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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44. [역경의 열매] 김남주 (1-17) 고아원 소년, 오직 주님 은혜로 신학대 총장 되다
40여년 매일 새벽 2시30분에 기상 무릎 꿇고 묵상·기도하며 하루 시작
김남주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총장이 춥고 배고픈 고아원 시절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해 살아온 지난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참 많이 울었다. 배가 고파서 울었고 너무 추워서 울었다. 외로워서 서러워서 보고파서 너무너무 힘들어서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
지난해 12월 나는 학교법인 성서침례학원 운영이사회와 법인이사회에서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제4대 총장에 선출됐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총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직책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거나 무슨 사욕을 부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당시 운영이사회는 이사들 각자가 무작위로 총장 후보 이름을 써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나를 포함해 4명이 후보로 올랐는데 내가 최다 득표자였다. 하지만 어느 한 분도 나보다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탁월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사회는 여러 차례 청문 등 투표를 거쳐 최종적으로 나를 총장에 선출했다.
성서침례대학원대는 2002년 교육부 인가를 얻고 2003년 3월 국내 유일의 강해설교 전문대학원대학교로 개강했다. 목회학석사, 성서학 전공 문학석사 및 기독교 교육학 석사, 신학석사, 그리고 목회학박사와 신학박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해돈 로빈슨, 앤디 스탠리, 찰스 스윈돌, 토니 에반스 등 탁월한 강해 설교자를 길러낸 미국 달라스신학대학원 출신의 교수들과 트리니티, 에버딘 등 국내외 유수의 복음적 신학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한 교수들이 팀을 이뤄 지성과 영성, 인품을 갖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성서침례대학원대를 운영하는 성서침례교회는 미국 최대 교단인 남침례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확산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 남침례교회에까지 미치자 이를 염려하던 보수성향의 목회자들이 G B 빅(Vick) 박사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1950년 5월24일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120여명의 목사들이 철저히 성경중심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들을 세워 세계선교에 박차를 가하자는 각오로 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를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 4개 신학대학과 4000여 교회가 있고 세계적으로도 1만 2000여 교회가 소속돼 있다. 전 세계 90여국에 850여명의 선교사도 나가 있다.
운영이사회와 법인 이사회를 거쳐 총장으로 선출된 다음날 기도하다가 눈물이 쏟아져 어린 시절 10년을 보낸 고아원에 다녀왔다. 고아원에서 굶주리며 주먹질로 하루하루를 보낼 때도, 주님의 은혜로 거듭나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구두닦이, 가게 점원, 양복점 보이, 세탁소 종업원, 문패 외무사원, 공사판 들통지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고학을 할 때도 내가 후일 총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적으로 자격도,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탁월한 리더십도 없는 사람이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40여년 동안 매일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무릎 꿇고 은혜의 보좌 앞에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는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해 왔다. 부족한 사람이 ‘고아원에서 총장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남주 (1) 고아원 소년, 오직 주님 은혜로 신학대 총장 되다
* [역경의 열매] 김남주 (2) 가산 탕진 아버지는 머슴살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 [역경의 열매] 김남주 (3) 고아원 시절의 추억 '강냉이죽·구더기 김치…'
* [역경의 열매] 김남주 (4) 고아원 악동들, 전교생 3000명을 주먹으로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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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9년 전남 장흥출생. 성서침례신학교, 부산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루이지애나 침례신학대 명예신학박사. 성서침례대학원대 교목실장. 성서침례전국친교회 회장 역임. 현 대전성서침례교회 담임, 성서침례대학원대 총장.
***[역경의 열매] 김남주 (2) 가산 탕진 아버지는 머슴살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대목수 할아버지 유산 날려버린 부친… 온 가족, 뜻밖의 역경에 뿔뿔이 흩어져
김남주 총장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전남 장흥군 관산면 닥실마을. 관산면은 서울의 정남쪽을 뜻하는 정남진이 있는 곳으로 지금은 읍으로 승격했다.내 고향은 한반도 남단의 ‘정남진’으로 불리는 전남 장흥군 관산면의 지정2구 닥실마을이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 천년학을 촬영한 천관산이 멀지 않은 곳으로 지금은 면에서 읍으로 승격했다.
나는 1949년 11월 3일 아버지 김동성, 어머니 이채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이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대목수여서 면소재지 학교건물도 건축하는 등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와 아버지 형제가 오순도순 살라고 다섯 칸 겹집을 나란히 짓고 논과 밭을 넉넉하게 마련해준 뒤 황소도 한 마리씩 줬다.
아버지는 국악을 좋아한 분이었다. 남도 소리에 능한 소리꾼이었고 농악 때는 장구를 치며 흥을 돋웠다. 그러다 면소재지에 드나들면서 면장이나 유지들과 어울려 소리를 하게 됐고 큰아버지와 함께 노름에 빠져들었다. 가세도 점차 기울어갔다. 아버지는 어른들의 정혼으로 닥실에서 6㎞ 정도 떨어진 삼산(산동)이라는 곳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 신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2년을 안 볼 정도로 멀리해서 나는 한참을 지나서야 태어났다.
내가 네 살 때쯤 예쁜 여동생이 태어났다. 이름을 은자라 했다. 백일쯤 됐을 때 소스라치게 울다가 벌벌 떨더니 숨을 못 쉬고 죽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물을 입에 머금고 조그만 채를 들고 얼굴에다 뿜어댔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한밤중에 급히 뒷산 넘어 산쟁이라는 동네에 어떤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 할아버지가 이런저런 방법을 썼지만 동생은 결국 죽고 말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놀라 몰려든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로 집은 울음바다였다. 어린 나이에 처음 죽음을 목격한 나는 무섭기만 했다. 어른들은 동생의 시신에 흰옷을 입히더니 작은 옹기 두개와 곡괭이, 삽을 준비하고 서산봉 골짜기로 갔다. 어린 나도 큰아버지의 등에 업혀 같이 갔다. 땅을 파더니 시신을 두 옹기 속에 맞춰 넣고 돌을 쌓아올려 돌무덤을 만들었다. 당시 남도에서는 어린아이가 죽으면 돌무덤을 만들던 관습이 있었다. 모두 울기 시작했다. 나도 울었다. ‘저게 무엇인가.’ ‘왜 저렇게 하는가.’ 집에 돌아오니 온 식구가 울어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조금 남은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메뚜기 개구리 송사리 올챙이 등을 잡으면서 재미있게 지내다 또래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집에서 4㎞ 정도 거리에 있는 관산초등학교였다. 여선생님이 담임이었다. 입학식 때 면장, 지서장, 장학관, 교장, 선생님들이 앞에 서 있었는데 처음 본 지서장의 금테 두른 경찰 모자와 계급장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서장이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어른이 되면 지서장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골 동네에서만 뛰놀다가 면소재지의 학교에 오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러나 면 위에 군이 있고 도가 있고 국가가 있으며 지구가 있고 각 나라와 세계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었지만 공부에는 재미가 붙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회 때면 달리기는 꼭 1등을 해서 상품으로 공책 3권을 타오곤 했다.
3학년에 올라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모님이 갑자기 짐을 싸라고 했다. 아버지의 노름 빚 때문에 집까지 날리고 살림이 파탄 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친정 동네로 가고 아버지는 멀리 남의 집 머슴살이를 떠나야 했다. 나는 낯선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날마다 고향 쪽 산을 바라보며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3) 고아원 시절의 추억 ‘강냉이죽·구더기 김치…’
창 밖을 보면 엄마 보고 싶어 눈물만… 열악한 환경에 이질 걸려 죽을 고비도
김남주 총장이 어린시절 10여년 동안 생활했던 고아원의 옛 건물 모습.고아원생은 전체가 120명 정도였다. 선후배 관계는 옛날 군대의 계급처럼 엄했다. 가끔 어린 핏덩이를 이불에 싸서 고아원 앞에 두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벽 5시면 종소리가 울려 일제히 기상을 했다. 옛날 건물이라 겨울이면 왕겨를 태우는 풍로로 온돌을 덥혔는데 새벽이면 식어버려 추위에 떨었다. 이불이라곤 6명에 미군 담요 1장씩 나눠준 게 전부였다. 처음엔 나란히 덮고 누워도 한밤중에 누가 잡아당겨 가거나 형들이 둘둘 감아버리면 그나마도 덮지 못했다. 기상하면 여기저기서 밤새 오줌을 싸버린 아이들로 인해 지린내가 났고 그 아이들은 실컷 두들겨 맞아야 했다.
