판을 보더라도, 불과 20~30년 만에도 주류궁체의 엄청난 변질이 올 수 있는데, 19세기 말부터 이미 무과에서 시행했던 철전사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면, 1930~40년대가 되면 궁술의 퇴보가 상당히 진행되었을 거라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당시는 물론 50~70년대의 활쏘기 영상들을 보면서도 느낀 바입니다. 특히 온깍지에서 대면조사를 했던 구사들 대다수가 <조선의 궁술>이란 책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지요.
한국의 활쏘기를 지은 정진명까지 청교 장언식공의 정사론과 웅천 이춘기공의 사예결해를 모르는 지경이었는데 국궁활의 혼란은 당연지사가 아니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나처럼 조선의 궁술과 정사론과 사예결해를 병렬로 맞추어 그 본질을 파악하고, 왕거의 사경과 서유구선생의 사결과 사법비전공하까지 병렬처리로 활쏘는 본질과 궁체의 전형을 찾아 간다면 그들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을지 모르나, 문 걸어 잠그고 오로지 온깍지! 이러는데는 대책이 무대책이고 세월이 지나면 스스로 사그라 들 것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붙잡고 그 길(정도)을 따르는 사람에게 곁길을 가는 사람이 결코 이길수 없는게 천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