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
<눅13:1~9>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 제사를 드린 끔찍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1절). 유대인들의 신앙은 철저히 인과응보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즉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이었습니다. 즉 어떤 이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한 것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보응이었던 것입니다(욥4:7, 욥22:4-5). 그래서 요9:1-2절을 보면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그가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지 즉 자기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와 갈릴리 사람들이 이러한 비참한 죽임을 당한 것을 이야기했던 이 사람들 역시 동일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들은 더 본질적인 질문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유월절 절기 때 로마 군인들이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짐승처럼 학살하고 그들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신들이 악한 이방인들로부터 이러한 압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그 뿌리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공정하지 못한 이 세상 일에 대해 동일한 의문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금 수저 물고 태어나 왕자 공주의 삶을 살다 죽고, 어느 누구는 흙 수저 물고 태어나 한 평생 고난의 삶을 살다 죽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지,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러한 불공정한 세상을 그대로 지켜 보고만 계시는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의도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졌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때 치어 죽었던 18명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고 하시며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여 바라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악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께 벌 받은 거야 라며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사고로 죽는 일을 보면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지 의심하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을 뒤집어 놓으십니다. 빌라도에게 비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인간, 더 선한 인간의 구별은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분명히 더 나은 인간이 있고 더 악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진작에 멸망을 당했어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신자는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의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내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원망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질상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땅한 것은 저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지금 우리들이 이 땅에서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이 지구 상에서 소멸되었어야 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계속 이 땅에 존재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쓰나미, 지진, 각종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때 어느 누구는 살고 어느 누구는 죽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선한 사람이라서 그럴까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같이 우리는 인간의 의를 본능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비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두고 단순히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받을 자들로만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시각입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을 자라는 말입니다. 즉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그 어떤 복도 기대할 수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봅니다. 누가 복을 받으면 그가 복을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불행을 당하면 그가 무슨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하박국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실종되고 불법과 강포가 만연한 세상을 그대로 지켜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기대하는 현실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의가 실종되고 하나님은 이를 가만히 지켜 보고만 계시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불만을 갖게 했고 결국 하나님께 반발한 것입니다(합1:2-4). 이러한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바벨론을 들어 유대를 진멸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합1:5-11).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박국은 악인(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들어 선인(하나님의 선민)을 징계하시는 일이 과연 옳으신 일이냐고 따집니다(합1:12-17). 하박국에게 망해야 할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cf. 삼상17:26).
이러한 하박국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유다를 진멸하십니다. 의인 유다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악인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하박국이 이해하고 있는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용하여 유다를 멸망시키십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가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합2:1-4).
믿음은 우리들의 죄를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죄인의 자리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신자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종말의 자리에서 지금 현재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종말의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현실의 필요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합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게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을 받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실상에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흥’입니다. 하박국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 부흥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백성 유다를 진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구원은 세상의 불행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이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긍휼 이외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때 그들의 죄가 드러날 것입니다. 유다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극렬하게 저항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망했고 그들의 죄악은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의 신세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세워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과 같이 멸망 받을 수 밖에 죄인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이 죄임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로 세우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택한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합3:13절을 보면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즉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들의 죄악을 철저히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본능적으로 밀어낼 뿐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감당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열심으로 우리의 죄인됨이 드러나고 그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매달아 죽여버린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더 이상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내게 불행한 일이 닥쳐도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롬5:3-8).
하박국이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합3: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더 이상 삶의 현실을 갖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비행기 사고로 죽든 그 사고에서 살아남든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일임을 믿고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지금 숨쉬고 살고 있는 이유는 남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에 살려놓고 계시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인됨에 눈을 뜨고 회개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인간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겸손하기 위해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을 할 뿐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지옥에 갈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자신이 스스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할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죄인된 실상에 눈이 열려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2:4절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13: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통해 회개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느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았습니다. 3년이 지나 열매를 보려고 가보았더니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당장 이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열매 맺힐 가능성이 없는 나무에 거름과 땅만 허비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한 해만 더 기회를 주면 자신이 잘 돌봐서 열매를 맺혀보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그때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포도원지기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요15:1).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된 죄인들을 말합니다(롬11:17). 죄인이 포도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반드시 회개의 열매는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회개의 열매가 도무지 맺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 나무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있었다면 그들에게 회개의 열매가 맺혔을 것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마9:13).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내용물인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율법의 껍데기를 붙들고 자기 의라는 열매를 맺히고 자기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이 열매가 맺히지 않을 자라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 결과 찍어버림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자기 의의 열매가 아니라 회개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은 의가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의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앞세워 그 의를 만들어 보고자 힘쓰고 이를 통해 얻어진 자기 의를 내세우며 자랑하고 있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