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와 무아(無我)에 대해 논리적으로 기록을 중심으로 설명하려한다. 윤회설이 비롯된 나라는 인도이다. 최초의 〈리그베다〉성립을 기원전 1,200년에서 1,00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시기를 전후해 윤회설이 민간신앙으로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상(天上)의 기쁨이, 그리고 육체의 해탈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원전 800년에서 600년 사이로 성립이 추정되는 〈우파니샤드〉의 문헌에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가 언급 되어있다. 윤회설의 처음 형태는 죽은 자에 대한 제사의례로부터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윤회는 불설(佛說)이 절대 아니다.
영혼, 불교 경전 어디서도 못 찾아
당시의 제사를 조령제(祖靈祭)라 칭했다. 조령제엔 남자만 참석했다. 사람이 죽으면 조상의 나라에 태어나는데 그것을 ‘피드리’ 라 불렀다. 조령(祖靈)이란 뜻이다. ‘피드리’ 들이 모여 사는 곳을 ‘피드리카’라 칭했는데 조상의 나라라는 뜻이다. ‘피드리’가 ‘피드리카’에 가기위해서는 조령제를 지내야 한다. 버터를 녹여 찹쌀로 지은 밥에 꿀을 바르는 제사음식이 ‘핀다’ 이다. 제사를 함께 지낸 사람을 ‘사핀다’ 라 칭했는데 이들끼리는 결혼할 수 없다. 제사를 소홀히 지내거나 딸만 있어 제사를 치룰 수 없는 영혼은 조상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고 ‘프레타’로 허공을 떠돌게 된다. ‘프레타’란 굶주림의 상징, 아귀(餓鬼)이다. 이것이 최초의 3도 윤회설이다. ‘프레타’의 개념이 완성된 시기는 기원전 3세기에 성립된 〈가정경〉에 ‘프레타’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고대 문헌은 저자가 없는 수세기동안 말씀으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문화이다. 부처님의 생존시기에는 축생과 지옥이 첨가되어 5도 윤회설이 등장하는 것이다.
용수와 제바 보살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에도 5도윤회만 언급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용수) 이후에 아수라(阿修羅)가 포함되어 육도윤회설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육도윤회설은 불설(佛說)이 아니며 영혼이란 단어는 불교의 그 어떤 경전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음을 밝혀둔다.
다음으로 설명할 부분은 불교의 근본 사상인 무아(無我)에 대해 설명할 차례이다. 부처님 생존 시에는 종교 사상가들이 많았다. 경전에 등장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그들이다. 자이나교의 교주인 ‘마하비라’를 비롯해 ‘아지타’ ‘고사라’ ‘산자야’ ‘프라나’ ‘파쿠다’ 가 그들이다. 이들은 인도의 전통 사상인 만물의 창조주인 브라흐만(brahman)과 개인의 주체인 아트만(atman)에 색깔을 더하여 각기 다른 주장을 펴는 것이다.
요약하면 마하비라는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을 주장하며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단식(斷食)등의 고행을 장려하고 있다. 살아서의 깨달음을 현신해탈(現身解脫)이라 하고 죽음 뒤에 영혼이 누리는 세계를 이신해탈(離身解脫)이라 하여 구경(究境)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다음은 아지타의 학설인데 물질요소는 육체로 집결돼 있어 육체가 해체되면 정신도 소멸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사라는 영혼의 존재는 인정했으나 삶의 노력은 별개의 것으로 지어진 운명의 결과에 따라 살아간다고 주장하는 운명론자였던 것이다. 불교측으로 부터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의 사명외도(邪命外道)라는 평을 받는 사람이다. 그 밖의 산자야, 프라나, 파쿠다의 학설은 생략한다. 이들의 주장과 학설에 대해 부처님은 침묵으로 부정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에는 진리중의 진리 연기법칙(緣起法則)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此滅故彼滅)’ 이것이 연기 법칙의 전부이자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만물의 창조주인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육체의 주인공 이라는 아트만의 존재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연 생(生)이요 인연 멸(滅)인데 무엇이 있어 생멸의 법칙을 벗어나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끝으로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의 무아부분을 옮겨본다. “과거 세상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過去世有我) 그딴 일은 있을 수 없는 일(是事不可得) 과거 세상에 있었던 내가(過去世中我) 금생의 내가 될 수 없다.(不作今世我)”
출처 : 현대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