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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의 길라잡이 / 13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
14 영적 치유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원제 : Talking with God (하나님과 이야기 나눔)
by Mrs, Gwyne Dresser Mark (귀네 드레서 마-크 여사 지음)
13. 그리스도의 치유사역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출15:26)
이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의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하신 일은
정신적 장애를 가진(disturbed) 인간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병든 몸을 치유하여 질서에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었지만
영혼이 몸을 통해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몸도 치유하셨습니다.
만일 몸의 건강이 영혼의 죽음에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면
주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 짧은 동안에
병을 고치는데 많은 시간을 쓰시지 않았을 것이며
또 제자들에게 병을 고쳐주라고 가르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행하신 병의 치유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훈련하신 일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성읍과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유다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주셨다.” (마태9:35)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악한 귀신을 내쫒고
온갖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주게 하셨다.” (마태10:1)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12:15)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주위의 온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병자를 모두 그에게 데리고 왔다.
그들은 예수께 그 옷술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마태14:35-36)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의 능력에 접하려면
‘낫고 싶은 의지’와
‘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명백히 하셨습니다.
치유를 받고 싶어 하는 자라도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충분치 않은 이도 있습니다.
또 때로 병을 통해 더 잘 충족되는 숨겨진 욕망도 있는데
책임을 회피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피하기 위한 예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우 사람의 의지의 힘은
불편함이나 고통에도 불구하고 건강으로 복귀하는 것을
막는 것과 같은 가장 안쪽의 욕구에 놓이게 됩니다.
또 사람은 회복을 갈망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결핍이요 믿음의 결핍은 잠긴 문입니다.
질서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완전히 바라지도 않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도 않는 것은
들어올 수 있는 주님과 그분의 치유 능력에 대항해
장벽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만 치유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그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 가거라. ..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눅10:2-9)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곧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막16:15-18)
이 말씀들은 기독교회 초기, 그리고 20세기에 있어서
치유를 인류에 대한 사역의 일부로 만든 권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치유를 위해 그런 명확함으로 일했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질서 안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이를 위해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치유하셨는데
인간은 몸 안에 있는 영혼이므로
주님께서 치유하실 때 몸과 영혼을 전부 치유하셨습니다.
몸과 영혼의 상호 의존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을 때’ 명령되어졌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각 개인마다 육체의 건강을 무시하거나 감수하지 않고
그것과 병행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사역이 주는 영향력과 가르침이
늘 새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회의 역사에 있어서의 영적인 힘의 성쇠는
그 교회의 지도자들의 이해와 의지가
신성한 율법을 향해 갖추어지거나 상실됨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유 사명으로 돌아와서는 언제나
치유를 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질서를 회복하는 힘도 주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치유했을 때 그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었고
또 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참고 : 스베덴보리 증언
* 병자가 치유를 받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함은 옳다.
주께서 행하신 기적 중에 대부분은 병을 고치신 것이었는데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 응해서 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고치심을 받게 한 그들의 믿음은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그들을 고치신 것이다.
* 주님께서 고치신 모든 병은 영적 치료를 뜻하고
주님께서 고치신 자연적인 병은
그것에 대응하는 영적인 병은 주님의 의해서만 낫게 된다.
영적 치유에 맡긴다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이며
그것은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하는 것이다.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치유는
악에서 깨끗함을, 또는 영적 생명의 회복을 뜻한다.
* 주님만이 사람의 성질과 악이 어떠한 것인가를 아시고
따라서 그 악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안쪽에서 제거되어
치유되는가를 알고 계신다.
사람 안에 행하는 일이 그의 행복을
영원히 증진시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전지(全知)와 전능으로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한 것을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14. 영적 치유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 (마태21:22)
사회는 인생을 한 짜맞춘 퍼즐 그림처럼 하고 있어서
우리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서로 명백히 관련이 없는 집합체의 조각들로 보고
이것저것 조각들을 집어 들고 그 뜻을 알려고 고생을 하지만
이것들을 하나의 합친 그림으로 꼭 맞출 때까지는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생의 여러 측면에 대처하기 위해
그 중심이 되는 뜻을 찾아내어야만 하고
만일 이 뜻이 힘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간단하고 나아가 포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 종교체계가 이 간단하고 포괄적인 것에
이르려고 해 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일체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
너희들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내게로 오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보다 더 만족스러운 개념을 주지 못했습니다.
(Various religious systems have tried to arrive at
such inclusive simplicity, but none has improved
upon the concept taught by the Lord :
“All power is given unto me.. Without me ye can do nothing..
Come unto me.. He that believeth on me hath everlasting life.”)
여기 이 말씀에, 그리고 성경 전체에
인생(human life)의 의미가 정의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것이요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기능합니다.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질서 있게 기능하는 것이
완전체(wholeness, 통일체) 또는 건강의 의미입니다.
질병의 만연은 오늘날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질병 퇴치를 위한 과학적 지식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음에도
의료실과 병원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질병 예방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고
의사들은 인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장애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의 지식이 최종 권위로 간주되는 한 더 이상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일한 권위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명확한 답변이 주어집니다.
그분은 우리 몸을 설계하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이 쉬지 않고 기능하게 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편의 혼선으로 질서가 혼란케 되었을 때
만일 우리가 협력할 의지와 방법을 준비한다면
그분은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Therefore He has the knowledge and power to restore order
when human interference disrupts,
provided we are willing and know how to cooperate.)
원인은 물론 알고 있습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손상이 있지만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 몸의 화학작용은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은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감정이란 무엇일까요?
감정은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그의 활동의 가장 깊은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또한 이 가장 깊은 핵심에 계십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공존합니다.
