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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주 모든 생명체는 본래 전지전능한 신神이었다!!
<2> 인간은 본래 전지전능한 신神이었다!!
<3> 나는 신神이었다!!
<<생명체들과 인간이 본래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는 진실에 대한 논리적 증명>>
(초안)
탐욕주의 보수주의 상류층 지배계급이 주도하면서 이끌어가는 첨단 과학기술이 모든 생활분야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발달하였다. 빌딩 아파트 주택 전기 가스레인지 보일러 TV 자동차 컴퓨터 냉장고 휴대폰 세탁기 비행기 선박 고급의류 고급음식 등등 인간은 만들지 못하는 물품이 없다시피 하다.
사회적 강자들인 탐욕주의 보수주의 상류층 지배계급은, 사회적 약자인 대다수 국민들에게,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이러한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향유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가치관을, 전폭적으로 선전선동 하며 주입하고 있다.
TV를 제조해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체육에 관한 뉴스를 듣고, 스포츠를 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입한다. 스마트폰을 제조해서 부산과 서울에 멀리 떨어져 길거리에서도 통화하고,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하고, 인터넷을 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세뇌한다. 자동차를 공작해서 회사까지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다른 도시로 드라이브를 떠나 여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주입한다. 비행기를 공작해서 해외로 출장을 다니고, 선진국으로 여행을 다니는 것이 즉, 행복이라고 세뇌한다. 보일러가 자동 난방을 하고, 냉장고에 고기를 얼려 두었다고 구워먹고,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 해주고, 모든 전자기계제품이 완비된 이층집에서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선전선동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이 저절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므로, 평생 동안 열심히 노동을 해야 되고, 이왕 노동하는 것이므로, 기쁘고 즐겁고 활기차고 정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입한다. 더 나아가 ‘노동이 곧, 행복’이라고 믿도록 세뇌한다.
탐욕주의 지배계급은 국민들에게 초중고대학 교육과정에서부터 ‘문명〓행복’ ‘노동〓행복’이라는 가치관을 주입하고, TV와 기업조직망을 이용해, 전폭적으로 ‘문명〓행복’ ‘노동〓행복’이라는 가치관을 주입한다. 이때 국민들이 이 가치관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술책술수를 다 부린다.
먼저 국민들로 하여금 문명 외의 다른 대안이 되는 삶은 없는가? 에 대해 사색해볼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고, 지성을 쌓을 수 없게 만드는 술책술수를 부린다. 문명의 발전 속도를 천천히 할 수도 있지만, 지배계급은 주 5일 노동, 주 6일 노동을 시켜서, 문명을 누리며 사는 삶의 대안에 대해, 사색해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초중고 교육내용에 있어서 사색하고 연구하는 능력을 쌓지 못하고, 오직 지배계급이 시키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종속적인 성향만 잔뜩 길러준다.
현대 문명사회가 행복한 지, 과거 태초원시사회가 행복한 지 연구해 보라고 제안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태초원시사회는 미개인의 사회이고 야만인의 사회라고 초중고 교육과정에서부터 세뇌하는 술책술수를 부린다. 늙어서조차 태초원시사회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도록, 국민들을 평생 노예처럼 길들이고 있다.
TV방송에서 노동을 ‘노동’이라 말하지 않고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노동자’라고 말하지 않고 ‘근로자’라고 말하는 것도 술책술수 중에 하나이다. 노동은 조금 힘들어 보이는 느낌이 드는 단어인데 반해,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 느낌이 들고, 노동자는 힘든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인데 반해, 근로자는 그냥 하면 되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국민들이 노동을 쉬운 것처럼 느끼도록 하기 위해, ‘노동’을 ‘일’이라고 말하고, ‘노동자’를 ‘근로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탐욕주의 지배계급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어릴 적 학교에서부터, 모든 국민들에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 잘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세뇌하고 주입하여 왔다. 우리들은 교실 칠판 위에 ‘근면 성실’이라고 적혀 있는 학교 교훈을 암기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교육과정이 바로 노동이 곧, 행복이라는 가치관을 암암리에 세뇌하는 술책술수를 부린 것이다.
탐욕주의 지배계급은 과거 1960년대와 1970년대와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는 농사노동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서 정말로 행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류는 이 고달프고 고통스런 노동에서 탈피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고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건설해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개발에 성공하여, 우수한 물품문명을 향유하게 되어, 매우 행복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나아가 탐욕주의 보수주의 상류층 지배계급은, 우리가 더욱 행복하려면, 과학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경제를 더 발전시켜야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부를 훨씬 더 많이 하고, 노동을 훨씬 더 많이 해야 된다고 주입한다. 그럼으로써 학생들은 밤 11시, 12시까지 공부하도록 시키고, 어른들은 밤 8시, 9시까지 노동에 매몰시키고 있다.
더불어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 먼저 과학기술과 물품문명과 국민경제를 발전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추월해,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를 지배하려 들고, 군사적으로도 통치하려 든다고 선동한다. 또 지구별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그 자원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어, 우리나라가 그 자원들을 선점하지 못하면, 한국의 국민경제는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국민들은 물품문명을 향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한국 국민들이 더더욱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노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고급음식 고급의류 보일러 가스레인지 냉장고 세탁기 TV 스마트폰 컴퓨터 자동차 주택 아파트 빌딩 선박 비행기 등등의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이 행복이고, 세계 각국이 이 문명들을 발전시켜 우리나라를 빼앗으려고 도전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행복을 누리고, 다른 나라들에게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불철주야 죽어라고 노동해야 된다는 게다. 곧, 이러한 논리 술책술수를 부려, 국민들을 속이며, 노동이 행복이라고 강력하게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18년 현재, 지구별에 사는 각기 문명국가의 인류는, 탐욕주의 보수주의 상류층 지배계급 새누리당 정권이 주입하고 세뇌하는 것과는 다르게, 태어나 50년을 살아도, 80년을 살아도, 100세 장수를 누려도 어쩐지 행복하지 않다. 평생 철철 흘러넘치는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살았는데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린 행복은 거의 없다. 길고 긴 100년을 살다가, 죽기 한 달 전에, 그제 까지 살아온 100년의 삶을 깊이 회고해 보아도, 행복했던 시간들이 별로 없다. 기억의 대부분은 학교에서 죽도록 공부한 것과, 회사에서 죽도록 노동한 것과, 늙어서 질병에 시달린 것과, 평생 돈 걱정에 힘겨워하며 산 것 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 우리들의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지배계급의 말대로라면, 한국은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므로, 국민들은 지금 매우 행복해야 된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보일러 난방 되고, 가스레인지 음식요리 되고, 냉장고 TV 세탁기 자동차 다 있던 90년대에 태어나서 2018년 현재까지 살아온 젊은 국민들조차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들도 노동을 하므로 마찬가지다. ........ ........
이 현실은 선진국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국민들이, 그렇게 행복하다는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100세를 살며 100년 동안을 누렸어도, 그들에게 행복은 온데간데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100세 된 선진국 국민 할머니의 얼굴에서, 100년 동안 그 풍요로운 물품문명의 행복을 누렸던 인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도리어 피로하고 고단한 표정만 역력하다. 그 행복하다는 물품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학교에 출근하는 청소년 학생들의 얼굴에서도 즐겁고 행복한 표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긴장되고 불안하고 권태로운 인상만 가득하다.
더군다나 문명국가 한국에서만, 행복이라고는 일절 누리지 못해, 행복지수가 0점이 되어,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자살하는 국민들이 해마다 1만3천여 명씩이나 된다. 1996년부터 2015년까지, 20년 동안, 자살자 인구가 22만 명을 훨씬 넘는다. 전 세계적으로는 해마다 수십만 명이 자살하므로, 지난 10년 동안 자살자 인구는 수백만 명이나 될 것이다.
