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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폭을 개발하지 못하고 부러워할까?
진포 대첩
새벽녘에 1함대 중 선봉 10여 척의 먼저 서풍을 받아 금강의 흙탕물이 시커먼 바닷물에 섞이는 강 끝자락에 도착했다. 화포는 특급 군사비밀이었다. 화포방사군이 혹 적에게 잡혀서 기술이 노출되면 안 되었다. 강어귀에 나와 있던 왜구의 척후선이 재빨리 강을 거슬러 쏜살같이 들어갔다.
고려의 척후선도 화살을 메기며 배 뒤꽁무니를 바짝 뒤쫓아 강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강 북안을 확보했다. 척후병의 긴급 보고를 받은 적진은 징을 치며, 취침 상태의 도적떼를 깨웠다. 겨우 몸을 추스른 적장 손시랄이 곧바로 큰 도끼로 묶은 줄을 끊고, 닻을 걷어 올리고 배를 떼어내었다.
하구에 다다른 고려 토벌군 함선 1진을 보고 왜구는 전함의 수가 저들보다 크게 열세라는 것을 알고 망설임 없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원수가 빨리 와서 공격 명령을 내려야 할 텐데…….”
“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화통방사군에 예성강에서 날고 기는 뱃사공 출신이 많듯이 제2함대에는 군산도의 뱃길을 가장 잘 아는 이곳 뱃놈 출신 군관이 있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최칠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세가 이끄는 제2함대가 너른 앞바다에 들이닥쳤다.
“저들의 배들이 아무리 많아도 한꺼번에 이 포구로 다 빠져나와 도망치지 못합니다.”
“함선들을 전개하여 포구를 둘러막고 포선이 강 북안으로 일자로 전진하여 대행을 갖추어 일제히 포문을 열어 포격해서 왜놈들을 일시에 궤멸시켜 버려야 합니다.”
고려 수군이 하구를 넓게 삼중 사중으로 겹겹이 포위한 채, 적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심덕부가 나세에게 말했다.
“원수, 밀물 때요. 이제야 화포를 선보일 때가 되었소. 오늘이야말로 고려의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거요. 총공격을 명령하시지요.”
나세가 최무선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그렇소. 자, 최 부원수의 꿈을 이룰 때가 왔소. 먼저 포선으로 단숨에 적선을 격파하시오.”
최무선이 붉은 깃발을 높이 들어 흔들고 큰 북을 쳐서 신호를 보냈다. 화포(火砲)! 그게 어떤 것인가.
“화전(火箭)을 5백 발을 쏴라.”
각 자 맡은 적선의 돛대를 향해서 5백 발이 동시에 심지에 불꽃을 뿜으며 날아간 화전이 선루에 박힌 뒤에 곧바로 터졌다. 동시에 불똥이 사방으로 튀며 불꽃이 일어났다. 도적들이 놀라서 불을 끄느라 대응을 하지 못했다.
“갑판과 선미를 향해 각각 화전(火箭)을 1천 발을 쏴라.”
“갑판을 향해 흘수선을 향해 화전(火箭)을 1천 5백 발을 쏴라.”
화전에 날아와서 터지는 반대 방향으로 우왕좌왕 피하기 급급한 왜구들이 불붙은 배로 공격해 오고 있었다.
최무선이 호령을 내렸다.
“칠석아, 저 벌레 같은 도적놈들이 꿈틀거리지 못하게 아예 배를 부셔버려라.”
“화포를 쏴라!”
각 배에서 겁 없이 다가오는 적선을 향해 연거푸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
‘방포하라!’는 사람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뒤를 이어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왜놈들이 질러대는 아비규환은 하늘을 울려 퍼지고 솟구치는 피는 바다에 흩뿌려졌다.
적선은 누각과 갑판이 산산이 부셔지고 삽시간에 연기와 화염(火焰)이 하늘에 넘쳤다. 불붙은 배와 함께 온몸이 타들어가는 왜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침몰하는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사체는 물고기 밥이 되었다.
1차 포구 전투 후에 곧바로 백강으로 거슬러 함열에 이르니, 왜선은 굵은 아마실로 만든 끈으로 배를 서로 묶은 채로 정박하고 있었다. 왜선에는 배를 지키는 병사와 노략질 해 온 곡식과 물건들을 배에 싣는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변 군현으로 노략질에 나갔었다.
