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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리토성(倉里土城 - 우강면 창리 창말)
고덕에서 622도로상 우강 소재지에서 동북쪽 강문리 가는 길로 접근한다.
토성은 우강 소재지 동북방 1.5km 창말 당뿌리마을에 자리한 창지 주변을 에워싼 토성이었으나 워낙 낮아 개간, 예비군시설 등으로 모두 사라졌다. 당뿌리는 창말의 끝부분이자 과거 육지의 끝이었다. 당뿌리의 끝(성의 동벽)은 논보다도 10여 미터 이상 높이 솟아서 간척 전에는 턱밑까지 바다였고 포구가 있어 현지 주민은 거기에 배를 매어놓았다고 한다.
산성은 구릉의 끝부분에 둘레 약 오륙백 미터 이상 가량 퇴뫼하여 축조했던 듯하나 현재는 북벽에 200미터 정도, 남벽 수십 미터 가량 토벽만 남고 성 내부와 동서벽은 민묘, 예비군 시설, 도로개설이나 개간용으로 파괴된 끝에 완전히 사라지진 후 농지로 변했다. 현지 주민 박창환 씨(78. 010-5009-3181)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북벽 안에 남은 느티나무 아래 평탄지가 과거 창터였다고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해 본다면 포구 배 정박지 근처 당뿌리 산에 성이 있었고 그 안에 남창으로 여겨지는 창(倉)이 설치됐던 것이다. 현재 민묘들이 들어선 성내 무덤 근처에 육칠십 센티 가량 되는 약간의 돌(초석?) 들이 있다.
현재 잔존하는 성벽부를 통해서 대체적으로 성벽 높이 약 5~10, 기저부 6~7, 상단폭 2m 가량으로 추정된다. 과거 토기, 기와, 자기편들이 출토됐다 하는 바 지금도 어골문 기와편, 회색 경질토기와 자기편들의 수습은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 바로 턱밑까지 바다였을 때 창의 보호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여기로부터 2 km 정도 남쪽 합덕리에도 또 하나의 창말(조선시대 덕산현의 창지) 지명이 존재하고 북에 북창이란 지명이 있어 지역에 여러 개의 창이 있었지 않나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홍주 관할이었던 면천군 부리포(犯斤內, 犯川)지역이다. 부리포의 행정명은 강문리다. 지금도 삽교호로부터 안으로 들어온 공포천 물이 드나드는 수문이 있다. 과거 새우젓, 소금 등을 사발로 되어 팔았다고 해서 부리포 대신 사발포(소발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주민들은 거기에 큰 창고들이 있었다고 한다. 京倉으로 갈 홍주, 공주 등지의 세미를 보관하던 창들이 있었으나 퇴적으로 바다가 얕아지고 간척이 진행됨에 따라 공세창으로서의 기능은 점차 약화됐다.
삽교천으로부터 상당히 깊숙히 자리한 원치리, 창리토성 등의 전면 인접지역에 남원포, 공포, 상포, 하포, 중포, 부리포, 원대포 등 여러 개의 포구 관련 지명과 감찰원, 남원, 홍원 등이 길이름으로 들판 가운데에 남은 것은 간척에 의해 과거 리아스식 해안이었던 지형이 크게 확장 변화됐음을 의미한다.
토성으로부터 서북방 들판 건너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탄생지 솔뫼가 있다. 조선말 온갖 박해 속에 죽어간 김대건 신부와 교인들 다수가 희생된 곳으로 이제는 성지가 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올(2014)해 8월 교황 방문을 앞두고 그 준비, 시설 확충 등에 따른 소란과 더불어 순례자들의 기도소리로 조용하던 시골마을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 됐다. 행사 때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걸린 금빛 예수상, 흰색 성모마리아 및 예수 제자상들, 예수의 삶과 관련된 각종 조각상들, 아레나 광장과 무대, 김대건 신부상과 생가지, 성당 등이 부활을 상징해 조성했다는 뫼山자 정문 안에 담겼다.
자료를 얻기 위해 방문한 면사무소 직원들은 창의 위치나 토성이 자리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면지를 꺼내 찾아 보고서야(그것도 출처 제시 후에야) 확인하는 현실과 거창하게 조성되는 솔뫼성지가 매우 대조된다. 옛 유적지에 전혀 무관심한 당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와 더불어 우리처럼 함께 관심이라도 가져 주는 것을 고마워하는 박창환 씨의 마음씨가 오히려 더 고맙다.
당뿌리에는 과거 당집이 있었다 한다. 지난날 이곳을 거쳐 나가는 조운선, 어선, 뱃사람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성내에서 면 주최로 제를 지냈다고 한다. 당뿌리는 당집이 있는 산의 끝이란 데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박창환 씨는 6.25 때 이 성으로 인민군들이 상륙하여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목격담으로 전해준다. 비단 6.25 때뿐만 아니라 정황상으로 미뤄 과거 역사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여기서 더 있었을 것인가. 창리 토성의 위상을 암시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스라이 넓은 쇠벌들(野) 간척지에서 나는 해나루쌀이 명품으로 대신하고 있지만 지난날에는 파도 넘실대던 바다, 소금배, 고깃배들이 줄을 이었고 염전이 즐비하던 곳이었다. 창 주변 선창가에서 술취한 이들의 흥겨운 노랫가락이 넘쳤을 것이다.
첫댓글 이렇게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뭔가 함께 둘러보았던 상황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자료와 글, 감사합니다.
'당뿌리는 '당부리'에서 온 것은 아닌지? 묏부리의 '부리처럼 말입니다. 당이 있는 산등성일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