자살자의 전체 숫자는 그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불행한 지를 너무나도 정확히 가름해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80점인데, 유독 자살자들만 행복지수가 0점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절대 아니다. 모든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자살자의 행복지수에서 크게 높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평균 행복지수도 결국 10~20점 사이인 것이다.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들, 자살자가 0점이고, 자살 충동을 느껴보았던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1~5점이고,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행복지수 6~15점이고, 인생이 상당히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16~25점이고, 삶이 조금 고단한 사람이 26~35점이고,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않아 그럭저럭 살만한 사람들이 36~55점이고, 다소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56~75점이고, 행복을 많이 누리는 사람들이 76~90점이고, 아주 행복한 사람들이 91~100점이라고 나누어 볼 수 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 분포도는 26~35점 사이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16~25점 사이가 많고, 다음으로 6~15점 사이와 36~55점 사이가 많을 것이다. 26~35점 사이는 청년시절부터 취직 걱정을 많이 하느라 고통스럽고, 취직을 한 이후에는 연봉이 낮은 기업에 입사해, 항상 생계비용과 문화생활비용과 노후준비비용을 걱정하느라 고통스러운 서민층 국민들이 해당된다. 16~25점 사이는 학교에서 머리에 쥐가 나게 공부하느라 상당히 고통스러운 초중고대학 재학 학생들이 해당 된다. 36~55점 사이는 그다지 돈 걱정을 안 하고 사는 중산층 국민들이 해당된다.
6~15점은 초중고대학에서 성적이 낮아 반에서 꼴찌 대열에 포함되는 학생들과, 질병이 심해 병원생활을 많이 하는 노인들이 해당되고,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기층민으로 전락한 국민들이 해당된다. 1점에서 5점은 이들 중에서 그야말로 좌절과 절망이 심한 국민들이 해당되고, 76~100점은 상류층이 해당되겠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이 있는데, 지구별에서 일어나는 폭력 성폭력 살인 전쟁 등으로 비참하게 병들고, 처참하게 장애를 입고, 끔찍하게 사망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걱정해,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민주진보 진영의 사회운동가들과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행복지수는 마이너스 점수라는 사실이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500여 명이 끔찍하게 사망하고, 세월호 침몰로 304명이 끔찍하게 사망하고, 대구지하철 화재로 또 수백여 명이 죽임당하는 사건들을 보고 국민들은 그야말로 비통하고 처참한 심정에 빠졌다. 이때 이렇게 비통하고 처참한 심정에 빠진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마이너스 점수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만 교통사고로 해마다 6천 명씩 사망하고, 산업재해로 2천 명씩 사망하고, 화재사고로 수백 명씩 죽고, 자연재해로 수십 명씩 죽임 당하는 세상을 인지하는 국민들은 비통하고 처참한 심정에 빠진다. 국민들이 이 사태를 인지하는 시기의 행복지수는 마이너스다. 보통 국민들은 생업에 바빠 이런 참사와 사고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마음이 즐거울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여전히 마이너스라고 말해야 원칙적으로 맞다.
또한 이런 참사를 잊지 않고, 항시 마음에 담고, 참사의 원인과 싸워서, 단 한 명도 사고로 끔찍하게 사망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들은 항시 마음이 너무나 아파 행복지수가 마이너스이다.
어린 학생들이 한 밤중까지도 학원에서 공부하고,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서울 시민의 절반이 자기 소유의 집이 없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이혼하고, 빈곤한 노인들이 말년에 큰 고통을 겪고, 돈이 없어서 결혼도 못하고, 결혼해도 자식을 하나밖에 못 낳고, 수많은 장애인들이 생활의 극심한 불편을 겪고, 많은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는 범죄자가 되는 세상을 인지하는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역시 마이너스다.
또 이런 세상을 너무나도 걱정해, 사회가 이렇게 되는 원인과 싸워,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회운동가들과 지식인들과 정치인들도 마음이 너무나 아파 행복지수가 마이너스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마이너스라고 해야 옳다. 그렇지만 그렇게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국민 평균 행복지수는 겨우 10~20점 사이이다. 이것은 과학기술과 의식주 물품문명이 발달한 지구별의 모든 문명국가에도 적용되는 논리일 것이다. 기술과 문명이 발달하지 않는 나라는 질병, 특히 어린이 질병의 발병률이 높고, 기아의 고통을 당하고 있어서 역시 행복지수는 높지 않다.
자, 그러면 한국 국민들과 선진국 국민들과 인류에게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행복한 삶이 무엇이길 레, 현재의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누리는 삶은 행복하지 않은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어떤 생활이 행복지수 100점의 삶인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끊임없이 문명을 발달시키려는 국가의 탐욕주의 보수주의 상류층 지배계급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국민들에게 진실한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 사색하고 연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인생을 다 살고 난 60대, 70대의 노인들에게도 행복론을 집필할 수 있는 능력을 쌓을 시간을 주지 않아 왔다. 당연히 행복론의 토대인 지구별과 우주에 관해 심도 있는 사색을 할 여유도 주지 않아 왔다.
이들은 다만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다른 국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문명과 기술이 발달했어도, 여전히 더욱 더 일을 해야 한다며, 국민들을 산업노동 현장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더불어 지구별은 이미 정복되었으며, 우주도 인류의 물품문명의 미개척 영역으로서, 언젠가는 인류의 정복 대상이라고 TV를 통해 광고한다.
우리가 지배계급에 종속당하지 않고, 성찰하고 연구할 시간을 벌어, ‘행복지수 100점의 삶이 어떤 생활들로 구성되는가?’를 알아보면, 가장 먼저,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 자체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흙과 물과 풀과 나무와 동물들과 모래와 바위와 석탄과 석유와 철광석 등등 자연생명체들을 파괴하고 죽여야 한다. 이런 자연생명체들을 채굴하고 채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생명체들을 파괴하고 죽이는 악마짓이다.
그런데 흙과 물과 풀과 나무와 동물들과 모래와 바위와 석탄과 석유와 철광석 등등의 자연생명체들은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우리들과 똑같은, 영혼과 의지와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 지능지수가 150이 되고, 감성 이성 지성이 있으며, 사랑과 우정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인류가 이 자연생명체들을 파괴하고 죽이면서, 우리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아가 자연생명체들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까?
집안에서 TV를 시청해도, 집과 TV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주행해도 자동차가 운전자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빌딩의 사무실 안에서 컴퓨터를 보고 일하거나, 공장 안에서 전자제품을 조립해도 빌딩과 컴퓨터와 공장과 전자제품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고로 현대 첨단문명을 누리고 있어도, 어쩐지 인류는 행복하지가 못하다. 그래서 인류는 일단 첨단문명인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철수해야 된다.
그 다음으로 우리들은 평생 노동하며 사는 ‘노동삶’이 아닌, 평생 놀며 사는 ‘놀이삶’을 즐겨야 한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하루 종일, 1년 내내, 평생 동안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는 시간은 긴장되고, 고단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럽다. 밤 8시까지, 9시까지 노동하는 생활을 5일간 연속 하다시피 하고, 이 생활을 한 달 내내 하면 삶이 고통스럽다. 8시에 출근하고, 6시 퇴근하는 생활을, 일주일에 이틀씩 쉬더라도, 1년 내내 하게 되면, 인생이 행복은 없이, 고단하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행복지수 100점의 삶을 살려면, 일단 노동에서 해방되고, 평생 놀이삶을 살아야 된다. 알고 보니,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한 번씩은 노동 없는 삶은 불가능한가? 언제까지 이 노동을 계속해야 되는가? 평생 노동으로 점철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가? 에 대해서 길지는 않지만, 생각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장 회사에 출근해 일을 안 하면, 굶어 죽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별 수 없이 일해야지! 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행복지수 100점의 삶은 어떤 생활들로 구성되는가?’를 알아보면, 다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핵가족화가 완전히 정착된 현대 도시인들이 깨우치기 어렵다. 우리는 갓 난 아기 적에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삼촌 숙모 외삼촌 외숙모 이모 이모부 고모 고모부 친형제 외종형제 이종형제 고종형제 그리고 더 먼 친척들도 두루 보게 된다. 그리고 자라서 결혼하면, 신랑 쪽 가족들과 인척들도 한 번씩은 인사를 다 나눈다. 그리고 마을 친구들과 학교 친구들과 마을이웃들과도 상당히 많이 교제를 한다.