기상 후 모포 정리를 하고 강당에 모여 원장님이나 사무장님의 인도로 새벽예배를 드렸다. 식사를 준비하는 보모들과 환자들을 제외한 모든 원생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대부분 졸았고 형식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성경과 찬송, 기도를 익히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줄줄 외우게 됐다. 예배가 끝나면 각 구역별로 마당 화장실 우물 화단 마루 강당 그리고 식당을 청소했다.
아이들은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나거나 머리에 기계독이 들고 부스럼이 생겨 진물이 나곤 했다. 옷 속에 이들이 우글거려 양 손톱으로 죽이면 피가 손톱 사이에 맺혔다. 그 속에 서캐가 깔려 있어 이빨로 씹어대는 게 일상이었다. 감기로 흐르는 콧물을 연신 닦아내 옷소매가 얼음처럼 단단해져 버린 광경도 눈에 선하다.
고아원생 가운데 유아들을 빼놓고는 대부분 초·중·고교에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교는 무료였고 중·고교는 조금씩 학비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닌 강진 중앙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약 3000명이라고 했다. 학교에 갈 때는 책보를 등에 메고 두 줄로 열을 지어 약 2㎞를 걸어 다녔다. 그럴 때면 고아원생이라고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공부시간에 창밖을 보면 엄마가 보고 싶어 자꾸만 눈물이 났다. 쉬는 시간에는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학생들 사이로 가서 고무줄을 끊고 약을 올리는 일로 재미를 삼았다. 교과서는 고아원 선배들에게 물려받아 사용했는데 철 지난 달력 같은 것으로 표지를 씌워서 다시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나는 4학년이 됐는데도 키가 크지 않고 체격이 아주 작았다. 하루는 입맛이 없더니 자꾸만 설사를 했다. 설사가 그치자 곱똥이 나오더니 혈변까지 나왔다. 당시 날마다 먹던 강냉이 죽과 간장, 김치에는 구더기가 우글거렸다. 배가 고프니 썩은 내가 나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열악한 위생 환경에 살다 보니 이질에 걸린 것이었다. 밥은 말할 것도 없고 물도 넘어가지 않았다.
한 달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살은 점점 빠졌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비슷한 증상의 아이들 몇몇과 함께 작은 방에 격리됐다. 아무런 힘이 없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질, 탈수,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채 모든 것이 무너져 갔다. 옆의 아이들은 한 명씩 숨을 거둬 공동묘지로 갔다. 내 차례도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었지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다 숨이 멈추면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실려 3㎞ 떨어진 공동묘지에 묻힐 것이었다.
보모 한 분이 사무장님께 옥수숫대 삶은 물을 한 번 먹여 보자고 했다. 당시 일부 주택은 옥수숫대를 엮어서 울타리로 해 놓았는데, 이걸 뜯어다가 씻어 뜨거운 물에 넣고 우려냈다. 맛은 요즘 녹차와 비슷했다. 몇 번이나 넘기지 못하고 토했지만 입을 벌려 잡고 숟가락으로 억지로 떠먹였다. ‘어차피 죽는데…’ 하면서.
***[역경의 열매] 김남주 (4) 고아원 악동들, 전교생 3000명을 주먹으로 평정
초교 때 이질서 기적적으로 치유 후 원생들과 몰려다니며 놀고 싸움질만
김남주 총장이 고아원 시절 다닌 강진 중앙초등학교의 옛 모습. 당시 학생 수만 약 3000명이었다.옥수숫대 삶은 물을 먹인 지 사흘 후쯤이었다. 죽은 듯 누워있던 내가 긴 숨을 쉬더니 눈을 뜨고 살아났다는 기색을 보였다.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모는 더욱 정성을 다해 죽을 쑤고 국물에 밥을 말아 먹였다. 고마운 그 보모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 궁금하다.
나는 건강을 되찾아 원생으로 정상 생활을 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장차 목사로 영혼구령에 쓰시려 계획하시고 다시 살려주신 것이라 믿는다.
강진 중앙초등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 3부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했는데 고아원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놀고 싸우는 것만 좋아했다. 5학년 때, 우리는 본관 건물 아래의 환기통 입구를 돌로 부수고 들어가 연필 지우개 칼 동전 등을 모으는 데 재미를 붙였다. 본관은 일본사람들이 지은 오래된 목조건물로 규모가 컸다. 나무로 된 교실바닥 아래에 들어가 한쪽 구석에서부터 이곳저곳 주워가노라면 가끔 횡재하는 경우도 있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하루는 환기통 입구 쪽 환한 곳에서 주운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누군가 “간첩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고, 교무실에까지 보고 돼 우리는 간첩으로 몰리게 됐다. 일단 어두운 쪽으로 도망해 대책을 논의했다. 교장실과 교무실 쪽으로 가서 들어보니 경찰까지 출동해 있었다. 메가폰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자수하라! 자수하라!”
졸지에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나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교무실 쪽으로 가서 크게 외쳤다. “그러면 다 불 질러 버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죽어버리겠다.” 선생님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소방서에 전화해 비상을 걸었다. 한동안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저들은 우리가 간첩이라 믿었고 전교생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간첩이 아니다. 이 학교 학생이다. 경찰들과 소방관들이 한 시간 내에 순순히 철수하면 확인한 후 불을 안 지르겠다. 그러나 한 시간 내 철수하지 않고 딴짓을 하면 바로 불을 질러버리겠다.”
소란스럽던 학교가 해가 질 무렵 조용해져 환기통 사이로 확인을 해보니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 명을 내보내 다 철수했는지 확인한 뒤 휘파람을 불게 했다. 그 친구는 나가서 휘파람으로 노래를 하고 다녔다. 간첩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고학년이 되면서 고아원생 친구 길용이와 태종이 등이 팀이 되어 3000명 학생 전체를 주먹으로 평정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덩치가 크고 황소처럼 생긴 용수가 길용이에게 도전해 왔다. 용수가 자꾸 왕초라기에 내가 우리 고아원을 뭐로 보고 그러느냐며 길용이에게 말해 대결을 주선했다.
방과 후 강진읍 장터 옆 소 매매시장 공터에 모였다. 양쪽에서 각각 3명씩 나왔지만 대결은 대표로 두 사람만 하기로 했다. 한 사람이 포기할 때까지였다. 덩치가 있는 용수는 잡으려 하고 마른 체격인 길용이는 피하면서 한 번씩 쳤다. 당시 우리 원생들은 고아원 선배들로부터 매일 태권도를 배우고 실전에 사용하던 터였다. 용수가 몇 대 정타를 맞더니 무릎을 굻었다. “와∼.” 우리는 신이 났다.
고아에다 공부도 못하는 데 대한 보상심리로 주먹을 쓰며 영웅이 되고자 했던 것 같다. 우리 원생들은 같은 반 학생들이 싸온 도시락을 보면서 솜사탕처럼 살살 녹을 것 같은 흰 쌀밥 한 숟가락만 먹어봤으면 하고 부러워하곤 했다.
어느덧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 됐다. 차준태 교장 선생님의 졸업식 훈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졸업생 여러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5) 중학 시절도 ‘원생’ 꼬리표… 성적 60명 중 58등
어머니, 외가동네서 밭일 해주며 생활… 아버지와 합류 후 산자락에 토담집을
김남주 총장은 1980년대 중반 대전에서 목회를 할 때 어린 시절 지냈던 고아원을 다시 찾아갔다. 뒷줄 정장 차림의 남자가 김 총장이다.중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다닌 강진중학교는 강진농고와 같은 교정에 있었는데, 넓은 동산에 잘 가꿔진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탱자나무 울타리, 벚꽃나무, 시누대 등 각종 수목들이 가득 차 있었다. 논농사 실습장, 클로렐라 실험실, 버섯 재배실, 젖소 사육장, 뽕나무 재배장 등도 있어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 원생들은 어디를 가나 ‘고아원 아이들(새끼들)’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사고도 많이 쳐서 고아원 사무장님은 늘 골치를 앓았다. 나도 학교 공부는 제쳐놓고 구두닦이와 극장보이를 하는 원생들과 어울렸다. 시비와 싸움에 맛이 든 나는 군인 탄띠를 구해 가슴에 차고 다녔다. 그럼 싸우다 가슴골을 맞아도 괜찮았다. 작은 군인벨트도 구해 31개의 구멍을 내고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배지를 뿔이 되도록 달아 싸움 도구로 썼다. 허리 양쪽에는 송곳과 잭나이프도 찼다. 가죽장갑을 잘라 손가락을 내고 해골반지까지 구해 ‘한 놈 걸리기만 해봐라’ 하면서 시비를 걸러 돌아다녔다
학교에 가기 싫으면 구두닦이 통을 메고 읍내를 돌았다. 친구가 “구두 딱∼” 하면 나는 “딱딱∼” 하면서 길 가던 어른들을 가로막고 구두를 닦으라고 했다. “이놈들이∼” 하면 나는 “뭐? 이놈?” 하면서 대들고 한방을 치고 도망가곤 했다. 한번은 다른 고아원에서 옮겨 온 원생과 시비가 붙었다. 각목에 맞아 쓰러진 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그런데 양쪽 엉덩이가 부어오르고 위아래 앞니 5개가 부러지고 없었다. 돈이 없어 치과에 가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신학생 때까지 이빨이 5개나 빠진 채로 그냥 지냈다.
