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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계급 중산계급 서민계급 기층계급으로 구성된
계급사회와 계급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해가는 지구촌 초중고대학 교육!!
지구촌의 어느 나라 어느 초중고대학 학교이든지, 교실에서는 선생 1명에게 수십 명의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다. 대략 30~40명의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서, 교단에서 강의하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문제를 제기할 줄 알아야 된다.
본래 모든 사람들은 자타불이 일심동체 관계의 친구 사이고, 살아가면서 그 자타불이 일심동체의 관계를 심화하고 구축해 간다. 너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주고받을 관계였고, 너와 내가 살아가면서 서로서로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주고받으며 삶으로써, 너와 내가 남이 아니고, 너와 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몸을 가진 그렇게 밀접하고 밀접한 관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모든 지구촌 인류가 이런 관계이고, 모든 국민들도 이런 관계이고, 모든 마을이웃들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친구들도 마찬가지이고, 친인척들도 이런 밀접한 관계이고, 형제관계도 그렇고, 부모자식 사이는 더욱더 자타불이 일심동체의 밀접하고 밀접한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학교에서 1명의 선생이, 30~4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생과 학생들 사이가 서로서로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주고받는 자타불이 일심동체의 관계라면 1대 다多의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하면 여기서 바로 선생과 학생들 사이의 자타불이 일심동체의 관계는 너무나도 쉽사리 무너지고 만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전해 주려면, 그렇게 30~40명을 교실에 앉혀 놓고, 자기 혼자 교단에 올라가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 만일 선생이 학생들을 정말로 깊이 사랑한다면, 선생 딱 1명이 학생 1명만, 교단에서가 아니라, 학생과 똑같은 책걸상에 앉아서 가르쳐야 된다.
그 이유에 대해 말하면 이렇다. 가정에서는 엄마아빠 두 명이 자식 두 명을 가르친다. 그래서 정말로 엄마아빠가 주고 싶은 사랑을 마음껏 준다. 이에 대하여 자식 두 명은 엄마아빠에게 받는 만큼 사랑을 엄마아빠에게 돌려준다. 그래서 엄마아빠와 자식 두 명의 사이에는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이 축적되고, 결국 자타불이 일심동체의 관계가 구축된다. 그리하여 가정에는 행복이 철철 흘러넘친다.
물론 이 철철 흘러넘치는 행복이 지속하려면, 자식 두 명에 대한 육아와 교육이 할머니할아버지 증조할머니증조할아버지 이모이모부 이종형제 고모고모부 고종형제 숙모삼촌 사촌형제 등등의 친인척들과, 수십 명의 마을이웃 어른들과, 친구들과 적절히 분담되어야 한다.
자, 그럼 선생 1명이 학생 30~40명을 가르치는 학교와 가정은 어떻게 다른가?
그야말로 학생들이 선생으로부터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조금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거의 줄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은 1명인데, 어떻게 30~40명의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든 사랑을 주겠는가? 결국 30~40명의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든 사랑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다. 그 말은 30~40명의 학생들에게 아주 작은 사랑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강의를 하는데, 30~40명이 모두 다 이해를 못하고, 한 열대여섯 명만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한다면, 선생님은 나머지 이삼십 명에게도 모두다 이해를 시켜야 된다. 그것이 바로 선생님이 학생들 모두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고, 모든 학생들이 빠짐없이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 못하는 이삼십 명에게는 이해를 못 시키고 넘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을 지극히도 깊게 사랑한다. 수학 시간에도 모든 학생들을 그렇게 지극히도 사랑한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에게 수학 지식을 알려 주고 싶다. 그런데 선생님의 강의를 이해하는 학생들은 열대여섯 명뿐이다. 그러면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을 지극히도 깊게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이삼십 명의 학생들에게도 이해를 시켜주어야 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수학과목 책 한 권을 한 학기에 모두 다 가르쳐야 되고, 다른 과목도 가르쳐야 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학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바꾸어 말하면 학교교육은 어른들이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문화이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문화이다. 깊고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문화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 지구촌 모든 나라의 모든 초중고대학에서는 선생 1명이 학생 30~40명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선생 1명이 학생 30~40명을 모두 다 이해시키지 못하고, 소수만 이해시키고 넘어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이 소수에게만 사랑을 주고, 다수에게는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로써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럼 학교에서 선생님의 설명과 강의를 이해하지 못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선생님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성장하게 되는데, 이때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가?