갑판에서 적장의 지휘로 화살로 대응하는 왜적에게 송부개가 만든 주화를 날렸다. 적의 화살은 힘없이 바다에 떨어지고 고려군이 쏜 주화는 화통에서 불이 붙으며 추진력으로 더 빠르게 힘차게 직선으로 날고 날아 멀리 날아가서 왜구의 가슴에 꽂혔다. 왜구의 괴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의 왼쪽 눈에 주화가 깊게 박혔다. 그는 발해의 유민의 후손이었다.
최무선이 지휘하는 포선에서 포를 쏘고 주화를 거칠 것 없이 날려 보내니 적선은 부서지고 불이 나서 침몰당하고 적은 주화를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죽어갔다. 화포의 위력에 놀란 왜적들이 바닷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면, 고려 수군이 긴 낫으로 목을 베거나 머리통에 유엽전을 박았다. 몇몇 병사들이 겨우 헤엄을 쳐서 뭍으로 도망을 쳤다.
뒤따라 온 대장 나세가 명령을 내렸다. 화포는 특급 군사비밀 신무기였다. 화포방사군이 혹 적에게 잡혀서 기술이 노출되면 안 되었다.
“군사들은 배에서 내려서 놈들을 추격하지 마라.”
다시 강을 거슬러 임천을 도착하니 적선이 강물이 갑자기 꺾이어 북쪽으로 향하는데 거기서 보니 고다진(古多津)에 적선들이 수백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최무선이 적선의 수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적들이 강 하구에서는 보이지 않게 이곳에 숨겨 놓았군요.” “고다진에 세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을 약탈하려 했으나 창고가 비어서 내륙 깊숙이 약탈을 자행하나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전함이 강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멈추어야 합니다.”
나세가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적선을 모조리 침몰시키고 더 이상 공격은 없다.”
“각 포선은 적이 반격하는 배를 골라서 집중 타격하라!”
포연 속에서 그 명령을 듣지 못한 칠석이 탄 포선이 화염을 뚫고 하구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다.
적의 대장선을 발견했다. 그때 대장선에서 작은 배로 옮겨 타고 금강 상류로 도망가던 도적의 괴수를 향해 화포를 날렸다.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괴수 손시랄(孫時剌)의 얼굴에 직격탄이 작렬했다. 괴수 손시랄의 머리통이 박살이 나고 몸이 산산이 찢겨졌다.
이 때에 적선 27척(*30척)이 포에 맞아 침몰하고 나머지 배들은 대부분 불에 타서 배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강가에 널브러졌다. 왜적들은 주화나 화살에 맞아 죽거나 거의 다 불에 타 죽었고 바다와 강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만세! 만세! 만세!”
격군들까지 모두 갑판으로 나와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는 왜선을 보며 군사들이 통쾌한 승리를 만끽했다. 강변 여기저기서 왜구들의 시체가 바다로 둥둥 떠내려갔다. 해묵은 원한의 갈증이 한순간 통쾌하게 씻겨 내렸다.
상류에서 배로 돌아오던 왜적이 이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그 중 한 왜장이 말했다.
“우리 배가 다 파선되었다. 배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육지로 후퇴해서 퇴로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포로로 끌고 오던 부녀들을 화풀이하듯 모조리 베어죽이니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겨우 334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왜적은 백강을 따라 상류로 달아나서 공주를 지나 회덕현 부근에서 배를 버리고 옥주(沃州 : 충북 옥천)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 : 옥천군 이원면)‧영동(永同)현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짓밟으며 지나갔다. 이제 왜적은 퇴로를 찾아서 귀환해야만 했다.
토벌군은 강 상류까지 샅샅이 뒤져서 부셔지지 않은 배를 모조리 찾아내어 끌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역사는 한 사람의 위대한 창조의 산물
역사는 한 사람의 위대한 창조의 산물이다. 최무선이 고려의 역사와 인류의 전사(戰史)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여기에는 고려가 고우성 원정 당시 원의 군사가 화포를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최영과 왜구 격퇴를 위해 독자적인 화약 제조에 노력을 기울인 최무선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를 처음부터 격려하고 끝까지 뒷받침해 준 최영이야말로 왜구 침략 시대의 탁월한 영웅이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배에서 발사한 화포(火砲 : 함상화포)는 최무선이 왜구를 향해 쏜 것이다. 212년 후에 이순신이 일본 수군의 전멸시킬 수 있었던 것도 최무선이 연구 개발한 화포요, 1805년 10월 21일에 트라팔가르에서 영국의 제독 넬슨이 육전에서 연승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벌인 해전에서 범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교전한 것은 425여년 후의 사건이다.
