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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과 다산 그리고 땅끝마을 (장흥 - 강진 - 해남)
코스 거리 (총 70k)
장흥대교 - 사송정 - 군동 - 강진 영랑생가 - 남포교(철새도래지 입구) -
5k 3k 5k 5k 4k
도원제방 남쪽(해창) - 백련사 - 다산초당 - 도암 - 신전 - 북일 - 북평 -
2k 1k 5k 3k 6k 9k 4k
서흥 입구 - 영전 - 토말하우스 - 해양자연사박물관 - 토말(땅끝마을)
5k 3k 4k 6k
아침 8시에 장흥을 출발했다. 강진까지는 14킬로. 탐진강을 따라가는 길이다.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는데, 이른 아침이라 장사를 하는 집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참 가다가 길가에 있는 허름한 국밥집에 들어갔다. 손님 서너 명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주인이 일반손님에게는 팔지 않는단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럼 어떤 손님에게만 파냐고 물어보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 다행히 남의리 구멍가게에서 아침거리로 영양갱과 쵸코파이를 사서 가게 앞에 앉아서 먹었다.
나는 탐진강이 강진만(어떤 지도에는 도암만으로 표기 되어 있다)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해로 빠지기 전에는 내가 걸어가는 코스와 내내 일치하는 것이다. 장흥공설운동장을 지나 순지삼거리에서 길이 헷갈린다. 이정표에는 2번과 18번 도로가 강진으로 가고, 군동으로 가는 노선이 하나 표시되어 있었다. 2번과 18번 도로는 보성에서 목포로 달려가는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이기 때문에 도보여행에는 적합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지? 이 방향이 맞는데..... 지도를 꺼내서 확인했다. 군동으로 가는 길이 맞다. 강진은 군동을 거쳐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동 코스가 옛날 길이다. 강진 4킬로 전방에 있는 면소재지가 군동이다. 이정표에 군동-강진이라고 표기해 놓으면 길손들이 얼마나 편할까.
갈대가 무성한 탐진강은 볼만하다. 당연히 철새들도 많이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귀한 손님을 보았다. 내 눈이 정확하다면 천연기념물 고니를 본 것이다. 그 우아한 고니 대여섯 마리가 갈대 사이를 흐르는 물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다행히 이 놈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분명히 백로나 해오라기 등 다른 철새와는 확연히 구분이 되었다. 나중에 해창 철새도래지에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그 새는 고니가 맞았다. 철새도래지에는 수많은 고니가 다른 철새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본 놈들은 일행을 이탈하여 상류로 올라와서 따로 놀고 있었던 셈이다.
나를 보고 놀라서 날아가는 모습이 정말 우아하다. 청둥오리가 비상할 때는 굉장히 바른 속도로 시끄럽게 날개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 오른다. 좀 촐랑거린다고나 할까. 고니가 발로 물을 차면서 날아오르는 모습은 흡사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하다. 언젠가 고니의 이동을 촬영한 BBC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계절이 바뀌어 고니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그 높은 하늘에서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를 만나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자연의 경이 앞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상승기류를 따라 히말라야산맥을 올라가는 하얀 고니떼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철새의 이동을 어떻게 찍었을까?
탐진강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강진 쪽으로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에 있는 갈대만 보일 뿐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그런 아늑한 풍경이었다. 무진을 강진으로 바꾼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둘 다 남쪽에 있는 바닷가 소도시이고, 안개가 많이 끼는 도시라는 점에서.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쌓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 가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에서>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언젠가 <무진기행>을 라디오 드라마로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고향 무진에 내려온 남자 주인공과 자기 모교인 무진중학교에 근무하는 음악선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스토리를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난다. 이런 작품은 모든 걸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텔레비전보다는 성우가 말로 묘사하는 라디오가 제격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내가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라디오 드라마는 ‘전설의 고향’과 <무진기행> 뿐이다. 내가 왜 <무진기행>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너무 아쉬워서일까? 아니면 그 당시 밤안개에 대한 성우의 상황묘사가 너무 리얼해서일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당시 내가 그 드라마를 굉장히 열심히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성우가 묘사하는 무진의 모습이 무척이나 몽환적었다는 사실도 기억난다. 내가 그 안개에 젖은 도시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안개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무엇이 있나 보다. 그러나 저러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던 김승옥이 기독교에 귀의하여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되었다.