당시 한 학급 학생수가 60명이었는데 나는 58등을 했다. 그래도 내 뒤에 두 명이나 있다는 것에 위로를 삼고는 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IQ검사에서도 나는 96이 나왔다. 공부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키도 전교에서 제일 작았다. 전교생 체조나 교장선생님 훈시 등으로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할 때면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김남주, 기준∼”이라고 했고 나는 오른팔을 들어 “기준”을 외쳤다. 반에서 자리도 제일 앞 1번 책상이었다. 뒤에서 떠들 때 인상을 쓴 채 돌아보며 “조용히 안 해!”라고 하면 다들 조용해졌다. 키는 작아도 힘이 약하진 않았다. 고아원에서 형들에게 배우고 서로 가르쳐 주면서 태권도 복싱 유도 평행봉 배구 정권지르기 등을 많이 연습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고아원생들은 아침부터 농장에 가서 일을 했다. 학생들도 방과 후에 농장에 가서 일하곤 했는데, 어린 나이에 불평을 하면서도 다들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방학 때면 나는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다녀올 수 있었다. 친정 동네로 간 어머니는 남의 초가집 한 구석 한 평 정도의 작은 방을 얻어 살았다. 집 한 칸, 땅 한 평 없던 어머니는 남의 밭에서 고구마를 캐주고 얻어온 것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외갓집 동네였으나 다들 넉넉하지 못해 그냥 불쌍히 여길 뿐, 도와주지는 못했다.
몇 년 후 머슴살이 갔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합류했다. 동네 어르신에게 산자락의 쓸모없는 땅을 빌려 흙담집을 지었다. 냇가에서 자갈을 주워오고 볏짚과 흙을 이겨서 두껍게 담을 올린 뒤 그 위에 나뭇가지들을 올려 짚으로 덮었다. 그곳은 동네 사람들이 죽으면 메고 가는 상여를 보관하는, 흔히 말하는 귀신 나오는 곳이었다. 해변이라 버린 굴 껍질도 쌓아 놓아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계속 고아원에서 생활했다. 방학 때마다 집에 가면 아버지가 정말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조금씩 거들었다. 그러면서 동생들도 생기고 커나갔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6) 강진농고 중퇴 후 부모님 찾아 시골 흙담집으로
주님 영접하려 철야기도 해봤지만 허사… 고아원서 사고친 후 무작정 걸어 도망도
김남주 총장이 다녔던 강진농고 학생들의 1960년대 실습 모습. 강진농고에선 벼농사와 접붙이기, 버섯 재배, 젖소 사육 등 다양한 실습을 했다.중학교를 졸업하고 강진농고에 진학했다. 축산과를 지망했지만 성적이 안돼 지원자가 거의 없는 임과로 갔다. 당시 농고에는 농과, 축산과, 임과 등 세 과만 있었다. 평판측량 기술부터 감나무 접붙이기, 버섯 재배, 농기구 개량 등을 배웠다. 눈 오는 날에는 산에 가서 토끼몰이도 하며 나름 재미있게 지냈다. 가끔 사고도 터졌다. 강진농고에는 당시 무지개클럽, 성자클럽, 혹클럽 같은 불량서클들이 있었는데 종종 패싸움을 벌여 경찰이 출동하곤 했다.
고아원에서는 때로 부흥회에 참여토록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강진읍교회까지 열을 지어 갔다. 김병두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저런 분처럼 한번 해보았으면…’ 하기도 했다. 밤에 산 기도도 하러 다녔다. 강진 만덕산 기도원에도 가고 강진읍 북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붙들고 소리소리 지르며 철야기도도 했다. 강진읍침례교회에서 열린 오관석 목사님 부흥회에도 갔었는데 방언이며 손글씨며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주위에서 ‘윽∼윽∼’하며 방언을 하길래 나도 방언 달라며 ‘엣살 라라랏’을 계속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상화가 나타나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채 망나니짓만 계속했다. 학교 간답시고 나와서 길가에 구덩이를 파놓고 시궁창 물을 넣은 뒤 나무 잔가지와 풀로 살짝 덮어두곤 했다. 지켜보다가 누군가 빠지면 깔깔대고 나한테 다가오면 시비를 걸어 싸웠다.
싸움만 좋아하고 공부가 정말 재미없던 시절, 가장 싫어하는 수학시간에 옆 친구와 욕을 써서 쪽지를 주고받는데 수학선생이 던진 분필이 날아왔다. 죄송하다고 해야 할 내가 도리어 일어나 수학선생님게 “이 새끼 너 이리 나와! 오늘 너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수학선생은 당황해서 수업을 중단하고 교무실로 오라는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나는 오히려 “교무실에 내가 왜 가냐”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일로 학교에 소동이 났고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둠과 동시에 고아원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켜 평호라는 친구와 함께 무작정 도망을 갔다. 성전면 방향으로 가다가다 지쳐 움막에서 잠을 자고는 영암을 지나 목포까지 사흘 길을 걸어갔다. 유달산에서 밤을 보냈는데 굶은 지 나흘째였다. 힘이 없어 동네로 내려와 우물물을 먹는데 그마저도 짭짜름했다. 시내로 와 역전 주변을 배회했다. 중국집에 찾아가 보이로 써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물만 얻어먹고 강진으로 돌아가려고 철길 따라 영암 방향으로 향했다.
마침 길가에 널어놓은 보리쌀이 있어 손으로 움켜쥐고 허급지급 먹었다. 그리곤 동네 우물로 가서 물을 들이켰더니 배속에서 불어나면서 터질듯해 죽을 뻔했다. 물어물어 성전면으로 다시 와 신작로길 재를 넘어가는데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 한 분이 손수레를 힙겹게 끌고 가고 있어 뒤에서 힘껏 밀어드렸다. 동네 가까이 오자 아주머니가 물었다. “총각들, 어디까지 가는가?” “네, 저희들 강진까지 갑니다.” “아이구, 어두워 오는데, 이 산을 넘어갈 수가 없다오.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내일 가소” “아 네, 감사합니다.”
작은 동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초가집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식구들이 반가이 맞이했다. 수제비를 끓여줘 세 그릇씩 먹어치웠다. 모기장까지 쳐줘서 우리는 그냥 녹아떨어져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침식사까지 챙겨줬다. 떠나면서 감사하다는 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수십년 후 목사가 된 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봤지만 이사를 갔다고 했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결국 고아원으로 돌아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나와 아버지가 지은 초라한 흙담집으로 가야 했다. 고아원과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7) 구주 영접 1966년 8월 15일… 새 삶이 열리다
쇠꼴 먹이던 아가씨의 천국 이야기에 천관산 중턱 바위서 무릎꿇고 죄 고백
1960년대 후반 부산 부곡동 성서침례신학교 교문 모습. 김남주 총장은 서울 불광동 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했다.짧은 시간에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린 여동생의 죽음과 돌무덤, 증조할머니의 죽음과 흙무덤, 인간의 출생과 삶 그리고 죽음, 그런 시간과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때마침 우리 동네 이두순이라는 아가씨가 서울 불광동 성서침례교회에서 선교사가 하는 성경학교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녀가 천관산 중턱에서 소를 먹이다가 내게 물었다.
“남주야, 너 고아원에서 교회 다녔지?” “네.” “너, 오늘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니?” “아니요. 싸움만 했는데….” “너 천국도 못 가는 교회는 왜 다니니?”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성경 로마서를 펴더니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내 모든 죄와 형벌, 심판, 저주를 처리하신 것이고, 부활하심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의롭다 함과 산 소망을 내게 주시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 새 생명을 얻고 새 인생을 살며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전해줬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되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며 천국의 시민권을 갖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게 된다고 성경을 펴 읽도록 했다. 그리고 영접 기도를 했다. 나는 천관산 중턱 넓은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시며 돌아가시고 영원히 의롭다 함과 새 생명 그리고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해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하고 황홀했다. 내 모든 절망이 순간 사라지고 소망이 생기며 복음으로 날 만나주신 주 예수님을 찬양했다.
