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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라고 느낄때 그대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비바람에 의해 곧 떨어질듯 가녀린 손을 뻗어 포기하듯 멈출때도 있지만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때 담쟁이 잎 하나는 주변의 담쟁이를 이끌고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어머님 85년 담쟁이 인생이야말로 가장 힘든 생과 여러개의 고비산을 넘기고 살아 오셨는데 오로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가족에 대한 헌신때문이었다. 어릴적에는 재래식 화장실에 실족하기도 하시고 처녀때는 4.3사건에 목숨을 잃을뻔도 하시고 한때는 폐결핵으로 수년동안 피를 토하시기도 하고 한때는 독사에 두번이나 물려서 사경을 해메이시기도 하고 한때는 산후 조리에 몸이 굳어져 위험한 경우를 당하기도 하고 한때는 과수원 나무위에서 떨어져 혼절을 하시거나 목욕탕에서 119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한때는 과수원 일하다 점심 뜨거운 물에 온몸을 화상입기도 하시고 한때는 손자를 돌보다가 대형 버스에 깔리신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제주도 애월읍 1931년생이다. 45년에 해방이 될때 15살이었고 제주 4.3항쟁때 18살이었으며 6.25때 20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4.19와 5.16 군사정변때가 30살이었다. 어머니의 인생은 일제압제의 치하와 2차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과 6.25 군사동란, 4.3항쟁등 대한민국의 어지러운 굴곡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그 와중에 가난한 보릿고개의 춥고 시린 시절과 좌우이념갈등에 의한 동족살륙에 목숨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던 때도 많았다 한다. 그보다 더 어려움은 유복하지 못한 가정과 불행했던 가정사였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결혼을 해서 2남 2녀를 낳으셨다. 그 중 어머니가 막내로서 당신이 3살때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술주정에 가산을 부수고 번돈을 가져다 주지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능한 외할아버지로 인해 외할머니는 가출을 하곤 재혼을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셨다. 외할아버지의 직업은 참빗이나 화장품등 생활용품들을 등짐지고 돌아 다녔던 장돌뱅이였다. 외할머니가 집을 나간 후 자녀들이 다 어려서 돌볼 사람이 없는 관계로 뿔뿔이 머슴이나 종녀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곡식이 있는 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어머니도 7살때부터 다른집에 애기 돌보미로 가게 되었는데 온종일 애를 보거나 그 집에 궂은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고향과 가까운 하귀리에 보내져서 어린나이 깜깜한 밤에 바닷가 용천수 물을 질어 나르기도 했다하니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것이다. 하루는 화장실에 미끄러져 푸세식 똥통에 빠졌는데 9살 어린 아이가 온통 똥을 뒤집고 있는데 그런 경우가 그 시절에 가끔 있어서 대부분 아이들이 똥 독에 감염되거나 놀라 넋이 나가 죽는 일이 허다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사람들은 통시를 지키는 귀신에게 동티가 나서 죽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자 오물을 뒤집어 쓴 어린 아이에게 그 집 할미가 모질게 빗자루로 때렸다. 그 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그게 동티를 막아주어 자기를 살게 한 방도였다고 어머니는 믿는다. 어머니는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누가 돌보거나 지켜줄 형편도 없었고 간신히 입에 풀칠만이라도 해서 모진 한 해 한 해를 연명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초등학교(당시는 소학교)에 간다는 것은 더구나 여아로선 지나친 사치였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을 다아 놓고 40살이 넘어서야 한글을 깨우칠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가족사 비극은 어머니 2남 2녀의 형제들 중 다른 형제들이 다아 사고로 돌아가셨다는것이다. 