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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리 : ‘ 高句麗 ’ 의 바른 발음. 추모왕(동명성왕)이 세운 왕조.
# 갈마 : ‘ 역사(歷史) ’ 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 이 말이 나온 까닭을 알고 싶은 분은, 본인(잉걸)이 이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인 「 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을 찾아서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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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 『 사통 』 원문에는 ‘ 이적[ 夷狄 ] ’으로 나오는데, ‘ 오랑캐 ’ 라는 뜻이다 – 옮긴이 오항녕 교수 )의 계통과 발흥을 보면, 북쪽의 맥(貊)은 하후씨(夏后氏)의 후손이고, 남쪽의 만(蠻)이라는 종족은 고신씨(高辛氏)가 기르던 개인 반호(槃瓠)의 자손이며, 고구리(高句麗)는 ‘시조 주몽(朱蒙. 「 광개토왕 비문 」 에는 ‘ 추모왕 ’ 으로, 『 삼국사기 』 「 고구려본기 」 에는 ‘ 동명성왕 ’ 으로 나오는 사람 – 인용자 잉걸. 아래 ‘ 인용자 ’ )이 쫓길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었기에 살아날 수 있었다.’ [고 말 – 인용자]하고, 토곡혼(吐谷渾)은 자신의 말이 그 아우 동네의 말과 싸웠기 때문에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 원문 :
“若夷狄本係種落所興, 北貊起自淳維, 南蠻出于槃瓠, 高句麗以鱉橋獲濟, 吐谷渾因馬鬪徒居.”
- 『 사통(史通) 』 「 내편(內篇) 」< 단한(斷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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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북쪽의 ~ 후손이고, ” : 맥(貊)은 중국 동북부 민족을 가리킨다(오항녕 [서기 2014년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주석. 아래 존칭 생략).
2. “ 남쪽의 ~ 자손이며, ” : 전설에는 고신시 때 견융이 침입했는데, 고신씨가 견융의 추장 목을 베어 오면 (자신의) 딸을 (공을 세운 이의)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반호라는 개가 견융 추장의 목을 바쳤고, 그 개는 고신씨의 딸을 데리고 남산 석실에 들어가 6남 6녀를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 후한서 』 와 『 남사(南史) 』 의 「 남만전(南蠻傳) 」 에 있다(오항녕의 주석).
3. “ 토곡혼은 ~ 한다. ” : 요동에 사는 선비족인 ‘ 섭귀(涉歸) ’ 에게는 ‘ 토곡혼(吐谷渾) ’ 과 ‘ 약낙외(若洛廆) ’ 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자 마을을 세웠다. 약낙외는 두 마을의 말이 서로 싸우자 토곡혼을 멀리 쫓아버렸다. (이 사실은) 『 위서(魏書) 』 와 『 송서(宋書) 』 의 「 토곡혼전(吐谷渾傳) 」 에 (실려) 있다(오항녕의 주석).
(토곡혼은 「 토‘욕’혼 」 이라고도 읽는다. 이것은 개인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나라의 이름이기도 하다. 토욕혼 국은 서기 4세기 초 몽골초원에서 - 티베트 고원의 동북쪽에 있는 - 오늘날의 제하[ 諸夏 : 수도 북경 ] 청해[ 靑海 ] 성[ 省 ]으로 내려온 선비족인 ‘ 토욕혼 ’ 이 세운 나라고, 왕족은 선비족이고 피지배층은 뵈[서양이 ‘ 티베트(Tibet) ’ 로 부르는 나라의 정식 국호. 이는 영어권 나라들이 ‘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 ’ 로 부르는 나라의 정식 국호가 ‘ 한국 ’ 인 것과 같은 이치다] 족 계통인 민족이었다.
이 나라는 5호 16국 시대부터 세력을 떨쳤으며, 그 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서기 663년 토번[ 吐蕃 ] 제국[ 뵈 족이 티베트 고원에서 세운 나라 ]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 잉걸의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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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통(史通) :
당(唐)나라의 지식인이자 전직 벼슬아치인 유지기(劉知幾)가 지은, 제하(諸夏 : 수도 북경) 최초의 역사학 이론서. 서기 710년에 세상에 나왔다. 내편(內編) 10권 36편, 외편(外編) 10권 13편, 합계 20권 49편으로 되어 있다.