넬슨은 이 해전에서 눈부신 작전 지휘로 적선 30척 가운데 18척을 나포하거나 침몰시켰다. 그러나 넬슨은 치열한 접근전을 벌이던 중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승전 보고가 올라오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영아례(迎迓禮)를 베풀어 최영에게 개선군을 영접하게 했다. 대함대가 벽란도로 귀항하려고 하자 최영이 명령을 내려 최무선의 화포를 실은 배는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게 하려고 동강으로 귀항시켰다.
동강에서 무기를 포장하여 비밀리에 내려서 옮기고 천수사(天壽寺) 환영식장으로 개선하게 했다. 곧장 천수사 환영식장으로 개경과 인근의 백성들과 군사의 가족들도 이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술과 안주 그리고 먹을 것을 해 가지고 기다렸다.
나세와 최무선의 군사들이 함선의 돛을 올려 순풍을 타고 개선하자 최영(崔瑩)이 백관을 거느리고 오색 장막을 설치해 온갖 놀이판을 벌이게 한 후 열을 지어 천수사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수사는 임진강 북안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진서면(津西面) 전체리 경계에 있었던 절이다. 고려 숙종(肅宗) 때부터 절을 짓기 시작하여 예종(睿宗) 11년(1116)에 낙성했었다.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중창공사를 감독했으며, 숙종(肅宗)과 명의 태후(明懿太后)의 초상을 봉안했다. 뒤에 그 자리에 천수원(天壽院)이라는 역원(驛院)이 세워졌다. 특히, 이 절 주위의 풍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때로는 사신을 맞이하거나 놀기에 적합 장소여서 사신들을 맞이하는 곳으로 쓰였고 이번에는 개선하는 군사들에게 영아례를 하는 곳으로 정했다.
서쪽에는 취적교(吹笛橋), 동쪽에는 나복교(羅伏橋)가 있다. 나복교에서 신라 경순왕이 왕건에게 투항란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개선군을 맞이하기에는 뜻이 깊은 장소였다.
연도에 사물놀이꾼들이 백성과 함께 신나게 풍악을 울리며 개선군을 환영했다.
“저 분이 최무선 장군인가?”
“이 사람아, 여태 무슨 말을 들었는가? 저 분이 바로 화통도감(火筒都監, 화약국)의 제조로서 화약과 화포를 만들고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만들어서 진포에서 왜적의 배 500척을 다 부셔버린 전과를 올렸다는 것 아닌가!”
“50척도 아니고 500척이라고? 상상이 안 되네.”
“왜놈들 엄청 죽었겠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런데 그때 육지로 약탈 나갔던 놈들과 배에서 탈출한 놈들이 육지 깊숙이 숨어버렸다니 그 지역 백성들이 고초를 겪을 걸세…….”
상쇠가 꽹과리를 두드리니 그 음이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로 울려 퍼졌다. 백성들이 박자를 맞추어 손뼉을 치면서 후렴을 제창하며 얼싸절싸 춤을 추었다.
“우리 군사 개선하네,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
“화포 쏘아 박살냈네,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
“바다 건너 왜구들아,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
“이젠 다신 못 오리라, 쾌지나칭칭나네. 쾌지나칭칭나네.”
환호를 받으며 군사들이 거의 다 천수사 경내에 들어서서 각자의 위치에 도열했다.
바지·저고리에 청·황·적의 3색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상모를 쓴 상쇠가 꽹과리를 두드리며 앞장을 서서 뛰어나가면서 부포 상모를 휘두르며 부포놀이를 했다. 쇠꾼들이 뒤따르며 같은 꽹과리로 연주하면, 뒤를 따르는 법고잽이가 채상모에 흰 띠를 길게 늘어뜨리고 목을 돌리며 띠가 땅에 끌리지 않게 빙글빙글 돌리며 마당을 돌며 재주를 부렸다. 채상모의 꼭지에는 놋쇠로 만든 접조시(징자)를 달았고, 여기에 실로 꿰어서 만든 작자를 달고, 그 끝에는 실을 꼬아서 만든 물체를 달았으며, 물체 끝에는 고니 깃털로 만든 부포를 달았다. 상쇠가 신이 났는지 둘러 선 대원들의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서 개인기로 외사·양사·사사·양산·전치기·좌우전치기·퍼넘기기·해바라기·면도리·연봉놀이·이슬털이 등을 연희하며 흥을 돋우자 백성들과 군사들이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추며 즐겼다.