큰 오빠는 대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일본 탄부로 자원을 해서 갔는데 당시 막장일은 모든게 열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졌기에 무자비한 노동작취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사고와 배고픔과 힘든 노동으로 죽어갔다. 지금처럼 머리에 쓰는 안전모가 있지 않은터라 머리에 석탄물이 떨어져서 머리를 부식시켜서 머리털이 다 빠져버리고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니 친척 한분이 세균을 죽이는데는 빙초산이 좋다 하여 강한 빙초산을 머리에 부었다 한다. 그 후 몸을 못쓰게 되서 귀국을 하곤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하는데 겨우 오빠나이 23살이었다. 둘째 오빠는 공부를 좋아했는데 역시 남의 종살이를 하다가 어느해 기계어선을 타게 되었다 한다. 어느날 밤 배에 불이 났다. 둘째 오빠가 튀쳐나오다가 기관실 책들이 생각나서 다시 불타는 기관실로 들어가서는 영영 나오질 못했다. (그때 나이 19살.) 해방이 되고 제주도는 4.3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좌우 이념에 의한 혼란의 시대에 수많은 죄없는 양민들이 낮에는 경찰들에게 몰려서 죽고 밤에는 죽창으로 무장한 산에서 내려오는 폭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했다. 낮에는 경찰들과 반공 연맹청년들이 호구조사를 하며 민간인들 중 10대들도 남녀 할것 없이 밤에도 당번을 순번으로 매겨서 순찰을 하게 만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막내딸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나가면 안된다고 타일렀다. 어느날 연맹에서 숨어있는 어머니를 찾아내고는 여러명의 무장한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한다. 그러면서 완장을 찬 한사람이 '이 중에서 이 여자가 폭도가 아니란것을 증명할 사람이 없으면 즉결처분 하겠다'고 했는데 그 중 이웃한 청년이 자신이 증명을 하겠다고 해서 생명을 부지했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서 정상적인 법과 집행이 따로 없었다. 마치 월남전처럼 폭도가 위장하기도 하고 밤에는 순경집을 습격해서 불태워 죽이기도 하기때문에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무자비하게 학살하곤 했다. 심지어 어느 마을에 폭도라는 의심이 들자 수많은 사람들을 배에 싣고 깊은 물에 커다란 돌맹이들을 묶어서 포승한 채 바다에 밀어 넣기도 했다 한다. 자신을 돌봐 주던 외할아버지는 19살에 돌아가시면서 막내인 어머니 손을 가슴에 여미며 잡더란다."불쌍타. 내딸아. 너를 고생만 시키다 시집 가는 모습을 못보고 눈을 감는 게 한이다" 하면서 돌아 가셨다 한다. 세 살 터울인 언니는 23살 때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을 갔다. 마음씨가 좋았던 형부도 일본에 돈벌러 가셨다가 병환으로 50대 초반에 돌아가시고 2남 4녀를 두신 언니와는 모진세월의 힘듦을 위지하며 사시다가 유일한 혈육이었던 언니 역시 교통사고로 49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언니(이모님)의 사고 역시 비극적인 것이었다. 일본으로 어릴 때 재가를 해버리신 외할머니가 고국에 있는 자신의 딸들을 마지막으로 보러 귀국하셨는데 귀국소식을 받고 어둔밤 도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음주트럭에 수십m를 끌고 가버렸다. 외할머니와의 만남은 기쁜 상봉이 아니고 슬픈 喪逢이 되버린것이다. 이렇듯 어머니의 가족사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혼란의 와중인 1952년 어머니는 22살때 시집을 가서 23살 때 첫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 역시 외롭고 힘든 소년기를 보내고 군제대를 막 끝낸 25살의 성실한 농부였다. 6.25 지원병으로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고는 전역을 했는데 훗날 상이군인 위로금을 받다가 누군가 정상적 활동을 하는데 무슨 전상자냐고 고발이 돼서 무효심판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허벅지에는 돌아 가실때까지 수류탄 파편이 박혀있었고 그 부분이 썩어 살집이 많이 패여 있었다 한다. 