‘놀라운, 놀라운 날이었네!/ 영원히 못 잊을 날,/ 어둠에 길 잃고 헤매던 날 주님 찾아주셨네.’
그날이 1966년 8월 15일, 죄와 사망과 형벌과 심판과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날! 어둠의 운명이 하늘 빛 광명으로 전격 바뀐, 새 삶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해가 저물어 산그림자가 내려오고 남도의 돌무덤을 지나는데도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기와집 부자들과 그들의 논밭을 보면서도 예전과 달리 전혀 부럽지 않았다. 신기했다.
나는 곧 삼산성서침례교회에서 행해지는 침례식에 순종했다. 이로써 내 모든 죄와 형벌과 심판과 저주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내버린 바 됐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게 됐다.
나도 모르게 3일간 길을 걸으며 주님께 묻는 기도가 나왔다. ‘주님, 제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 가기를 원하십니까?’ 마침내 세미한 음성이 내 심령에 들려왔다. ‘이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라!’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네, 주님!” 내 영혼에 생기가 돌았다.
서울 불광동 성경학교를 소개받아 체계적으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잭 배스킨 선교사와 김우생 목사, 라스터 선교사, 패트릭 선교사 등이 가르치고 훈련하는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40여명의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함께 공부했다. 학교에선 오전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무조건 구령하러 나가도록 독려했다.
하루는 불광동 언덕 위에 있는 배스킨 선교사 집에 작업을 하러 갔다가 양변기를 처음 봤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토록 맑은 옹달샘 같은 물이 화장실에 있단 말인가. 시골 재래식 화장실만 봐왔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채플시간에는 항상 앞으로 나와 헌신하고 영혼을 향한 눈물을 흘리며 복음 전파의 소명을 주신 주님께 충성을 결단했다. 우리는 매주 1달러를 받아 십일조를 내고 목욕과 이발 등 모든 것을 다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기초를 닦는 필수 과정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8) 돌아온 탕자, 통곡의 회심… 전도의 길 나서다
동네 선배가 부산 신학교 안내해줘… 장흥 회진항에서 3일 뱃길로 찾아가
김남주 총장이 재학 중이던 시절, 성서침례신학교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성경학교 졸업 후 시골로 내려왔다. 어떻게 할까 기도하던 차에 같은 동네 이상철이라는 선배가 부산에 신학교가 있다면서 전도지 뒷면에 있는 주소를 가르쳐줬다. 나는 몰래 배삯을 구해 장흥 회진항에서 부산 가는 배 3등 칸에 몸을 실었다. 남해안 굽이굽이 뱃길로 여수와 통영 등을 거쳐 3일 동안 배를 타고 갔다.
부산여객선 부두에 내려 전철을 타고 동래 온천장에 있는 제일성서침례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김석규 전도사님께서 반가이 맞아 주셨다. 신혼이었던 것 같은데 김 전도사님 부부가 “저 강 건너 낙원 있네. 아름답고 영원한 곳 믿는 자만 그곳으로 가겠네∼” 찬양을 하시는데 너무 좋아 보였다. 그는 신학교에 대해 안내해주며 지금은 방학이라 9월에 개강한다고 했다. 하룻밤을 묵고 인사한 뒤 다시 고향으로 왔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접어들 무렵 부산 부곡동 성서침례신학교에 입학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방에는 계단식 철침대가 놓여 있었다. 기상 후 새벽 경건의 시간, 순번제 설교, 오전 강의 시간을 가진 뒤 오후엔 각자 막노동이나 허드렛일, 과외교사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틈날 때마다 구령도 하러 다녔다. 나와 김종식 형제는 온천장 일대와 남산동, 팔송, 범어사, 두구동이 주 무대였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 전도지를 나눠주며 전도를 했다. 전도지를 다 돌리고 나면 나는 외쳤다. “여∼르∼부∼ㄴ 지∼그∼ㅁ 어디∼느 흥∼해 그∼고 그∼시∼니∼끄∼(여러분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위아래 앞니가 5개나 빠져버린 나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옥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보며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불같은 연민의 정으로 외쳤다. 교복차림의 여고생들은 깔깔대고 웃어댔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가난해도 문제가 안됐다. 앞니가 5개나 빠졌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롬 1:16).
하루는 설교학 수업을 들은 뒤 캠퍼스 뒤 산에 올라가 설교연습을 했다.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을 영혼이라 여기고 낮은 바위를 강대상 삼았다. 그때 갑자기 도토리가 눈에 들어오면서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얼른 기숙사로 내려가 식칼을 가지고 올라왔다. 도토리를 깎아 뻥 뚫린 앞니에 맞춰 넣고는 다시 설교연습을 시작했다. 조심스레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세게 발음하는 대목에서 깎아 넣은 도토리가 ‘퍽’ 하며 입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은 듯하면 당감동 화장터를 찾아갔다. 그곳은 통곡의 장소였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건장한 체구의 군인, 공장에서 일하다 벨트에 끼어 유명을 달리한 아줌마, 교통사고로 숨진 초등학생, 자살한 여인 등 사연 많은 이들의 운구행렬이 줄을 이었다. 나는 화장터 건물 뒤로 돌아가 불을 조절하는 분들에게 신학생임을 밝히고 간식 값을 드리면서 화장하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끈질기게 매달리자 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작은 창으로 볼 수 있게 해줬다. 그곳은 불타는 지옥과 같았다.
부산지방법원 법정에 찾아가 재판광경을 보며 죄와 죄인에 대한 성경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당시 부산시장이 횡령죄로 기소돼 흰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포승으로 묶인 채 법정에 나타났는데 권력자도 죄인의 신분이 되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가를 실감했다. 나는 지옥에 갈 영혼들에게 제발 거기는 가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준비하신 복음을 선물로 받고 천국에 가시라고 더욱 뜨겁게 전도했다. 산길에서 만난 젊은 스님을 붙들고 성경을 펴 구령을 했다. 그는 예수님 영접기도를 한 뒤 절에서 나오겠다고 했다. 시내버스 차장 아가씨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9) 돈 없어 하루 세끼 국수… 고학으로 신학교 졸업
첫 임지는 전남 장흥의 15평 교회… 미자립임에도 ‘주의 종’ 1호 배출해
첫 임지였던 전남 장흥군 관산면 성남성서침례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남주 총장. 당시 교회 바닥은 흙이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야만 했다.나는 신학생으로서 말씀, 기도, 구령 훈련에 이어 혹독한 생활 훈련도 받았다. 고학생이었기에 구두닦이, 가게 점원, 양복점 보이, 세탁소 종업원, 문패 외무 사원, 공사판 들통지기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한 번은 기숙사비가 없어 쫓겨나기도 했다.
여름방학 때 이용대 형제와 함께 부산 반송 지나 기장 쪽 고촌이라는 마을의 교회를 맡았는데 성도가 적어 생활이 정말 어려웠다. 먹을 것이 없어 가느다란 타래 국수를 작은 석유곤로에 삶아 간장 하나만 놓고 매일 아침 점심 저녁에 먹었다. 열흘 정도 먹으니 속에서 받아주질 않았다. 길가의 호박잎을 따다가 데쳐서 한 달을 먹었다. 나는 지금도 가는 면발의 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했다. 제1회 졸업생은 나와 이상천 장기봉 이춘식 서영개 김원배 백월금 정신길 등 8명이었다. 졸업식은 부산 제일성서침례교회에서 거행됐다.
신학교 졸업 후 목회 첫 임지는 전남 장흥군 관산면 남송리 성남성서침례교회였다. 교회는 시멘트 블록에 나무 서까래를 걸친 뒤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건물로 면적 50㎡(약 15평) 규모였다, 바닥은 흙으로 돼 있었고 전기가 없어 호롱불을 켜야만 했다. 미자립이었기에 서울에서 라스터 선교사가 불광동교회를 통해 우편환으로 보내준 3000원이 한 달 생활비 전부였다.
나는 당시 성남교회 외에 8㎞ 거리의 동촌교회, 10㎞ 거리의 장환도교회까지 목회자가 없는 관산면 내 3곳의 교회를 맡아 자전거로 순회하며 목회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 석유 값도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동네 무당집의 초등학생 딸 자매가 주일학교에 나왔다. 그 아이들이 300원, 200원씩 헌금을 해 호롱불 석유 값을 감당했다.
