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와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오는 걸 보니
삼라만상에 봄 기운이 돌고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입니다.
땅을 보고 분석하기 참 좋은 계절에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공주시로 봄마중 가시면 좋겠습니다.
풍수를 배우다보니 역사속 인물과 조우도 하고 모르던 역사를 알게되어 참으로 좋습니다.
좋은 날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총무 김 은희 올림*
1. 답사일 : 2025년 3월 9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강백년 묘역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한계(閑溪)·청월헌(聽月軒)이다. 강인(姜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운상(姜雲祥), 아버지는 강주(姜籒)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응서(金應瑞)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김씨 김광수(金光燧)의 딸이다. 강백년이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사패지(賜牌地: 나라에서 내려준 땅)인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에 묘소를 마련하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강백년(姜栢年)[1603~1681]은 1627년(인조 5) 정시(庭試: 비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과거시험의 일종)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부교리로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삭직을 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문신중시(일명 문과중시: 10년마다 병년(丙年)에 당하관인 문신에게 보이던 승진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듬해인 1647년(인조 25) 향교 부흥에 관련된 상소를 올렸으며, 1648년 다시 강빈의 신원(伸寃)을 상소하다 청풍군수로 좌천되었다. 1653년(효종 4) 좌승지까지 올랐으며, 충청도관찰사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후 1660년(현종 1)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70년(현종 11)에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冊文: 선왕의 시호를 올릴 때 그 생전의 덕행을 칭송한 글)을 지었고 예조판서·우참찬·판중추부사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편저인 『한계만록(閑溪謾錄)』과 약간의 시문이 들어 있는 『설봉집(雪峯集)』이 있다. 『한계만록』은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수양 공부를 논하고 있다. 『한계만록』에는 경서(經書)와 송대(宋代) 유학자들의 저술들인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주자가례(朱子家禮)』, 『심경(心經)』 등과 조광조(趙光祖) 등의 선인들의 언행에서 해당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이 폭넓게 수록되어 있다.
강백년은 169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일찍이 부친의 뇌물수수 사건을 겪은 후 젊어서부터 몸을 단정히 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는 청빈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 사후인 1695년(숙종 21) 관직 수행 능력이 뛰어나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 덕목을 두루 겸비한 사람에게 주는 청백리에 피선(被選)되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의 정퇴서원(靜退書院),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충청북도 청주시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002년 후손들에 의해 문정사라는 사우가 건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백년 [姜栢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계룡산 신원사 (鷄龍山 新元寺)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651년(의자왕 11)에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믿기 어렵다. 백제 때 지은 절일 가능성이 있지만 보덕이 지은 절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보덕이 지은 절 이름에 신원사는 보이지 않는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절을 중창하였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무기(無寄)가 중건하였다. 조선 후기에 무학(無學)이 중창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고, 1866년(고종 3)에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중수하면서 신원사라 하였으며, 1876년에 보연(普延)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룡산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하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향각(香閣) · 영원전 · 대방(大方) ·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신원사 대웅전은 1978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집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또 향각의 불상은 명성황후가 봉안한 것이라고 전한다.
문화유산으로는 1974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신원사 오층석탑과 부도가 있다. 오층석탑은 여래사리탑(如來舍利塔)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양식을 띠고 있으며, 상층 일부가 없어지고 4층만 남아 있다. 1975년의 보수 공사 때 1층 탑신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구(舍利具)와 함께 개원통보(開元通寶) · 함원평보(咸元平寶) · 황송통보(皇宋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고려시대의 것이다.
이 밖에도 대웅전에서 동쪽 약 50m 거리에는 이 절에서 관리하는 197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계룡산 중악단이 있다. 본래는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 즉 계룡단이었던 것이 조선 말 고종 때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에 하악단(下嶽壇)을 두고 있었으므로 중악단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때는 중사례(中祀禮)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에는 향전(香奠)을 올릴 뿐이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 팔작집으로 조선 말기 건축 중 우수한 것이다. 우리 나라 산악신앙의 제단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중악단의 경계가 되는 영역은 612㎡로 둘레에 축담을 둘렀고 전면에 이중의 내외문(內外門)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룡산 신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윤증 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11-1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이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다.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고, 부인은 안동권씨로 권시(權諰)의 딸이다. 아버지 윤선거가 성혼(成渾)의 외손이므로 가학(家學)이 성리학이었다.