아버지는 9살 때 역시 독자 고아가 됐다. 할아버지가 겨우 30대 초반에 돌아가셨는데 도두리 비행장 옆에 묘를 쓸 때 지관이 그러더란다. "이 터는 자손이 많이 나올 터"라고..." 고아가 된 후 증조 할머니 밑에서 생활하다가 돌봐 주던 할머니 조차 돌아가시자 큰숙부댁에 가서 소먹이는 양자로 들어갔다. 초등학교 3년을 다니다가 월사금(당시는 의무교육이 아니라서 매달 교육비를 내야 했다)을 내지 못해서 그만뒀는데 담임이 큰숙부에게 와서 학생이 공부하고 싶은 의지가 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는게 어떠냐는 부탁을 했는데 거절을 하였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꽤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사촌들하고 팽이치기를 하는데 아버지의 팽이가 자꾸 이기니 큰숙부 막내아들이 팽이를 달라 졸라서 줬다. 그래서 다시 팽이를 좀 더 좋게 만들었더니 다시 달라 조르며 떼를 쓰며 우니까 큰 숙부께서 "너는 어린 동생하고 다투느냐." 하며 대들보에 베로 묶어놓고는 사정없이 매로 두들겨 맞았다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자기를 돌봐 달라며 보낸 괘짝을 업고는 5리 정도 되는 자기 살던 집으로 분한 마음에 가버렸다. 동네 소문도 안좋고 해서는 큰숙모가 달래서 다시 데려 살긴 했는데 밥을 먹더라도 자신은 부엌에서 혼자먹게 하고 숙부자녀들은 안방에서 먹게 하는 차별때문에 속으로 "언젠가 나도 잘 살고 말거야"하는 독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한다. 결혼식 풍경은 가난한 상이용사에게 먼저 시집간 언니가 동네 근실한 청년을 보고 소개했다고 했다. 그리고 윗대에서 물려받은 작은밭이 있어 부지런하면 목구멍에 거미줄은 안치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적극 추천했다. 그런데 잔치할 돈은 둘째 치고 손님치를 쌀조차 없어서 언니는 형부의 군용오바를 시장에서 쌀 한말과 바꿨고 엄마는 이웃에게 사정을 해서 보리쌀 두말을 빌렸다고 한다. 그리고 신랑이 갖고 온 돼지 뒷다리를 갖고 간신히 손님을 치루었으며 아버지가 동네 안쓰던 가마를 손수 고쳐서 보내줬다고 한다. 엄마는 그때까지 바다물질을 해서 번 돈으로 솜과 천을 따로 사서 이불을 두개 만들고 언니집 한 켠에서 가난한 신방을 차렸다. 지금도 가난하고 못배운 시절 의지할 곳 없었던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해 준 언니를 가장 고마워 하신다. 아버지는 어머니랑 결혼하고는 고난의 유년시절을 보상받듯 정말 독하게 열심히 일을 했다. 처음에는 농사일하다가 돈이 안될것 같아서 다시 고기잡이 어부가 되었고 어머니도 물질(해녀)로 보태기도 하셨다. 어부의 직업이 적성에 안맞았는지 건축일을 배웠다. 건축일은 그 당시 새마을 운동과 겹쳐서 일이 점점 많아지고 이 일이 손재주가 있던 아버지에게는 적성이 잘 맞았는지 그때부터 물만난 고기처럼 일을 하곤 돈도 꽤 벌기 시작해서 제주도 시내에 마흔이 되자 땅도 사고 손수 2층집도 지었다. 나중에는 직접 설계도면도 본인이 하시고 밑에 사람들도 여럿이 둔 대장목수을 하며 점점 큰 공사들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목수일만 열심히 하신게 아니고 자녀농사에도 열심히 하셨다. 본인이 독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사신 원으로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데까지 낳고자 하였다. 2년 3년 터울로 자녀들을 보셨는데 돌아가실때까지 무려 8명의 남자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너무하셨다 생각해서 8번째는 지웠는데 의사가 따님이라 해서 다시 애를 쓰셨는데 결과는 아들부자가 되었다. 두 분 다아 외로우셨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원대로 이루신것 같다.(할아버지묘를 썼던 지관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랑 19년의 부부생을 하셨던것이다. 아버지는 성실하지만 가정에선 불같은 성미라서 밖에서는 그지 없이 호인이면서 집에 들어와서 성이 안차면 보이는게 없었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현명하게 가타부타 말없이 순종하고 아버지를 보이지 않은 가운데 열심히 내조를 하셨다. 가끔 술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엄마가 겪은 세월의 시련에 비하면 참을 만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바깥일을 열심히 하시고 어머니 역시 집에서 돼지를 치거나 농사일을 돌보았는데 돼지를 치면 그렇게 다산을 하였고 농사를 하면 남들보다 훨씬 많은 곡식이 열렸다고 했다. 