당나라 이전까지 나온 제하 역사서들의 역사 서술 방식을 고찰하였으며, 역대 사서가 변천하여 온 과정과 그 득실을 비평하였다. 당시 권위를 가진 유교의 경전도 가차 없이 비판하였으며, 당 조정이 정부 주도로 역사서를 펴내는 일과 그 일을 맡은 기구( 예컨대 『 실록 』 을 쓰는 관청 )의 결함을 다루었다.
역사서의 범주, 사관 제도의 역사, 역사서에 담기는 기록의 종류, 역사서의 장단점, 분류사의 서술과 특징, 역사 사실의 왜곡과 오류 등을 날카롭게 살핀 사료 비판에 대한 종합적인 관찰과 서술이다. 이 책에 실린 논의는 역사서와 사학사를 다룬 일부를 빼면, 거의 모두 사료 비판이다.
※ 유지기 :
서기 661년에 태어나 서기 721년에 죽은 ‘ 한족(漢族) ’ 역사가. 자(字)는 ‘ 자현 ’ 이고 팽성(강소성 서주) 사람이다. 당나라 때 사관(史官)을 지냈다. 이세민(시호 당 태종) 때부터 시작된 『 실록(實錄) 』 편찬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경악하여 궁을 나와 『 사통 』 을 썼다.
『 서경 』/『 춘추 』 같은 유가의 경서(經書. 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책)나 『 사기 』/『 한서 』 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비판했으나, 『 사기 』 가 도가(道家)의 시조인 황제(黃帝)를 맨 앞에 내세운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 한서 』 가 외척의 열전보다 이민족의 열전을 앞에 내세운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사관은 유가의 그것과 중화사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 신당서 』 에 그의 열전인 「 유자현전 」 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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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은 인용자(잉걸)의 풀이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중화사상과 유교를 받드는, 당나라의 ‘ 한족 ’ 역사가 유지기가 맥(貊)족과 고구리(高句麗) 사람들과 ‘ 남만인(南蠻人) ’ 으로 불린 화중(華中)/화남(華南) 지방의 원주민들(말레이 인 계통이고, 비엣남[Vietnam]의 다수민족인 비엣[Viet]족과 친연관계다)과 몽골 계통인 선비족/뵈 족 계통인 민족이 세운 나라의 사람들을 “ 오랑캐(원문에는 ‘ 이적[夷狄] ’ ) ”로 부르고 그 역사도 제하 갈마( ‘ 역사 ’ )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나(支那. 나는 수도가 북경인 나라를 비판하고 비난할 때는 ‘ 지나 ’ 라는 이름을 쓰고, 그들을 칭찬하거나 변호하거나 냉정하게 이해할 때에는 ‘ 제하[諸夏] ’ 라는 이름을 쓴다) 공산당이 스물여섯 해 동안 밀고 나가는 동북공정과 서남공정(뵈 족의 갈마와 문화와 정체성을 말살하고, 뵈 족의 땅과 뵈 족을 지나 정부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밀고 나가는 갈마 비틀기[역사 왜곡 작업])과 남방공정(화중/화남 지방의 원주민과 비엣남 사람들의 갈마/문화/땅이 모두 지나의 것이며, 그 어떤 독립성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갈마 비틀기)은 그 정당성을 잃게 된다.
맥과 고구리의 갈마가 제하의 갈마가 아니라면, 당연히 고구리 유민이 세웠고 지배층이 “ 고구리 ” 와 “ 부여 ” 의 계승을 천명했으며, 고구리 백성들(흑수말갈/철리말갈을 뺀, 나머지 “ 말갈 ” 들)이 모여든 나라인 중기(中期) 고리(高麗)[당나라가 붙인 이름은 ‘ 발해 ’ ]의 갈마와, 맥족의 갈마도 제하의 갈마가 아니며, 이들의 갈마는 당연히 배달민족의 갈마가 되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고구리의 전신(前身)인 원(原) 부여와, 고구리의 형제국가인 십제/백제/남부여의 갈마도 제하의 갈마가 아니고.
