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512 / 실패라 쓰고... (출2:11-25)
조각 퍼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큰 그림을 작은 조각으로 쪼갠 후 이것들을 다시 맞춰 원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인데,
이 퍼즐을 사게 되면 그림 조각들과 함께 박스 겉면에는 원래의 큰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박스는 없어지고 조각들만 지퍼 백에 넣어 놓았는데,
언젠가 퍼즐이나 한 번 맞춰볼까 하고 시작했다가 테두리만 어찌어찌 해서 껴 맞추고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조각들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큰 그림이 있어야 했습니다.
주변에서도 종종 듣는 말로 인생에서도 큰 그림 곧 빅 피처를 그려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미 조각 퍼즐에서 실패해 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100% 공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빅 피처는 어떻게 그려야 할까요?
그냥 꿈만 크게 가지면 될까요? 소망만 품고 있으면 되는 걸까요? 아니면 3년 후 또는 5개년 계획 같은 설계와 준비만 잘 하면 되는 걸까요?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인생에 빅 피처가 없어서 자주 실패하고 매번 힘들게 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인생은 빅 피처가 없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빅 피처를 몰라서 혼돈스러운 것입니다.
공장에서 조각 퍼즐 만들 때를 생각해 보세요. 제작자는 조각들을 만들고 나서 그 다음에 큰 그림을 준비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이미 큰 그림이 있은 후에 조각들이 제작 되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에 빅 피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각자를 위한 빅 피처는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제작자가 빅 피처를 바탕으로 조각 퍼즐을 만들 듯이 우리 인생도 제작자가 이미 빅 피처를 갖고 인생들을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이 인생의 제작자를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위한 큰 그림을 갖고 계시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현재 완성된 그림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실패한 인생은 아닙니다. 단지 미완성일 뿐입니다. 조각들은 다 있습니다. 다만 아직 맞춰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중단된 내 인생 큰 그림의 완성을 보기 위해 ‘하나님께는 나를 위한 큰 그림이 있으시다.’는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간혹 살다보면 인생의 어두운 조각을 집어들 때가 있습니다. 또는 실패 조각, 고통 조각들을 집었다 하더라도 그것들 역시 장차 완성될 인생 큰 그림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다 사용하셔서 우리 인생의 멋진 큰 그림을 완성해 나가실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란 보고 맞출 큰 그림이 없을 때라도 모든 조각들이 어떻게든 맞아 들어간다고 계속 믿는 확신입니다. 인생의 큰 그림은 하나님이 그려 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이란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일 때에도, 아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은 목적이 있으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비록 내 앞의 인생 조각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큰 그림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모세의 실패조차 기회로 삼아 그를 지도자로 만들 큰 그림을 그려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혈통적으로는 히브리인이지만 애굽 공주의 양자이자 왕손으로 살아왔습니다.
이후 11절에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라 했는데, 사도행전 7: 23절에 기록된 “나이가 사십이 되매”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 모세가 태어나던 때의 이야기를 담은 10절과 11절 사이에는 40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0년이 지난 후에....., 무슨 말입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본격적인 역사하심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하시는 시간’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때가 되매’ 또는 ‘때가 차매’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29세까지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린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서도 준비하는 시간이 있게 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준비되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내가 포기를 준비하려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믿는다면 우린 포기하려고 준비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려는 준비를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란 설사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그려 나가실 큰 그림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원한 대학에서 떨어졌다.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졌다.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당했다. 생각지도 않던 병에 걸렸다. 이상하게 매번 실망과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계속 믿으세요. 중단하지 마세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나를 준비시키시는 기간이라 믿으세요. 결국 믿음은 그 모든 것을 헤쳐 나갑니다.
다시 성경을 보세요. 39세까지의 모세는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40세 때.
드디어 하나님의 큰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한번은 노예 감독관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친다.”는 말은 “쳐 죽인다”는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이에 모세는 자기 형제 사람을 쳐 죽인 감독관을 쳐 죽여 몰래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그 현장에 갔더니 이번에는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걸 보고 뜯어 말리며 잘 못한 사람을 꾸짖었더니 그가 노예임에도 감히 애굽의 왕자에게 이렇게 대듭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죽여! 죽여!” 하며 덤벼듭니다.
이 일을 계기로 모세의 살인 사실이 탄로 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왕족이 군인 한명 죽인 것쯤은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정치세력 간의 암투로 인해 정적들은 차제에 모세를 제거하고자 하여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결과가 어찌되었습니까?
상황은 ‘모세가 왕궁에 머물 수 없었다. 모세로 하여금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다.’로 이어집니다.
모든 게 상황 탓입니다. 정적 탓입니다. 운 탓입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누가 이런 사소한 사건을 악화시킬까요? 도망갈 수밖에 없도록 모든 상황을 조정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의 준비 기간이 끝난 시점이기에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광야로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통한 큰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 먼저 그에게 믿음이 있게 하시려는, 역시나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위대한 기회가 됩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40년 단위로 애굽 왕궁에서, 또 미디안 광야에서,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 여정으로.
