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5장36~16장5절 제목 : 갈등을 넘어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에 말씀을 전한 각 성을 다시 방문하려다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섭니다. 마가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지만 역설적으로 선교영역은 확장됩니다. 바울이 새로운 동역자를 만나 사역하면서 교회는 든든히 서 갑니다.
1.심각한 의견의 충돌(15:36~41절) 1)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제안함(36절)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여기서 언급된 며칠 후는 유다와 실라가 떠난 이후의 날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Lenski)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된 날은 아닐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 제2차 선교여행에 대해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하고 있는 점이 독특합니다. 1차 여행 당시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 교사들이 안수하여 파송한 것이지만(13:1-3)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안디옥 교회의 빠른 성장에 고무되어, 새로운 전도 여행의 사명을 느끼게 된 듯합니다.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겪었던 혼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기 위해 이전에 전도했던 지역을 찾아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2) 바울과 바나바간의 의견이 갈림(37~38절) “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바울의 제안을 받은 바나바는 전적으로 찬성한 듯합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동행시키자고 바울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요한은 행12:12에서 언급된 인물과 동일인물로 추정됩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며(골 4:10),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이며 마가복음의 저자입니다. 한편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마가는 1차 여행 때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이 있습니다(행13:13). 그러나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왔는지, 아니면 바나바가 그를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간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실라와 마가가 동일하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바나바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유가 1차 여행 당시 요한이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점(13:13)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요한에게 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음을 13:13의 사건을 통해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행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바울은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별 도움이 못되리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3) 다투어 피차 갈라섬(39상반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39상반절)” 바울을 위해 헌신적으로 애썼던 바나바(9:27;11:25)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동행자 문제로 언쟁 끝에 헤어지게 됩니다. 이 다툼은 감정적(感情的)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루살렘 회의 이후 바울의 입지가 강화되고 독자적 권위가 인정됨으로써 바나바의 도움이 바울에게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바울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바울에게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다툼은 대등한 입장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양보를 거부하게 된 지극히 감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날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바나바와의 다툼과 요한에 대한 냉대가 지나친 바울의 고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마가 요한은 훗날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바울로 하여금 감사하게 합니다(골4:10;딤후4:11;몬24절). *골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딤후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몬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4) 바나바는 구브로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39하반절~41절) “[39하반절]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1) 바나바는...구브로로 가고 - 바나바의 행적은 구브로를 떠남으로써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습니다(4:36). 그가 구브로로 가게 된 것은 1차 여행의 첫 선교지였고, 바울이 제안한대로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나바가 떠나자 바울은 실라를 택하지만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갔다가(33절) 바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왔는지, 아니면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실라에게 전도여행을 제안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져서 실라를 동역자로 맞아드리고 선교여행을 준비합니다.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는 장면 묘사는 바나바와 매우 대조됩니다. 즉 바나바는 매우 화난 사람이 훌쩍 떠나버린 듯한 묘사(39절)를 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바울의 떠남이 교회 성도들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 누가의 초점은 바울에게로 모아지고 바울의 비중(比重)을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행선지는 육로를 통해 북상하여 자신의 고향인 다소를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향을 1차적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바나바와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첫 방문지를 재방문하자고 하였던(36절) 계획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바울의 2차 여행에서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가 빠져있다는 것은 바나바와의 감정적 대립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구브로로 떠났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2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편지의 수신처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도 바울의 행선지는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 지역에 편지를 전하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든가 아니면 직접 편지를 전해준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본절에 비춰볼 때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단순히 바나바에게 처음 제안했던 것과 같이(36절) 1차 여행지의 재방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작하는 대장정(大長程)의 출발이었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교회 지도자들의 통찰력으로 문제가 잘 해결되고 교회가 평안해지자, 바울은 다시금 복음 전도에 전력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함께 전에 방문했던 교회들을 다시 찾아가 격려하기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에 이탈했던 마가 요한의 거취 문제가 대두됩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자 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교회가 세운 두 사역자는 이 일로 인해 심히 다투고 갈라섭니다.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함께 교회를 세워 온 바나바와 바울은 이제 각각 다른 곳, 즉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로 떠납니다. 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갈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조차도 선하게 사용하셔서 복음이 계속 확장되게 하셨습니다. 5) 다툼의 결과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집니다. 성경은 다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가 다툼을 이르킵니다(잠15:18). 잠17:14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18:18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잠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예화]고양이 두 마리가 고기 한 덩이를 얻어 가지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원숭이가 자기가 재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고양이들은 쾌히 승낙하고 고깃덩이를 원숭이 앞에 놓았습니다. 원숭이는 고깃덩이를 둘로 잘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작은 것을 받은 고양이가 "내 것이 더 작다."고 하자 원숭이는 큰 것을 한 입 잘라먹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고양이가 자기 것이 작다고 하였습니다. 원숭이는 또 다른 고기를 한 입 잘라먹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계속하니 고기가 양쪽 다 아주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므로 원숭이는 고기를 다 먹고는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고양이들은 자기들의 싸움을 후회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소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싸우지 말고, 사랑으로써 화평케 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리로다"(시37:11)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을 피하고, 어느 곳에든지 온유와 사랑의 씨를 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잠22: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막3:24,25,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약3: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싸움의 결과] 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두 집 다 무난한 매상을 올리고 있었지만 같은 종류의 음식점으로서 늘 상대를 견제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앞집에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원조 닭갈비하고 써 붙였다. 