군동에 애저 전문식당이 보인다. 간판에 ‘애저전문식당’이라고 적혀 있다. 애저는 새끼돼지를 말한다. 아마도 아저(兒猪)가 전라남도에서 애저로 불리지 않았나 싶다. 애저는 찜이나 구이로 주로 먹는데, 나는 아직 애저를 먹어보지 못했다. 내가 애저에 대해서 처음 들은 것은 재수 할 때다. 나는 고등학교 때 공부는 안하고 깽판을 치는 바람에 인사동에 있는 정일학원에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사회선생님이 애저 얘기를 해주었다. 그 분은 전라도 광주에 가면 애저라는 음식이 있는데, 애저는 어미 뱃속에 있는 돼지새끼를 말한다고 했다. 새끼를 꺼내기 위해서는 어미를 죽여야 하기 때문에 그 음식이 비싸다는 거였다.
본래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마도 어린 돼지로 하는 음식을 애저라 하지 않을까? 소고기도 송아지 고기는 빌(veal)이라고 해서 소고기 부위 중에서는 가장 비싸다. 나는 호주 유학 10년 동안 한 번도 이 부위를 사먹어 본 적이 없다. 안심보다 훨씬 더 비쌌었다. 양고기도 어린 양고기가 훨씬 비싸다. 애저는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만 언젠가는 한번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다. 스페인 세고비아 지방에서도 새끼돼지로 만드는 꼬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라는 요리가 유명해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오늘은 컨디션이 영 좋지 않다. 장흥에서 강진까지 14킬로 밖에 안되는데, 발바닥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다. 물어 물어 겨우 김영랑생가에 다다랐다. 단정하게 잘 관리하고 있는 거 같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왜 일까? 집에 사람이 살지 않아서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낙안마을에 있는 옛날 집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직접 살고 있기 때문에 집에 생기가 돌고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이다. 뽕짝기 없이 이 정도라도 관리해주는 강진군청이 고맙다. 옥에 티라면 어느 단체에선가 기증한 옛날에 전국적으로 한창 유행한 콘크리트 의자가 정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거 좀 나무의자로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영랑생가 입구에 있는 찻집에서 오미자차를 마셨다. 문화관광해설사인 위동연씨가 운영하는 집인데, 찻집 이름이 이쁘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위씨는 다산초당까지 가는 길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정약용의 남도유배길’이 생겼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카미노처럼 한국관광공사에서도 걷는 길을 만든 모양이다. 팜플렛을 하나 건네 주는데, ‘도보여행자 여권’이라고 적혀 있다. 문화생태탐방로라는 이름으로 강화 나들목과 여강길(남한강 따라가는길), 동해안 해안길, 소백산 자락길, 박경리 토지길, 고일돌 질마재 따라 100리길 등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친환경적이고 친자연적인 관광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주 좋은 시도이다.
나는 쌍계사에서 화개로 내려오면서 나뭇가지에 묶어논 ‘박경리 토지길’이라는 표식을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누가 이걸 만들어 놓았지?” “이게 뭐지?” 하고 의심을 품었었는데, 그 의문이 여기서 풀렸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도로에 갓길을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이런 코스에서도 도보여행자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 수도 없이 지적했지만 우리나라 지방도로는 너나 할 거 없이 갓길 폭이 1미터가 넘는 도로가 거의 없다. 4대강이다 녹색개발이다 거창하게 떠들지 말고 지금 있는 도로에 갓길을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화석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도보여행자나 자전거여행자들이 저절로 늘어날 것이다. 그게 녹색개발(sustainable/green development)이다.
‘흔적 없이 사용하는 것도 기술이다.’ 영랑생가 남자화장실에 적힌 문구다. 내가 여자화장실에는 안들어가 보아서 잘 모르지만 남자화장실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 만이 아니다.’ 함양 시외버스터미널 화장실에는 좀 과격한 문구가 붙어 있다. ‘변기에 화장지를 버리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다.’ 나는 집에서 변기에 화장지를 버리는데. 아마도 변기가 자주 막히다보니까 그런 문구를 적어 넣은 거 같다. 선암사 뒤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앞으로 한 발짝 당겨서 정조준 할 것.’ 아마도 도를 닦는 스님들도 생리현상을 처리할 때는 실수를 자주 하시는가 보다. 초등학교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이었던 오근정선생님이 하신 말이 생각난다.
“똥을 정확하게 네모 칸에 잘 조준해서 싸라.”
“화장실을 깨끗이 써라. 미국사람들은 화장실에서도 밥을 먹는다.”
그 양반은 카츄사 출신이었다. 언젠가 모셔서 식사 한번 하고선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하루에 한 번씩 수락산에 오른다는 말은 들었는데.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빈다.
사의재(四宜齋)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사의재는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의 당호로 다산이 지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01년 강진에 처음 도착해서 만 4년간 기거한 주막집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1801-1818)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주막집 주인할머니의 배려로 방을 하나 얻어 봇짐을 풀었는데, 그 방이 바로 사의재다. 그러니까 다산이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 후진교육과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실학의 대가로 거듭나게 된 배경에는 이 주막집 할머니의 공이 크다 할 수 있다. 바로 이 주막집을 묘사한 다산의 시가 한 수 있다.