학생들의 인성과 인격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얼마나 많이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훌륭할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아주 나쁠 수도 있다. 주변 사람이란 학생들의 선생님도 있고, 친구들도 있다. 물론 학생들이 사는 집에서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고, 친인척들과 마을이웃들도 있다.
학생들은 낮 시간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의 낮 시간의 주변 사람들은 친구들과 선생님 밖에 없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성장하게 되는 학생들은, 결국 인성과 인격이 나쁠 수도 있고, 아주 나쁠 수도 있다. 결코 어른이 되어서 좋은 인성을 가지거나, 훌륭한 인성을 가질 수 없다.
물론 낮 시간의 대부분을 친구들과도 보내기 때문에, 학생들의 친구들에게 아주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 좋은 인성을 가지거나, 훌륭한 인성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성을 교육하며 바로잡아 주는 역할은 낮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선생님이 해 주는 것이지, 친구들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성장하면서, 인성이 타락하게 되고, 어른이 되면, 타락한 인간이 되어 있게 된다.
저녁시간은 잠만 자기 때문에, 인성은 낮 시간에 대부분 가꾼다. 학생들이 낮 시간에 인성을 가꾸는 곳은 학교이고, 인성을 잘 가꾸도록 교육해 주는 사람은 선생님이다. 학생들의 인성은 주로 인성을 잘 가꾸도록 교육해주는 선생님으로부터 얼마나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받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선생님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많이 받으면, 학생도 사랑과 우정을 많이 줄 수 있는 인성이 되고, 선생님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조금 받으면, 학생도 사랑과 우정을 조금 밖에 줄 수 없는 인성이 된다.
자신의 생활 영역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정을 조금 밖에 주지 못한다고 해서, 이기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우정을 조금씩은 주기 때문이다.
선생 1명이 학생들 30~40명을 교실에 앉혀 놓고 가르치는 교육문화는 먼저 학생들이 생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조금씩 밖에 주지 못하는 인성을 가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류사회를 깊이 있고 정확하게 분석해 이해해 보면, 지구촌 문명국가에서 초중고대학 교육이란, 각국의 보수주의 지배계급 자신들이 소유하고 통치하는 자국의 과학기술발전 수준을 드높이고,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공부 잘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보수주의 지배계급은 초중고대학 선생들에게, 학교의 교단에서, 교실 안의 공부를 잘하는 인재들에게 더욱 더 많이 관심을 주고, 배려를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도록, 선생들을 유도하고 이끌어간다.
지구촌의 모든 국가의 보수주의 지배계급은 자국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이웃나라를 정복하고, 지구촌 전체 국가를 정복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지구촌의 모든 나라들 위에 군림하며, 지구촌을 좌지우지 호령하고 있다. 미국 보수주의 공화당의 목적은 결국엔 지구촌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다른 강대국들의 보수주의 정당도 마찬가지고, 약소국들의 보수주의 정당들조차도 지구촌을 정복하고 싶은 탐욕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초중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와 교수들을 양성할 때,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유도하고 견인할까? 결국에 보수주의 지배계급 자신들이, 지구촌을 정복할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과학기술과 경제와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인재를 학교에서 많이 양성하도록, 교사들과 교수들을 유도하고 견인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공부 잘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시키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물론 각국의 보수주의 지배계급은 초중고대학의 교사와 교수가 될 제자들에게 지구촌 정복에 대한 탐욕을 심어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지구촌 정복에 대한 탐욕은 감쪽같이 숨기고서, 국민들의 국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강화시켜서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공부 잘 하는 인재를 양성시키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각국의 지배계급이란 한국에서는 자유한국당이고, 일본에서는 자민당이고, 독일에서는 기민당이고, 미국에서는 공화당이다. 그리고 이런 당들과의 연합세력인 재벌들과 부자들이다. 구체적으로는 군 장성들과 행정부 고위관료들과 사법부 판사들과 검사들과 경찰들과 언론인들과 대학 교수들과 종교인들 등등이다.