어느 해는 산달이 되었는데도 농사일을 너무 열심히 하시다 홀로 자녀를 낳은 경우도 있었다. 산통이 있자 오리나 되는 먼길을 혼자 돌담을 의지하면서 집에 와 아이를 낳았는데 탯줄을 끊고는 탯줄 묶을 실이 없어서 피를 엄청 쏟기도 했다고 했다. 얼핏 두 분이 맞지 않은것 같으면서 서로 잘 맞았다고 본다. 그것은 두분이 어린시절을 어렵고 외롭게 자란 아픔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17~8년 세월이 엄마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외롭고 가난한 두분이 만나 화목한 대가족의 부푼꿈을 갖고 희망이 넘쳤던 시절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건축일을 하던 이들이 대부분 요절을 하였는데 이유는 당시 신식으로 새로나온 석면 스레트 지붕때문이었다. 이 석면스레트는 선풍적 인기를 타서 집집마다 초가집이었던 지붕개량을 하는데 획기적 역할을 하긴 하였지만 문제는 당시 검증이 안된 석면의 해악때문이었다. 이것은 불에 태우면 암을 유발하는 성분을 대량 뿜어대는데 그 당시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매일 해갈음을 동료 목수들과 함께 소주와 고기를 석면위에 태워 먹었으니 얼마 없어서 몹쓸병에 걸린 이유도 그것때문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속이지 않으며 맡은 건축들을 열과 성을 다해 지어주었기 때문에 건축주들이 맘에 들어서 계속 일감들이 밀려오는 상황에 아버지가 쓰러지신것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계속 승승장구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생활을 했을게 분명하고 어머니도 그 모진 세월을 힘들게 보내지 않았을것만은 틀림없을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호락 호락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42살에 암에 걸려서 온갖 치료를 다 했다. 그 당시 최첨단인 서울 성모병원의 방사선 치료까지 해서 암을 치료한것 처럼 보였는데 비오는 날 밭에 가서 다시 힘든일을 하곤 재발이 되더니 향년 44살에 불귀의 객이 돼버렸다. 아버지는 병중에 엄마에게 "내가 너무 어릴 적 가난의 한때문에 일만 하고 당신에게도 고생만 시킨것 같다. 이번 몸만 나으면 애들과 맛있는것도 사먹고 호강여행도 한번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다하실 때 아버지는 전에 외할아버지 처럼 어머니손을 으스러지게 잡고는" 불쌍하다"하고 크게 한탄하시며 숨을 거두었다 한다.(어머니나이 41세) 어머니에게 남겨진 것은 그동안 쌓았던 재산도 병치레로 없어지고 태어난지 한 달이 된 8째 막내부터 고2가 된 큰아들까지 아이들뿐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놓여질 수많은 인생동안 남겨진 여덟자식들을 돌보기엔 너무도 힘든 시련의 짐을 맡겨놓고 가는게 미안한 마음에서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호강여행 가자던 아버지는 홀로 꽃상여에 누워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났다. 정실 검은오름곁 따스한 양지밭에 묻히셨다가 2015년 11월 8일 어승생 공설묘지 가족 납골묘로 이장해 생전에 함께 하셨던 조부,증조부모 3대가 함께 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일생은 가난과 가족들의 죽음을 지나 믿었던 남편의 사망까지 겹쳐 힘든여정의 산들로 켜켜히 쌓여만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말 세상으로 부터 생존의 위협을 느낀 작은 암사자처럼 자녀들을 위해 헌신했다. 아이들이 잘하든 못하든 이웃들이 시끄럽게 찾아오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납작 엎드리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세상의 시궁창에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몸을 던질것처럼 부끄럼없이 맹목적으로 살아갔다. 40대인 어머니는 이미 여성이길 포기했다. 어머니의 화장대는 분외에는 거의 없는것과 같았다. 하루는 오일장터에서 수박을 도매로 사서 소매로 파는 장사를 할 요량이었는데 엉엉 울면서 빈 손으로 들어오셨다. 고등학교 다니던 형님이 장터로 갔더니 이미 좌판을 깔아놓은 청년들이 못보던 아줌마가 끼여들어 화가나서 수박을 다 발로 차고 짓이겨버린 것이다. 위압적인 장사꾼들에게 암소리도 못하고 형님이 씁쓸히 깨진수박들을 리어카에 싣고는 돌아 왔는데 나와 동생들은 뜻도 모른채 즐거이 수박파티를 열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있음에 고등학교 아들이 위로를 하는데 "어머니. 