나아가 그(유지기)가 “ 남만(南蠻) ” 사람, 그러니까 제하 중부와 남부(호북성/호남성/남경/절강성/복건성/강서성[江西省]/광동성/광서성[광서장족자치구])의 원주민도 “ 오랑캐 ” 라고 불러 제하 ‘ 한족 ’ 과 구분했다는 것은,
남(南)중국 원주민(월[越]/오[吳]/초[楚]/백월[百越]/민월[閩越]/동월[東越. 비엣남 식 이름은 ‘ 통비엣 ’ ])들과, 그들과 계통이 비슷한 민족들이 세운 나라로 보이는 서기전 2704년(아사달[고조선]이 세워지기 371년 전이자, 화북지방에 하[夏]나라가 세워지기 7세기 전) ~ 전국시대의 촉(蜀)나라(오늘날의 사천[四川] 분지에 있었던 독립왕국. 전국시대에 진[秦]왕국에게 정복되어서 망했다. 제하의 옛 문헌에는 이들이 “ 오랑캐 ” 로 나온다), 그리고 ‘ 남만 ’ 으로 불렸던 남조(南詔)국과 반랑/어우락/남비엣(한자로는 ‘ 남월[南越] ’ )의 갈마와 문화는 지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지나 정부가 밀고 나가고 다른 ‘ 중화권 ’ (대만/홍콩/마카오)과/ ‘ 화교 ’ 학자들이 묵인/지지하는 “ 장강[長江] 문명과 월/오/초/촉과 화중/화남/운남성/비엣남에 퍼져 살던 월[越]족 계통 민족들의 갈마는 우리 “ 중국 ” 의 고유 문화/문명이고 ‘ 중국 ’ 의 갈마다. ” 는 학설이 과연 옳은지 의문을 품어야 한다.
( 100% ‘ 순혈 ’ 한국인이자, 국적도 한국인 내가 볼 때, 이들을 부를 때 ‘ 월[越] ’ 이라는 한자가 쓰인 사실은, 이들이 오늘날 비엣남의 다수민족인 ‘ 비엣Viet[한자로는 월(越)] ’ 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비엣남판 『 삼국유사 』 인 『 영남척괴열전(嶺南摭怪列傳 ) 』 「 동천왕 전 」 에 “ 은[殷]나라[상나라 – 잉걸]의 왕은 [ 반랑의 왕인 ] 웅왕[ 雄王. 비엣 어로는 ‘훙 브엉’. 한국으로 치면 단군 ]이 [ 상나라에 ]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장차 남방을 순수 [ 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 ]한다는 핑계를 대고 [ 반랑 왕국을 ] 침략하고자 했다. ” 는 구절이 나오는데,
은나라, 그러니까 상[商]나라는 그 남쪽 경계가 오늘날의 호북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만약 상나라 군사가 반랑[ 비엣남에 세워진 고대국가. 한국으로 치면 아사달(고조선) ]을 치려고 한다면, 지나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반랑의 땅이 오늘날의 호남성/강서성까지 뻗어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오늘날의 광동성/광서 장족 자치구[ ‘ 광서성 ’ ]와 비엣남 북부에서 반랑 왕국을 세운 비엣족과 계통이 비슷한 또 다른 월[越]족이 호남성이나 강서성에 살고 있었고, 상나라가 그들과 싸웠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진[秦]나라가 점점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월족은 밀려서 오늘날의 광동성이나 광서성이나 비엣남 북부나 라오스로 달아났기 때문에,
월족이 간직하던 갈마[월족과 상나라가 싸운 갈마]가 비엣남에 전해져, 중세 말기에 비엣족이 자신들의 갈마와 전승을 정리할 때 그 갈마가 『 영남척괴열전 』 에 들어가게 된 건 아닌지.
‘ 땅 ’ 은 움직이지 않아도 ‘ 기억 ’ 을 지닌 ‘ 사람 ’ , 그러니까 민족이나 인종은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지나 정부가 남중국(화중지방/운남성/화남지방)의 원주민 분포를 그린 지도를 인쇄할 때, 예전에는 ‘ 월(越) ’ 이라는 한자를 그대로 썼는데(비엣남도 한자로는 월남[ 越南 ]이다),
요즘[서기 2016년 현재] 나오는 지나의 갈마 지도에는 그 한자 대신 뜻과 발음은 비슷하지만 모양은 완전히 다른 ‘ 월(粤) ’ 이라는 한자를 쓰기 때문이다.