벽란도로 갔던 관리와 가족들이 배를 빌려 타고 뒤따라 부랴부랴 천수사로 달려왔다.
최영과 도당의 핵심 재상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하듯 환영했다. 나세와 최무선이 말에서 내려 달려가서 두 번 절하니 최영도 역시 두 번 절하고 앞으로 나와 최무선의 손을 잡고 눈물을 뿌리면서 치하했다.
“바다를 제패한 공이 이 한 번 싸움에 있었으니, 제조가 아니었으면 누가 화약과 화포를 발명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었겠소.”
최무선의 뺨으로 그동안의 고생한 편린(片鱗)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형님의 지도편달 덕분입니다. 더욱 화포를 개량하여 왜구들이 바다로 출몰하는 곳마다 더 강력한 화포로 물리치겠습니다.”
왕이 나세와 최무선, 심덕부에게 각각 금 50냥(兩)씩을 내려 주고 비단도 하사했다. 이하 비장 정룡(鄭龍)‧윤송(尹松)‧칠석(七夕) 등에게는 각각 은 50냥씩을 하사하니 다들 사양했다.
“장수는 적을 죽임이 직분이니 어찌 감히 받으오리까?”
최무선에게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의 호가 내리고, 광정대부문하부사(匡靖大夫門下府事 종2품)에 제수되고, 조금 뒤에는 중대광영성군(重大匡永城君 종1품)에 제수되었다. *1401년 11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에 추증(追贈)하고,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봉했다.
진포 해전에 참전했던 최무선의 개선 행사에 대하여 조선 사가들이 입을 다물었다. 겨우 칼날로 화살로 몇 명의 적을 죽인 것을 자랑으로 출세를 하고 위세를 떨치던 장수들이나 나라를 빼앗았던 무리들이 할 말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후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최무선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최무선은 국민적인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한편, 이성계를 옹립하려 했던 쿠데타 세력으로부터는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명나라와 왜구로부터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최영이 죽임을 당하여 후원자가 사라지고, 화포로 자신을 공격할까 봐 두려워하던 이성계와 그 추종자들이 조준을 앞세워서 최무선의 화통도감을 1389년에 재빨리 해체시켜버렸다.
그 후에 최무선을 향한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에 위상도 점차 줄어들어 죽는 날까지 쿠데타 세력에게 철저히 소외를 당했다. 겨우 화살로 노루나 사냥하고 적과 싸우던 장수들이 부끄러운 자화상을 역사에 감추고 싶었던 것이었다.
*화약에 관하여
정이오(鄭以吾 1347~1434, 1374년 문과 급제, 21등)는 과거를 보기 위하여 항상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조선 초에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했다. 조준(29등)과 동방이다. 그가 국방에 있어서 화약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그 제조기술을 잘 습득하여 국가에 유용하게 쓰도록 할 것을 건의했다. 저서로는 ‘화약고기(火藥庫記)’가 있다.
*군기감(軍器監)은 1392년(태조 1) 7월 관제 개혁을 단행할 때 군기감(軍器監)은 군자감(軍資監)의 예에 따라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 종5품 승(丞) 1명, 종5품 겸승(兼丞) 1명, 종6품 주부(注簿) 3명, 종6품 겸 주부(兼注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정8품 녹사(錄事) 2명을 배치하였다.
*군기시(軍器寺)는 1466년(세조 12) 관제 개혁에서 군기감을 군기시(軍器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군기시(軍器寺)는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병기 제조(兵器製造)를 관장한다. 화약고(火藥庫)는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고, 자문감(紫門監)은 궐내에 있다. 정(正 정3품 당하)‧부정(副正 종3품)이 각 1명, 첨정(僉正 종4품)‧판관(判官 종5품)‧별좌‧별제‧주부(主簿 종6품)가 각 2명, 직장(直長 종7품)‧봉사(奉事 종8품)‧부봉사(副奉事 정9품)‧참봉(參奉 종9품)이 각 1명이다.