울지 마세요.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가난하고 답답한 이들이 많습니다"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 후의 고초들도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양봉업을 하신다고 여성몸으로서 20kg이나 되는 양봉통들을 100개나 넘게 밀원을 따라 이동하고 나를 때는 허리가 여러번 상하실 때도 많고 양봉도둑이 든다고 해서 깊은 산중에 홀로 천막을 치고 주무실 때도 있었으니 가히 젊은 남정네들도 하긴 힘든 시련을 마다 하지 않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위대한 사명감을 수행하는 장군처럼 그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이 든다. 한번 여쭈어 보았다. 몇날 며칠을 산중에 홀로 천막을 치고 주무시는데 안무섭냐고? 어머님 대답왈 "무서울게 무어야. 아들 여덟을 둔 어민데.달리 도리도 없었다. 정말 무서울 때는 기냥 염불 외우고 만다. 부처님이 다 돌봐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니 무서울게 하나도 없더라"라고 하셨다. 천둥 번개의 산을 넘고 그 후 45년이 지났다. 이제사 어머니의 긴 겨울의 터널은 끝이 난것 같다. 지금의 어머니는 석가모니처럼 지혜롭고 건강해지셨고 마음도 후덕해지셨다. 거울속의 45년전 모습이 어머니에겐 변변한 옷없이 눈덮인 세상에 던져진 시린 겨울앞에 있었다면 지금은 어머니에게 따스한 봄날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 긴 겨울이 어머니를 더욱 강하게 한것 같고 그 겨울이 있었기에 지금 봄의 따스함을 더욱 즐기시는것 같다. 그런말이 있지않은가. 겨울이 매서울수록 봄향기와 꿀은 더 진하고 달콤하다는 말이 어머니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그 당시 가련하고 병색이 든 작은 여인이 지금은 당당하고 호기로운 여장부같다. 어머니의 연대분들이 하나 둘 치매걸린 이웃들을 보시며 건강도 열심히 지키신다. 지금의 어머니를 보면 한 사람의 어머니는 백사람의 교사에 견줄만 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어머니는 한번도 자녀들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질책을 하거나 회초리를 들어본적이 없다. 본인이 학교문턱에 안 가신 양반이었기에 가타부타 말씀은 안하셨다. 아마도 종교적 불심이 강하셨기에 모든 자녀들이 나름 태어난 본래의 부처님 뜻데로 갈 길이 있을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항상 자녀들이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믿어주고 고마워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제일 많이 하셨던 말씀은 "내주제에!" "고맙다!"였다. 그 덕택에 헐벗고 가난하고 밥풀 하나가 아쉬웠던 그 자녀들도 건강하게 모두 성장해서 사회에 일꾼들이 되었다. 우리 형제들 모두가 어머니를 존경한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모든 자녀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만큼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느낄때가 또 있을까. 올해 연세 85세. 얼마 전 어머님 말씀. 스님이 자신 손금을 보더니 공덕을 많이 쌓아서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는데 95세에 운명할 것이며 자손 중 2명이 자신의 운명을 지켜볼 것이라는 말씀을 하더이다. 어머님. 건강하게 백수하시길 기원드립니다. 2015년 5월에 |
첫댓글 외할아버지는 삼남 1녀였습니다. 그중 외할아버지가 맏이였고 어머니는 2남2녀의 막내로서 두오빠는 20세 전후로 결혼전 요절. 언니인 윤석이 모친역시 사고로 돌아가심. 둘째외할아버지에게 난 자녀는 첫부인에게 2남(요절)2녀(기수, 남수어머니) 둘째엄마에게서 1남(장군이삼촌)3녀(화자,춘자삼촌형제)를 낳으셨고 세째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덕화,태화삼촌 夫) 네째고모할머니는 양씨집에 시집을 갔습니다.(인실이 할머니) 인실이 아버지와 둘째할아버지의 두아들은 해방후 비행장 폭탄을 수거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포탄이 터져 둘 사망하고 인실 夫는 다리장애를 입었지만 80세까지 수명.(어머님 육성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