강진읍 주막
북풍에 흰눈처럼 불어 날리어
남으로 강진땅 주막집에 이르렀네
작은 산이 바다를 가려줘서 다행이고
빽빽한 대나무가 꽃처럼 아름답네
장기(풍토병을 유발하는 나쁜 기운) 있는 땅이라 겨울 옷 벗어내고
근심이 많으니 밤술 더욱 더 마시네
설 전에 동백꽃 붉게 피어서
나그네 수심을 그나마 풀어주네 (창비 <다산시선> 중에서)
이 주막집은 지금은 강진군에서 사람을 두고 토속음식을 파는 음식점으로 운영하고 있다. 나는 추어탕을 시켜서 먹었는데, 음식이 얼마나 깔끔한지 먹기가 아까울 정도다. 주막을 운영하는 양순자씨에 의하면, 인공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도 음식이 좀 짜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는 더운 날씨에 음식이 쉽게 상하기 때문에 남도 음식이 자연스레 짤 수 밖에 없었지만, 모든 음식을 냉장할 수 있는 지금은 그렇게 짜게 만들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단지 그 지방 사람들의 입맛이 짜게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전주음식 정도로만 간을 맞추면 남도음식도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후 2시에 다시 길을 나섰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다. 강진 읍내를 빠져나와 평동리 남포마을에 있는 남포교에 앞에 ‘철새도래지’라는 작은 이정표가 붙어 있었다. 나도 오줌을 누다가 그걸 보았다. 그 길이 강진만을 끼고 해창마을까지 내려가는 도원제방이다. 그 제방의 끝이 철새도래지다. 내가 걸은 도로도 해창 철새도래지에서 그 제방과 만난다. 나는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가는 이정표만 보고 제방 안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걸은 것이다. 제방길보다 거리도 더 멀고 무엇보다 너무 위험했다. 차들이 제법 다니는 포장길인데, 정말 갓길이라고는 거의 없어 차가 올 때마다 길 옆으로 비켜서야만 했다. 정말 로드킬을 안당하는 게 기적인 그런 길이었다. 통일전망대에서 여기까지 최악의 길이다. 정말 짜증나는 길이다. (나중에 자동차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도보여행자들은 남포교에서 도원제방을 따라 해창마을로 걸어야 한다).
이런 실수에 대한 책임은 우선 나 자신에게 있다. 보성 율포에서 완도를 거쳐 토말로 가려고 이쪽 지도(5만분의 1)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두 번째는 강진군에서 ‘철새도래지’라는 이정표 밑에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 제방으로 가세요.”라는 안내문 하나만 붙여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작은 배려 하나로 해창 철새도래지와 다산초당 가는 길이 만난다는 걸 모르는 도보여행자들이 나 같은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런 지방이 ‘남도답사일번지’라니.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자들에게는 그럴지 모르지만 걸어다니는 여행자들에겐 아니다. 나는 도보여행자가 아니라 관광레저 전공자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어머니 말로 “아나, 떡이다.” 강진군이 정말 남도답사일번지로 거듭 나려면 관광지와 연결된 모든 길부터 제대로 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애정을 갖고 하는 말이다. 강진군은 그럴만한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관광문화자원을 살릴 수 있는 접근망을 관광객의 관점에서 정비하는 일이다.
도원제방이 끝나는 지점에서 내가 걸은 도로가 만났다. 거기가 해창 철새도래지다. 강진만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망원경도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철새들이 조류독감을 옮기는지 새를 관찰한 다음에는 잘 씻으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내가 탐진강에서 만난 고니 뿐 아니라 황새, 청둥오리, 검둥오리, 재두루미도 있었다.
물이 빠진 갯벌에는 여기 저기 철새들이 모여 먹이를 찾고 있었다. 남해 쪽으로 뻗은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색깔이 하얀 새는 잘 보이고, 다른 색깔의 새들은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새들이 우는 소리를 이렇게 한꺼번에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자기네들끼리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는 소리이겠지만 내가 알 도리가 없다. 단지 뭔가 조급하게 내는 소리, 먹이를 푸짐하게 먹고 느긋하게 내는 소리, 상대방에게 저리 가라고 경고하는 소리, 마음에 드는 짝을 꼬시려고 유혹하는 소리, 맛있는 먹이를 발견했다고 동료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 위험한 사람이 접근한다고 경계하는 소리일거라고 상상할 뿐이다. 한참 동안이나 앉아서 이렇게 철새들의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도 도보여행의 별식이다.