*최해산(崔海山 1380~1443) : 1400년 태종 때 군기시에 등용되어 주부에 올랐다. 1436년 세종 때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화차, 완구, 발화, 신포 등의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냈다.
1401년(조선 태종 1) 군기시(軍器寺)에 등용 주부(主簿 종6품)를 거쳐 경기우도 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 종5품)에 오르고 그 해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해온정(解慍亭 : 창덕궁의 동북쪽)에서 발사시험을 하였다.
또 1424년(조선 세종 6) 12월에도 군기판사로서 왕을 모시고 광연루(廣延樓 : 창덕궁의 동남쪽)에 나아가 화포 발사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 군기감사(軍器監事 종3품)를 지내고 1431년 6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그가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조정 신하들이 그의 체직(遞職)을 품신했지만 조선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듬해
1432년 공조우참판(종2품)으로 승임되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해진다 하여 중추원부사(종2품)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평안도 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 최윤덕[崔潤德 1376~1445, 조부 최록(崔祿 1325~1362), 아버지 최운해(崔雲海 1347~1404)]과 함께 파저강(婆猪江) 유역의 여진족 이만주의 토벌작전에 참전했을 때도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은 관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세종은 그가 20여 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벼슬만 거두도록 하라고 하여 용서하였다.
그 뒤에도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 그는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성과 열을 다하여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화약고기(火藥庫記)’ 문에,
“군기시 부정(軍器寺 副正) 최해산(崔海山 1380~1443) 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이 일찍이 왜구(倭寇)가 침입하면 제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여, 수전(水戰)에서 화공(火攻)을 쓸 방책을 생각하고서 염초(焰硝)를 구워서 쓸 기술을 찾았다. 원 나라 이원(李元)이란 자는 염초 굽는 장인(匠工)인데, 공(公)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은밀히 그 기술을 물어서 집에서 부리는 종 몇 명을 시켜 사사로이 기술을 익히게 하여, 그 효과를 시험한 뒤에야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 10월에 처음으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여 염초를 굽고, 또 원 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자를 모집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공이 직접 감독했다. 그러나 모두 공의 이러한 일을 위험하게 여겼더니,
왜구가 전라도‧충청도에 크게 침입하여 그때 인심이 흉흉했으나, 심덕부(沈德符)‧나서(羅湑?)와 우리 선군(先君)이 세 원수(元帥)가 되어 누선(樓船) 80척에 화통(火㷁)과 화포(火砲)를 비치하고서, 진포(鎭浦)에서 맞아 공격하여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괴수 손시랄(孫時剌)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1380년 8월에 있던 일이다.
그 공로에 대한 상으로 금과 비단이 하사되었고,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의 호가 내리고, 광정대부문하부사(匡靖大夫門下府事)에 제수되고, 조금 뒤에는 중대광영성군(重大匡永城君)에 제수되었다. 이성계가 즉위한 이듬해 계유년에는 정헌대부 검교참찬 문하부사(正憲大夫檢校參贊門下府事)가 되고, 판군기시(判軍器寺)를 겸임하게 하였으니, 공(公)을 등용하려 한 것이다.
을해년(1395) 봄 3월에 70세로 사망했다. 금상 전하(이방원)께서는 1401년 11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에 추증(追贈)하고,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봉했다.
내가 그 끼친 은택을 입어 벼슬길(1400)에 나간 지 1년(1401) 사이에 군기시주부에 제수되었다가, 감승(監丞)으로 승진되고 지금은 부정(副正)이 되었다. 나는 위로는 전하의 위임하심이 융숭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선신(先臣)이 전해 준 비밀의 기술을 이어받아 밤이나 낮이나 혹 직책을 이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도읍을 옮기던 초기에 본감(本監)의 청사가 비좁고 누추했으나, 다시 수리하지 못했는데, 기축년에 이르러 별감 이도(李韜)와 같이 겸판사 면성군(沔城君) 한규(韓珪)에게 보고하여 임금께 아뢰게 하여 먼저 무고(武庫)를 자문(紫門 : 도성 북서쪽에 세운 성문이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 한다. 청와대 서북쪽) 안에 세워서 각 도에서 바친 무기를 오는 대로 받아서 보관하고, 다음에는 본감을 수리하고 정유년에는 화약 제조를 감독하는 청사가 비로소 준공되었다.
