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나는 북경과 하얼빈을 거쳐 목단강과 도문
조선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연길까지 달려와 있었다.
연길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중국과의 수교 축하메세지를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몇 차례에 나누어 1992년 8월에 여행했던 40일간의 중국여행기를 글로 담는다.
-7월 20일 중국 초록빛 남방에서 김부식 원장-
[추억의 40일 중국 여행기]
1.홍콩에서 북경으로
1992년 8월, 나는 총신대학원 M.A과정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있는 상태였다.
많은 학우들과 선배님들을 통해 중국을 보아야한다는 예기를 들었다.
그때 난 이미 다른 나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맘 한구석에서 이상하게 중국을 다녀와야겠다는 확신이 서 있었다.
학원을 운영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긴 중국 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그 당시 중국은 공산사회주의 체제이었으므로
특정국가비자를 받아야만 출국을 허가해주었다.
그 허가를 받는 일은 매우 복잡하고 힘든 일이었기에
특정국가허가를 받는 사람은 몇 명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나도 몇 번 시도를 해 보았지만 결국 허가를 쉽게 받아 내지 못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홍콩을 경유하면
비자와 중국입국이 수월하다는 정보를 듣고 그 길을 택하기로 했다.
난 곧바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홍콩으로 향했다.
며칠간 홍콩 미션홈에 머물면서 여행사를 통해 중국비자를 받게 되었고
머뭇거릴 틈 없이 중국 북경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직 미지의 땅 중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 장애인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삶을 보기위해서였다.
말로만 듣던 중국장애인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북경 상공에서 바라본 대륙은 신기하기만 했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중국 땅,
그 거대한 대륙의 심장부인 북경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활주로를 미끄러지는 순간, 아! 나도 중국이란 닫혀진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되는구나! 하는 감탄을 맘속으로 외쳐댔다.
비행기가 멈춰지고 트랙을 내려오는 순간 하늘이 노랗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낯선 땅 북경에는 아무런 연고자도 없었고 마중할 사람 한 사람도 공항에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말을 잘 구사하는 것도 아니었고 막막하기만 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호텔로 가는 택시를 타고
저렴한 호텔을 찾아 묵겠다고 택시 기사에게 부탁을 했다.
영어는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이제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 40일간을 헤쳐나갈지 참 암담하기만 했다.
이 땅에 두 발로 서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려움과 함께 미묘한 느낌으로 신기하다고 표현 할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 요금을 요구하는 택시 기사, 단골을 정해놓고
손님을 모시고 오는 택시기사에게 소개비를 건네는 호텔측,
내 눈은 그들의 말과 동작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만큼 낯선 땅에서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법인가 보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손바닥에 한자로 글씨를 써가며
청각장애인과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우의호텔에 묵게 되었고 지금도 그 호텔을 지나칠때면 감회가 새롭다.
나는 우의호텔에 머물면서 며칠동안의 북경여행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준비하였다.
구사할 수 있는 중국말은 간단한 단어 몇 개 정도,
여행이 순리로울리가 없었다.
그래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중국의 수도 북경을 뒤지기 시작했다.
북경의 유명한 곳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 꼭 가보고 싶었던 중앙미술학원을 찾았다.
손짓 발짓을 해가며 학교를 찾아 입학원서를 구해서 돌아왔다.
북경의 뒷골목은 지저분한 것들로 인해 지독한 냄새를 피우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여자 운전수들이 대형 노선버스와 전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길을 쓸어 가는 수많은 자전거 행렬, 사거리에는 교통지도하는
여자 경찰들의 방향 지시가 신기롭기만 했다.
삼류 영화관을 들어가 북경 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옛날 우리 나라에서 보아왔던 삼류 극장에서의 고함소리
관중들은 필름이 끊어지는 순간 일제히 환불을 요구하는 듯한 고함을 질러댔다.
활발한 중국인들, 그리고 당당해 보이는 듯한 중국인,
그들이 점점 더 친숙해져 가고 있었다.
중앙미술학원을 나와 천안문 광장까지 걸었다.
오후 2시, 천안문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오가고
넓은 광장가운데 초라한 모습의 한 사나이가
100호 수묵화에 점 하나 찍듯 연약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외국인들과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국인들이 광장을 거닐면서
인력거를 타고 여유롭게 오간다.
연을 날리는 사람,
짝을 지어 사진기를 연신 눌러대는 사람,
자전거를 타며 광장주위를 맴도는 사람들...
참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중국인들의 움직임은
우리가 배워왔던 무시무시한 공산주의의 모습이 아니라
자유로운 표현과 여유로운 생활을 만끼하고 있었다.