4시 반쯤 백련사(白蓮寺)에 닿았다. 3번 도로에서 백련사까지 1.5킬로는 계속 올라가는 고갯길이다. 길 양쪽으로는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백련사가 우리나라 3대 동백서식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시위하는 듯하다. 주차장에서 절로 올라가는 숲길 양쪽에는 천연기념물 151호로 유명한 동백숲이 울창하다. 올라가는 길도 황토흙을 깔아서 발바닥에 전달되는 촉감이 부드럽다. 당연히 걷기에 좋다. 백련사는 다산과 혜장스님(1772~1811)과의 친교로 유명한 절이다. (다산과 혜장선사의 교유와 논쟁에 대해서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참조). 백련사는 동백숲도 유명하지만 나에게는 수 백 년 된 배롱나무가 더 정겨웠다. 대웅전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모습도 눈맛이 시원하다. 옛날의 구강포는 이제는 모두 간척지로 변했다.
수녀님 두 분이 문화해설사를 따라 다니며 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보기에 참 좋다. 다른 종교를 서로 인정해주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진행되는 대다수의 전쟁은 종교전쟁이다. 이라크전도 그렇고, 아프간전도 그렇고,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국지전도 그렇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그렇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면 이와 같은 종교전쟁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천주교 신자이지만 절집에 가는 걸 좋아한다. 거기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절보다는 작고 고즈넉한 절, 번잡한 관광 시즌보다는 한적한 겨울철에 자주 찾는다. 혼자 조용히 절집을 돌아보고 그냥 조용히 나오는 편이다. 저번에 금둔사에서처럼 운좋게 아는 스님을 만나기라도 하면 차 한 잔 얻어 마시는 행운도 누리고.
이보현사무장에게 탬플스테이를 부탁했다. 부지런히 백련사를 돌아보고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려다 절집에서 조용하게 하룻밤을 묵고 싶었다. 저녁공양은 떡국이었다. 무우김치가 시원하게 맛이 있어서 어떻게 만든 거냐고 물었더니 배추김치에 박은 거라고 한다. 배추김치가 짜지 않아도 배추김치에 무를 박아 놓으면 이렇게 맛있는 무김치가 저절로 된다는 거였다. 공양간에 스님은 한 명 뿐이고, 2명은 고시생, 나를 빼고 나머지는 대여섯 명은 모두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저녁공양을 마치고 6시부터 시작하는 저녁예불에 참석했다. 이사무장이 종을 33번 치게 되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 전에 사무장은 나에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천주교라고 대답하자 저녁예불에 참석하고 싶으면 참석하라고 얘기했고, 나는 참석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스님 두 분과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예불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는 순서를 몰라 이사무장이 하는 모습을 옆 눈길로 훔쳐보면서 그대로 따라했다. 수없이 절을 반복하고서야 예불은 20여분 만에 끝났다.
내 방은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다방(茶房) 옆방이다. 다방이 마음에 들었다. 다방 창문을 통해 강진만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인다. 다방 바닥은 대나무자리가 깔려 있어 발바닥 촉감이 시원하다. 찻상에는 여러 가지 다기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내 눈에는 찻상이 눈에 띈다. 가로 50센티, 가로 1미터 정도 되는데, 그게 물건이었다. 아무런 칠도 하지 않은 원목에 여기 저기 틈이 벌어지고 금이 가 있었다. 이사무장에게 그 역사를 물어보았다. 대웅전 기둥을 교체하면서 나온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수백 년이 넘은 연륜을 자랑하는 것이다. 위치를 전혀 옮기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만도 20년 넘게 앉아 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이사무장과 그 찻상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시면서 30분 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다방 옆방은 다용도실이고 그 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투숙객이 생활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샤워기도 있고 따뜻한 물도 잘 나온다. 샤워를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아무튼 내가 절에서 샤워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학 4학년 때 학교 앞 절에서 하숙을 하면서 여름철에 비구니 스님들 몰래 절 계곡물에서 목욕을 한 적은 있다. 요즘 절집들은 이런 현대식 시설로 구조를 바꾸고 탬플스테이를 원하는 여행자들을 유치하고 있다. 가격은 3만원이다.
내가 잔 방은 스님 옷이 한 벌 걸려 있었고, 스님을 그린 초상화 그림이 두 점, 다기 그리고 이상한 부처님이 한 분 있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이 눈길을 끈다. 하얀 돌로 조각한 두상인데, 머리가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어 누가 보더라도 웃음이 나오거나, “어라! 이렇게 생긴 불상도 다 있네”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그런 부처님 두상이었다. 방이 너무 펄펄 끓어서 새벽에는 다방의 문을 열어 놓고 잤다. 절집의 밤은 적막 그 자체다. 사람 소리는 고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작년 겨울 정선 대광사에서도 이런 적막감을 경험했었다. 새벽 3시에 열리는 예불소리도 못들을 만큼 잠을 곤히 잘 잤다. 죽음보다 깊은 잠.