이렇게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육받은 초중고대학 선생들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시키기 위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주게 된다. 결국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선생님의 관심과 배려와 사랑으로부터 소외당한다.
교실에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교단 위의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만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많이 주는 것을 보고서 결과적으로 선생님으로부터 이기주의를 배우게 된다. 학생들의 마음에 이기주의가 자리 잡히고 배태되는 것이다.
이기주의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권력과 부귀영화와 명예를 소유하려고 덤벼드는 것이다. 탐욕주의란 무소불위의 어마어마한 권력과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부귀영화와 숭상한 명예를 소유하려고 덤벼드는 것이다.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집에서 엄마아빠로부터 많은 사랑과 우정을 받은 것처럼,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우정을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준다.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주는 이유는 국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강화시켜서,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각국의 보수주의 지배계급이 선생님들에게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주라고 한 이유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지구촌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려는 것이다.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주어, 과학기술과 경제와 군사력을 발전시켜서,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은 이기주의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주어, 과학기술과 경제와 군사력을 발전시켜서, 지구촌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려는 것은 탐욕주의이다.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면,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모든 학생들이 어른이 된 후 참여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된다. 즉,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어른이 된 후, 기업과 국가기관에 들어가, 과학기술도 발전시키고, 경제도 발전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해야 된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만, 어른이 된 후, 주요 대기업과 주요 국가기관 등에 취직해,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끼리만 특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끼리만, 주요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고, 주요 국가기관에 들어가게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재산을 모으고, 몸도 편안한 노동을 하고, 비싼 승용차를 구입하고, 평수 넓은 집을 구입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습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보고, 인류사회를 보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연봉이 높은 기업이나 직장에 취직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어서 부귀를 누리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해서 국민들에게 도시문명에 기반 한 행복을 창출해 주고 있다. 이 현실은 실제적으로 자국의 보수주의 지배계급에게 지구촌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하다.
학교의 교단 위의 선생님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주어, 이 학생들이 더욱 더 공부를 잘 하게 만들어, 이 학생들로 하여금 대기업의 주요 부처나 국가 기관의 주요부처에 취직해, 나라의 과학기술과 경제와 군사력을 강화시켜서,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이나 중요하지 않은 회사에 취직한 국민들에게, 물질문명에 기반 한 행복을 창출해 주는 것은 지독한 이기주의다.
수재들은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둔재들은 다른 사람들이 창출해주는 행복을 받는 것은 지독하고 악독한 이기주의인 것이다.
행복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한쪽은 행복을 주고, 한쪽은 행복을 받기만 하면, 행복을 주는 쪽은 주인이 되고, 행복을 받는 쪽은 노예가 된다. 이른바 계급이 형성되는 것이다.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이 구축된다.
학교의 교실에서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만 많은 사랑과 우정을 주는 것은 이렇게 계급주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초중고대학에서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많이 받고, 선생님으로부터, 학급 1등이네, 학급 2등이네, 학급 반장이네 칭찬을 듣고, 이로 인해 학급 교실 안의 친구들로부터도 존중과 부러움과 외경심을 많이 받은 학생들은 어른이 되어 주요 대기업과 주요 국가기관에 입사해 높은 연봉과 높은 사회적 지위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고, 선생님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받지 못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학급 꼴찌네, 학급에서 두 번째 꼴찌네, 반장도 못해 보네 하는 암시를 받고, 이로 인해 학급 교실 안의 친구들로부터 무시와 멸시와 놀림을 많이 받은 학생들은 어른이 되어 국가에서 중요성도 없는 중소기업과 영세기업에 입사해, 낮은 연봉과 낮은 사회적 지위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다.
지구촌 문명국가의 초중고대학에서는 선생 1명이 학생 30~40명을 가르치고 있다. 이 교육문화는 선생이 모든 30~40명의 학생들에게 모든 지식을 이해시키지 못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만 이해시키고 넘어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공부를 못하는 학생으로 나누게 된다. 이것은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하면, 높은 연봉과 높은 사회적 지위 대접을 받는 사람과, 낮은 연봉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받는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즉, 높은 계급과 낮은 계급으로 나누고,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으로 나누고, 작게는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 기층민으로 나누고, 세밀하게는 초상류계급 하위상류계급 중위중산계급 하위중산계급 상위서민계급 중위서민계급 하위서민계급 기층계급, 이 8개의 계급으로 나눈다.