그러나 이런 생활도 그때 잠시 뿐, 서서히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학교공부에 바쁘고, 생계자금을 버는 회사생활에 바쁘고, 또 거주하는 지역을 계속 옮기면서, 이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아기 적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친인척들과 교류하면서 살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결과 현대 도시인들은 공동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공동체가 해체되었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고, 공동체 생활을 해야 된다는 말에 공감이 가지 않고, 공동체를 복원해야 된다는 말에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행복지수 100점의 삶을 살려면, 첫째 조건이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철수해야 되고, 둘째 조건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생 ‘놀이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바로 이 놀이삶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친인척도 바로 이 놀이삶을 더불어 어울려 즐기는 사람들이다. 노동에서 해방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한 달 내내, 1년 내내 놀이삶을 즐기는데 4인 가족끼리만 즐기면 금방 쉽게 물리고 싫증난다. 그래서 놀이삶을 함께 즐길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 당연히 친인척들이 2순위 사람들이다. 놀이삶을 함께 즐기는 다음 사람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 다음 사람들은 마을이웃들이다.
노동에서 해방되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므로, 직장동료와는 놀지 않게 된다. 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동, 마을에서 살게 되므로, 마을이웃이 놀이삶을 교류하는 사람들이다. 도시에서 먼 곳에 떨어진 다른 동의 사람들과는 자주 만나지 않게 된다. 자기가 사는 동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이들과 놀이삶을 즐기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대도시의 인구는 필요가 없는 것이 되고, 거대도시 전체 인구가 마을이웃이 될 수도 없다. 마을이웃이라 함은 태초원시시대의 자연마을이웃을 가리킬 뿐이다.
이렇게 가족과 친인척과 친구와 마을이웃이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들 중에 동물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비록 동물들이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인간과 교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동물들도 놀이삶의 교류 대상이고, 공동체 구성원이다.
또 한 가지가 공동체 구성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들과 숲과 호수와 강과 산과 바다와 하늘과 구름과 창공 등의 자연은 비록 인간과 언어가 통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존재자들이다. 주말에 산에 올라 광활한 하계 아래 산하를 조망하면 행복하고, 바닷가에 가서 망망대해를 전망하면 행복하고, 강길을 따라 산보하면 무척 안정되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놀이삶의 종류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다채로울 것이다. 하루 종일, 1년 내내, 평생 동안 놀기만 하니까, 수십 수백 가지의 놀이삶들을 개발해 낼 것이다. 우주선을 만든 인간이므로, 놀이삶의 종류도 엄청나게 많이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화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뛴다. 대화의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대화의 내용은 찬차만별이므로, 대화 상대가 바뀔 때마다 대화하는 행복이 느껴질 것이다. 남는 것이 시간이므로, 자기 자신이 작사를 하고, 작곡도 해서, 자기 고유의 노래를 만들어, 자기가 직접 부르고, 때론 사람들 앞에서 공연도 할 수 있다. 자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마음에 들 때, 굉장한 행복이 찾아 올 것이다. 평생 동안 수십 곡을 만들어, 그 때마다 행복하면, 평생 동안의 행복지수는 엄청나게 높다.
역시 남는 것이 시간이므로, 자기 자신이 이야기를 쓰고, 그 이야기에 맞는 춤을 개발해, 자기 고유의 춤을 만들어, 자기가 직접 여러 사람들과 춤을 출 수도 있다. 자기가 개발한 자신의 춤이 마음에 들 때, 굉장히 행복할 것이다.
평생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므로, 아무리 운동을 못하더라도, 정열적으로 몇 가지 운동에 도전해, 운동 실력을 꾸준히 상승시킬 수 있고, 능숙하게 잘 할 수도 있다. 실력이 상승할 때마다 매우 보람 있고, 매우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 여러 가지를 개발해 평생 동안 즐기면, 평생 동안의 행복지수는 엄청나게 상승한다.
수십 수백 명의 공동체 사람들과의 놀이삶은 정말로 다양할 것이다. 때론 둘이서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뛰어 놀고,, 때론 셋이서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뛰어 놀고,, 때론 10명이서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뛰어 놀고,, 때론 수백 명의 공동체 구성원 전부가 모여 축제를 벌인다. 축제는 보름에 한 번씩 실시한다.
대화하는 상대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다른 대화를 할 수 있어 즐겁고, 노래 부르는 상대가 다르면, 다른 노래를 들을 수 있어 즐겁고, 춤을 둘이서 출 때와, 셋이서 출 때와, 30명이서 출 때는 서로 다른 행복감이 솟아오른다. A팀과 축구를 할 때와 B팀과 축구를 할 때와, C팀과 축구를 할 때는 서로 다른 경기 양상이 벌어져, 그에 따른 행복감이 생겨난다. 친구들과 수영을 할 때 행복 다르고, 친인척들과 수영할 때 행복 다르고, 마을이웃들과 수영할 때 행복이 달라, 수영 한 종목만으로도 다양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
대화와 노래와 춤과 운동 외에 놀이삶은 훨씬 더 많다. 어렸을 적, 밀창이라는 놀이, 오징어라는 놀이 등을 했었는데, 어른들에게도 어른들의 감성에 맞는 놀이가 있을 것이다. 남는 것이 시간이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직접 해보며 다양한 놀이를 개발할 수 있다. 청년의 놀이, 중년의 놀이, 장년의 놀이, 노년의 놀이가 다 달라, 그 연령대에 맞는 놀이를 할 때마다 다른 행복감을 향유한다.
뿐만 아니라, 이론가의 적성을 가진 사람들은 시를 지을 때도 행복하고, 소설을 쓸 때도 행복하고, 논설문을 집필할 때도 역시 즐겁고 행복하다. 언어를 공부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기쁘고 행복하고, 물리를 연구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즐겁고 행복하다. 이런 공부와 연구도 놀이삶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놀이삶을 향유하는 상상만 해도 행복한데, 실제로 직접 그렇게 생활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제 서야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우칠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국민 모두가, 인류 모두가 노동을 안 하면, 당장 도시가스가 끊기고, 전기가 끊겨서 집에서 음식을 요리할 수 없고, 난방이 안 되어 겨울에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없고, 여름에 시원하게 잠을 못 자고, 냉장고 식품이 다 썩어버리고, 저녁에 전등이 안 들어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화장실 변기 물이 안 내려가고, 수돗물이 안 나와 밥도 지을 수 없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삶을 살 수가 없는데, 과연 노동에서 해방될 방법이 있는가?
모든 국민들이 노동을 그만두면, 도시문명 기능이 마비되어 버리므로, 도저히 노동을 그만두고 해방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루 종일, 1년 내내, 평생 동안 놀이삶을 향유하는 것은 어리석고 낭만적인 공상에 지나지 않을 듯싶다.
자, 여기서 우리는 태초원시시대를 상상해 보아야 된다. 평생 노동으로 점철되는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고, 행복지수가 겨우 10~20점 사이밖에 안 되므로, 포기하지 말고, 머리를 돌려서, 원래 이 지구별에 존재했던, 태초원시시대의 놀이삶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인류학자들이 인류가 탄생한 시점을 약 700만 년 전으로 추정하므로, 1만 년 전 최초로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까지, 699만 년 동안의 인류는 오로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놀이삶 만을 즐겼었다.
나무열매나 풀을 먹는 것 외에 사냥을 했다지만, 이것은 나무열매와 풀이 부족할 때만 했고, 사실상 열매와 풀은 부족할 리 없었다. 그래서 태초원시시대 인류는 사냥이라는 노동도 하지 않았으며, 평생 놀이삶을 향유하였고, 행복지수는 당연히 100점 이었다. 그 시대의 지구별 모든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100점 이었으니, 말 그대로 천국극락이었었다.
태초원시시대에는 인간들끼리만 사회를 구성하고 산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인간과 동물들과 식물생명체들과 물질생명체들이 모두 참여해서 한 사회를 이루고 살았었다. 현재 한국 1개 시군의 1/3의 면적의 영토에서 인간과 돼지 양 사슴 개 늑대 다람쥐 호랑이 소 닭 꿩 비둘기 까치 학 잉어 매기 가물치 고등어 명태 오징어 고래 억새 쇠뜨기 진달래꽃 철쭉꽃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소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흙 물 바위 산소 질소 구름 하늘 등등의 생명들이 마을국가를 구성하고 살았던 것이다. 마을국가의 구성원 숫자는 동물이 약 6400명, 식물생명체가 550명, 물질생명체가 50명 정도였고, 들과 숲과 호수와 강과 산과 바다가 있었다.
