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를 두고간’이란 통속의 설정은 그저 영화 한편 보듯 지나가더라도, 앞에 앉은 여자의 손가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옛 남자의 반지자국을 발견하는 일.
그 희미한 반지 자국이야 말로, 그녀의 생이다. 한 남자를 벗고 다른 남자를 갈아끼기 위해 나와서 무료히 앉은, 한 여자의 풍경. 빗방울을 흩는 것처럼 분열하는 삶의 이채(異彩)들. 이보다 짓궂은 언어가 또 있을까.
더뷰스 수능기획 : 마음을 붙드는 언어-감각의 촉수, 박태일 시 읽기
찰나와 기미를 붙잡는 솜씨
박태일의 시를 좇아 다닌지 제법 오래 된 것 같다. 그의 시는 우리 말의 음악적인 구사가 뛰어나고 말과 침묵 사이를 가만히 음미하는 듯한 여운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에게 매료된 것은, 곳곳에서 탁월하고 섬세한 시안(詩眼)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지나가고 흘러가고 흩어지는 시(詩)의 찰나와 기미를 붙잡는 솜씨는, 그를 잊지 못하게 한다.
눈길이 머문 곳에 함께 오래 붙들려. 시가 돋우는 질문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 것이, 시와 접면하는 경험을, 마치 더불어 겪은 생의 추억처럼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옛남자의 반지 자국
그녀 웃자 그녀 쪽 유리잔이 떨렸다
그녀 고개 들자 내 잔 속 물이 떨었다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만났고
그녀와 나는 남남으로 남는다
낮 두시 찻집 베트남
그녀와 나는 할 말이 없다
창밖 인조 대숲에선 빗발이 글썽거리고
그녀 낮은 콧등처럼
그녀 외로움도 저랬을까
그녀를 두고 간 옛남자의 반지 자국이
그녀 짧은 손가락 마디를 기어 나와
바깥 창 빗방울 잠시 흩는다
박태일 ‘빗방울을 흩다’
낯선 남녀가 어색하게 앉아 맞선이라도 보나 보다. 열 번째 행까지 건성건성 지나왔을 때 문득 한 구절이 눈을 붙든다. ‘그녀를 두고간 옛 남자의 반지 자국’.
한 남자를 벗고, 다른 남자로 갈아끼는 중
‘그녀를 두고간’이란 통속의 설정은 그저 영화 한편 보듯 지나가더라도, 앞에 앉은 여자의 손가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옛 남자의 반지자국을 발견하는 일.
그 희미한 반지 자국이야 말로, 그녀의 생이다. 한 남자를 벗고 다른 남자를 갈아끼기 위해 나와서 무료히 앉은, 한 여자의 풍경. 빗방울을 흩는 것처럼 분열하는 삶의 이채(異彩)들. 이보다 짓궂은 언어가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