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치는
선생님의 입장단과
쇳가락에서도 발견됩니다.
당시
선생님의 쇳가락은
최고였습니다.
견줄 수 있는 가락은
전경환선생님이 유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쇳가락 맛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기운과 멋은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지에서 노닐고 계셨지요
그런데
쇳가락의 맛과 느낌이 다른 것은
아마
두 분의 성격과 삶에 대한 인생관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고 나름대로 정리를 했습니다.
두 분의 생활에 깊숙히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결론이었던 것 같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황재기 선생님의 쇳가락이 더 앵겨왔습니다.
그래서
쇳가락도 황재기선생님을 흉내내려 노력했지요
군고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지금도
무대용이나 춤 반주용으로는 황재기선생님의 쇳가락맛을 최대한 흉내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풍물과 소고춤에 대한 식견과 예술관이었습니다.
한참
선생님을 찾아뵐 때는
1990년대 초`중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이 꿈꿨던 판을 한 번 멋지게 펼쳐보이시고 싶어하셨습니다.
이 때
사물놀이가 점점 대중적인 호소력을 잃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난타가 등장하기 전이었지요,
풍물굿운동을 하던 입장에서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습니다.
풍물굿의 정신과 내용을 제대로 대중화시킬 수 있는 기회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해야할 것 같다는 판단과 방안과
선생님이 하시고 싶으신 판과 많이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판이 구상하시는대로 펼쳐진다면
물꼬를 돌릴 수 있는 대전환의 판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같은 것 말입니다.
선생님의 소고춤뿐만 아니라
풍물굿과 풍물놀음은
전통적인 미학(멋과 맛)과 기능을 온전히 이은 상태에서
무대화와 공연화라는 시대환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꽃피울 수 있는 더늠과 식견을 확보한 상태였으며
그 엑기스들 마지막 당신의 판 속에서 맘껏 펼쳐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타이밍의 절묘함과
그 내용의 웅혼함과 미래성에 대해
속으로 재삼재사 감탄했던 감회가
이 글을 쓰면서 새롭네요.
그래서
작업을 시작하였지요.
선생님을 충동질 했습니다.
마산에 내려가
한의원을 하는 대학 동아리 친구 박철원장에게
종잣돈도 뜯어냈지요.
그 친구도 쇠를 쳤고 계속 고향 마산에 내려가
쇠를 놓고 있지 않던 굿쟁이였기에
두 말이 필요없었습니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문화운동판의 풍물하는 후배들을 닦달했습니다.
열심히 연습을 해서 판을 선생님과 함께 만들자고
그렇게 한 때 땀을 흘렸지요.
황재기 선생님을 뵙고서
문화운동판의 풍물쟁이들에게 폼(?)을 잡았습니다.
이런 분에게 반드시 배워야 한다.
가까이 서울에 계시지 않느냐.
이제 전문성을 높여야 할 때이다.
이분이 진짜시다.
꼭 배워라
그래서 몇몇 들락거리게 됐고
그 중 몇몇이 학습에 들어가 있었던 때였습니다.
조흥국, 서종대, 하애정 등등
물론 막내따님이신 황은미씨가 조교역할을 열심히 하시던 시절입니다.
어렵게 공간을 내셔서
많지는 않지만
여러 수강생들이 모여들던 시절
그리고 알아서 온 봉천놀이마당의 이상덕선생님, 이무양 등
잘 추스리면 선생님이 원하시는 판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맘껏 했지요.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선생님은 판을 펼쳐보이시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죄스럽고 안타까울 뿐이지요.
원인은 여럿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선생님의 '예술세계'를 맘껏 펼쳐보이게 해줄 쟁이로서의 자질(기량,역량)이
준비팀들에게는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남은 성과물이
황재기소고계 였으나
이마저도 지속력을 갖지 못했네요.
선생님이 가신지도
10여년이 훌쩍 넘어가버린 시점에
다시
선생님의 소고춤과 풍물에 대한 훈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황재기 소고춤을 접해보신분들이나
앞으로 관심을 갖게 되실 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큰 성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첫댓글 굿연구소 박흥주 소장님이 쓰신 글인데, 한살 더먹으니 참으로 진솔하고 맘이 웅웅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스크랩했습니다.
항상 박소장님과 황재기선생님께 죄송할 따름이지만, 올한해도 또 내년에도, 그이후에도 계속 노력해볼까합니다..........
잘봤습니다. 익숙한 성함들이 나오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