여기서 인간은 하루는 돼지와 다채로운 놀이삶을 즐기고, 하루는 사슴과 다채로운 놀이삶을 즐기고, 다음 하루는 호수에서 매기들과 수영을 하며 놀이삶을 즐기고, 그 다음 하루는 비둘기와 다양하고 이채로운 놀이삶을 향유하고, 또 그 다음날에는 바닷가에서 고래와 다채롭고 새로운 놀이삶을 즐겼다. 수천 명의 동물들과 1년 내내, 평생 동안 다양하고 다양한 놀이삶을 향유하며, 풍요롭고 무궁한 행복을 누렸었다.
그리고 태초원시시대에는 식물생명체들과 물질생명체들도 지능지수가 150이 넘고, 감성이성지성 수준이 높고, 사랑과 우정이 가득 차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고등생명체로서 동물들과 사회를 이루었는데, 인류는 진달래꽃과도 억새와도 소나무와도 흙과도 물과도 하늘과도 대화가 통했고, 다양하고 신선하고 신비한 놀이삶을 향유하였다. 이 식물물질 생명체들과의 놀이삶은 어떤 측면에서는 동물들과의 놀이삶보다 신비하게 행복하였고, 인간들끼리의 놀이삶보다도 훨씬 더 신비하게 행복하였다.
이 태초원시시대는 말 그대로 천국극락에 다름 아니었었다. 그러다가 약 7천 년 전부터서 오늘날처럼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동물들은 언어를 잃고, 지능을 소실하고, 식물생명체와 물질생명체들도 문명의 도구이자 재료인 하등존재자로 전락했다.
태초원시시대가 천국극락이었다면, 그럼 그때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말도 안 된다. 왜, 태초원시시대 인류의 행복지수가 100점이냐? 원시시대는 질병을 치료할 의학기술이 없어서, 낳자마자 사망하는 아기들도 많았고, 어릴 적 죽는 어린이들도 많았고, 수명이 40살도 안 되어 장수도 못했었는데, 어떻게 행복지수가 100점이냐? 또 호랑이 사자 늑대 여우 등의 맹수에게 잡아먹혀 사망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어찌 행복지수가 100점이나 되냐? 또 나무열매와 풀이 풍족했다는 근거도 없고, 풍족했다고 하더라도 열매와 풀만 먹는 삶이 어찌 감히 행복지수가 100이 되는가? 또 원시시대는 집과 옷이 없어서 얼어 죽는 경우도 많았을 텐데 행복지수가 100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부정할 것이다. 도리어 태초원시시대는 지옥에 다름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지구별에 천국이었던 시절은 없었을까? 현재도 과거도 천국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앞으로도 천국은 없을까? 그래서 이 지구별에 천국이란 없는 걸까? 아니면 태초원시시대는 천국이고, 현대는 지옥인가? 아니면, 태초원시시대가 지옥이고, 현대가 천국인가? 그것도 아니면 태초원시시대와 현대 모두 그냥 그만그만하게 그럭저럭 크게 행복하지도 않고, 크게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유지했던 시대인가?
그럼, 왜 이 세상은 이렇게 되어 있는 걸까? 왜 이 지구별은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극락이 되지 못하는가? 행복지수 100점의 세상, 완벽한 천국극락이 못 되는가? 왜 지옥의 성격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태초원시시대는 왜 지옥이나 다름없었을까? 아니면 왜 현대는 지옥이나 다름없을까? 언제, 어떻게, 누가, 왜, 지구별을 창조했길 레, 지구별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나의 논리대로라면, 왜 지구별의 고대로부터 현대를 지옥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지구별을 누가, 왜 창조했는지? 언제, 어떻게 창조했는지? 무슨 목적과 목표로 창조했는가? 연구해 보아야 된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별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왜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창조해갔는지?’를 연구해 왔다. 그 사람들 모두가, 인생이 고달프고 고통스런 지옥이나 다름없어서, 지옥에서 벗어나 해방되어 천국극락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그런 질문을 던지고 연구해 보았다고 사려 된다.
자, 나의 연구 결과는 어째든 고대로부터 현대의 지구별은 지옥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주장대로, 태초원시의 지구별은 지옥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지구별을 창조한 주체는 지극히도 사악하고 악독한 존재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악하고 악독하니까, 수 없이 많은 인류에게 고통을 주었고, 생명체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천국을 그리워하고, 천국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존재로 창조했을까? 인간은 거의 대다수 사람들이 선과 정의를 지향하므로, 그 창조주는 왜 인간을 선과 정의를 지향하도록 창조했을까?
일단, 여기서 인간은 천국에서 살고 싶은, 선과 정의를 지향하는 존재이고, 반면에 이 인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 자들은 분명히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들을 일단 악신惡神들이라고 하자.
1789년에 프랑스에서 민주주의 대혁명이 일어났고, 1917년에 러시아에서 평등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1945년에 북한에서 평등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1949년에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했다. 모두 다 자기 국가를 천국극락으로 만들어서, 국민들을 행복지수 100점을 누리고 살도록 하고자,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목숨을 걸고 일으켰다. 그럼 사악하고 악독하면서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자, 악신들이 지구별을 관장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혁명이 발생했을까? 그것은 이들에 대적하는 선하고 정의로우면서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자, 선신들이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지구별 인류의 도시문명은 지옥에 다름 아니므로, 악신들이 인류에게 도시문명을 건설하도록 해준 것이다. 악신들이 인류로 하여금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 등의 도시문명을 건설해가며, 평생 동안 노동을 하면서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도시문명을 앞장서서 행복한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산업노동 현장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이 있다. 대다수 인류는 노동이 고통스러워, 싫어서, 노동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데, 이들은 그 노동이 곧, 행복이라고 주장하며 권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선인인가? 악인인가?
몸집은 다 커가고 있지만, 정신은 아직 어린 중고교 학생들을 자정 12시 한밤중까지 공부노동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배계급도 있고, 상류층이 재산이 늘어간다고, 서민층 국민들에게 그 돈을 다 나누어 주지 않는데, 상류층의 세금을 줄여주는 대통령과 정당이 있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연봉이 줄어드는 피해를 입거나 말거나, 일 잘하는 능력이 있는 국민들에게만 연봉을 올려주겠다는 성과연봉제를 실시하려 한 대통령과 정당이 있고, 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일본에서 납치해 암살을 시도하고, 시민사회운동계의 대표적인 활동가를 산에서 암살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분명히 악인들이다. 그래 지구별에는 악인들도 있다.
인류는 대략 1만 년 전경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해, 그때부터 본격적인 노동을 시작한다. 그 이전, 태초원시시대에 노동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그런데 농사노동을 시작해 많은 노동시간과 높은 노동강도를 만들어 놓았다. 결국 인류의 삶은 고달파졌고 고통스러워졌다. 그러면 악신들이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힘으로 이렇게 인류를 이끌어갔고, 인간사회에서는 누가 이렇게 인류를 이끌어 갔는가? 그 사람들이 바로 악인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선인들이 풍부한 식물채집으로 먹고 살며, 인생 대다수의 시간 동안 놀이삶을 향유하던 태초원시시대 문화를 깨뜨리고,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농사기술을 개발해 노동력을 강화시켜 행복지수를 떨어뜨렸을 리 없다.
민주진보 진영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국민들의 노동시간을 줄여,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했다. 이로써 대다수 국민들이 한나절 더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실질적으로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올라갔다. 또한 주 5일 근무제에 반대하고, 갈수록 빈부격차를 벌여가던 보수진영의 재벌들을 규제하여,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목숨을 바쳐서 노력했다.
이렇게 지구별은 현재 선신도 있고, 선인도 있고, 악신도 있고, 악인도 존재한다. 그래서 선신은 선인들과 힘을 모으고, 악신은 악인들과 힘을 모아, 선신선인은 수많은 국민들에게 천국극락을 만들어 주려고 하고, 악신악인들은 수많은 국민들을 계속 산업노동현장으로 내몰아 물품문명과 의식주문명과 사무교통통신문명을 더 발전시키고, 실질적으로 지구촌에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여, 패권을 장악하고, 모든 나라들을 빼앗아, 자신들이 직접 통치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각국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악신악인들은 초중고대학 교육과정에서부터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일류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을 따라잡아야 된다! 하며 지구촌에서 패권을 다투고 있다. 20세기 초중반 까지만 해도 지구촌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려고 세계전쟁을 저질렀던 강대국들도 있었다.
