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ho Kim
13시간 ·
【책 이야기. 57】
Hannah Arendt.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김선옥 옮김. 한길사, 2006.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취재원 자격으로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1963년에 출판되었다.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모습은 어떤 이념에 대해 광기에 휩싸인 자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악은 뿔 달린 악마’처럼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면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냈다.
‘악의 평범성’이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관료 조직과 군대에서 선임의 반인륜적인 지시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순응하면
누구나 쉽게 ‘악의 평범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지시가 주어지면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도덕적 측면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얼마든지 가학적인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자신의 직책이 불운했을 뿐 누구를 죽인 적도,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고, 자신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보다 업무에 태만했을 경우 양심의 가책을 더욱 많이 느꼈을 것이라는 그의 증언은 참담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이 야기할 결과가 학살이나 총살, 가스 주입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증언을 들으며 아렌트는
그의 행동이 말과 생각의 무능력, 즉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는 무능력에서 비롯되었음을 분석한다.
상투적인 언어의 반복적인 사용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반성적 사고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전혀 알아챌 수 없는 그의 무능력이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대안으로 “생각함”을 말한다.
지시받은 대로만 행동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언제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기에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생각함과 말함의 무능력’이
악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악행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악인’이기에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생각함과 말함’에서 무능력했기 때문에 악행을 저질렀고
악의 도구가 된 것이다.
결국 아이히만은 “사유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 였다.
이같은 무능력은 누구나 예외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쉽게 악행을 저지를 수 있고 악의 편에 설 수 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는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훈련이 필요하다.
내면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권력과 조직에 순응하는 것은 ‘악의 평범성’에 침몰되는 일이다.
섭리를 거스르고 부도덕한 말과 행동에 대해
최소한 고민이라도 하는 것이 도덕적 소양이다.
그런 고민 중에 찾아오는 혼란과 고통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부당함과 부도덕함, 불의에 순응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결국 본인의 편안함을 위해 이기심이 도덕성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유일한 이유가 인류 구성원 가운데 그 누구도 아이히만과
이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마땅할지 ‘생각’하지 않은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보기에 비록 ‘잘못 만들어진 법’을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여기서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유대인의 비극에 한정하지 않고
대량학살의 문제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곧 ‘전체주의’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더 자세하게...
즉 나치의 행위가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좀 더 포괄적인 정의로 접근한다.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음으로써
그의 행위는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범죄로 축소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 재판은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정의 구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 것이다.
아렌트는 이 재판이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이 정의 실현을 위한 도구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재판은 유대인 본인들의 과오에는 눈 감은 유대인의 한풀이였다
사형을 목전에 둔 아이히만은 끝까지 ‘독일 만세’를 부르며
나치의 일부로 남는다.
나치의 언어와 사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그의 인식 어디에도 유대인이 받은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자기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악’이란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평범한 일임을 역설하고 있다. 생각 없이 순응하는 인간은 악이 될 수 있다.
근면하고 순종적으로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비판력 없는 사고와
그 사고를 바탕으로 한 행동의 결과는 죄가 될 수 있다.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나의 행동에 책임지려 하지 않음으로, 결국 무책임이 죄가 된다.
예수를 모르는 것이 죄라고 하지만
악을 보고 모른척 하는 것 또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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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희준이나 [박하사탕]의 동구까지도 소환하게 하니...
병헌의 행동은 재평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요즘 서초동의 그 누구를 보니, 그가 아이히만이다.
한나 아렌트..... 그녀는 내일...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