아침 7시 반에 백련사에서 아침 공양을 마치고 다산초당을 향해 출발했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오솔길은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 길이다. 바로 다산과 혜장스님이 서로 교유하면서 수 없이 오간 길이기 때문이다. 이 오솔길을 오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상을 논하고, 세상사를 걱정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 아무래도 유배 와서 찾아 올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는 다산이 더 자주 혜장스님을 찾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손님으로서 절에 찾아가서 밥도 자주 얻어 먹었을 것이고. 거리는 약 1킬로미터, 이정표에는 0.8킬로라고 적혀 있다. 초보자가 서나서나 걸어도 반 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을 만큼 짧고 걷기 수월한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 일찍인데다 길가에 숲이 울창해서 그런지 길은 어둑어둑했다. 백련사를 벗어나면 바로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좀 헷갈린다. 이런 곳에 이정표 하나쯤 세워두면 좋으련만. 조금 더 가면 대나무가 호위하는 듯한 길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바로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아직도 어스름하게 어두웠다. 원래 주위에 나무가 칙칙해서 좀 어두운편인데, 해가 뜨기 전이라 그런지 주위가 온통 어둑어둑하다. 방문 시간을 잘못 택한 거 같다. 나중에 보니 초당 말고는 사진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동암, 서암, 천일각, 정원 등. 그나마 어둠속에서 허둥대느라 다산 유배시절의 유일한 유물로 다산이 정석(丁石)이라고 손수 새긴 바위는 빼먹고 말았다. 정원에는 대나무를 연결하여 위로부터 가느다란 물줄기가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은 안개에 쌓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동암은 딸에 대한 다산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딸에게 주기 위해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오려 ‘매화와 새’라는 장첩(障帖)을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씨가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었을까? 특히 어린 딸은 얼마나 눈에 어른거렸을까? 딸을 위해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짓는 다산을 그리며 동암 앞에서 한참이나 그냥 서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떨어져 지내는 딸에 대한 아버지들의 그리움은 똑같은가 보다. 다산은 6남 3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요절하고 2남 1녀만 남았다고 하니, 아마도 살아남은 그 따님일 것이다. 그런데 다산초당에서 남쪽으로 7킬로쯤 떨어진 도암면 학동마을 앞에서 정다산 따님의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았다. 최근에 강진군에서 유허지와 함께 조성했다고 한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으나 나중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정다산유물전시관은 시간이 너무 일러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다산초당 아랫마을 귤동에 있는 다산명가 선물센터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아줌마에게 언제 문을 여느냐고 물었더니, 9시 넘어 담당직원이 출근해야 한다고 한다. 기다릴까 망설이다가 오늘 약 40킬로를 걸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라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3번 지방도로에서도 멀리 다산전시관이 보인다. (이번 여름에 다시 방문하여 살펴보니 전시물이 너무도 빈약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로를 걸어야 한다. 도암 신전 북일 북평(남창)을 거쳐 토말하우스(모텔)까지 가야 한다. 약 100리길(40킬로미터)이다. 도암부터 남창까지는 55번 도로를 타고, 남창부터 토말까지는 77번 도로를 타고 걷는다.
1년 전에 이 국토종단도보여행을 시작할 때 1년 안에 이 여행을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2009년 1월 30일에 정선에서 처음으로 걷기 시작했으니까 이미 1년을 넘긴 것이다. 이런 저런 핑계로 주말마다 여행을 미루다보니 이렇게 늦어지고 결국 마지막에는 일정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날이 좋은 가을에 이틀만 더 걸었어도 예정대로 1년 안에 마칠 수 있었을텐데. 아니면 여름에 비를 맞으면서라도 이틀만 더 걸었어도 이렇게 추운 날 걷지는 않아도 될텐데.
난 살아가면서 이런 실수를 수없이 반복한다. 젊었을 때 좀 더 열심히 할 걸. 작년에 좀 더 열심히 할 걸. 지난 달에 좀 더 열심히 할 걸. 지난 주에 좀 더 열심히 할 걸. 어제 좀 더 열심히 할 걸. 살아가면서 이런 후회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나만 그런가? 아니면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인가? 도보여행을 통해서 인생을 배운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거 같다.
하늘은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고, 거센 맞바람에 비까지 가늘게 뿌리기 시작한다. 여름비는 걷는데 도움이 되지만, 겨울비는 도보여행자에게는 최악의 날씨다. 눈이 내리는 날은 운치라도 있지만, 비를 맞으면 바로 감기에 걸려서 장거리 도보에 치명적이다. 도암농협에 들러 우산을 샀다. 배낭이 무거워서 물도 안가지고 다니는 판에 반갑지 않은 짐이 하나 더 생겼다.