그리고 악신악인들은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명씩 자살로 사망하게 만들고, 교통사고로 수만 명씩 사망하게 만들고, 산업재해로도 수만 명씩이나 죽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죽지 않는 사람은 매일처럼 죽도록 중노동에 시달리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자, 그러면 지구별은 누가 창조했을까? 악신이 창조했나? 선신이 창조했나? 악신과 선신이 공동으로 창조했을까? 인류는 선신의 피조물인가? 아니면 악신의 피조물인가? 아니면 선신 악신 공동의 피조물일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하고 명석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과연 피조물이라면 행복할까? 자기가 자신을 창조했다면 행복할까? 인류는 과연 피조물이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창조해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존재이기를 바라는가? 선신은, 피조물들이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절망하는데, 과연 피조물을 창조할까? 에 대한 대답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선신이 창조해서,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인류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원시시대에는 인류의 삶을 미개인의 삶, 야만인의 삶으로 만들었고, 현대에는 평생 죽도록 노동만 하는 삶으로 만들고, 나아가 한국에서만 자살로 해마다 1만3천 명이 죽는 지옥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선신이 창조했다면, 인류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리 없다. 선신이 창조했다면, 인류는 지구별을 천국극락으로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진정 선신이라면 피조물을 창조하지 않는다. 피조물들이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이 선신이나 악신이 만든 피조물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피조물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서글프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 직접 창조했기를 바라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자신이 원하는 감성과 이성과 지성을 소유하게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얼굴과 몸매를 갖게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태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넓고 깊게 생각해보면, 인간은 인간이 만들고, 개는 개가 만들고, 돼지는 돼지가 창조하고, 닭은 닭이 창조하고, 사슴은 당연히 사슴이 만들었고, 비둘기는 마땅히 비둘기가 만들었고, 억새는 억새가 창조했고, 소나무는 소나무가 창조했고, 흙은 흙이 만들었고, 물은 물이 만들었고, 하늘은 하늘이 창조했다면 얼마나 이상적인가? 지구별의 만물과 우주의 만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독립성 있고, 자주성 있고, 주체성 있어서 이상적이다. 그래서 일단 여기서는 자기는 자기가 창조했다는, 그래서 우주는 우주의 생명체들이 직접 창조했다는 [자기참여우주창조론]을 받아들이자.
나는 내가 만들었다면, 내가 나를 창조할 줄 알아야 되고, 나의 몸을 성장시킬 줄 알아야 되고, 창조하는 과정이 기억이 나야 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의 태아일 적 몸과 영혼을 만들 줄 알고, 태어난 후 죽을 때까지 몸과 영혼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하며, 태아를 만들던 과정이 선명히 기억이 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전지전능적인 능력에 해당된다.
어머니가 10개월 동안 먹은 음식인 곡식과 채소와 고기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우연히 나의 태아일 적 몸과 영혼으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곡식과 채소와 고기로 선신이나 악신이 나의 태아일 적 몸과 영혼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선신이나 악신이 곡식과 채소와 고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나의 몸과 영혼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이제 확연히 잘 알 수 있다. 선신이나 악신이 창조한 것은 아니므로, 정답은 첫 번째 가설이거나, 아니면 앞에서 말한 대로, 생명체 자신이 그 무엇으로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는 [자기참여우주창조론]을 얘기해보자.
자, 여기서 내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몸과 영혼을 만들었다면, 나는 태아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어야 된다. 태아가 되기 전의 그 ‘무엇생명체’가 곡식과 채소와 고기로 태아의 몸과 영혼을 만들었던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만들었던지 하면 된다. 그러면 그 ‘무엇생명체’란 어떤 것인가? 그 ‘무엇생명체’는 당연히 물체가 아니고 영혼이나 영혼과 비슷한 것이어야 된다. 물체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배 피부와 살을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나 영혼과 비슷한 것만이 어머니의 배 피부와 살을 투과하여 들어갈 수 있다. 매우 전지전능적인 능력이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 ‘무엇생명체’는 반드시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이 있는 생명체이어야 된다. 곧, ‘무엇 생명체’가 나의 태아일 적 몸을 만들고서, 태아의 영혼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생명체가 태아의 몸체로도 변화하고, 태아의 영혼으로 변화한 게다. 태아가 갓 난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로 자라고, 청년으로 성장하고, 어른이 되면, 그 ‘무엇생명체’가 기억난다. 어른이 되면 ‘무엇생명체’가 자기의 태아일 적 몸체와 영혼을 만드는 과정이 기억난다. 곧, 무엇생명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렇게 되어 자기는 자기 자신이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영혼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의 태아일 적 몸체와 영혼을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전지전능적인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영혼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란 사랑 우정 기쁨 즐거움 희열 황홀함 행복 등등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일진데, 이 생명체는 인간의 태아를 여성의 자궁 속에서 만들 능력은 없다. 따라서 나의 태아를 나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만든 생명체는 ‘영혼 비슷한 무엇생명체’이다.
그러면 이 ‘무엇생명체’는 어디서 왔는가? 언제부터 있었을까?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왜 지금 내가 ‘무엇생명체’일 적의 내가 기억나지 않는가? 내가 엄마의 배 속에서 나의 태아를 만들기 전의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 나는 무엇이 되는가?
[자기참여우조창조론]을 받아들였기에, 인간과 물질식물동물 생명체들은 각각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창조했고, 모든 인간과 모든 포유류 동물들은 엄마의 자궁 속에서 자기가 자기의 태아일 적 몸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태아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이 인간과 포유류 동물들은 자기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몸체로 변화해, 태아를 창조하던 과정이 훤하게 기억난다.
그러면 태아로 변화해, 태아를 창조하기 전 각각의 자기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지전능적인 능력이 내재한 생명체들이어야 된다. 그래야만 각각 자기 엄마의 배 피부와 살을 투과해, 각각 자기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너무나도 정밀하고 어려운 인간의 태아를 만들 수 있고,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위대한 영혼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과 포유류 동물들이 엄마의 자궁 속에서 자기 자신의 태아일 적 몸체를 만들기 전 있었던, 전지전능적인 능력을 내재한 생명체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 생명체들은 수없이 많은데,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언제부터 있었을까?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왜 그 전지전능적인 능력이 내재한 생명체일 적의 자기 자신이 기억나지 않는가?
인간과 동물들은 70년이나 80년, 10년이나 20년 살고나면 모두가 죽게 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들과 동물들은 이렇게 죽으면 자기 자신은 완전히 사라지는 줄 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부모님과는 어떠한 교류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부모님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안다. 그리하여 자기도 죽으면 완전히 끝나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춘기일 적 한 소녀가 한 소년을 멀리서 지긋이 바라볼 때, 생겨나는 가슴 설레는 몸의 반응은 신성神性 없는 기계의 반응이 아니다. 소녀 소년이 둘이서 처음 만날 때, 가슴이 콩닥 콩닥 뛰는 몸의 반응은 신성神性 없는 기계의 반응이 아니다. 소녀 소년이 둘이서 바닷가에 놀러가, 수영을 하러, 바닷물로 걸어 들어갈 때, 발에서부터 허벅지로 허리로 가슴으로 이어지는 몸의 반응은 신성 없는 몸의 반응이 아니다. 둘이서 추운 겨울에 도심의 어느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카페에 들어갔을 때, 얼굴에서 손으로 발로 몸 전체로 이어지는 몸의 반응은 신성 없는 몸의 반응이 아니다. 그것을 어찌 神性 없는 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가슴 설레는 느낌과 가슴 콩닥콩닥 뛰는 느낌은, 신성神性이 담지 된, 가슴과 허리 위 상체의 반응이다. 수영하러 바닷물에 들어갈 때 생겨나는 시원한 행복감은, 신성神性이 담지 된, 발과 허벅지와 허리와 가슴의 반응이다. 추운 산에서 내려와 카페에 들어갔을 때 생겨나는 따뜻한 행복감은, 신성이 담지 된, 얼굴과 손과 발과 몸체의 반응이다. 그렇지 않은가? 몸 전체에 신성神性이 담지 되어 있지 않다면, 몸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다. 몸 전체에 신성神性이 담지 되어 있기에, 가슴 설레고, 가슴 콩닥콩닥 뛰고, 바닷물에 시원해 행복해 하고, 카페가 따듯해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녀 소년이 둘이서 만나 얼굴을 보면, 볼 때마다 왠지 모를 기쁨과 즐거움이 솟아나는데, 이것도 신성이 담지 된 온 몸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사귄 지 오래 되어, 둘이서 몸을 부둥켜안아 포옹하면, 포옹할 때마다 왠지 모를 희열과 황홀함이 솟구쳐 오르는데, 이것도 신성神性이 담지 된 온 몸으로 희열과 황홀함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몸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신성이 내재되어 있는 몸인 것이다.