그 무렵 길을 가다가 자주 만나던 학생들에게 교회 오라고 전도했는데 두 학생이 찾아왔다. 그들은 구령 상담을 통해 구원을 받은 뒤 달밤에 리어카를 가져오더니 냇가에서 돌들을 주어와 화단을 만들었다. 당시 내겐 초라하지만 두 벌의 양복이 있었는데 한 벌을 한 학생에게 입혀줬다. 그를 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추천해줬다. 그 학생이 현재 광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정국연 목사다. 목회하면서 49명의 주의 종들을 배출했는데 길거리 전도로 목사가 된 제1호가 정 목사다. 얼마 후에는 어린이 중고생 청년 할머니 등과 초등학교 선생님 두 분까지 해서 80∼90명 정도 예배에 출석했다.
6개월 뒤 동촌교회에 친구인 김종식이 목회자로 부임해 서로 오가면서 전도와 심방을 같이 했다. 그는 청년들과 부인들을 많이 전도해 동촌교회의 부흥을 일으켰다.
우리 둘은 양쪽 동네 청년들에게 몇 차례 위험을 겪어야 했다. 동네에 전과가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종종 날 괴롭혔다. 어느 수요일 밤에는 술을 먹고 와 유리창을 다 깨고는 피 묻은 유리조각을 들고 예배당으로 들어와 옷을 다 찢고 자기 몸에 상처까지 내더니 유리조각을 입에 넣고 씹다가 입속의 피를 뿜어냈다. 모두 피신시키고 나도 피했다. 아침에 가보니 영어공부 할 때 사용하는 야외용 라디오가 다 부서지고 책들도 모두 뒤집어져 있었다. 그는 변상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산면 소재지에 5일장이 서는 것을 보고 친교센터를 개장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입대 통지서를 받았다. 주님께 기도했다. ‘군대 3년, 한시적으로 푸른 세계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할 수 있다면 군종으로 보내주십시오.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 목사로서의 길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0) “나 군목인데, 김 일병이 급히 설교좀 해주게”
훈련소선 1분간 휴식 때도 성경 읽어… 믿음의 軍생활에 군종전도사 특명을
1사단 11연대 신앙대대에서 단독 목회를 하던 시절의 김남주 총장(오른쪽). 문화관광부 장관과 3선 의원을 지낸 정동채 당시 일병과 포즈를 취했다.1971년 2월 13일 광주 31사단 신병훈련소에 입대했다. 아직 겨울이었다. 나는 한영 신약성경을 갖고 들어갔다. 훈련 중 ‘1분간 휴식’을 할 때도 동료들은 담배를 태웠지만 나는 성경을 꺼내 읽으며 꿀송이 같은 말씀을 주님과 함께했다.
4주 기본훈련 후 기대했던 군종과는 안 되고 텔레타이프 통신병이 돼 대전 육군통신학교에 입학했다. 텔레타이프 213기로 영어 알파벳으로 치고 한글로 번역하는 암호문 텔레타이프를 부지런히 배웠다. 통신장교 하나는 가수를 했다는 친구에겐 “노래 1발 장전∼” 하며 노래를 시켰고, 틈만 나면 성경을 보는 내겐 “야, 예배당장! 설교 1발 장전∼” 하면서 5분 설교를 시켰다. 그럼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전도 설교를 5분 동안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기회를 주신 것이다.
통신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 최전방 1사단 11연대 통신대에 텔레타이프 조수로 배치됐다. 통신대 내무반 인원은 총 36명이었다. 나는 주님께 통신대 전체를 복음화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1연대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통신대에 1분만 시간이 나도 성경을 보는 미친 예수쟁이가 하나 있다’는 소문이 연대 전체에 퍼졌다.
하루는 서울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설교하러 오신다고 해서 꼭 참석하고 싶었다. 연대장은 전화당번 외 전 병력을 교회로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나는 졸병이라 통신대 내무반 전화당번을 해야 했다. 아쉬워하며 전화기 앞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나 군목인데, 김 일병이 지금 급히 설교를 해야겠다. 목사님께서 오시다가 문제가 생겨 못 오시게 됐다.” “아니, 그럼 군종 전도사님들이….” “긴급회의를 했는데 아무도 못하겠대. 그래서 성경만 보는 통신대 김 일병에게….” “예, 알겠습니다.”
산등성이에 있는 교회까지 5분, 나는 읽고 있던 본문을 기도로 정리하면서 갔다. 교회당은 꽉 차 있었고 연대장과 참모들이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다. 내가 강단에 올라가니 통신대 선임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목이 “존경하는 연대장님…” 하며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나는 강단 의자에 앉아 덜덜 떨었다.
군목의 소개가 끝난 뒤 나는 바로 성경을 읽고 온 힘을 다해 침을 튀기며 설교를 했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무슨 설교를 했는지 의식도 없었다. 하지만 설교를 끝내자 박수소리가 예배당 안에 가득했다. 나는 ‘휴∼. 주님, 해냈습니다’라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연대장이 “우리 부대에 이런 병사가 있다니!” 감탄하며 군목에게 “김남주 일병을 군종과로 특명을 내시오”라고 지시했다. 날아갈 것 같았다. 푸른 세계 선교사로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신 것이었다. 할렐루야!
연대 군종이나 각 대대 군종 모두 정원이 꽉 차 있어, 나를 군종과로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전방 연대 직할 DMZ 수색대 군종전도사라는 자리를 새로 하나 만들어 파견했다. 주님께서 길을 내신 것이다. 수색대에서 내가 하는 일은 DMZ 잠복근무조가 출발하기 전 기도를 하는 것과 DMZ 내의 각 GP(경계초소)에서 1주일씩 생활하며 예배와 상담·구령을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연대 군종과에서 전화가 왔다. 신앙대대인 2대대 전도사가 전역을 하는데 후임으로 갈 사람이 없다고 했다. 단독 목회인 데다 설교도 항상 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워 지망자가 없으니 나더러 맡으라고 했다. 나는 “알겠습니다” 하고 즉시 신앙대대로 왔다. 미군부대를 인수한 곳이라 예배당은 독립건물이었고 사무실과 침대까지 있었다. 주일에는 대대장과 참모 등 250여명이 예배에 참석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1) 선교사들 軍 방문에 자극… 영어책 닳도록 ‘열공’
“우리 전도사님” 대대장 덕에 영창행 면해… 전역 후 레드먼 선교사와 부산서 교회 개척
김남주 총장이 1974년 부산 산상교회 전도사 시절에 보던 성경(왼쪽)과 영어사전. 책장이 닳고 닳았다.나는 신앙대대에서 구령상담과 주일설교를 하며 초소 방문, 격려, 사고병 관리, 사회인사 접촉 등을 했다. 참모회의에도 참석했는데 대대장은 장교인 참모들에게는 반말을 하면서도 병사인 내겐 언제나 경어를 사용했다. 장교들도 힘들어하고 나는 나대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 후에는 장교들도 모두 내게 ‘전도사님’ 하면서 경어를 썼다.
하루는 부대 밖 교회에 다녀오는데 차량 몇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지나갔다. ‘아차’ 하는 순간, 맨 뒤에 가던 헌병대 차가 멈춰서더니 “너, 이 새끼” 하더니 내 이름표를 떼 갔다. 그날따라 경례도 못한 데다 복장도 위아래가 달랐다. ‘아이고 하나님!’ 기도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대에 도착하니 사단 헌병대에서 김남주를 사단 영창으로 보내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대대장이 ‘우리 전도사님은 영창에 못 보낸다’며 맞섰다. 헌병 참모가 직접 부대로 찾아왔지만 대대장은 “우리 전도사님 잡아가려면 날 영창 보내시오” 하며 더 세게 나갔다. 그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지, 놀랍고도 고마웠다. 총으로 동료들을 쏴죽이고 자살하려 했던 병사를 설득하는 등 사고 병들을 잘 관리해온 것을 알기에 날 보호해줬던 것이다. 덕분에 영창 행은 피했다.
신앙대대에서 군목회를 하고 있을 때 라스터 선교사와 워커 선교사 부부, 이제 막 김포공항에 도착한 레드먼 선교사 부부로부터 우리 부대를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군 전방부대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고 내가 맡고 있는 군인교회에도 와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어를 잘 못했던 나는 난감하기만 했다. 중고생 때 공부는 하지 않고 싸움만 하고 다녔던 게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세 부부가 부대를 방문했을 때 대대장실에서 인사를 나눴는데 서울대 출신의 형제가 통역을 했다.