신전에서 이쁜 성당 하나를 보았다. 정말 하꼬방 같은 교회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인간 중심의 경제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한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의 말이다. 물론 여기에서 작은 것이란 반드시 외양이 작은 걸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경우는 많다. 요즘 일부 교회나 사찰들이 대형화되어 인간은 상대적으로 더 왜소화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대에 저런 작은 교회가 있다니. 참 반갑고 반갑다. 저런 가난한 교회에 하느님은 더 관심을 가지고 더 큰 은혜를 주시지 않을까?
오후 1시에 북일면 소재지인 신일에 도착했다. 북일면부터는 해남군이다. 강진군에서 해남군으로 넘어온 것이다. 해남은 나에게 사연이 있는 곳이다. 내가 결혼 전에 짝사랑했던 여인이 해남군 산이중학교에서 가정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주말 어느날 서울에서 내려온 나는 그녀를 만났다. 우린 대흥사에도 가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내가 찻집에서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했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다고 거절했다. 절망한 나는 완도로 가서 바다만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실연의 상처를 달랬던 것이다. 지금은 옛날에 내가 사랑했던 여인들을 한 번씩 만나보고 싶다. 다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신일마을에서 식당이 서너 개 눈에 띄었다. 시골에서 식사시간에 실망하지 않는 법. 그건 중국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짜장은 전국적으로 평준화되어 있어서 어디서나 별로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다. 거기서 거기다. 지난 번 구례 간전에서 볶음밥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볶음밥을 시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볶음밥은 안된단다. 짜장밥을 시켰더니 바로 나온다. 맛있게 잘 먹었다. 중국집 맞은 편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붕어빵 네 마리를 천원에 사서 손에 들고 걸었다. 얼마 가지 못해 참지 못하고 그걸 다 먹어버렸다.
햇빛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는데, 바람은 여전히 세다. 오후 4시에 북평면 소재지인 남창에 도착했다. 오면서 만난 이정표에는 계속 남창이라는 지명만 나오고, 북평이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아 내심 길을 잘못 들었나 하고 걱정했었다. 나중에 지도를 자세히 보니 북평면 소재지 이름이 남창이다. 남창은 교통의 요지답게 꽤나 번잡했다. 거기에서 서쪽으로 가면 해남, 동쪽으로 가면 완도, 북쪽으로 가면 강진, 남쪽으로 가면 땅끝(토말)이 나온다. 여기서 좀 고민했다. 완도에 가서 자고 내일 여기부터 다시 걸을까? 여기까지 왔으니까 완도도 구경하고 싶었다. 완도에 가 본 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그렇게 하면 좋긴 한데, 남창에서 땅끝까지가 22킬로나 된다. 내일 6시간 그러니까 거의 하루 종일 걸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토말에 가서 하루를 더 자야 한다. 안된다. 더 걷자. 내일 일정이 수월하려면 오늘 힘들더라도 더 걸어야 한다. 쉬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다시 강행군이다.
약 12킬로 전방에 있는 토말하우스를 목표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장거리 도보여행에서는 오후 서너 시가 가장 힘들다. 발도 아프고 쉬어 가고 싶은 유혹에 자꾸 빠지기 때문이다. 오늘 일찍 일정을 멈추고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면 안될까? 이런 유혹이 가장 큰 적이다. 그러나 오늘 덜 걸으면 내일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되어 있다. 공부가 됐든 업무가 됐든 노동이 됐든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 논에 가서 일할 때도 해질녁이 되면 우리들은 그만 집에 가자고 엄마를 조르기 시작한다.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늘 안하면 내일 더 힘들어진다. 오늘 조금 더 하고 가자.”
남창부터 남쪽으로 가는 길에서는 왼쪽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바다가 보이니 좀 낫다. 바다 건너가 완도군이다. 완도군은 지금은 남창에서 완도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육지나 마찬가지다. 역시 해남은 기온이 온화해서 그런지 도로 주변에 배추밭, 마늘밭, 보리밭이 지천에 널려 있다. 우리 김장거리도 매년 해남에서 주문해서 사먹는다. 호박고구마도. 지난 가을 배추를 추수하지 않고 저렇게 밭에서 겨울나기를 해서 봄에 수확을 하면 비싼 값에 팔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해남은 승주 장흥 강진과 달리 윤택하고 풍족해 보인다. 보성처럼 젊은이들도 눈에 많이 띄고.
