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어 삼귀의⟩
붓다~암 사라나~암 갓챠~ 아~ 미~~~~(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마~암 사라나~암 갓챠~ 아~ 미~~~~(불법에 귀의합니다.)
상가~암 사라나~암 갓챠~ 아~ 미~~~~(상가에 귀의합니다.)
6. 삼보(三寶)의 의의(意義)
우루베라 카사파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고, 제자들에게 아그니의 제단을 계류에 버리도록 시키고,
동굴의 구렁이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붓다와 함께 우루베라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하산했다.
하산 도중, 그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그니의 제사에 대해서는 그들 대부분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의문이란, 교조는 어쨌든 간에,
아무리 혹독한 육체 고행을 계속해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기는커녕,
제자들 중에는 병마에 침범되어, 재기할 수 없는 자가 나왔다.
또 엄격한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투쟁적으로 되어 가서, 사람이 변해가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제자들의 수행의 미숙함이라고 해서, 불명(不明)인 채 버려져 간 것이었다.
게다가 또 아그니제사의 역사적 습관이 이런 신앙을 지속시켰다.
₍₁₎신심(信心) ,신앙(信仰)의 형태가,
형식이나 계획된 진행 방식을 동반하여 가면,
내용보다 형식에 사로잡혀 간다.
즉, 마음을 아는 것이 어렵게 되어 간다.
바라문이 오랜 역사 속에 학문적인 형식으로 되고 만 것도,
또 지금의 불교가 가람이나 전통 속에서만 살아 있게 된 것도,
마음의 문제보다도 형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째로는 지식과 지혜가 혼동되어,
그 구분을 잡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환경에 휩쓸려, 눈에 보이는 움직임에 사로잡히는 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괴로운 일보다 편한 일을 하고 싶어하며,
가난하기보다 풍족한 생활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인정(人情)이 차츰 부풀어 사물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면,
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구별을 하기가 어려워져서,
사람의 본성인 신성 불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루베라 카사파의 신앙은 불의 신,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으나,
동시에 신앙의 형태가 습관적 행사화(行事化)되어,
행사를 위한 신앙으로 변해 간 것도 간과할 수 없었다.
많은 제자들이 행사화된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바뀌어
붓다의 수행이 어떠한 것인지 당혹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타성으로부터 깨어나지 않으면,
마음의 진성(眞性)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들 자신이 구원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그니의 신을 버리게 하고, 붓다에게 귀의시킨 것은,
그들에게 있어 엄격한 생활의 대전환이었으나,
그래도 그것이 그들 자신의 구원이라고 보면,
붓다가 취한 조치는 큰 자비였다'라고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루베라 카사파의 행동은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이면 제자들의 체면도 있어 명예를 걸고라도 붓다와 대항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믿고 있던 아그니의 신(神)을 깨끗이 버리고, 붓다에게 귀의했다.
"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면,
설령 어떤 수행자라도, 불행하도록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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