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후의 신학에 관한 글과 관련하여
욥기를 묵상하는 바, 엘리후라는 인물을 통해 공감의 개념을 돌아보게 하는 본 글과 같이 엘리후가 연소자요 그의 어투와 표현이 욥의 상황을 헤아리지 아니한 채 무례하였음은 본문이 기록하는 바입니다.
엘리후는 본문에서 인과응보, 즉 원인이 있기에 결론이 있다는 논조로 욥의 물음과 표현에 답하고 있습니다. 아는 바와 같이 엘리후가 욥의 상황을 바라보는 객관화가 결여된 데에는 욥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욥이 지금 처한 어려움들의 상황에 욥의 표현과 같이 까닭없는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사단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의 배후를 알지 못한 채, 욥이 고난받는 부분에 관하여 무엇인가 원인, 잘못한 바가 있으니 그러할 것이라는 의이로 말하며 처음에는 엘리후도 부드럽게 표현하였으나 욥이 계속하여 자신의 무고함, 억울함중에 마주하는 고난에 대하여 토로함이 이어지자 엘리후의 표현도 더욱 격해졌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 글이 기록하는 바, 공감의 개념에는 위험한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글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재판부가 성소수자를 축복한 젊은 목사 출교한 사실을 두고 공감능력이 결여된 신학이라 표현하고 이것을 폭력으로 간주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목회자는 마땅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사람이요, 그 진리의 말씀으로 가감없이 선포하되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목회자가 성경에 기록된 바 성소수자, 동성애라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죄를 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축복한 것은 잘못된 것이요 그 목회자의 신앙적 중심을 검증해야 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죄악된 행위에 대하여 축복이 아니라 책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잘못된 행위와 죄에 대하여 공감의 개념으로 다가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잘못된 행위, 죄가 있으면 그에 대하여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른 길로 돌이킬 수 있도록 인도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치리, 권징이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 상)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바 죄된 동성애적 가르침과 행위를 하는 이들을 축복하는 목회자는 마땅히 책망하고 징계를 받아야 함이 옳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바른 가르침과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가는 것이 됩니다. 특별히 성경을 동성애, 성소수자적 개념으로 풀이 해석하는 것을 퀴어신학이라 하는 데, 이것은 이단으로 결의된 신학(합동 2020년 제 105회 총희결의)으로서 경계되어야 합니다.
글. 배병두 집사(대구서문교회 사랑부 교사) 202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