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독을 물리치는 보시행
Ashin Sopāka (성찬스님)
부처님께서는 보시행은 마음속 세 가지 독(毒心, 不善根;akusalam laː三毒心; 貪瞋癡)의 첫 번째인 탐욕(lobha)을 없애고 무찌르는데 최고의 무기가 바로 보시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마음을 닦는 수행의 실천인 육 바라밀행에서 앞자리에 있는 이유입니다. 중생들은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나"라고 하고, 자신의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여 죽는 순간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하기 때문에 탐욕심과 이기심에 병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심과 탐욕심의 병을 치료하고 녹여 없애는데 가장 좋은 약이 바로 보시입니다. 이 보시는 이기심과 탐욕심을 치료하는 최고의 해독제이자 약입니다.
보시는 바로 공양입니다. 공양은 인색함을 이기고, 탐욕을 이기고, 이기심을 이기게 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이 강하고 억셀수록 공양의 아름다움을 실천하기는 힘이 듭니다. 상응부 경전에서는 "공양을 올리는 보시행은 마치 하나의 전쟁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심에 가득하여 "나"와 "내 것" "나의 가족" 즉 "우리"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양의 보시 공덕행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줄까? 말까? 할까? 말까? 좋은 것은 내가, 못나고, 못생기고, 부족하고, 엉성한 것은 남에게 주고 좋은 것은 내가 갖고... 이러한 마음을 쓰고 헤아리는 그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불자들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쓸모 있는 것을 베풀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심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공양을 올리고 베풀고 나누고자하는 보시행을 하기 위하여서는 자신이 익혀오고 몸에 베인 습(習;v san )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
아주 가는 실로 짠 새 그물이라고 하더라도 참새에게는 걸리는 순간 죽음으로 인도하는 속박이 됩니다. 하지만 힘센 황소에게는 아무런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불행하며, 마음마저 나약한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도 공양을 올리는데 주저하며 아까워합니다. 왕이라고 해도 마음이 굳센 사람은 탐욕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 알고 확신을 하면 자신의 왕국조차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을 수 있습니다.
탐욕심과 이기심만이 공양의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법을 믿지 않고, 죽은 뒤의 세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아는 것이 적은 사람도 공양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가 힘이 듭니다. 만일 불자들이 공양이 얼마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도 이 위대하고 거룩한 실천행을 잡기 위하여 잠시라도 마음을 게을리 하거나 쉬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보시의 가치에 대하여 나만큼 알고 있다면 단 한 끼의 밥도 남들과 나누지 않고는 먹지 않을 것이니라."고(여시어경;如是語經) 하셨습니다.
베풀고 산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베푸는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축복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렵고 힘든 가운데 올바른 수단으로 모은 재물을 가지고 자기의 분수에 따라 베푸는 공양이 으뜸이다"라고(증일 아함경)에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작은 것에서라도 떼어주어라" (법구경) "작은 데서 내준 것이 천 배의 가치가 있다."(상응부)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으로 보듯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더라도 빈곤 속에서 베푸는 공양이 더욱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적고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근근히 생활을 꾸려가더라도 분수에 맞게 생계를 꾸려가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 공양을 올리고자 하는 마음을 낼 때, 그 사람의 공양은 부자들의 천번 만번의 기도나 제사보다 훨씬 뛰어난 가치가 있는 참다운 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야 말로 부처님께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바르게 삶을 살며 바르게 "공덕행(kusalam la)"을 잘 닦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원만하게
공양을 올리는 보시를 하는 공덕행을 닦는 사람은 "주기 전에도, 주면서도, 주고 나서도 기쁜 사람"입니다.(증지부) 이 사람이 이렇게 기쁜 이유는 공양을 올릴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만 해도 공양을 올리기 전에 이미 기쁘고, 다른 이들에게 아쉬움을 충족시겨 주었기 때문에 주는 동안에도 기쁘고, 주고 나서 좋은 일을 하였다는 생각 때문에 기쁘게 됩니다. 공양을 올리는 마음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나 항상 똑 같아야 합니다.
공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혼자서 돈을 모을 줄만 알고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사람"(경집)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이에게 나누고 베푼다는 것은 내가 남아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부족하고 힘들지만 내가 아껴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 나눔에는 처음도, 중간도 끝도 같아야 합니다.
행여나 나누고 베푸는 공양을 "불편한 기분으로 상대방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또는 상대방이 힘과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두려워서 주거나, 전에 받았던 보답으로 주거나,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나에게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주거나, 이렇게 나누고 베풀면 남들이 나를 인자하고 덕이 많다고 칭찬하겠지"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이 공양을 베풀어야 하고 받는 사람이 누군가를 가려서 집착을 해서도 안됩니다.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표시를 내기 위해서 하는 졸렬한 공양은 더욱이 안됩니다. 오직 공양이 욕심과 이기심의 더럽고 악한 때를 벗겨내어 마음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아가는 수행의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공덕 짓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조금씩 쌓아 큰 공덕을 만든다.
마치 방울씩 떨어진 물이 큰 독을 채우듯이."(3번)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거칠고 탐욕스럽고 이기심에 가득한 부정적인 요소를 물리치고 제거하는 이 모든 과정의 첫 걸음이 보시입니다. 곧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거룩한 수행의 첫걸음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베풀고 나누고 하는 공양은 공양을 올리는 그 자체가 보람으로 최상의 공양입니다.
가장 훌륭하고 참다운 공양(을 한 사람)은 주기도 전에, 주면서도, 주고 난 다음도 기쁜 사람입니다. 베풀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이 넉넉하며, 기뻐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공양을 하면서도 상대로 하여금 인사를 차리지 않도록 하고,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고 그저 베풀며, 오로지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는 일에 마냥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하게 완성 된 보시 바라밀을 실천하여 똑 같은 방법으로 다른 지계 바라밀, 인욕 바라밀 등의 다른 바라밀 행을 완성시킬 때 진정한 공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