나는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혀를 만드신 하나님, 두뇌를 만드신 하나님, 바벨탑에서 언어별로 흩어버리신 하나님, 제 눈과 귀와 혀가 열리고 머리도 좀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중1 영어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후 전역할 때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영어를 공부했다.
34개월 10일간의 국방의무를 마치고 1973년 12월 27일 전역했다. 시골 흙담집에 3년간 보관했던 깡말라버린 구두를 찾아 닦았다. 구두끈 한쪽은 쥐가 갉아먹어 짧게 맸다. 레드먼 선교사가 같이 부산에 가서 일하자고 해 기도한 후 승낙했다. 레드먼 선교사가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불광동 성서침례교회(김우생 목사)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레드먼 선교사가 한 달 사례비로 1만5000원을 줘서 중고품 가게에 갔다. 9000원짜리 야외용 소형 전축과 LP판으로 된 3000원짜리 ‘100만인의 회화’를 샀는데, 십일조까지 내고 나니 1500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반복해서 들으니 조금씩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레드먼 선교사가 기초 한국어 공부를 마친 뒤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거제2동의 상가 2층 30평을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5000원을 내기로 하고 빌렸다. 1974년 8월 10일 산상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을 했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영어실력은 그리 빨리 늘지 않았다. 레드먼 선교사가 통역을 데려왔는데 미군부대 주변에 살아서인지 영어가 유창해 기가 죽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며 골목골목 전도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몇 달 뒤 추석 명절에 고향에 갔던 통역이 돌아오지 않고 연락도 없었다. 당황했다. 당장 주일설교 통역을 할 사람이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2) “돈·실력·인물 없지만 제겐 하나님이 있습니다”
13번째 결혼 소개받은 자매에게 편지… ‘바로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답장이
김남주 총장과 이봉례 사모 부부. 김 총장 부부는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 기도한 것처럼 수많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푼의 빚도 지지 않고 살아왔다.레드먼 선교사는 나보고 주일 설교 통역을 맡으라고 했다. 영어 회화도 손짓과 발짓 섞어가며 온몸으로 하는 수준인데 통역을 맡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절하고 빨리 다른 통역을 구해보라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날마다 레드먼 선교사 댁에 가서 한영성경과 영한·한영사전을 펼쳐놓고 함께 영어를 공부했다. 영문 설교 원고 오른쪽 3분의1 공간을 남겨 달라고 해 그곳에다 연필로 억지 번역도 해봤다. 절박했기에 간절히 기도하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내가 처음으로 통역한 설교는 두 사람이 원고를 각각 한 줄씩 읽으며 7분 만에 끝났다. 한 사람이 3.5분씩 한 셈이다. 지금도 그 원고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밤이면 셋방에 돌아와 영어사전과 씨름을 했다. 3개월, 6개월, 1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통역이 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레드먼 선교사를 만나게 하시고 통역이 없는 비상상황을 만드셔서 ‘영어훈련 학교’에 집어넣어 영어실력을 쌓게 하신 것이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루는 선배인 대전의 김종성 목사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주일학교 교사이자 교회 반주자인 이봉례라는 좋은 자매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나는 사실 이전에 12명의 자매들로부터 거절을 당한 상태였다. 또 탈락이겠거니 하고 글을 올렸다. ‘제겐 세 가지가 없습니다. 돈이 없고, 실력이 없고,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김남주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이 저의 전 재산입니다. 그래도 한 번 만나겠다면 좋습니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답장이 왔다. 자매에게 편지를 보여줬더니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고 했단다. 대전으로 가서 김 목사님 오토바이로 자매의 집까지 찾아갔다. 한눈에 봐도 부잣집이었다. 큰절을 올렸는데 아버님께서 던진 첫마디는 “내 딸,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였다.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 달 사례비 1만5000원 받아서 십일조와 헌금, 월세 5000원까지 내고 나면 계산이 안 나왔다. 그때 김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아, 그야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먹여 살리지요.” 명답이었다. 위기를 넘겼다. 장인어른은 “아무리 좋은 데 선을 보라고 해도 거절하고 교회에 미쳐 저러니 아주 포기했다”고 하셨다.
자매와 함께 하천 둑을 따라 3km 정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복음 사역자의 길과 사명을 이야기했고 자매도 가치관과 신앙이 같았다. 우린 프로포즈도 없이 일생을 함께 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기도를 했다.
이후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다 부산의 개척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이라곤 조퇴하고 온 우리 교회 중고생 몇 명이 전부였다. 신혼여행은 꿈도 못 꿨다. 돈이 없어 사진사도 부르지 못했는데, 결혼 1주일 후 편지가 한 장 날아와 뜯어보니 흑백사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지금도 누가 보냈는지는 모른다. 천도교를 믿는 처가에는 신세 질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무릎을 꿇고 경제적인 면에서 두 가지를 기도했다.
‘첫째, 성경말씀대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 아무 빚도 지지 않겠습니다(롬 13:8). 둘째, 성경말씀대로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저희에게 더하시리라 믿습니다(마 6:33).’ 그렇게 기도로 시작한 우리 부부는 수많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단 한 푼의 빚도 지지 않고 살아왔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기이한 손길들을 통해 공급해주신 덕분이다. 신실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김남주 (13) 믿음의 아내와 중고 TV 팔아 ‘복음 리어카’ 제작
찬송 테이프 틀고 부산 골목길 누벼… 공터·야외서 주일학교 ‘아이들 북적’
김남주 총장 부부가 부산 산상교회 전도사 시절 제작한 ‘복음 리어카’.나와 아내는 중고 흑백TV를 팔아 ‘복음 리어카’를 제작했다. 리어카에 파이프로 사각형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는 스피커를, 뒷면에는 알루미늄 보드를 만들어 성경동화 그림들을 붙일 수 있게 했다. 자동차 배터리에 작은 앰프를 연결한 뒤 찬송 테이프를 틀며 부산 거제동과 연산동, 사직동 골목골목을 끌고 다녔다. 공터가 나오면 아이들과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어린이전도협회에서 구입한 성경그림으로 전도를 했다.
아이들이 늘어나자 앉고서고 해서 빽빽하게 270명까지 들어올 수 있던 2층 예배당도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아내가 맡은 미취학 유치부 아이들은 건물 아래 공터에서 80∼100명씩 따로 모였다. 몇 달 뒤에는 고등학생 형제들이 리어카 사역을 돕겠다고 나서더니 자기들이 직접 주일마다 네 군데 공터에서 야외 주일학교를 했다. 산상교회는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초등학생만 600∼900명이었고 중고생도 80∼120명에 달했다.
우리 부부는 2층 예배당 한쪽 아주 좁은 방에 살았다. 방이 너무 작아 어른 둘이 눕고 나면 큰아이는 누일 곳이 없어 옷걸이 밑에 재웠다. 공용화장실 입구에 베니어합판으로 칸막이를 해서 부엌으로 사용했다. 석유곤로 하나로 밥을 지어먹고 수도가 없어 물을 길어와야 했다. 그래도 복음으로 구원받고 찬송 부르며 성장해 가는 어린 영혼들을 보며 행복해했다.
오후엔 일생을 목사로 헌신키로 한 다섯 명의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요한복음을 한 장씩 읽으며 성령께서 주신 감동들을 나눴다. 같이 라면 끓여 먹고, 김장을 하고 계단 아래 도르래로 우물물을 길어다 주는 충성스러운 형제들이었다. 그 형제들이 현재 침례신학대 신학대학원장으로 있는 이형원 박사와 침신대 교수인 정승태 박사,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훈련원에서 사역하는 조광문 목사, 부산 복천교회 박금조 목사, 호주에 이어 미얀마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연규 선교사다. 송경희 정미숙 박선옥 김진향 서연희 사모 등은 내 아내를 충성스럽게 도와주던 여학생들이었다. 당시 산상교회 학생들 중에서 부산 십대선교회(YFC) 대표 임양조 목사를 비롯해 총 16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나왔다. 주님의 선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1978년 9월 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마침 부산 반송성서침례교회가 문을 닫을 처지라며 한번 와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첫 설교를 했는데 총 11명이 모였다. 대지 132㎡(40평)에 예배당과 사택, 마당을 갖추고 있었다. 기도하고 기쁘게 옮겼다. 거제동 산상교회에서 낳은 첫째 사명이와 둘째 성찬이에 이어 이곳에서 막내 성진이를 낳았다.