마땅히 화약에 대한 시말을 기록하여 청사의 벽에 써 붙여서 선군(先君)이 애쓰던 뜻을 무궁한 후세에 드러나게 해야 하겠기에, 오직 자네에게 이것을 부탁하는 것이니, 부디 써 주기 바란다.’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본감의 구조가 대청(大廳)‧야로소(冶爐所)‧조갑소(造甲所)‧대고(臺庫)‧제조고(提調庫) 등과 여러 공장(工匠)들이 거처할 행랑방을 합하여 82칸이다.
최군은 생각하기를,
‘이만하면 본감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하겠으나, 아직 화약감조청(火藥監造廳)이 구비되지 않았다.’ 하고, 금년 정유년 봄에 또 제조 이종무(李從茂 1360~1425, 찬성사(贊成事)를 지냄, 이을진의 아들) 공에게 고하여 임금께 구체적으로 아뢰게 했더니, 마침내 공조(工曹)에 명하여 개성에 있는 예빈시(禮賓寺)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짓게 하되, 공무의 여가로 감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단청을 칠하여 두어 달 만에 준공하고, 남은 재목으로 궁전소(弓箭所)등 15칸을 지었으니 모두 최군의 계획과 지휘에 의한 것이다.
최군이 본감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화약이 겨우 6근 4냥이 있었고, 각궁(角弓)이 2백 장 정도이고, 중소(中小) 화통(火㷁 :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던 무기)이 겨우 각궁의 수효와 같았는데, 지금은 화약이 6천 9백 80근 9냥이고, 각궁이 1천 4백 20장이며, 중소 화통이 1만 3천 5백 자루이고, 다른 병기도 이 정도이니, 이상이 화약고 연혁의 대략이다.
처음 당선(唐船)에 있는 화기(火器) 한 개를 깨뜨려 가지고, 충청도에서 의정부에 가서 그 이름을 군기시판사 곽해룡(郭海龍)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화기는 중국에서도 비밀로 취급하는 기술이므로, 내가 비록 중국에 오래도록 있었으나 나 또한 모른다.’ 했다.
그 후 최군이 이 직책에 들어와서 그 화기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완구포(碗口砲 : 성곽 공격용 포)이니 평소 선군(先君)에게서 그 이름과 제도를 익숙하게 들은 것이다.’하였다. 전하께서 최해산에게 명하여 그것을 주조하라 하니, 최군이 물러나와 대‧중‧소 20개를 만들어 올리자,
이것을 1409년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해온정(解慍亭)에 나가서 발사 시험을 하니, 화석포(火石炮)가 1백 50보의 거리까지 나갔으므로 최군은 내승마(內乘馬)를 상으로 받았다.
아, 최군은 위로는 융숭한 위임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그 아버지가 비밀리에 남겨 준 기술을 잃지 않아, 아버지가 앞에서 시작한 것을 아들이 뒤에서 계승하였으니, 참 유능한 신하라 하겠고, 또한 유능한 아들이라 하겠다.
부원군의 이름은 무선(茂宣)인데, 성품이 통달‧민첩하여 각 분야의 책을 널리 상고하였고, 또 중국어를 잘 알았다. 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썼으므로 능히 이원(李元)의 기술을 얻었으니, 그의 사려가 깊고 멀다 하겠다.
지금 왜구가 우리 수군과는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비교하지 못하는 것은 앞서 진포(鎭浦) 싸움이 있었고, 뒤에는 남해(南海)의 승전(勝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고쳐먹고, 정성을 바치는 것은 비록 전하께서 펴신 교화에 의한 것이지만, 애당초 빠른 우레와 세찬 번개처럼 폭발한 화통과 화포가 그들의 혼을 빼앗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 완악하고 사나운 왜구를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30년 동안 왜구의 침략을 당했을 때에도 태평을 유지하게 된 것은 다른 힘이 아니고 여기에 있었던 때문이니, 아, 참으로 힘쓸 바를 안 분이라 하겠다. 옛날에는 국가에 공로가 있으면 사당을 세워서 향사(享祀)하였으니, 이렇게 크고 영원히 썩지 않을 공로를, 향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향사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최공에게는 관계가 없을 것이나, 어찌 밝은 시대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오래전부터 하였으므로 여기에 아울러 기록하는 것이니, 이 청사(廳事)에 오르는 이들도 마땅히 생각해 볼 것이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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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강대국이 되려면, 원폭, 수폭이 없으면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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