3.5킬로쯤 가다가 77번 도로를 버리고 서흥 신흥 묵동마을로 가는 작은 길을 택했다. 바다 쪽으로 난 길이다. ‘땅끝 바다의 향기’라는 팬션이 하나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집인데, 멀리서 보기에 꽤나 이뻐 보인다. 자고 가고 싶지만 토말에서 너무 멀다. 좀 더 가야 한다. 영전마을에서 다시 77번 도로와 만났다. 해안 쪽에서 다시 내륙으로 들어온 것이다.
남전마을부터 토말하우스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이제 정말 힘들다. 다리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프다. 피곤할 때 오르막을 만나면 뒤로 걸으면 훨씬 덜 피곤하다. 내가 걸으면서 터득한 비법이다. 아마도 우리 다리가 앞으로 걸을 때와 뒤로 걸을 때는 서로 다른 근육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고개 정상 300미터 전방에 ‘아름다운 길’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곧 바다가 나온다는 뜻이다. 5시 50분이 지나자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린다. 6시부터는 나도 후레시를 켜고 걸었다.
마침내 토말하우스가 보인다. 입구 간판에 불이 켜져 있다. 다행이다. 남평을 지나서 만난 토말하우스 광고판이 너무 낡아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전망은 기가 막혔다. 앞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바다 앞에 서 있는 모텔이다. 길이 토말하우스부터 땅끝마을 쪽으로 꺽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90도 꺽여서 서쪽을 보고 달리는 것이다.
방은 따끈하고 온수도 잘 나온다. 무엇보다 방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일품이다. 전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저녁으로 전복죽을 먹었다. 1층이 전복전문 식당이어서 다른 도리가 없었다. 기분 좋게 보해 복분자도 한 병 마셨다. 여주인에게 남창에 서있는 광고판 좀 깨끗하게 교체하라고 당부했다. 아침식사로 냉이국을 먹었다. 내가 어제밤에 시레기 된장국을 주문하자 여주인이 냉이국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올 들어 냉이국은 처음이다. 향긋한 냉이냄새가 입맛을 돋군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정말 파랗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하얀 라인을 그리며 비행기가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시드니에 다닐 때 비행기가 이쪽으로 해서 필리핀 상공으로 날았던 것 같다. 한두 대가 아닌 것으로 보아서 이쪽이 남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길인 거 같다. 한참 가는데, 도로 왼쪽에 ‘선탑자와 운전병 외 병력 하차’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군대에서 내가 가장 싫어했던 표지판이다. 나는 포병이어서 항상 차를 타고 다녔는데, 고개에서 저 표지판만 나오면 우리 졸병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고개를 걸어서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미칠 지경이었다.
사구미해수욕장 위에 조성해 놓은 땅끝조각공원에 들렀다. 너무 인공적이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은 없다. 차라리 사구미마을이 깨끗하고 안락하고 편안해 보인다. 앞으로는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거기에 예본교회가 이쁘게 서있다. 드물게 보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시골마을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마을이다.
사구미해수욕장에 이르자 맞은 편 바다 건너 멀리 땅끝전망대가 보인다. 직선으로는 저렇게 가깝게 보여도 해안도로는 들쭉날쭉 달리기 때문에 10킬로는 기본이다. 백사장을 1킬로쯤 걸었다. 발이 백사장에 조금씩 빠져서 걷기 힘들다. 겨울에 해수욕장을 걸은 것은 연애할 때 아내와 함께 대천해수욕장을 걸어본 이후 처음이다. 그때 사람도 별로 없는 해수욕장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흑백 스냅사진을 많이 찍었었다. 그 사진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는 그림같은 남해안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서있고, 그 앞에는 양식장이 여기저기 떠있다. 그 사이로 통통배가 다니면서 작업을 한다. 우리 같은 외지인들 눈에는 그런 풍경이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양식 등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고된 작업장일 뿐이다. 삶을 꾸려가야 할 일터인 것이다. 도로변에는 동백꽃이 막 피어나려고 꽂망울을 내밀고 있다. 어떤 성급한 놈들은 벌써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다음 주 쯤에는 이 남도에는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함께 불리겠지. 섬마을 선생님이 주인공인 해당화는 언제 피지?
통호리에서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에 들렀다. 이 개인 박물관은 임양수관장이 30여년간 각국을 다니면서 수집한 해양식물과 육지생물 표본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선장이었던 임관장은 송지면 통호리 통호분교 폐교부지에 박물관을 만들고 자신이 세계 각국을 돌면서 수집해서 소장하고 있던 패류 산호 어류 표본 4만점을 전시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지원은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한 개인의 노력으로 이렇게 알찬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하트모양의 조개는 정말 볼만했다. 입장료 3천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전시장이다. 이런 각 분야별 사설 박물관이 활성화되면 우리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더 많은 교육기회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고.