부산 달동네 판잣집에서 이주해온 3만명이 살던 이곳에서 나는 열정적으로 전도했다. 청년들은 날마다 영혼들을 데려와 구령 상담을 맡겼다. 때론 새벽 1시까지 하나님 말씀으로 구령 상담을 해 구원받는 역사들이 일어났다. 예배 때마다 성령이 충만했고 기쁨과 감격이 넘쳤다. 1년도 채 안 돼 출석 성도가 11명에서 110명으로 늘어났다. 레드먼 선교사 부부가 종종 찾아와 눈물을 흘리곤 했다.
예배당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려 계획하고 있는데 대전에서 전화가 왔다. 대전성서침례교회 후임을 놓고 내가 거론되고 있어 초청 설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기도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모르니 그곳이 열리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산연합신학대학원 졸업여행을 마치고 대전 가양동에 있는 교회로 갔다. 오전 예배에 31명이 출석했는데 ‘하나님의 동산에 심긴 백향목’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저녁에도 설교를 했다. 구원받은 사람과 헌신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왔다. 회의하는 동안 잠시 나가 있다 들어오라 하더니 박수로 맞이했다. 10·26사태 이틀 전인 1979년 10월 24일 작은 트럭에 짐을 싣고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4) 재정 부족에 사례비 5000원에도 감사 기도를
1500원 없어 재래식 화장실도 못 퍼… 열심히 기도·전도하자 교회에 생기가
김남주 총장이 1980년대 중반에 기획했던 미국 윙스오브모닝 합창단 내한공연 전도대회 모습.대전성서침례교회는 비누공장으로 사용하던 무허가 슬레이트 건물이었지만 마당에다 낡은 기와집 사택까지 있었다. 31명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군에 입대한 청년들이 가끔 휴가 때 출석했다. 재정을 담당한 형제는 사례비가 13만원이라고 했다. 재정자립이 되면 돌려주기로 하고 재정장부를 가져오라 해서 내가 직접 관리했다. 매주 공공요금부터 지출하고 우리 생활비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기도하며 살았다.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니 침체된 교회에 생기가 돌았다. 이용덕 조익현 서재필 형제 등이 교사들과 함께 열정을 쏟아 유년 주일학교에 250명 정도 나오게 됐다. 하지만 재정적 뒷받침은 부족했다. 아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다 세 아이들을 키우며 몸까지 허약해져 기진맥진했다. 너무 힘들 때는 아무에게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을까봐 겨우 기어가서 유서를 써놓기도 했다.
교회에 드럼통 화장실이 있었는데, 변이 가득 찼지만 1500원이 없어 푸지를 못했다. 어떤 분이 사정도 모르고 우릴 향해 소릴 질러서 바가지로 조금씩 떠다가 마당 입구 쪽 하수구에 버렸다. 우리 부부는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처가나 외국인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다. 하루는 마이클 할러스 선교사가 부탁해 통역을 했는데 끝내고 나니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라며 5000원을 줬다. 십일조를 떼어놓고 화장실 푸는 사람부터 불렀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자며 서로 위로했다.
무허가 건물인 예배당 바닥의 콘크리트가 양잿물로 인해 버석버석 깨지고 솜처럼 하얀 색깔이 드러났다. 당시 갈탄 난로를 사용했는데 아무리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해도 목에서 검정색 가래가 나왔다. 재정이 없으니 직접 바닥공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시내 공사장에 가서 ‘도끼다시(인조대리석)’ 하는 법을 배워왔다. 재료도 직접 구입했는데 바닥을 매끈하게 갈아내는 기계는 살 돈이 없었다. 대신 숫돌을 사와서 바닥을 갈았는데 진전도 없고 힘들기만 했다. 죽기 살기로 작업하다 수돗가에 가서 젖은 바지를 걷어 올렸는데 무릎의 살이 바지에 붙어서 벗겨졌다. 병원에는 갈 생각도 못하고 소독만 하며 1년을 지냈다. 그 와중에도 비새는 서재에서 초급반 양육교재를 완성했다. 겨우 치료비를 구해 병원에 갔지만 지금도 큰 흉터가 남아 있다.
키가 매우 작은 여인이 있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쓰러져가는 집에 살았고 남편은 알코올 중독이었다. 남의 밭을 빌려 채소를 심었다가 조금씩 팔았는데 300원, 500원 씩 십일조를 했다. 나는 십일조 봉투를 볼 때마다 감동이 돼 봉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곤 했다. 그 여인이 하루는 “장에 가서 똥강아지를 하나 사왔는데 동네 사람들이 불독이래요. 불독이 뭐예요?”하고 물었다. 얼마 후 “우리 개가 새끼를 열 마리나 낳았는데, 한 마리에 10만원이래요. 100만원을 받아서 10만원은 십일조로 드렸어요. 남은 돈으로는 송아지를 한 마리 샀어요. 기도해주세요” 했다. 나는 집으로 심방을 가서 송아지를 놓고 축복기도를 해드렸다. 그 송아지가 커서 어미 소가 되더니 새끼를 두 마리나 낳았다. 그 여인은 소들을 모두 팔아 만든 목돈으로 소형 아파트까지 구입했다.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하루는 사업을 하는 한 부부가 예배에 나왔다.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는데 몸이 아파서 병원을 전전했는데도 낫지를 않았다. 심방을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다. 영접기도를 하자 누워 있던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하다고 하더니 이불과 베개에서 부적을 빼내주었다. 부부가 사업을 하기에 밤늦게 성경공부를 하곤 했는데 결국 온 가족이 구원 받았고 아들은 신학을 공부해 주의 종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5) 추수감사주일 헌물로 단 하나 뿐인 냉장고를
전도 할머니·故 김재수 회장에게서 기도의 힘·청지기 삶 몸으로 체득해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 실버스테이트유스캠프에서 미국 젊은이들에게 설교하는 김남주 총장.우리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하던 분이 계셨는데 ‘전도 할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전도에 열심이었다. 그분이 종종 말씀하셨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100만원 십일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아들은 운수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고 십일조는 2만∼3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100만원이라니 잡아도 너무 많이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믿음이 너무 작았다. 아들의 십일조가 점점 올라가더니 그는 대형 트럭을 운영하는 운수회사까지 세웠다. 지금은 십일조뿐 아니라 장학금, 선교비 등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어머니의 기도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고 김재수 신도물산 회장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일생 동안 불교를 믿었던 그는 몇 가지 고통스런 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낸 뒤 우리 교회 전도집회에 초대받아 왔다. 내게 구령상담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됐다. 2년 반 정도 매주 화요일 아내와 함께 김 회장 댁에 가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우리는 가족처럼 지냈다. 하루는 우리 셋방에 와보고 “아니 영어 통역까지 하시는 목사님이…” 하면서 놀라워했다. 고기를 사가지고 왔는데 넣어둘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추수감사주일에 바칠 것이 없어 집안을 둘러보다가 그나마 제일 값나가는 것이 냉장고라 바쳤는데, 다시 장만할 엄두를 못 내고 6년을 냉장고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 후 많은 도움을 주셨다.
김 회장이 하루는 부인을 보내 본인 인생에 마지막 예배당을 지을 계획인데 나를 담임목사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조건은 단 하나였다. 성서침례교회에서 나와 초교파적으로 목회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인은 밤 11시까지 우리를 설득했다. 난감해서 1주일만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나와 아내는 기도하며 많은 대화를 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들지만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해준 성서침례교회, 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내 편한 길을 택할 수는 없었다. 그 교회는 누구든 할 사람이 많겠지만 이 가난한 성서침례교회는 누가 한단 말인가.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을 가자고 생각했다. 1주일 후 조심스럽게 나의 힘든 결정을 말씀드렸다.
김 회장은 아흔이 넘어 건강 악화로 혼수상태를 오가던 중 급히 나를 찾았다. 단숨에 달려갔다. “목사님, 하나님 일 많이 하고 오십시오. 저 먼저 갑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소리쳐 울면서 기도했다. 그는 국내외에 40여 예배당을 짓고도 감사패 하나 받지 않고 거절하셨던 분이었다. 늘 ‘나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다’라고 말씀하셨던 분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분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는 매일 새벽 가양동과 성남동, 소제동의 집집마다 전도지를 넣으며 뛰어다녔다. 대전 중앙로 상가에서도 전도를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멈춰 산길 넘어 오지로 전도를 하러 가기도 했다. 대전의 정·관계 인사들도 많이 만나 전도하고 교제했다.