[내 추측이지만] 지나 정부는 월남의 월(越)자와 비슷한 越자 대신 월(粤)자를 씀으로써, 지도를 본 사람들이 남중국 원주민의 갈마와 문화가 고대 비엣남의 그것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문을 품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다.)
끝으로 유지기가 토곡혼(토욕혼)을 “ 오랑캐 ” 로 부른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다.
그가 토곡혼이라는 선비족을 “ 오랑캐 ” 로 부른 사실 -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를 “ 오랑캐 ” 의 나라라고 부른 사실 - 은 선비족의 갈마와 토곡혼의 백성인 ‘ 뵈 ’ 족 계통 민족인 청해성 원주민의 역사는 결코 지나의 갈마가 될 수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선비족의 갈마는 당연히 한국인이나 몽골인의 갈마로 집어넣어야 할 것이고, 피지배층이나 백성을 갈마 연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토곡혼의 역사는 뵈 족의 갈마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오늘날 지나 정부와 지나 공산당은 선비족의 갈마를 “ 우리 ‘ 중화인민공화국 ’ 소수민족의 역사 ” 로 간주하고, 뵈(티베트)족의 갈마를 지나의 갈마로 집어넣으려는 ‘ 서남공정 ’ ( ‘ 중원 ’ 의 ‘ 서남쪽 ’ 인 티베트 고원과 운남 고원의 역사를 다루는 공정이라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을 밀고 나가는데, 유지기의 말대로라면 이는 억지고 거짓말을 참말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나아가 뵈 족의 갈마는 오늘날의 티베트 고원 안에서만 펼쳐진 게 아니라 티베트 고원 바로 동북쪽인 청해성에서도 펼쳐졌으며, 이는 배달민족의 갈마가 한반도 안에서만 펼쳐진 게 아니라 ‘ 만주 ’ /연해주/몽골초원 동부와 동남부/왜(倭)열도 서부/지나 동쪽과 남쪽 바닷가/동남아시아 바닷가/남아시아 바닷가에서도 펼쳐진 사실과 비슷하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여기까지 쓰면, 여러분은 “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지기 한 사람의 견해일 뿐이고, 당 조정은 생각이 다르지 않았어? ” 하고 물어보실 것이다. 나는 ‘ 그렇지 않다. 당나라 지식인들과 당 조정은 유지기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 고 대답하리라. 증거가 있다.
내가 『 신당서 』 권 132 「 유자현전 」 (유지기의 자[字]가 ‘ 자현 ’ 이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유지기의 『 사통 』 을 읽은 당나라 사람인 서견(徐堅)은 “ 역사가라면 마땅히 이 책을 자리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한다. ” 고 평가했고, 유지기가 죽은 뒤 당 황제는 “ 하남[河南]에 있는 그의 집에서 『 사통 』 을 베껴 오게 하여, 그것을 읽고는 훌륭하다고 평가했 ” 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지기는 죽은 뒤 ‘ 공부 상서 ’ 라는 벼슬을 받았다. 만약 당 조정이나 당나라 사람들이 유지기와 생각이 달랐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따라서, 나는 그 때문에라도 “ 맥 ” / “ 고구리 ” / “ 남만 ” / “ 토곡혼 ” /뵈 족/선비[鮮卑]인의 갈마를 ‘ 중국 갈마 ’ 로 우기는 지나 정부와 지나 학자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실제로는 ‘ 100% 중화 왕조 ’ 도 아닌] 당나라를 자신들의 나라로 여기는데, 그렇다면 당나라 지배층의 견해도 그대로 이어받아 ‘ 한족 ’ 이 아닌 민족들이 세운 나라는 그냥 ‘ 다른 나라 ’ 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이른바 ‘ 다(多)민족 통일국가론 ’ 이 아니라, 옛 기록과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유물과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옛 사람의 뼈/여러 민족의 문화를 통해, 중화사상과 ‘한족’ 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아시아의 온전한 갈마를 연구하고, 각 나라와 겨레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