소녀 소년이 청년이 되어서 결혼하여 아기를 낳았을 때, 둘이, 갓 난 아기를 자기들 어깨 사이에 놓고, 아기를 바라보다가, 아기의 얼굴 위에서 둘의 눈빛이 부딪혔을 때, 둘은 얼굴과 가슴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소녀 소년이 청년을 넘어 중년이 되어, 이들의 아기가 다시 청년이 되어서 결혼식을 하는데, 예식장의 주례 선생님 아래 서 있는 그 두 자기 자식을 바라볼 때, 둘은 온 몸으로 흐뭇함과 만감을 느낀다. 소녀 소년이 중년을 넘어 장년이 되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손녀 손자들의 모습을 볼 때도, 온 몸으로 귀여움을 느끼고,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도, 얼굴과 가슴으로 자신이 늙었다는 회한을 느낀다. 소녀 소년이 60년 동안을 해로하여 이제 늙어서, 남편이 병들어 먼저 죽게 되었는데, 어느 날 누워있던 남편이 마침내 임종할 때, 늙은 소녀는 온 몸으로 처연한 슬픔을 느낀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생겨난다. 소녀 소년이 80평생을 살아가면서 둘이서 생활할 때, 가족들과 생활할 때, 친인척들과 생활할 때, 친구들과 생활할 때, 많은 마을이웃 사람들과 생활할 때, 직장 동료들과 생활할 때, 생겨나는 감정들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다양하고 많다. 소녀 소년의 이 다양하고 많은 감정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몸에서 생겨나고, 뇌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모든 사람들도 태어나 죽을 때까지 수많은 감정을 느끼는데, 이 모두가 몸에서 생겨나고, 뇌에 그대로 저장된다.
소녀 소년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표출 하도록 이끌고 견인하는 신성神性을 한 마디로 인간의 ‘체성, 감성, 이성, 지성’이라고 규정한다. 소녀 소년의 몸에는 ‘체성, 감성, 이성, 지성’이 있기 때문에, 80평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생활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녀 소년이 처음 만남 장소를 결정했을 때, 그것은 소녀 소년이 어느 장소가 좋을까? 온 몸으로 뛰어다니며 알아보는 연구를 해서, 이곳이 왜, 어떻게 좋겠다고 개념을 구성해 결정했다. 결단코 한 지점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으면서, 뇌로만 결정한 것이 아니다. ‘체성’이 몸을 이끌고 만남 장소를 알아보려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알아본 것이다. ‘체성’이 여기가 좋다고 느끼고, 왜 어떤 점이 좋을 것 같다고 연구해, 개념을 구성해 결정하면, 뇌의 감성은 여기가 좋다고 확인할 뿐이고, 뇌의 이성은 왜 어떤 점이 좋은지 그 개념만 확인할 뿐이고, 지성은 좋은 감정과 개념을 저장할 뿐이다.
부부가 된 소녀 소년이 아기를 봄에 낳을까? 가을에 낳을까? 결정한 것도 온 몸으로 여러 가지 장단점과 가족생활 회사생활 등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판단하는 연구를 해서, 개념을 구성해,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결단코 집에서 붙박이가 되어 있으면서, 뇌로만 결정한 것이 아니다. ‘체성’이 부부가 된 소녀 소년의 몸을 이끌고 가족생활도 했고, 회사생활도 했는데, 바로 이 생활들에서 ‘체성’이 봄이 좋을지 가을이 좋을지 느끼고, 그 생활들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판단하는 연구과정을 거쳐, 개념을 구성해 한 계절을 결정한 것이다. 뇌의 감성은 어느 계절이 좋다고 확인할 뿐이고, 이성은 왜 어떤 점이 좋은 지 그 개념만 확인할 뿐이고, 지성은 좋은 감정과 개념을 저장할 뿐이다.
중년의 부모가 된 소녀 소년 둘이서, 자식의 결혼식 날짜와 예식장을 결정했을 때, 그것도 온 몸으로 언제가 좋을까? 어느 예식장이 좋을까? 여러 가지를 분석하고 종합하고 판단하는 연구를 해서, 왜 그 날짜가 좋고, 그 예식장이 좋은지 개념을 구성해서 결정했다. 이 모든 것을 ‘체성’이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했고, 뇌의 감성과 이성과 지성은 저장했을 뿐이다.
소녀 소년의 몸의 ‘체성’은 몸을 이끌고 80평생을 살아가면서 그야말로 무수한 감정을 느끼고, 무수한 생활들을 연구하고, 수많은 개념을 구성한다. 소녀 소년의 뇌에는 80평생 동안 느꼈던 감정들과, 분석하고 종합하고 판단하는 연구를 통해 구성한 개념들과 생활들이 확인되고 종합되고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은 한 마디로 신성神性이다. 물체가 아니다. 인간의 몸에는 이러한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동물의 몸체에도 체성 감성 이성 지성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식물생명체들과 물질생명체들의 몸체에도 이것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몸체〓신성神性’이다. ‘뇌〓신성神性’이다. 몸 전부가 신성이 내재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동물들의 몸체 전부가 신성이 내재한 것이며, 식물생명체와 물질생명체들의 몸체에도 신성이 내재해 있다.
그럼, 우리가 죽으면, 몸체와 뇌에 담지 된 신성은 어떻게 될까? 몸체에 담지 된 신성 神性인,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이 주관하여, 80평생 살아가면서 실행했던 무수한 생활들과, 이 생활들에서 생겨난 감정들과, 분석들과 판단들과, 이를 통해 구성된 개념들은 어떻게 될까? 결코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신성神性이기 때문에 그렇다. 신성은 죽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신성은 죽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 내가 죽더라도, 나는 소멸하지 않고, 나의 신성은 살아남게 된다. 동물들이 죽더라도, 동물들의 신성은 살아남게 되고, 식물생명체와 물질생명체들이 죽더라도, 신성은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몸체가 죽으면, 신성神性인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은 몸체와 분리되어,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이 생명체는 죽은 몸체를 변화시켜, 이 죽은 몸체도 생명체로 만든다. 그렇게 변화를 마무리 하면, 한 명의 완벽한 ‘무엇생명체A’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 이 ‘무엇생명체A’는 뭐일까?
