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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12주년을 맞아 진행된 경축의 한장면. |
조선족 집거중심 -연변조선족 자치주 설립
전국 30개 자치주의 하나인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행정적으로 연길, 룡정 등 5개 시와 3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말부터 조선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일제 시대에는 반일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20일 소련군 과 동북항일련군은 간도 림시정부를 수립했으나 그해 11월 중국 공산당은 간도 림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 1948년 3월 연변전구(专区)를 창립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전구가 철페되고 '연변조선족 자치구'가 설립 됐으며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 자치주'로 변경했다. 당시 자치주는 1개시와 5개 현을 관할, 자치주 소재지는 연길시였다.
1948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의 총인구는 76만 7천여명, 조선족 인구는 총인구의 77%를 차지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총인구는 200여만명, 그중 한족이 58.2%, 조선족이38.94%, 만족이2.47%, 회족이0.29%, 몽골족이 0.07%이다.
조선족의 행정구조를 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외에 전국 119개 자치현 가운데 하나인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고 수십개의 조선족향진이 있다.
1952년 당중앙위문단 팽택민단장으로부터 김백산농장주석이 축기를 수여받았다. |
조선족하면 벼농사를 빼놓을수 없다. 그만큼 조선족들이 동북지역 벼농사에 큰 공헌을 했기때문이다.
건국이래 흑룡강성에서 배육보급한 벼 품종은 182가지에 달하는데 그중 흑룡강성 조선족 육종가들이 직접 배육한 품종이 54가지 (1949년부터 2009년 8월 말 기준), 그 보급률이 70%선에 달하여 흑룡강성 농업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흑룡강성의 보급면적을 감안할 경우 합강벼연구소의 고 강석일연구원이 배육한 합강 계렬품종과 동북농업대학의 최성환교수가 배육한 동농 계렬품종이 앞 4위를 차지한다.
특히 '동농 416'벼 품종은 1998년 '성장 특별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지녔다.
길림성의 경우 건국 이래 279가지 (1949년-2008년) 벼품종을 배육했는데 그중 조선족이 배육한 벼 품종이 약 50가지이다. 그중 연변에서 배육한 벼 품종은 29가지(1949년-2009년 9월)인데 모두 조선족 육종가들이 배육한것이다.
동북지역의 벼조기 개발은 19세기 후기로 벼생산의 선두주자는 조선족으로 기록된다.
1948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의 총인구는 76만 7천여명, 조선족 인구는 총인구의 77%를 차지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총인구는 200여만명, 그중 한족이 58.2%, 조선족이38.94%, 만족이2.47%, 회족이0.29%, 몽골족이 0.07%이다.
조선족의 행정구조를 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외에 전국 119개 자치현 가운데 하나인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고 몇십개의 조선족향진이 있다.
성화집체농장- 새 중국의 첫 집체농장
새중국 농촌창업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조선족향의 성화집체농장은 1951년 2월 22일에 건립됐다. 당시 열혈의 젊은이였던 김백산, 리재근은 36세대의 농가를 이끌고 집체화에 앞장서 피와 땀으로 개간한 벌판에서 천만섬의 벼가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 성공은 중국 전역에 알려져 려명을 맞는 새 중국농촌의 아침을 깨우는 력사적 의미를 지녔다. 집체농장의 규모도 1951년도의 36농가에서 1957년에는 207농가로 늘어났다. 성화집체농장은 특수한 공헌을 인정 받아 1952년 국무원으로부터 '전국 알곡 다수확상'을 수상했으며 큰 붉은 말 네필과 다이야수레 한대를 장려 받았다. 성화촌은 선후 8차례나 성급이상,국가급 영예칭호를 수상했다. 1952년부터 1955년사이 인민일보는 선후 7차례나 성화집체농장의 성공 사례를 보도했으며 성화집체농장의 사적은 당시 소학교 교과서에 편입됐고 기록영화로 제작됐으며 중앙방송과 인민화보에도 널리 보도됐다. 당시 국내 뿐만 아니라 소련, 조선,로무니아,벌가리아,체코 등나라의 방문단도 성화집체농장을 방문했었다.
정률성 강경산 라치환 석산린
해방군 군가 작곡가-정률성
중국의 문화예술에 크게 기여한 조선족들이 적지 않다. 고 정률성, 중국 '록크왕자' 최건, 고 정판룡, 고 김학철, 김봉호 등 수많은 우수한 작곡가, 학자, 작가, 평론가들이 배출됐다.