나는 북경역을 한번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인력거를 세웠다.
인력거는 내 앞에 서자 타라는 시늉을 한다.
난 한국말로 북경역 까지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두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 손바닥에 한문으로 북경역이라고 써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보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십원이라는 뜻이었기에 "너무 비싸니 5원 하자."며
오른쪽 손바닥을 펴 보였다.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고래를 끄덕이며 타라고 했다.
생전 첨 타보는 인력거이지만 신기하기에 앞서
힘들게 인력거를 끌고 가는 주인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 몸을 조아리고 탔다.
그는 열심히 페달을 밟았고 인력거는 천안문 광장을 벗어나
북경역을 향해 달리고 시작했다.
한참이나 달렸을까 대로를 벗어나더니
이상한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분명 구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북경역을 가려면
이 골목길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길을 잘 아는 인력거가 응당 잘 바래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상황에서 믿지 않고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을 적시며 골목길을 달려온 인력거운전자는
인적이 없는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 인력거를 세웠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감지를 한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으슥한 골목에 적막감만 감돌았다.
아직 북경역이 보이지 않으니 북경역 가까이 가자고 재촉했다.
그는 운전석에서 나에게 다 왔으니 내리라는 신용을 한다.
나는 이곳이 분명 북경역이 아니기 때문에 내릴 수 없다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결국 그의 손에 의해 강제로 내리게 되었고
그는 손을 벌려 요금을 요구한다.
난 약속대로 지갑에서 5원을 꺼내 주었다.
그는 두손을 가로 저으며 5원이 아니라 10원이라는
열 손가락을 펴며 험상궂은 얼굴로 째려본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분명 위험한 상황이고
인력거 주인의 행패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십원을 더 주더라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갑에서 10원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 10원을 받아 쥐고서는 또 다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열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소리를 질렀다.
앞이 캄캄했다.
10원이 아니면 얼마를 달란 말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 100원을 준다한들 또 다른 행패를 부릴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깡패와 같은 그를 상대하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마침 경찰복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너무나 반갑기도 하고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에
경찰에게 딱한 나의 사정을 얘기했다.
외국사람인 내가 이 깡패한테 지금 당하고 있으니
빨리 구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한참 예기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한국말로 열심히 설명했던 것이다.
아차 지금 여기가 중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영어도 통하지 않는 중국.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지껄이는 나를 보고는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번에는 인력거주인이 그 경찰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했다.
아마도 자기 입장을 옹호해달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경찰은 그 사람의 예기를 듣고 난 후 눈을 부릅뜨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호통을 치고는 사라졌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가슴이 뛰고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전혀 없다는 막막함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몇 년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과 달라 중국에서는
경찰이나 군인이 아니어도 군복을 입고 다니는 일반인이 많았다.
이제 인력거 주인은 독 안에 든 쥐를 어떻게 요리할까
군침을 흘리며 기세가 당당하여 돈지갑을 요구한다.
인적 없는 후미진 곳에서 거대한 덩치의 인력거주인은
우악스럽게 지갑을 낚어 챈다.
순간, 여권과 여행비용이 든 이 지갑을 빼앗기면
국제고아가 된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손안에서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한참 뺏고 빼앗기는 긴장감속에 무쇠 같은 주먹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난 쓰러지는 순간 정신을 차려야한다는 의지하나로 다시 일어나며
속주머니에 감추어두었던 가스분사기를 꺼내 그의 얼굴에 발사했다.
중국 들어올 때 주위에서 많은 충고가 있었다.
위험한 곳인 만큼 반드시 위험에 대처할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듣고 사만원을 주고 볼펜모양의 가스분사기를 구입해
속주머니 깊은 곳에 넣고 다녔던 것이다.
인력거 주인은 갑자기 얼굴에 발사된 가스로
눈을 비비고 재채기를 하며 괴로워 어쩔 줄 몰라한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그때 기회를 잡아 재빨리 지갑을 가로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허우적거리며 눈을 뜨지 못한 채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한참이나 달렸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주위에 꽤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 뒤돌아보니 다행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한숨을 돌린후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젠 모든 사람이 두렵다.
택시 기사의 행동 하나에도 신경이 쓰인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오른손엔 항상 가스분사기가 들려져 있다.
그날이후 두려움으로 중국여행은 계속되었고
배짱좋게 만리장성, 이화원, 13릉을 다 둘러보았다.
가끔 속주머니에 가스분사기가 잘 꽂혀 있는지 확인하면서......
10년이 지난 지금 천안문 광장 앞을 지날 때마다
그때 그 끔찍한 인력거 사건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