내가 죽은 후에, 죽은 몸체를 변화시켜, 이루어진 한 명의 완벽한 ‘무엇생명체A’와 내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몸체로 변화하기 위해, 엄마의 뱃속을 투과해 들어간, ‘무엇생명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죽은 후의 나와 태어나기 전의 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당연히 똑같은 나이다. 전자는 후자보다 80평생을 더 살아온 나이다. 태어나기 전의 나에게, 80평생 동안의 무수한 감정들과 수많은 분석들과 수많은 판단들과 다양한 개념들로 이루어진 총합인 삶이 덧붙여진 나일뿐이다. 내가 그 만큼 더 성장했고, 그 만큼, 더 나이를 먹었고, 그 만큼 행복양이 축적된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 죽은 몸체와 분리된 신성이 담지 된 일부의 생명체는 구체적으로 무슨 활동을 하는가? 곧,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은 구체적으로 무슨 생활을 하는가? 생명체이므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생활할 텐데 어떻게 하는가? 곧바로 죽은 몸체를 ‘무엇생명체A’ 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능동적으로 천천히 할 수도 있고, 빨리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으면, 죽은 몸체와 체성감성이성지성이 분리되는데, 이 체성감성이성지성은 사물들 볼 수 있고, 사물을 만질 수 있고, 생명체들과 대화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죽은 사물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죽은 몸체에서 분리된 체성감성이성지성은 창공을 날며, 도시를 굽어볼 수 있고,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고, 버스 안에서도 있을 수 있고, 시장을 구경할 수도 있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점에서 책장을 넘기면 책을 볼 수도 있고, 공연장에서 노래를 감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죽은 몸체를 ‘무엇생명체A’로 변화시키는데 주력한다. 그리고 ‘무엇생명체A’ 곧, 80년을 더 산 ‘무엇생명체’가 되면, 다시금 어느 젊은 신혼부부 여성의 자궁 속에서 다시금 태아의 몸체와 영혼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죽은 후의 나는 다른 여성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 새로운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새로 엄마아빠가 될 사람들과 사전에 논의가 필요함은 당연하다. 인간과 동물들이 죽으면 이런 활동들이 펼쳐진다.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몸을 만들었었는데, 이때의 ‘무엇생명체’도 당연히, 창공을 날아다니며, 도시를 굽어다 볼 수 있고, 음식집에 들어가 밥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고, 전철 안에서도 있을 수 있고, 시장을 구경할 수도 있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더불어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점에서 어느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책을 볼 수도 있고, 공연장에서 노래를 감상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엄마의 자궁 속에서 다시금 태아의 몸체와 영혼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나의 태아일적 아기를 만들기 전에, 나는 한 인간으로 60년 살다가 죽은 “그 무엇 생명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인생 60년을 살고 죽으면, 나는 또 다시 60년을 더 산 “그 무엇 생명체”가 된다. 이어서 새로운 엄마의 자궁 속에서 다시금 나의 태아일적 아기를 창조할 수 있다.
내가 죽으면, 몸체는 죽고, 체성감성이성지성은 살아남아 육체를 모두다 체성감성이성지성으로 윤회시킨다. 그리고 이어서 이번 생애를 살았던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엄마 아빠를 선택해, 새로운 엄마의 자궁 속에서, 새로운 나의 태아를 창조한다. 다음번에는 한 사슴의 자궁 속에서 사슴의 태아를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으로서 40년 살고 죽으면, 다시, 지역을 바꾸어, 다른 사슴의 자궁 속에서, 다시금 사슴의 태아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죽으면, 다음에는, 잉어의 자궁 속에서 알을 창조하고, 어미가 알을 낳으면, 잉어의 태아를 만들어, 아기 잉어가 되고, 어른 잉어가 되어가면서 한 인생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들로 윤회하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이 과정을 지속해 왔을 것이다.
내가 이번 생애에 인간의 태아를 만들어 보았으므로, 다음 생애에는 사슴의 태아도 만들 수 있다. 사슴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어려울 것이 없다. 기본적으로 맛있는 풀을 뜯어먹으며 생존하고, 다른 사슴들과 어울려 살면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여성의 몸속에서 태어나지 않고, 사슴 암컷의 자궁 속에서 태아를 만들어,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내가 인간의 태아를 만들어 보았다면, 침팬지의 태아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사슴 말고, 침팬지 암컷의 자궁 속에서 태아를 만들어, 침팬지로 태어나 살아갈 수도 있다. 이렇게 나는 다른 동물들로도 태어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이때도 새로운 엄마아빠가 되는 동물들과 사전 논의가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렇게 내가 인간으로 80평생을 산 다음에 죽어, 인간이나 사슴이나 침팬지 등 여러 동물 중에 사슴으로 태어나 또 다시 40년 살았다면, 나는 이제 120년을 산 결과가 된다. 사슴으로 40년을 다 살고 나서, 죽은 다음에는 나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든지, 사슴으로 태어나든지, 침팬지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이번에는 비둘기의 몸을 만들어 비둘기로 살아보든지, 아니면 호수 물속에서 잉어의 몸을 만들어 잉어로 살아보든지, 바다에서 고래의 몸을 만들어 고래로 살 수도 있다.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올 줄 알았으므로, 비둘기 잉어 고래로서 살아가는 방법도 알 수 있다. 엄마 비둘기와 엄마 잉어와 엄마 고래가 알려주는 대로 살면 되고, 엄마와 떨어져 살면, 내겐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이 인간일 적의 그대로 구비 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동물로 사는 방법을 배우고 연구하면서 살아가면 그뿐이다. 같은 동물인데 삶을 사는 원리가 다를 리 없다. 만일 내가 고래를 선택해, 고래의 자궁 속에서 태아의 몸을 만들어 태어나 고래로서 70년 살았다면, 이제 나는 190년을 살았다.
그 후로도 계속 다른 동물들로 지속 태어나서, 지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동물로 살다 죽은 후에, 소나무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이번에는, 나는 어느 산에서 빈 공간에 솔방울을 만들고, 계속해서 뿌리를 뻗고, 키를 키우며 다른 소나무들처럼 살아갈 수 있다. 또 만일 내가 소나무로 살다가 죽은 후에, 계곡 바위틈에서 흘러나와, 강으로 흘러가고, 바다에서도 여기저기로 파도치며 흘러가는 물로 사는 방법을 안다면, 나는 산속 바위틈에서 물 수백 리터를 만들어, 다른 물들과 함께 물로 살아갈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하면, 나는 내가 동물로 살기도 하고, 식물생명체로 살기도 하고, 물질생명체로 살기도 하면서 앞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이른바 윤회이다. 나는 인간과 동물들과 식물생명체들과 물질생명체들로 윤회하는 존재이다. 윤회하는 존재라면, 아주 초월적인 존재이고, 전지전능적인 존재이다. 그렇지 않은가?
물질식물동물 생명체와 신神적인 ‘무엇생명체’를 지속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초월적이고 전지전능적인 존재이다. 물체생명체일 적에도 꽤 초월적이고 전지전능적인 능력이 담지 되어 있는 것이고, 신神적인 ‘무엇생명체’일 적에도 굉장히 초월적이고 전지전능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들과 식물생명체들과 물질생명체들은 전지전능적인 존재이다. 즉, 전지전능한 신에 가깝다. 내가 바로 그런 신神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동물일 적에는 동물신, 식물생명체일 적에는 식물신, 물질생명체일 적에는 물질신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윤회를 할 때에는 호랑이로 태어나 살아갈 수도 있고, 비둘기로 태어나 살아갈 수도 있고, 고등어로 태어나 살아갈 수도 있고, 나아가 진달래꽃의 몸체를 만들어 태어나 살아갈 수도 있으며, 소나무의 몸체를 만들어 태어나 살아갈 수도 있으며, 흙의 몸체를 만들어 한 인생 살 수도 있으며, 지구의 내부 핵을 이루는 물질생명체로 태어나 한 인생 살 수도 있으며, 하늘의 몸체를 만들어 한 인생 살 수도 있다.
이런 윤회는 매우 전지전능적인 능력인데, 인간 외에 모든 생명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이런 굉장히 전지전능적인 능력이 있다. 내가 나를 창조하고, 생명체들이 생명체들을 창조했으므로, 당연히 이와 같은 전지전능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럼, 머나먼 과거부터 이런 윤회를 해오고 있는데, 나는 언제 최초로 생명체가 되었는가? 나의 태초는 언제인가? 다른 사람들의 태초는 언제인가? 다른 생명체들의 태초는 언제인가? 우주 생명체들의 태초는 무엇인가? 태초 이전에 우주는 어떤 모습이었나? 더불어 내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태아를 만들기 전에 ‘무엇생명체’였고, 죽은 후에 ‘무엇생명체A’가 되는데, 이들은 뭐인가? 이들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여기서 잠깐, 엄마아빠의 결혼식 날, 엄마가 먹은 쌀과 배추와 무와 고기가, 엄마아빠가 교미를 하면서, 엄마의 자궁 속에서, 나의 태아로 우연히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보자. 이후에 10개월 동안 엄마가 먹은 쌀과 배추와 무와 고기 등이 계속 나의 태아일적 아기로 변화했다고 해 보자.