특히 중조 두나라 군가를 창작한 정률성 동지는 세계음악 사상 한 사람이 두나라의 군가를 창작하는 기적을 창조한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1918년 당시 조선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한 정률성은 1933년 중국에 도착하여 선후로 섬북공학과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고 이듬해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정률성은 연안에 있던 기간 가극 '연안송', '팔로군 행진곡' 등 무수한 정품을 창작해냈다. '팔로군 행진곡'은 해방 전쟁 때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불리다가 1988년 7월 25일 중앙군위의 명령으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됐다.
정률성은 광복후 조선으로 돌아가 '해방 행진곡', '조선인민군 행진곡' , '동해어부', '두만강' 등 30여수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중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후에 조선인민군의 군가로 확정됐다.
생애에 400여편의 예술작품을 창작한 정률성 동지는 1950년 주은래 총리의 요청으로 중국에 돌아와 중국 국적에 가입했다. 1976년 12월 7일 5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올해 9월 새 중국 창립 60주년을 맞아 정률성동 지의 탁월한 공헌을 기리여 중앙 부문은 '새 중국 창건 100명 영웅모범 인물'영예를 수여하고 올해 7월에는 정률성 생애 사적 전시관이 할빈서 개관됐다.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원사 -강경산
세계 항천분야의 걸출한 과학자인 강경산은 우리 민족의 영재로 중국공정원에서 유일한 조선족 원사이다.
강경산(1936년 길림성 룡정시 출생)은 북경사립대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레닌그라드 울리아노브무선전공정학원에서 5년간 류학했다.강경산은 새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인공위성, 운반로켓발사에 참여하여 공간탐사와 위치 확정의 중대한 과제를 해결했다.
1981년 미국 캔사스대학에 류학, 미크로파원격측정 창시자인 모르교수와 함께 연구사업을 진행했다. 1983년 조국의 부름을 받고 결연히 귀국한 강 원사는 '7.5' 계획과 '8.5' 계획기간에 국가연구과제 수십개를 완성했다. 이 기간 강경산은 세계 최초로 자연재해실시간전천후 감시 시스템 제작에 성공했다.
국가 과학기술진보 특등상을 비롯하여 무수한 국제, 국제상을 수상한 강경산 원사에 대해 중국공정원은 ''우리나라 미크로파원격측정기술 창시자의 한사람으로서 미크로파원격측정학과를 창설하고 기초연구를 진행했으며 그 기술체계와 응용연구 체계를 세우는데 뛰여난 기여를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동양인 최초 세계빙속 우승자-라치환
중국빙상운동에 큰 공현을 한 조선족선수들로는 라치환, 리만기, 김창섭 등을 꼽을수 있다.
특히는 1963년 2월 24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 고산경기장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동양인이, 그것도 락후한 나라로 기시받던 중국인이, 더우기는 중국 조선족이 우승과 더불어 세계기록을 쇄신한것이였다.
당시 열린 제56회 세계빙속선수권대회 1500미터 빙속경기에서 중국 조선족 라치환 선수( 당시 21세, 흑룡강성 해륜시 출신 )가 2분 9초 2로 세계기록을 쇄신하고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새 중국 창립후 처음 동계종목에서 세계우승을 따냈던것이다.
1959년 제1회 전국대회 1500미터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낸 라치환선생은 이듬해부터 국가대표팀 선수로 나라를 대표해 54, 55회 세계빙속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며 국제경험을 쌓다가 1963년 제56회 대회에서 1500미터 세계기록 쇄신과 함께 500미터, 5000미터 준우승까지 차지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국가녀자빙속대표팀 감독으로 다년간 사업하다가 2002년 퇴직후 라치환 선생(67세)은 1984년 건국 35주년을 맞아 '가장 걸출한 운동원'으로 선정됐고 1988년에는 '신중국 체육개척자'로, 1994년에는 건국 45주년을 맞아 '45명의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개혁개방 30년 100대 경제인-석산린
급수설비 령역의 ‘대혁명’을 일으켰던 할빈창녕그룹과 석산린 총재(1945년 길림성 동풍현 출생, 할빈공대 졸업)는 조선족기업 발전사에 획기적인 한획을 그엇을 뿐만아니라 중국 민영기업 발전사에도 중대한 기여를 했다.