이에 대해 무디 목사는 모세의 생애를 삼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처음 왕궁 40년은 ‘I am somebody.’ 스스로 꽤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기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40년은 ‘I am nobody.’ 절망하고 좌절했던 시간이었고,
마지막 40년은 ‘I am God's buddy!’ (영어로 buddy란 ‘친구, 절친’등을 듯합니다.) 이 기간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절친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했던 기간이었다고 했습니다.
‘I am nobody!’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어쩌면 가장 비참했던 이 기간이.
혹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은 아니신지요?
그러나 성경은 모세에게 있어서의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믿음의 기간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기회요 믿음이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지금의 ‘I am nobody!’는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나갈 기회이며, 하나님의 큰 그림이 완성될 준비 단계일 것이기에.
오늘의 실패를 내일의 축복으로 나가기 위한 믿음의 기회로 삼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본문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우린 세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거절하고, 더 좋아하고,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하나님 없이 되어지는 모든 것을 거절했습니다. 설령 그것들이 부와 명예와 권력이었다 해도.
대신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겪게 되는 모든 상황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실패요 고통이요 괴롬이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상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큰 그림이 완성될 것임을 믿었습니다.
힘을 내세요. 성도인 여러분에게서 지금은 ‘끝’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도라면 그 시작을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 모친에 의해 생명이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자라면서는 애굽의 공주에 의해 모든 후원과 필요한 공급을 받았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히브리 노예와 애굽의 정적 그리고 바로에 의해 배신과 고통과 괴롬을 당했습니다. 괘씸한 일입니다. 분통터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게 또한 인생입니다.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더니.’
여러분의 신앙의 눈을 이차원에만 고정시키지 마세요. 삼차원 사차원 다차원으로 보려 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어머니가 자식이 죽는 걸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 출생 당시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의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모친은 달랐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하나님께 맡기자.’
당시 많은 아이들이 어머니의 눈물과 절망 속에서 맨 몸으로 나일 강에 던져졌습니다. 다 죽었지요.
그러나 모세는 나일 강에 던져졌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믿음 안에서 갈대 상자에 담겨 띄워졌습니다.
강물 따라 흘러가다 목욕 나온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모세는 살았습니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면 하나님께 맡기자!’
이 한 문장이 오늘 여러분의 믿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확신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이 책임 져 주십니다. 그에게서 당신이 계획하신 인생의 큰 그림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모세가 막다른 골목에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과 좌절의 그 순간에도 모세를 어루만지시는 따스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순간, 고통의 순간,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모세 인생의 큰 그림을 만들어 가고 계셨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큰 그림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한 밤 중에 목사님이 성도의 심방 요청을 받고 산부인과로 달려갔습니다. 가족 친지들이 산모가 누운 침상에 둘러서서 있습니다. 다들 둘러서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다들 울고 있었습니다.
가족 한 분이 인도하는 대로 옆방에 가 봤더니 남편 되시는 분이 생명이 없는 신생아를 안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아기를 감싼 분홍색 수의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습니다.
직감적으로 상황을 판단한 목사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아이 아버지 옆에 앉아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 아이 아버지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제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정말 믿는 지 알 수 있는 순간이겠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노라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을 정말 믿는 지 알 수 있는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이 그때일수도 있습니다.
다시 모세를 보세요. 40년 왕궁 생활과는 180도 다른 광야 40년. 더 이상 왕자가 아닌 양치기로 사는 40년 동안 모세는 무엇을 했을까요?
23절을 보면 “여러 해 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10절과 11절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22절과 23절 사이에 또 4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어지는 23절로 25절을 보면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했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구약 성경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 곧 저와 여러분을 위한 신앙의 시청각 교재입니다.
그렇다면 방금 읽은 출2:23-25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1)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는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 ‘하나님은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신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이 만지시는 손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문제들을 갖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 있음을 믿으세요.
나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게 하세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리하셨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각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살다보면 누구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나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실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내 신앙이, 내 기도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실패는 내 인생 큰 그림의 완성을 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따라 하세요.) ‘실패라 쓰고 / 기회라 읽자!’ (한 번 더) ‘실패라 쓰고 / 기회라 읽자!’
민수기 14:28에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 하리니’ 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실패 앞에서일지라도 실패라 쓰고 기회라고 읽을 때, 들으신 하나님은 들으신 대로 그 모든 것이 기회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할 수 있는 기회, 일어설 수 있는 기회, 만회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들이 내게도 있을 것입니다.
단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는 부르짖는다는 전제가 앞서야 합니다.
이제껏 잘 참고 잘 믿어 오셨다면 이제 이것 하나만 더 힘을 내세요.
‘부르짖어 기도하자.’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기회입니다. 실패는 내 믿음을 시험해 볼 기회입니다.
드디어 내게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내 인생의 큰 그림이 완성될 기회가 온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