즉, 현대 지구촌 문명국가의 초중고대학 교육은 국민들을 초상류계급에서 기층계급까지 8개의 계급으로 나누는 작업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로 하여금 이 8개의 계급이 지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게 만드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바꾸어 말해, 모든 국민들이 서로서로 깊고 깊은 사랑과 우정을 주고받으며, 너무나도 친밀하고 친밀하고 밀접한 자타불이 일심동체의 관계를 구축해, 모든 국민들이 평등하게 풍요롭고 무궁한 행복을 향유하는 세상을 완벽히 깨뜨리는 기초작업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평등하게 풍요롭고 무궁한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과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로 나누는 교육문화, 곧, 선생 1명이 학생 30~40명을 가르치는 교육문화를 시정해야 된다. 어떻게 하냐면, 가정에서 엄마아빠 두 명이 자식 두 명을 교육하듯이, 선생 1명이 학생 1명을 가르쳐야 된다.
그리고 과학기술과 경제력과 군사력만을 확장하고 증강할 능력을 보유한 학생들만 주요 대기업과 주요 국가기관에 입사해 높은 연봉과 높은 사회적 지위 대접을 받게 만드는 국가문화를 일소하고, 모든 직종과 모든 기업과 모든 국가기관에 입사하게 될 모든 학생들이 높은 연봉과 높은 사회적 지위 대접을 받는 국가문화를 창출해야 된다.
그리하여 선생 1명이 학생 1명을 가르쳐서, 선생이 학생의 적성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학생이 그 적성을 살려서, 그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과 국가기관에 입사해,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연봉과 사회적 지위 대접을 받을 수 있게 해야 된다.
초중고대학 학생들의 적성이란 무엇일까? 과연 현재 지구촌 문명국가가 학생들의 모든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화를 담지하고 있을까? 현재 지구촌의 첨단 도시문명 사회가 모든 인류의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화를 담고 있을까?
적성에 맞는 직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직업생활을 하면 기쁨과 즐거움과 희열과 환희 등등의, 행복이라는 감성에 해당되는 감정들이 발현이 되는 직업이다. 현대 도시인들이 오늘날 자신의 직장에서 노동을 할 때 과연 이 행복이라는 감성에 해당되는 감정들인 기쁨과 즐거움과 희열과 환희 등등이 발현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니다” 이다. 우리들은 노동을 할 때, 절대로 기쁘거나 즐겁거나 희열차거나 환희스럽지 않다. 반대로 우리는 노동을 할 때 힘들고 지치고 피로하고 고단하고 고통스럽다. 사무직보다 연구직이 더욱 그렇고, 연구직보다 노무직이 더욱 그렇게, 노무직보다 중노동과 고역노동이 훨씬 더 힘들고 지치고 피로하고 고단하고 고통스럽다. 물론 세상을 바꾸어 모든 인류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들려고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사회운동가들과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이럼 감정들이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이 하는 생활은 노동이 아니고, 사회운동이고 지식전파운동이고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700만 년 동안의 원시시대 인류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연구해 보아야 된다. 1만 년 전 농사를 짓기 시작하기 전의 700만 년 동안의 인류는 인생의 모든 시간을 다양하고 다채로운 놀이삶을 즐기면서 살아왔었다. 놀이삶의 문화가 모두 다 소멸된 현대사회의 인류가 과거 원시시대 700만 년 동안의 인류의 놀이삶 문화를 상상해 보기란 어렵다.
원시시대는 장장 700만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럼 왜 그렇게 놀이삶이 풍요로웠던 원시시대가 700만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 놀이삶이 지극히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지극히도 행복했기 때문에 놀이삶이 700만 년 동안 유지된 것이다. 놀이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진 작에, 100만 년 전이든, 200만 년 전이든, 500만 년 전이든, 690만 년 전이든 그 시점에 놀이삶 문화를 중단하고, 1만 년 전 인류처럼 농사를 짓기 시작해야 했었을 것이다.
원시시대의 놀이삶은 인류의 모든 적성을 담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도 행복했을 것이다. 이로써 장장 700만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유지되었다. 원시시대의 놀이삶과 원시인들의 행복에 관해 연구하고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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