1990년대 중반 총부를 북경으로 이전,급수설비 공급상으로 부터 기계,전자, 식품,경공업과 건축 등 5대 업종을 포섭하는 대형그룹으로 발돋움했다. 그를 모델로 한 ‘풍진속의 사나이’(风尘硬汉)란 드라마가 방영되여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그가 직,간접으로 양성한 기업가들이 전국 급수설비공급 령역의 90%이상을 차지하기도 해 창녕그룹은 ‘조선족 공업대학’이라고도 불리웠다.
창녕그룹은 1995년 국가공상행정관리총국으로부터 전국 제3대민영기업 칭호를 수여 받았고 그는 11억원 자산으로 2001년 ‘포부스 중국 대륙 100대 부호’ 51위에, 2002년 ‘호윤 중국 대륙 100대 부호’ 68위에, 2003년 ‘호윤 중국 대륙 100대 부호’ 76위에 오르는 등 휘황한 력사를 자랑했다.
특히 석산린은 2008년 개혁개방 30년을 맞아 중국 경제주간에서 평의한 ‘중국 개혁개방 30년100대 경제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창립되여 연변체육운동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체계적인 발전일로를 걷게 되였다.
1955년 8월 1일 연변축구팀을 기초로 길림성 축구팀이 정식으로 설립됐다. 1965년 길림성축구팀(다수 연변적 선수)은 전국 갑급경기 우승을 따내여 조선족 스포츠인들의 자부심을 과시했다.
1994년 중국에서 축구직업경기제도를 실시하며 연변축구구락부가 정식 설립됐다. 90년대 초반 연변팀의 고종훈, 김광주, 리홍군, 리시봉 등 선수는 국가팀의 주력 선수로 뛰기도 하는 영광을 누렸다. 1997년 한국 한양대 최은택교수(별세)가 사령탑을 잡으면서 부진하던 연변팀을 갑A 4강에로 끌어 올렸다.
2000년 연변팀은 갑A에서 강급되고 자금난으로 축구팀을 절강록성팀에 팔아 저조기에 처했으나 젊은 선수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03년 전국운동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2004년에 재차 갑A로 복귀하고 현재는 갑급 시즌을 치르고 있다.
중앙TV, 홍콩TV 및 지역TV에서 세계 50여국에 생방송을 하면서 연변축구는 연변을 전국각지,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대표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연변대학은 1949년 4월에 정식 설립, 당시 동북지역에서 많지 않는 종합대학으로 손꼽혔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손수 창건한 조선족을 위주로 한족과 기타 여러 민족의 각 류형의 고급전문 인재를 육성하는것을 목표로 한 성직속 중점종합민족대학이다.
1958년, 길림성위원회의 비준을 걸쳐 연변대학은 연변대학,연변의학원,연변농학원,연변공학원 등 4개 학원으로 분리됐다. 1959년 연변공학원은 또 다시 연변대학에 합병됐다. 1983년1월과 1988년6월을 선후로 연변사범고등 전과 학교와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이 설립됐다.
1996년 국가교육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연변대학,연변의학원,연변농학원,연변사범 고등 전과학교,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은 합병되여 새로운 연변대학으로 거듭났다. 같은 해 10월, 연변의 첫 중외 합작-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연변대학에 합병되여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으로 됐다.
1999년 12월 '211공정'에 들어 전국 100대 중점대학으로 자리 매김했다. 연변대학은 장덕강, 리덕수, 전철수 등 중앙지도자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조선족 전국 로력모범들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조선족 전국로력모범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전국 로력 모범들을 일일이 적을수 없어 각 분야의 대표적인 모범들만 적는다.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공기계공장 기술원 안태준과 흑룡강성 대경1205시추대 대장 신관은 공업분야의 대표로 꼽힌다.
할빈제1백화상점 판매원 전옥순(녀)은 항상 웃는 얼굴로 고객을 맞이, 상업분야의 '한떨기 꽂'으로 불리운다.
사법분야에서는 백성법관-김계란과 김광진을 들수 있다. 흑룡강성 녕안시 인민법원 동경성 법정의 김계란(녀) 법관은 1000여건 사건을 처리했는데 오판 등 사건이 한건도 없는 4가지 '없다'를 기록했다. 그는 선후로 '전국 10대 우수법관' 등 60여가지 영예 칭호를 지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검찰원 검찰장 김광진은 전국우수인민경찰 등 칭호를 받았다.
료녕성 무순시 김죽화(녀)교장은 시종 교단을 굳건히 지켜가며 교육사업에 혼신을 다해왔다.
흑룡강성유기벼협회회장 홍상표 농민과 중국 최초로 농민중개 사이트를 개설한 심양 조동철농민은 2008년 '전국 100명 농촌우수인재' 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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