불등마을에 ‘땅끝에 아침’이란 민박이 있다. 도로 아래 빈터에 바다를 보고 있는데, 내가 만난 민박집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이다. 4칸 한옥으로 절집처럼 지었는데, 바다를 그대로 가슴으로 안고 있고, 햇빛이 가득차고, 잘 자란 잔디 사이로 큰 돌을 걷기 좋을 만큼 박아놓아 돌길을 만들었다. 기둥과 보에도 아무런 칠도 하지 않고 나무결을 그대로 살렸다. 그런데 방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부질없이 짖어대는 개만 길손을 반긴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잘 지었다. 무위사 극락보전처럼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단아하고 소소하다. 주인장이 누구일까?
도로변 시멘트 방벽에 기념낙서가 즐비하다. 토말하우스 직전의 고개에도 이런 방문기념 낙서가 즐비했었는데. 아마도 이곳을 방문한 기념하기 위해서 시멘트벽에 이름을 새겼을 것이다. 옛날에 금강산을 방문한 사람들이 바위에 저마다 자기 이름을 새긴 것과 비슷하다. 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힘든 줄을 모르니까 이런 걸 새길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멀리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자기 고생을 기념하고파서 무언가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충동을 느꼈으니까. 내용을 보면 울산에서 여기까지 걸은 친구도 있고, 광주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친구도 있고, 부산부터 걸어서 온 친구도 있고, 나처럼 통일전망대부터 걸어서 온 친구도 있고, 가지각색 사연이 다 적혀 있다. 재미있는 기념물이다. 그나마 시멘트벽이어서 다행이다. 바위였으면 환경훼손이 심했을텐데.
땅끝마을 입구에서 조준민 학생을 만났다. 내가 땅끝마을로 내려가려는데, 저 앞에서 누가 절뚝거리면서 자전거를 들고 내려오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앞 바퀴가 동강나 있었다. 언덕을 시속 50킬로로 내려오다 도로 옆에 나있는 콘크리트 배수로에 쳐박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를 들고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퀴 하나를 들고 그 친구는 본체를 들고 마을로 내려갔다.
조군은 올해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대입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인천에서 땅끝마을까지 자전거여행을 시도하여 12일 만에 도착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지원학과도 내 전공인 관광학과라고 해서 더 반가웠다. 어린 학생이 참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었다. 나중에 어떤 역경도 다 헤쳐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점심을 사주고 약간의 여비를 보태주고 헤어졌다. 준민이는 일단 목포로 가서 인천행 버스를 타고 간단다. 이번 도보여행 도중 항상 남의 도움만 받다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진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이 딱 맞는다.
2월 2일 오후 1시 10분에 마침내 땅끝마을에 닿았다. 처음 약속한 1년에서 하루가 더 지났지만 그래도 내가 1년 전에 약속한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나이 오십 고개를 넘기는 중년의 나에겐 의미있는 일이다. 나는 인생에서 큰 목표를 세워 달성한 적이 세 번 있다. 물론 실패한 적은 더 많고. 중학생 때 내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 스폰서 없이 서른다섯에 호주에 유학 가서 아내의 도움으로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딴 것. 그리고 나이 53세에 통일전망대에서 땅끝마을까지 주말을 이용해서 1년 동안 걸은 것. 이제 남은 건 실크로드의 행적을 따라 걸어서 일본 교토에서 서울을 거쳐 로마까지 걸어가는 일이다. 그건 은퇴 후에 시작할 것이다. <나는 걷는다>를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도 나이 예순이 넘어서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걸었는데 나라고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들뜬 마음으로 마누라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1시 10분 땅끝 도착. 1년 동안 주말과부로 지내준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2010년 1월 30일 - 2월 2일)
교통
서울(강남 고속터미널 호남선)에서 장흥행 버스는 하루 4회 운행되며, 첫차는 08:00, 막차는 16:50분. 소요시간은 5시간 걸린다. 장흥이나 강진은 버스편이 많은 광주를 경유해서 가는 편이 좋다. 토말(땅끝마을)에서 서울까지 직접 오는 버스는 없고, 해남이나 강진, 목포, 광주를 경유하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자가용은 서해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숙박
장흥에서 토말 구간에는 장흥, 강진, 토말에 숙박업소가 집중되어 있다. 다산초당 입구와 사구미해수욕장에서 토말에 이르는 남해안 해안도로 주변에도 다양한 숙박업소가 있다.
식당
장흥에서 토말 구간에서는 남도답게 다양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강진에 있는 사의재 추어탕을 반드시 먹어보기 바란다. 남해안을 따라서는 해물을 즐길 수 있다. 토말에도 식당들이 즐비하다.
관광지
강진의 영랑생가, 다산초당, 백련사, 해양자연사박물관, 땅끝마을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