사람이 각자의 영과 육체 안에 가질 수 있는 평화의 정도는
이러한 공존의 성질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병의 원인에 대한 의학계의 학설 중의 하나는 ‘스트레스 설’인데
그것에 의하면 부단한 긴장을 받는 유기적 조직체는
언젠가는 그의 가장 약한 데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으로 생기는 것만큼 강한 긴장과 압박은 없습니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
표현하기를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우리의 의지는
예기된 것, 허용된 것, 가능한 것에 의해
끊임없이 밀고 당겨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된 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결코 멈추지 않는 긴장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In the wear and tear of life,
what we want or do not want (expressions of will) is constantly
pushed or pulled by what is expected, permitted or possible.
We live under never-ending tension from having to adapt
what we want to what we are allowed.)
몸은 마음의 버튼 하나하나에 복종하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지의 긴장은 몸의 긴장을 낳습니다.
몸의 긴장은 긴장된 근육, 수축된 혈관, 억압된 호흡,
화학적 불균형으로 구성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기관의 기능을 방해합니다.
이러한 몸의 혼선(interference)이 너무 자주 발생하거나 습관화되면
무질서가 확산되어 세균이 잠복할 기회가 생깁니다.
이것이 많은 질병이나 장애가 발생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것은 감정적인 분위기보다는 피로와 전염을 통해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긴장이 존재하면 치유가 막힐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영적치유는 병의 원인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영적치유를 도움으로서 구할 때에
병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 필요를 따라 소원이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되는 것으로
그것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구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기본 원칙이며
자유 의지의 원칙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종종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편에서 알아차리거나 바라지도 않는데
주님 편에서 돌보아주시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지가 거듭나는 일만큼은
우리들 편에서 주도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할 때 그것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무한하신 힘이 유입됩니다.
의지의 긴장으로 인해
몸의 장애가 생기게 되거나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첫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첫 단계일 뿐입니다.
긴장과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 골몰했지만
아무도 아직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는
이 단순한 단어들이 제공하는 명확함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To understand tensions and all they mean
has been absorbing psychologists for years,
and none has yet achieved the clarification offered
by those simple words: "Thy will be done.”)
여기에는 중생을 향해가는 모든 영혼이 평생을 산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치유를 위해서 하는 모든 진실한 노력은
그분의 뜻에 일치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노력의 동기부여가 무엇이냐에 달렸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탄원으로 요구를 하거나
인간이 구하는 대로 하나님은 해주셔야 한다는 태도는
성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구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많은 경우 ‘내 이름으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격요건은 종종 간과되지만
사실 그것은 그 상황의 가장 핵심입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일 뿐이기에
그 자체로서는 뜻을 갖지 않지만
그러나 이름은 그것에 따르는 모든 것을 표징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한 인격으로서 알려진
당신의 모든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은 우리가 닮아야 할 본래의 인격으로서 알려진
주님의 모든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따라서 단순히 구하는 것과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구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일입니다.
우리들은 건강, 돈, 성공 따위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면
우리들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목적에 맞는 것에만 제한됩니다.
구하는 것은 실제로 여전히 돈이나 건강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을 구하는 이유가
그분의 이름으로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육체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청교도 같이 비뚤어진 생각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잘못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있지 않고 구하는 이유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물질과 영 모두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우리들이 충분히 먹고 살기 좋은 집에서 사는데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마련해놓으신
너무도 명백한 이 육체적 존재에 의하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들은 이 육체적인 존재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질서 안에서 성공적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적 도움이 무엇이든
그것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사용되는 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될 수 없습니다.
+ + +
믿음은 치유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최종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혼잣말만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전에는
그것을 우리 삶의 힘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믿음 없이, 즉 그들을 믿지 않으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은 지식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지식이 결여된 느낌도 아닌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지성과 감정 모두의 기여가 필요합니다.
즉 그것은 알려진 것과 느끼는 것 모두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사랑하게 된 지식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우리는 거기 애착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고치실 때
‘너는 낫고자 하느냐’ 또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병의 상태를 묻지 않으셨고
단순히 그들의 의지와 믿음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사실 그분이 다루고 계셨던 것은 그들의 사랑의 본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자기 초월적인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모든 규칙은
이런 유형의 사랑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사랑의 결합인 믿음은
기도에 있어서, 따라서 치유에 있어서 주님의 현존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또 우리가 이타적인 노력에 전념할 때
우리가 구하는 그분의 치유 능력이 우리의 것임을 안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지식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이르게 될 믿음을 형성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그분 보시기에 오직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확신으로 구할 수 있고
또 우리의 기도는
정말 물질적으로 필요한 경우만이 아니라
특히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건강을 위한 것도 응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건강은
사람 전체의 질서 정연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 스베덴보리 증언
* 마음이 주님을 향하면 몸도 그와 같이 된다.
만약 사람이 늘 주님을 자기 눈앞에 맞이하고 있다면
그는 마음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과 함께
몸을 다 하여서 그렇게 한다.
* 주님께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의 고양(高揚)이다.
그때 사랑과 지혜는
마음 안쪽으로 흘러듦과 동시에 몸도 그와 같다.
사랑과 지혜는 사람과 함께 계시는 주님이시다.
* 몸의 꼴인 사람의 바깥 꼴은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안쪽의 꼴이 새롭게 되고
완성되는 데에 따라서 완성된다.
만일 사람이 주님께서 그의 바깥쪽의 것을
그의 맨 안 쪽 것에 대응하게 하는 대로 맡기면
안쪽의 것은 바깥 것과 한 몸이 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의 영혼을 통해서 몸에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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