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고대의 책상이 있다. 🏯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을 하니 단 하나의 책상도
떠오르지 않아서 가슴이 많이 아프고 터지는 기분이다.
우리나라의 책상 중국의 책상도 함께 올린다.
우리의 책상을 올리는 것은 꼭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올리는 것이고 우리것을 알고 살기 위해서 이다.
고려시대의 사료에도 조선시대의 사료에도 나타나는데
이 제도가 1,000여년을 넘는 세월을 지닌 연력이 있으며 우리 백성들이
다함께 치루는 민본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제도이라고 자신은 강조하는 입장이다.
고려부터는 과거로 등용문을 나선 이들이 많았으며 기술직과 승려인
승직을 뽑는 시험에는 일반 백성이 많이 합격하여 고려의 백성들이 예절이 발라서
부지런하고 목욕을 잘해서 피부가 하얗고 공부를 잘해서 아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고려와 조선만 말하니 그렇다 신라는 무궁화 꽃이 많이 피는 군자국의
사람들이라서 쌍호랑이가 함께 한다고 오랜 고서어에 기록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고려시대부터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과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책상에 앉아있다
고려의 도병마사와 조선의 의정부에서 다인용 책상을 사용하는 사료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함에도 책상에 대해서 젊어부터 알았는데 보이지 않아서 두서없는 글을 무작정 올려봅니다.
🏚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을 확대해 보면 고대의 책상을 알수 있습니다
▣★☆▣★☆▣★☆▣★☆▣★☆▣★☆▣★ 고인쇄 광경에서 나타난 우리의 책상들 ▣★☆▣★☆▣★☆▣★▣★☆☆▣★☆▣★☆
▣★☆▣★☆▣★☆▣★☆▣★☆▣★☆▣★☆▣★☆▣ 고인쇄 광경의 풍경 ▣★☆▣★☆▣★☆▣★☆▣★☆▣★☆▣★☆▣★★☆
▣★☆▣★☆▣★☆▣★☆▣★☆▣★☆▣★ 중국 송나라 사대부의 책상과 문방사우 ▣★☆▣★☆▣★☆▣★☆▣★▣★☆▣★☆▣
▣★☆▣★☆▣★☆▣★☆▣★☆▣★☆▣★☆▣★☆ 우리의 고대 필통 ▣★☆▣★☆▣★☆▣★☆▣★☆▣★☆▣★☆▣★☆▣☆
▣★☆▣★☆▣★☆▣★☆▣★☆▣★☆▣★☆ 문방사우로 썼던 팔각통 ▣★☆▣★☆▣★☆▣★☆▣★☆▣★☆▣★☆▣★☆▣★☆
▣★☆▣★☆▣★☆▣★☆▣★☆▣★☆ 고비와 붓걸이 ▣★☆▣★☆▣★☆▣★☆▣★☆▣★☆▣★☆▣★☆▣★☆
▣★☆▣★☆▣★☆▣★☆▣★☆▣★☆ 경상과 함께 썼던 서안 ▣★☆▣★☆▣★☆▣★☆▣★☆▣★☆▣★☆▣★☆▣★☆
▣★☆▣★☆▣★☆▣★☆▣★☆▣★☆ 문갑文匣→ 문서나 문구를 넣어 두던 세간이었다 ▣★☆▣★☆▣★☆▣★☆▣★☆▣★☆
▣★☆▣★☆▣★☆▣★☆▣★☆▣★☆ 서안書案→ 책을 얹는 재래식 책상 ▣★☆▣★☆▣★▣★☆▣★☆▣★☆☆
▣★☆▣★☆▣★☆▣★☆▣★☆ 연상砚床→책 종이 벼루 먹 따위를 놓던 작은 책상 ▣★☆▣★☆▣★☆▣★☆▣★☆▣★▣★☆▣
▣★☆▣★☆▣★☆ 소수서원紹修書院→백운동서원이라 칭함: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
▣★☆▣★☆▣★☆▣★☆▣★☆▣★☆▣★☆▣★☆▣★ 도산서원 교전당 陶山書院 敎典堂 ▣★☆▣★☆▣★☆▣★☆▣★☆▣★
▣★☆▣★☆▣★☆▣★☆숭양서원 崧陽書院 → 개성開城에 있는 정몽주 선생을 모시는 서원 ▣★☆▣★☆▣★☆▣★☆▣★☆▣★
▣★☆▣★☆▣★▣ :조선 14대 선조 3년(1570)에 개성의 사족들이 세웠다 정몽주의 화상필적 기타 유물 등이 보관되어 있다. ▣★☆
▣★☆▣★☆▣★☆▣★☆ 벼루(연석砚石:벼루돌)→먹墨을 가는데 쓰는 문방구 : an ink slab ▣★☆▣★☆▣★☆▣★☆▣★☆▣★
▣★☆ 한양에 전철이 1899년 놓여졌다 그리고 1905년에 촬영한 사진: 유럽과도 얼마 차이가 없다 ▣★☆▣★☆▣★☆▣★☆▣★☆▣★☆ 유럽에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에나 전철이 다니던 시절이었다 산업혁명이후 급격한 시대 부응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고 본다.
▣★☆ 일본 1차 대전 추축국(승전국)이면 우리는 경제는 알부자 였다 거의 국민들이 국채보상운동으로 다 갚는 것을 일본이 막았다.
▣★☆▣★☆▣★☆ 종로에 처음 전철이 다녔던 1899년의 낡아버린 흑백사진의 옛날 근세의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임에도 깨끗하지
▣★☆▣★☆▣★☆▣★☆▣★ 못 한 것이 많이 아쉽지만 그때의 풍속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쾐찮은 사진이다.
▣★☆▣★☆▣★☆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나 전란을 겪었던 이씨 조선의 궁궐의 사진을 한장 올려보았다.
▣★☆▣★☆▣★☆ 이 창덕궁이 태종 5년부터 시작 성종 6년에 마무리를 하였다고 생각함에 어이하야~~
▣★☆▣★☆▣★☆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 눈 앞에 연상되는가? 경복궁 이조가 한양으로 천도 후 1년이 채~~
▣★☆▣★☆▣★☆ 공사가 걸리지 않고 입궐 후 경복궁이라 하였으니 1년의 경복궁과 70년이나 걸렸던~~
▣★☆▣★☆▣★☆ 창덕궁이라 생각하면 참! 우리가 왜 이리 바삐 살아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