간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손님이 늘어 재미를 보았다. 그러자 맞은편 식당에서는 다음날로 진짜 원조 닭갈비라는 간판을 더 커다란 글씨로 달아 놓았다. 조마조마하게 두 집 사이에 맴돌던 전운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한 모양이다. 양쪽 집의 싸움은 감정 싸움이 되어 이성으로는 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투 양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간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치울라면 비용만 해도 엄청날 텐데 이제는 그런 손익계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상대를 누르고 말겠다는 자존심과 오기만 발동해서.... 우리가 진짜 원조 닭갈비하면 원조 특허 받은 진짜진짜 닭갈비라고 응수하고 뒤에다 주의! 유사닭갈비!하고는 경고문까지 내달았다. 다음날엔 원조라고 다 원조냐?를 선봉에 세웠다. 주인들은 물론이고 종업원까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와서 멱살잡이하고 욕설에다 온갖 모함을 다 퍼부어댄다. 구경 중에 제일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더라. 흥미있게 싸움구경하던 사람들도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에 질려 도망질했다. 입맛을 잃은 단골들은 혀를 차며 다른 먹자골목으로 옮겨갔다. 이젠 손님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래저래 양쪽 식당 모두 단골을 잃어버리고 아예 재기 불능, 텅 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상처뿐인 전투! 이젠 그만둡시다. 그때서야 제정신을 찾았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다.   딤후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빌2:1~4,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하며 사랑의 위로와 성령의 교제와 긍휼과 자비를 갖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일을 돌볼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선교 확장, 디모데와의 만남(16:1~5절) 우리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삶을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만남을 이어 간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마4:18~22) 그들의 삶은 고기를 낙는 어부에서 사람을 낙는 어부로 바뀌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의 만남,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인생의 좋은 기회를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고, 성령의 인도로 드로아에서 활동하게하시고 루아디아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십니다. 바울은 그들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1)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았습니다(1~3절).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납니다(1절).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더베와 루스드라는 14:6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루스드라와 더베라고 나옵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지명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와는 달리 동쪽으로부터 전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디모데는 “제자”였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시 개종한 것으로 알려지는 디모데가 채 1년도 안 돼 시행된 2차 전도여행 때에 벌써 '제자'라고 불리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미 디모데는 어릴 적에 성경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딤후3:15절입니다. *딤후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둘째,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디모데를 설명하면서 먼저“믿는 유대인 여자의”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여성의 믿음은 유대교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의 어머니는 근방에 있는 형제들과 다를 바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디모데의 어머니가 유니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기독교 신앙에 입문해 있었다고 말하는 것에서 더욱 분명하게 입증됩니다(딤후1:5).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디모데는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의 신앙을 물려받음으로써 수직적인 신앙전승의 한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누가는 디모데가 “헬라인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의 부친이 헬라인이었다고 밝히는 것은 단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 그의 부친의 출신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3절).
셋째,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였습니다(2절). 디모데는 동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폭넓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1:22;6:3;딤전3:7). *행1:22 (맛디아)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실제로 교회의 지도자를 세울 때에 성도들의 평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10:22;22:12). *행10:22“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행22: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잘 대접하지 못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찌 잘 할 수 있겠느냐는 예수의 질타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마15:4). 그는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루스드라에서뿐 아니라, 그밖의 지역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디모데는 여러 지역에 소문난 신앙을 가졌습니다. 디모데는 진리소유, 신앙전승, 동료칭찬이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2)사도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자기와 함께 데리고 가기를 원했습니다(3절). 그런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전도여행에 동반시키고자 했을 때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디모데를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디모데의 부친이 헬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3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래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공연한 마찰이나 갈등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요한 마가가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 디모데에게 담당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13:5). 디모데는 이때부터 바울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바울이라는 이름과 함께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디모데전·후서 등의 서두에서 등장합니다. 이때 디모데의 나이를 15세 혹은 18세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바울의 1,2차 전도여행의 간격이 채 1년도 안되었던 걸로 보아 이보다 많은 21세쯤으로 추청됩니다(Lenski). 한편 고전 4:17에서 디모데는 바울에 의해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불리웁니다. 바울이 그와 의기투합한 다른 이들 모두에게 '내 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걸로 보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호칭은 단순히 '뜻이 맞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Lenski). 2)사도 회의의 교훈을 전함(4~5절)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은 후에 “여러 성”을 통과하였습니다(4절).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여러 성”은 1차 전도여행시 복음을 증 거했던 곳 즉,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 등을 가리킵니다. 서쪽에 있는 아시아의 도시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들”을 주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규례(the decisions)는 예루살렘 1차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15장)을 가리킵니다. 할례 문제를 발단으로 하여 개최된 이 총회는 율법 엄수를 주장하는 자들의 폐쇄적인 태도를 멀리하고, 이방인들을 한 형제로 영접한다는 내용을 결정하여 안디옥과 수리아, 길리기아 등에(15:23)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남북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은 아직 그 '결의안'내용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전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은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순회와 교지전달은 두 가지 결과를 일으켰습니다. 첫째, 교회들이 믿음에 견고하게 되었습니다(5절상반절). 둘째, 교회들이 날마다 수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5절하반절). 후자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많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교회의 수가 많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교회들이 “믿음에”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적이며 질적인 안정을 의미한다면, “수적으로”는 외적이며 양적인 부흥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안정과 부흥에 있어서 열정과 교리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열정과 교리가 조화를 이루어 표현될 때 교회는 안정되며 부흥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