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행 기차에는 조선족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한참을 가고있는데 앞좌석에 앉아있던 한 조선족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 분이 하는 말 아직도 한국은 하루 세끼를 못 먹고
굶는 사람이 허다하다는데 참 불쌍하다면서 혀를 찬다.
이제 한국은 잘 살고있다고 얘기를 했지만 그 분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때였다.
도문에 도착해 역을 빠져나오는데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이제 이곳은 조선족자치주이기에 어디에서든 우리말이 통한다.
간판도 모두 한글이다. 이제 살 것만 같았다.
가는 곳마다 한국사람이냐? 한국인을 만나기 원했다.
한국사람은 처음 보았다면서 정겹게 맞아주었다.
이 땅에서 이렇게 귀한 우리 조선족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신기했다.
도문에서도 교회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도문교회를 방문했다.
도문교회를 책임지고 계시는 김영일장로님을 만났고 성도들 모두 반가이 맞아주었다.
마침 교회에서는 수백명이 참여한 성경학습반이 열리고 있었고
아래층에서는 음악훈련을 하고 있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안봉철,박해연,김옥자,김화자,심청길...)
장로님의 부탁으로 성경학습반에서는 뉴에이지 음악과 교회음악에 대해 강의하고
음악훈련생들에게는 음악이론과 오선보에 대해 열심히 지도했다.
집회 때는 찬송반주를 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한국인과 조선족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웨딩마치를 연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혼식 반주를 하고 신혼부부 차에 올라
그들과 함께 백두산으로 향했다.
헝겊으로 둘러친 낡은 베이징 지프에
신혼부부와 함께 뒷좌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얼마나 급경사인지 정말 아찔했다.
한참을 올라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차는 오바이트를 하면서
오르막에서 멈추고 말았다. 뒤를 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급히 차를 멈추고 바퀴에 돌을 바치고 엔진 열이 식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백두산 첫 등정에 오르게 되었고 천지호의 신비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백두산은 그야말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고
백두산의 정기가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날 백두산은 안개로 자욱했다.
가끔 안개사이로 삐죽 비치는 천지는 황홀하기만 하다.
안개문이 열렸다 닫혔다하는 몇 번의 연출은
백두산을 보려는 이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묘미이리라.
결국 비구름으로 덮이고 장엄한 백두산은 문을 닫았다.
연길에 숙박을 정하고 연길 구석구석을 살폈다.
조선말이 통하는 곳이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언어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TV방송에서 김영삼대통령이 한, 중 수교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나왔다.
1992년 8월 15일 한, 중 양국의 수교가 정상적으로 이뤄진 날이다.
불모지의 땅, 특정국가라는 이유로 특별비자를 받아
허가를 얻어야 들어 올 수 있는 나라였는데
이제 양국의 정상적인 수교로 이런 어려움은 없어질 것으로 추측이 된다.
연길에 머물면서 많은 어려운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장애인연합회에서 근무하는 류두범 선생님을 통해
이곳 장애인들의 처지를 들으면서 저들에게 내게 뭔가를 해야한다는 맘으로
숙연해지는 나날이었다.
태국으로 가서 음악학교를 세울 계획을 접고
중국에 힘겨워하는 장애인들과 고난을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점점 더해온다.
내가 가진 건 재물이 아닌 기술일 뿐인데
이들에게 무엇으로 도움을 줄까 많은 생각을 했다.
며칠동안 장애인연합회와 상의를 거듭하고 낸 결정은
이곳에 기술을 가르치는 기술교사로 초청하기로 하고
내년부터 기술훈련반을 시작하기로 합의를 봤다.
류두범선생님의 도움으로 심양까지 기차로 올라
심양역에까지 마중 나온 조선족을 만날 수 있었다.
심양까지 16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는데 피곤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