주님은 신학교 강의와 국내 집회, 외국인 통역 등으로 바쁜 내게 미국 윙스오브모닝 합창단 시민회관 전도집회를 레드먼 선교사 주선으로 기획하게 하셨다. 강사는 조지 골든 박사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벤추라시에서 목회를 하는 분이었다. 미국인 30∼40명이 온다고 해서 대전 지역 5개 교회가 함께하고 전국 친교회에서도 협조했다. 낮에는 미션스쿨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저녁엔 시민회관에서 3일간 집회를 했는데 만석이었고 수많은 영혼이 구원상담에 응했다.
이 행사를 위해 뛰는 나를 지켜보던 골든 박사가 미국에서 순회집회를 인도하도록 나를 초청했다. 1987년 6월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6) 美서 설교·간증… 가는 곳마다 성도들 회개 헌신
고아원 생활·싸움·소명 등 나눠… “우리 교회서 집회” 요청 쏟아져
김남주 총장이 1991년 2월 2차 방문 설교 때 벤츄라침례교회에서 이 교회 조지 골든 박사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미국 방문은 처음이었다. LA공항에 도착해 인근 벤츄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첫 밤을 보낸 뒤 조지 골든 박사의 벤츄라침례교회에서 첫 영어설교를 했다. 골든 박사의 주선으로 LA 몰라비아 갈보리교회에서도 설교를 한 뒤 LA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주 오스틴으로 갔다. 단 레드버러 박사의 조지타운 헤리티지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레드버러 박사는 태평양연안성서침례대학(PCBBC) 합창단을 한국에 데리고 와 전도집회를 할 때 통역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이 교회 존 카너럽 부목사의 안내로 오스틴 일대를 돌아보다 잭 험버트 목사가 시무하는 힐탑교회에 들어가게 됐다. 험버트 목사는 부사장만 21명인 미국 철도회사의 수석부사장으로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자가용 기차까지 갖고 살다 50세 가까운 나이에 소명을 받고 오스틴에 교회를 세운 분이었다. 한국에 왔을 때 통역을 해드린 적이 있어 잘 아는 사이였다. 연락을 하니 바로 달려와 껴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일 설교를 부탁하셨지만 이미 집회 약속이 잡혀 있어 다음 기회로 미뤘다.
텍사스 샌엔젤로에 가 설교를 하고 미들랜드를 거쳐 달라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콜로라도주 덴버로 갔다. 밤 11시쯤 도착했는데 우리 교회를 두 차례 방문했던 빌 스미스 박사가 마중을 나왔다. 덴버에서 가장 큰 교회를 40년 이상 담임하고 있는 스미스 박사는 인근 록키산맥 기슭에 실버스테이트유스캠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밤중에 캠프장으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아침에 스미스 박사의 사모님이 특별히 내 식사를 준비했는데 반찬도 수저도 없이 흰 쌀밥 한 공기만 달랑 가져왔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물 한 컵과 함께 한 그릇을 비웠다. 이튿날은 아들인 짐 스미스 목사 내외가 불고기와 김치 등을 구해왔다.
캠프장은 통나무로 지어진 큰 강당과 여러 채의 숙소, 경마장,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어 규모가 대단했다. 나는 강단에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말씀을 전했다. 젊은이들이 강단 앞으로 쏟아져 나와 주님 앞에 헌신하는 광경은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감격해 한없이 울었다. 저녁 간증설교를 부탁해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보고 세월을 아끼며 주님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면서 살 것을 설교했다. 또 고아원에서 10년 생활, 싸움, 주님과 만남, 소명, 신학, 군대, 개척교회 등등 주님의 인도하심을 나눴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들이 보였다. 쉬는 시간에 미국 각지에서 청년들을 인솔해온 목사님과 집사님들이 찾아와 자기 교회에서도 집회를 해달라는 요청들을 쏟아냈다. 다 들어준다면 나는 수개월 동안 한국에 못갈 것 같았다.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신기하기만 했다.
3일간 집회를 마치고 빌 스미스 박사가 목회하는 교회를 둘러봤다. 엄청난 규모였다. 비행기를 타고 버커스필드로 갔다. 이곳에서 테리시어스 목사님을 만나 인사하고 유럽풍 교회당에서 설교를 했다. 자동차로 프레스노로 달려가 PCBBC 음악 교수이자 나와 친분이 있는 오티스 레드베러 박사가 목회하는 체스넛성서침례교회를 방문했다. 목사님 댁에 짐을 풀고 며칠을 묵으며 주일 아침과 오후 설교를 했다. 성령님께서는 이 교회에서도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성도들이 강단 앞으로 몰려나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헌신하는 광경은 참으로 놀라웠다. 주님은 강단에 설 때마다 나를 성령으로 담대하고도 열정적으로 만드셨다. 부둥켜안고 작별인사를 한 뒤 다시 LA공항으로 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것이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1차 미국여행이었다. 그 후로 6차까지 미국 각 지역 순회집회를 인도하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역경의 열매] 김남주 (17·끝) ‘5者 철학’으로 영혼의 혁명 주심에 감사합니다
구령·양육·설교·인도·기도자의 삶… 주님, 고아원생을 총장으로 이끄셔
김남주 총장이 성서침례교회 전국친교회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서울 올림픽홀에서 개최한 성서침례교회 선교 50주년 기념행사 모습.주님은 한없이 부족한 종에게 6차례 미국 전역 순회집회를 인도하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멕시코 필리핀 이집트 이스라엘 터키 싱가폴 호주 몽골 인도네시아 중국 캄보디아 일본 아프리카 가나 등을 순방하며 760여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셨다. 국내에서도 서울 임마누엘교회에서 한 달 동안 매주 수요일 밤 전도집회를 가진 것을 필두로 전국 50여 도시의 각 교회와 대학교 등에서 통역, 세미나, 사경회 등을 담당하게 하셨다.
10권의 책도 출판토록 하셨고 성서침례신학교와 성서침례대학원대에서 30년간 강의하고 교목실장과 운영이사, 법인이사로 섬기도록 허락하셨다. 성서침례교회 전국친교회장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하셨고 성남교회부터 대전성서침례교회까지 45년간 목회를 하도록 큰 은혜를 베푸셨다. 특히 36년간 대전성서침례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울고 웃으며 눈물과 땀으로 헌신해주신 온 성도님들과 서정열 박철웅 이용덕 이병구 박기만 염중재 홍종욱 정홍기 이강우 서재필 안필기 박종천 오현균 김진택 곽배준 한경수 송해룡 정건화 구중림 송인준 이진기 김명수 김정환 윤성원 송재만 박준연 안효을 성택 천명선 등 집사님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모든 것은 선하신 주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다.
여기까지도 너무 감사한데 지난해 학교법인 성서침례학원 운영이사회와 법인이사회에서 이토록 무익하고 부족한 종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서침례대학원대 제4대 총장에 선출됐다. 죄 가운데 방황하며 영원한 형벌과 저주 아래 놓인 운명,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없고 앞이 캄캄하던 고아원의 소년에게 뜻밖의 한 분이 사랑으로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 내가 치러야 할 영원한 심판과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하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죄 사함과 의롭다함과 산 소망으로 복음의 결정체가 되신 예수그리스도! 내 영혼의 혁명을 가져오신 분! 날 새롭게 하시고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셨다. 제한된 지면에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분에 넘치도록 축복하시고 사용해 주셨다.
총장에 선출된 다음날, 엎드려 기도하다 눈물이 쏟아져 어린 날 힘든 세월을 보낸 고아원에 조용히 다녀왔다. 버스 안에서 주님께서 내 가슴에 담아두신 ‘5자 철학’을 되뇌었다. ‘구령자(Soul-Winner) 복음으로, 양육자(Fosterer) 말씀으로, 설교자(Preacher) 성령으로, 인도자(Leader) 인격으로, 기도자(Prayer) 무릎으로.’
앞으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며 이 시대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수하게 복음으로 구령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나라를 땅 끝까지 확장하는 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신실한 종들을 양성, 배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내 인생 고아원생에서 총장까지 손을 높이 치켜들어 보일 플래카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며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감사를 그분께 돌린다. 특별히 주님께서 내 마음 판에 새겨 주신 말씀들이 있다. 시편 27편 10절, 71편 5절, 118편 17절, 에베소서 2장 8∼10절, 3장 7절, 고린도전서 1장 26∼29절, 15장 10절, 로마서 1장 16절, 10장 12∼15절, 디모데후서 4장 1∼5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누가복음 9장 23절, 잠언 23장 17∼19절이다.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며 주께서 미말의 나 같은 인생에 행하신 선하심을 국민일보를 통해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주님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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