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풍경
-대전 죽동공원
* 월간 신문예 123호(2024. 5)
차용국
아련히 떠오르는 마을의 풍경은 추레했다. 산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구릉 같은 산자락이 마을의 북쪽과 동쪽으로 삭은 고무줄처럼 늘어져 있었다. 산은 진한 숲을 이루지 못하고 군데군데 원형 탈모처럼 빠져버린 머리 모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산자락 마른 밭에 겨울이면 눈이 날아와 쌓여 하얀 여백의 공간으로 오래 남아 있었다. 봄바람에 눈이 녹으면 냉이ㆍ보리가 먼저 올라오고, 배꽃(이화梨花)이 피고 지면 무르익은 햇볕에 고구마ㆍ감자ㆍ고추 등이 자라났다.
산기슭에 150여 호의 납작 엎드린 집들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몇 채의 팔작지붕 기와집도 있었지만, 집은 대부분 흙벽돌로 쌓은 벽 위에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볏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덮은 초가집이었다. 집과 집, 집과 고샅길의 경계는 불분명했고 무질서했다. 헐렁한 경계에서 대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스스로 자라서 저절로 울타리를 쳤다. 사람들은 마을을 대울이라 불렀고, 읍(면) 기록에는 죽동竹洞이라 적혀 있었다. 둘 다 ‘대나무 울타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대울은 계통이 없고 보초步哨가 없는 울타리였다. 쥐ㆍ족제비ㆍ뱀이 넘나들며 까불면, 개와 고양이가 달려들어 한바탕 시끄럽게 맞장뜨면서 위험을 알렸다. 댓잎마저 늘어진 염천炎天의 폭거暴擧에 시달린 시간마저 오수午睡에 빠져버리면 댓잎마저 대책 없이 늘어져서 고요한, 그래서 한없이 적막한 울타리였다.
마을 앞에는 세 개의 공동 우물이 있었다.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 웃말이고 남쪽 우물이 있는 곳이 아랫말이었다. 우물은 촌가와 논의 경계에 있어서 여러 갈래의 고샅길과 논길이 맞닿은 환형環形 교차로 중심축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 우물에서 도르래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양동이나 들통에 담아 집으로 들로 날랐다.
우물 앞에는 논이 펼쳐지고, 논 한복판을 가로질러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편에 또 논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신작로가 있었는데, 그 신작로 건너편도 논이 빼곡했다.
그 아득히 먼 들판의 끝 무렵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잘한 계룡산 능선은 원양에서 겨우 빠져나온 기진한 파도처럼 훌쩍이며 달려오다가 허당에 걸려 겹겹으로 쓰러지고 포개지고 소멸해버리는 것이었다. 날이 저물면 갑하산과 왕가봉 너머로 물러난 해가 계룡산 천황봉 위에서 뒤끝이 긴 노을을 붉히며 오래 머물러 있었다.
2차선 신작로는 양쪽에 키 큰 플라터너스나무가 나란히 줄 서 있었다. 그 가로수길을 따라가면 장터와 학교가 나왔다. 그곳이 읍(면)내였다. 시장도 학교도 읍(면)사무소도 지서도 그곳에 다 있었다.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그곳에 걸어서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너나 한 것 없이 개울에서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개울물은 투명해서 물밑으로 떼 지어 다니는 붕어ㆍ치리ㆍ송사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물길은 순하고 수심이 얕아서 아이들도 물고기 잡는데 어렵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개울을 죽동천竹洞川 혹은 대울천이라 불렀고, 인접 동네 지족동 사람들은 지족천智足川이라 부르고, 지족동과 죽동에서 한 자씩 따와 지죽천智竹川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공식 안내도에는 반석천盤石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석천은 이 개울이 발원한 유성구 우산봉 일대의 반석리盤石里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그 마을 주변에는 넓고 편평한 반석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반석천은 반석동, 지족동, 노은동, 죽동, 장대동 들판을 지나 궁동 어귀에서, 유성구 갑동 산자락에서 발원하여 구암동과 장터를 거쳐 내려온 유성천儒城川과 합류한다.
반석천은 천변 공원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서 걸어가는 사람, 자전거를 저어가는 사람들의 길이다. 특히 자전거길은 멀리 외삼마을을 거쳐 세종시에 이르는 길로 조성했다. 천변의 길은 깔끔하고, 계통과 질서가 있고, 심은 벚나무에서 벚꽃봉오리가 오물거리는데, 개울물은 정돈된 도랑으로 얌전하게 흘러서 물소리는 속삭이듯 들린다.
아득히 넓고 멀었던 논에는 고층 아파트와 상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섰고, 신작로 양쪽으로 서 있던 키 큰 풀라터너스나무 가로수는 사라졌고, 확장된 길가는 날씬한 이팝나무 가로수가 차지했다. 내가 놀던 뒷산 자락은 절개되어 평지가 되어서 내가 살았던 산날망 찌그러진 촌가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내 고향 대울에 와서 낯선 이방인처럼 낯선 풍경을 걸었다.
나는 죽동근린공원 입구에 서 있는 죽동유래비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2015년 11월 30일 죽동지구추진위원회가 설치한 죽동유래비는 사각의 받침석 위에 앞면을 평평하게 깎아서 펼치고 그 위에 마을의 유래가 새겨져 있었다. 도시화 된 죽동에서 사라진 대울의 흔적과 기억은 이제 이 유래비 돌 속에 들어있는 글의 분량만큼만 유효한 것인가?
나는 죽동근린공원 소나무 사이로 난 숲길을 걸어가며 잃어버린 방위를 가다듬으며 유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빼곡한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 사라진 등고선을 다 되찾아 기억해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보았다. 해가 떨어지는 포물선을 따라가서 천황봉을 밝히는 붉은 노을빛으로 굳게 덮어진 기억 저편을 들춰볼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퍼즐 같은 풍경의 조각을 끼우고 맞추다 보면, 그나마 덜 잊힌 추억의 풍경 몇 점이라도 건져낼 수 있는 행운이 따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망대까지 걸어가는 산길은 1킬로미터 남짓한 황토길이었다. 몇몇 주민으로 보이는 분들이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래 대울의 산자락은 황토가 많았다. 어렴풋한 기억 한편에서 아마 칠석날이었던가, 어떤 특별한 날이었을 그날. 산자락에 가서 삼태기에 가득 찬 황토를 머리에 이고 와 사립문 바닥에 빙 들러 뿌리고, 장독대 위에 촛불을 켜고, 정화수를 올리고, 치성致誠을 드리던 어머니의 모습! 그때 어머니는 누구에게 어떤 소망을 구원했던 걸까?
어머니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머니는 노인복지회관에서 나와 온천길 노천 족욕탕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고 말했다. 매면 이맘때 생신을 맞아 서울과 서울 인근에서 내려온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손자들과 겨우 점심 한 끼 먹고 서둘러 떠나보내며 기뻐하는 어머니의 삶은 행복한 걸까?
하나의 피자 조각처럼 도시화된 대울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작은 죽동공원에서 바라보는 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갑하산과 왕가봉 너머 계룡산 천황봉 위에서 노을을 붉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