효종(孝宗)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랑·사헌부지평에 잇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었는데, 『주자가례』에 따라 극진히 상을 치렀다.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숙종(肅宗)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 임금이 내린 특별한 유지)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가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1682년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의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예송 논쟁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과의 갈등 대립 및 당파의 분파일 것이다.
예송 사건이 당파와 연계되면서 윤증과 윤선거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뿐 아니라 묘지명 사건과 결부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노론·소론의 분파를 초래하고, 같은 율곡학파 내에서 윤증과 송시열이 결별함으로써 사제간의 의리까지 단절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치적 진로를 달리할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송시열과는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 때, 송시열을 지지하는 쪽이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쪽이 소론이 되었다. 윤증은 아버지가 죽은 지 4년 뒤인 1673년(현종 14)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화도의 일(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병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자기만 진원군을 좇아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尹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되 자기는 윤선거에 대해 잘 모르므로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고 하였다.
윤증이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며 고쳐 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 만 수정할 뿐 내용은 고쳐 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윤증이 송시열의 인격을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함으로써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지게 되었다.
윤증은 53세 이후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을 강조하며 송시열의 명분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는 데서 학풍의 변모를 보였다. 성리학의 기본 틀은 율곡과 함께 하면서도 성리의 사변적 탐구보다는 유학 본래의 자기 수양과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을 지향하며, 이론보다는 실천,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무실학풍을 연 것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윤황과 아버지 윤선거의 슬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4세 때 아버지의 학문적 동지였던 유계가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금산에 자리 잡자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때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시와 문장에도 능하게 되었다. 19세 때 권시의 딸과 혼인하면서 그의 문하에 들어갔고, 23세 때 김집의 문하에, 이듬해에는 송준길(宋浚吉), 26세 때인 1654년에는 조익(趙翼), 29세 때에는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아지자,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우고 학자들과 담론하기도 하며,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해 거상 중에도 강학하였다. 거상이 끝난 뒤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해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종실록(顯宗實錄)』권21 14년 2월 정묘조에 “윤증과 박세채는 모두 위기지학에 뜻을 두고 있으므로 조정 신하로서 문학에 있어 두 신하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이니, 만약 춘방관을 겸대하게 하면 또한 반드시 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윤증의 문학적인 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할아버지 윤황이 우계학파의 조종 성혼의 사위였던 사실에서 볼 때 우계학파의 적통을 이었던 사상적 연관성을 살필 수 있다. 즉 창녕성씨의 가학 전통으로 이어진 우계학풍이 파평윤씨 가학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학통이 손자인 윤증에게 계승되면서 이른바 소론파 유학이 정립되었다. 즉 그는 ‘소론의 영수’로 이른바 ‘소론 성리학’의 중심인물이었으며, 평생을 재야에서 학문 연구와 강학에 힘쓴 순유(醇儒)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증 [尹拯]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4) 숭선군 묘(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산2-1)
숭선군은 인조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이징(李澂)이고,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1646년(인조 24)에 숭선군에 봉해졌으나, 1651년 모친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656년 부수찬 홍우원의 소청으로 풀려나 관직이 복구되었다.
숭선군이 공주 지역에 묻히게 된 이유는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을 왔던 것이 인연이 된 듯하다. 전언에 따르면 원래 측근들이 숭선군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묘역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족의 묘가 도성에서 90리 밖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법제 때문에 안치되지 못했다가 후손들에 의해 1766년(영조 42)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묘는 봉분 좌·우·후의 3면이 ㄷ자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담장 하단부는 화강암 지대석으로 되어 있고, 상단부는 벽돌로 치장하였다. 상돌과 봉분 사이에 비석을 세웠으며, 앞면 중앙에 장명등 1기와 문무인석 2기, 망주석 2기를 시립시켜 놓았다. 봉분의 둘레는 18.6m이고, 높이는 2m이며, 봉분 주위 하단에는 8m의 화강 석재를 정치하여 이를 둘레돌로 돌렸다. 봉분 앞면에 있는 비석은 규형비로 높게 된 방형의 받침돌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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