쌀과 배추와 무와 고기 등은 품종이 동일한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면 품종이 동일한 데, 왜 수많은 아기들의 얼굴과 몸체는 다른 것일까? 품종은 동일해도, 각각의 쌀알과, 배추 포기와, 무와 고기 부위는 질이 달라서, 수많은 아기들의 얼굴과 몸체가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수많은 아기들의 얼굴과 몸체가 자기 엄마아빠를 닮는가? 왜 각각의 쌀알과 배추포기와 무와, 고기부위를 따라가지 않는가? 엄마가 먹은 음식이 태아로 변화했다는 우연창조설은 이 점을 입증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설명해보면, 엄마가 먹은 음식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나의 태아일 적 몸체로 변화하고, 태아의 영혼으로 변화했다면, 어떻게 식물과 고기와 생선이 체성과 감성과 이성과 지성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똑같은 품종의 쌀과 똑같은 품종의 배추와 똑같은 품종의 돼지고기와 똑같은 종류의 닭고기를 먹었는데, 어째서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몸매가 다르고, 체중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개성이 다른가?
엄마가 먹은 식물과 고기와 생선이 태아로 화학적 변화했고, 뇌로도 화학적 변화했으며, 감성과 이성과 지성은 뇌로 화학적 변화한 식물과 고기와 생선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마다 얼굴과 몸매와 체중과 성별과 개성이 다른 것은 쌀이 똑같은 품종이더라도 쌀 낱알마다 매우 조금씩 성분의 함량이 다르고, 고기도 사람이 먹는 고기 부위마다 매우 조금씩 성분의 함량이 달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이른바 ‘과학적 기계론’이다. 그러나 그러면 ‘왜 사람마다 부모의 얼굴을 닮는가?’에 대한 대답은 있을 수 없다. 성분의 함량이 달라서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지면 부모의 얼굴과는 관계가 없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부모의 얼굴을 닮아가므로, 결국 ‘과학적 기계론’은 틀리다.
선신이나 악신, 혹은 둘이 함께, 혹은 다른 신이, 엄마의 뱃속에서 나의 태아일적 몸체를 만들고, 영혼을 만들었다면, 나를 만든 재료는 두 가지 종류이다. 하나는 엄마가 먹은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물체가 아닌 영혼이고, 아니면 다른 하나는 또 다른 무엇이다. 신이 엄마가 먹은 쌀과 배추와 돼지고기와 닭고기 등을 가지고 나를 만들었을 경우, 이것은 물체로 만든 것이고, 이런 물체로 만들지 않았다면, 엄마의 배의 피부를 투과하고, 살을 투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므로, 그것은 물체가 아니라 ‘무엇’이라고 해야 된다.
물체로 만들었든, 무엇으로 만들었든, 신은 태아의 몸체와 영혼을 만들 때, 사람마다 비슷하게 평생 몸체가 성장하고 퇴화하는 일정을 만들어 놓았다. 더불어 영혼이 성장하는 속도도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일정표대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런데 이 인간의 일정표를 인간이 결정하지 못했고, 나의 일정표를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 인간은 이 일정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지도 못한다. 역시 주체성을 가질 수 없고, 독립성을 가질 수 없고, 자주성도 못 가진다. 결국 종속이고, 복종이고, 굴욕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신이 인간과 생명체들을 창조했다는 이론은 자존감이 있는 인간에게 신뢰감이 떨어진다.
피조물은 주체성 독립성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므로, 피조물을 창조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나쁜 신이 된다. 그래서 선신善神은 인류를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신은 생명체들도 창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의 창조론을 믿으면, 악신惡神들이 창조했다고 믿어야 되는데, 악신이 창조한 인간이 선과 정의를 지향하고, 천국극락을 꿈꾸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은 삶을 100% 선하고 정의롭게 살려고 하고, 천국극락을 만들려고 한다. 이 의지는 악신이 창조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 악신이 인류와 생명체들을 창조했고, 창조하고 있다는 말은 틀리다. 선신은 절대로 피조물을 창조하지 않았고,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과학적 기계론’과 ‘신’에 의한 창조론이 둘 다 틀리므로, 맞는 이론은 자기가 자기를 창조했다는 [자기참여우주창조론]이다. 나는 내가 만들었고, 인간은 인간이 창조했고, 동물은 동물들이 창조했고, 식물생명체는 식물생명체들이 창조했고, 물질생명체도 물질생명체들이 창조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참여우주창조론]을 이야기 하였는데, 이 이론을 설명하다보니 [윤회체제론]을 알게 되었다.
태초에 나는 무엇이었는가? 태초에 우주 생명체들은 무엇이었는가? 태초 이전에 우주는 무엇이었는가? 당연히 전지전능한 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갖춘 생명체이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음의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들은 별의 핵을 이루는 물질생명체로도 윤회해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별의 맨틀을 이루는 물질생명체로도 윤회해 살아갈 수 있다. 또한 별의 지표면을 구성하는 흙으로도 변환해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바다의 바닷물로도 변환해 살아갈 수 있다. 더불어 산 위의 바위로도 윤회해 살아갈 수 있다. 나아가 하늘을 구성하는 물질생명체로도 윤회해 태어나 삶을 살 수 있다.
태초에 우리들은 이러한 생명체들로 윤회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자였다. 별의 핵이나 맨틀은 별을 움직일 수 있다. 지구별의 핵이나 맨틀이 지구별을 자전시키고, 공전시키듯이, 모든 별들은 자기 별들의 핵이나 맨틀이 전후좌우상하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별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죽은 후의 ‘무엇생명체’류가 되면 별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우리들이 다른 동물들과 식물생명체와 물질생명체로 윤회할 때, 꼭 지구별 안에서만 윤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볼 필요는 없다. 다른 별로도 윤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구별에서 다양한 동물식물물질 생명체들로 윤회하며, 수천 년을 살고 나면, 북두칠성의 꼬리 쪽 끝 별로 윤회해 넘어가, 그 별의 다양한 생명체들로 윤회하며, 수천 년을 살 수 있고, 다음에는 오리온별자리 왼쪽 위 별로 윤회해 넘어가, 그 별의 다양한 생명체들로 윤회하며, 수천 년을 살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다른 은하계의 또 다른 별로 윤회해 넘어가 그 별에서도 다채로운 생명체로 변환하며 살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은 죽은 후의 ‘무엇생명체’류가 되면 ‘무엇생명체’의 체적을 우주 전체로 퍼지게 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영혼 비슷한 ‘무엇생명체’의 체적을 지구별에서 북두칠성별자리까지 펼칠 수 있고, 오리온별자리까지 펼칠 수 있고, 다른 은하계로까지도 펼칠 수 있으며, 우주공간 전역에 체적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 이전의 우리들이나, ‘무엇생명체’유의 우리들은 물질식물동물 생명체들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일단 물질식물동물 생명체가 되면 유한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태초 이전의 우리들이나 ‘무엇생명체’유의 우리들은 인간의 태아나, 사슴의 태아나, 비둘기의 태아나, 잉어의 태아나, 고래의 태아나, 핵이나, 맨틀이나, 흙이나, 바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생명체들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고, 이를 영원히 반복할 수 있다. 곧, 물체생명체로서의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태초 이전의 우리들이나 ‘무엇생명체’류가 되면 별을 움직일 수 있으며, 체적을 우주공간 전체에 펼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태초 이전이나 ‘무엇생명체’류가 되면,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곧, 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죽으면 신으로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 이전에 물질식물동물 생명체들은 본래 전지전능한 신이었었다는 의미이다. 인류는 본래 전지전능한 신이었었다. 나는 신이었었던 것이다.
인간은 죽으면, 다른 생명체들로 윤회해 태어나 살 수도 있지만, 전지전능한 신으로 다시금 윤회해 돌아갈 수도 있다. 내가 죽은 후에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찬란하고 신비하고 행복한 말인가?
지구별에는 동물들과 식물생명체들과 흙 물 모래 자갈 바위 산소 질소 구름 하늘 등의 물질생명체들이 있는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전지전능한 신들이 실재한다. 이 신들은 동물식물물질 생명체들로 윤회하지 않은 신들이다. 아니면 전생에 동물식물물질 생명체로 살다가, 지금은 전지전능한 신으로 살고 있는 신들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별과 우주에는 현재 신들이 실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후에 이 신들로 윤회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 본래 전지전능한 신이었고, 인간이 본래 전지전능한 신이었으며, 내가 본래 전지전능한 신이었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들의 실재에 관해 증명을 해 보았다. 이 증명은 이론적인 증명일 뿐이다.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증명은 인간과 생명체들이 현재의 삶을 다 살고 죽어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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