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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비너스에게 주는 말
함 석 헌
글 머리에
하필이면 나더러, 여자에 대해서는 실패를 한 이 나더러, 젊은 여자에 대한 말을 하라고 할까? 사양하고 사양해도 기어히 하라고 졸라 댈까?
이것은 검사의 심문인가? 뒤에오는 사람이 앞에 가는 사람을 불러 돌이키게 함인가? 그렇지 않으면 느티나무 밑에서 하는 설교일까? 사랑방에서 하는 토론일까? 우물가에서 하는 애기일까?
그렇다. 어쨌든 쓴 잔은 마신 사람이야만 그 맛을 알 것이오, 마셨으면 쓴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누구의 잔은 쓴 쓴잔 아닐 수 있을까? 누구는 아니 마시는 재주 있을까? 소금 서슬이 어쩔 수 없이 녹아들어 있고 어느날 어느 구석에도 놀이 일지 않는 곳, 않는 때가 없는 이 생명의 바다에서.
젊은 여성이라 해도 사실은 개 닭 소리에 자고 깨는 시골 농삿군이나 갈매기 갈잎 바람에 울고 웃는 바닷가 어부 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 대접을 아니해서가 아니다. 거기는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거기는 할머니 어머니가 있고 아내 아주머니가 있고 누나 딸이 있지만 여성은 없다. 그들 앞에서는, 길을 가다가 만나면 열 발걸음 앞에서 벌써 수긋 하고 길 아래 나려서는 그들 앞에서는, 말이 있을 것이 없다. 말 아니해도 한번 건너다 보면 그만이요, 보지 않아도 있는 줄 알면 그만이다. 또 말할 새도 없다.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해도 넉넉히 먹지도 못하는데, 엄마 노릇 아내 노릇 딸 노릇 하기에 바쁜데 언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여자 노릇을 할 새가 있으며, 서로 서로의 눈물 콧물 닦아 주기에도 바쁜데 언제 말을 할 겨를이 있을까? 젊어서도 젊음을 누릴 생각을 못하고 늙어서도 늙은 것을 한탄하려 하지 않는 그들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도시의 여성이다. 여성, 좋게 말해서 여성, 나쁘게 말해서 게집은, 이 도시에만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일하고, 일하기 위해서 성을 잊고 젊음을 잃었는데 이들은 성에 깨고 젊음을 찾아 계집 노릇 하기에 일을 잊었다. 저들은 의무에 지쳐 누림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맛에 미처 뜻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저들의 부르짖음은 「어떻게 하면 살까?」요 이들의 지껄임은 「무슨 맛에 살까?」다.
참맛을 모르는 여성들
젊은 여성들, 당신들은 맛에 사는 사람들이다. 당신들을 이끄는 생활 원리는 맛이다. 엔죠이다. 현대 문명이 맛의 문명이요, 그 맛을 찾아 입을 다시는 오늘의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당신들이다. 그러나 거기 잘못이 있지 않을까?
물론 사람이 사람인 이상, 삶이 삶인 이상, 맛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삶은 즐거운 것이다. 즐거움이 없으면 참 삶이 아니다. 그리고 즐거움은 맛에서 나온다. 그러나 맛은 어디까지나 할 것을 한 다음에 오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요. 먼저 맛본 맛이 이끄는 힘이 되어 다음 걸음을 내키게 할 것이지만, 그것이 곧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맛은 개개에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고 전체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은 영원 무한한 것 곧 전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맛에만 붙어 있었다면 사람은 나비나 벌이 됐을 지언정 결코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맛은 붙게하는 것이 아니오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맛 있는 맛도 계속해 불어 있어서 맛 있는 법은 없다. 맛은 맛보고 마는 것이다. 맛이 있었으면 보고는 뚝 떨어져 다시 다른 새 맛으로 향하는데서 맛의 맛됨이 있다. 그러므로 맛본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맛은 물질에서 나지만 물질이 아니다. 물질과 정신의 중간이다. 물질에서 정신으로 옮겨가게 하잔 것이 맛이다. 그러기 때문에 맛이 그 극치에 달하면 정말 참 맛, 곧 영원 무한한 맛 곧 전체를 아는 맛에 이르면 그것을 의미(意味), 곧 뜻의 맛이라고 한다. 뜻은 어투루 마투루의 만물을 하나로 만드는 정신적인 하나다. 모든 것이 생겨난 것도 뜻에서요, 이 세계가 되어가는 것도 그 뜻으로요, 생명의, 역사의 가닿는 것도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뜻이 하나님이다 하는 말을 한다.
하여간 삶의 목적이 뜻이요, 그 뜻을 이루도록 삶의 토막토막을 이어주는 것이 맛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무한한 생명을 한 개의 진주 목걸이라 한다면 맛은 그 한알 한알의 진주의 반짝이는 빛이요, 뜻은 그 알알의 진주 속에 숨어 있어 뵈지 않는 끈이다. 그리고 옛말이 있지 않던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궤야 구슬이라고」. 꿰어 살리는 것이 뜻이요, 뚫려야 꿰어진다. 맛만을 알고 뚫지 못하는 마음, 맛은 맛대로 있고 뚫리지 못 맛, 참 맛이 아니요 참 마음이 아니다. 끈에 뚫려 꿰인 구슬이 비로 구슬이듯이 뜻에 꿰어 뚫린 맛이어야만 참 맛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이 맛만을 따르게 됐고 그 현대의 잘못된 문명에서 우리는 뒤진 사람이 됐기 때문에 미쳐 판단할 겨를이 없이 미쳐버렸다. 그것이 유한마담이요, 사모님이요, 양단 꼬리치마요, 여대생이요, 사창이요, 계집애들이다. 언제나 떨어진 놈은 더하게 마련이다. 상유호자(上有好者)면 하필심언자(下必甚焉者), 위에 좋아하는 놈이 있으면 아래는 반드시 더하는 놈이 있다고, 앞선 사람보다 한술 더 뜨려는 것이 흉내 내는 놈의 버릇이요 물건의 타성이다. 눈 잔등에 멍을 내는 계집이 미국에 더러 있었겠지만 이 나라처럼 이렇게 제 처지도 모르고 생김새도 생각 않고 계집이란 계집이 다 눈 잔등에 멍이 들어야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밍크 한 마리에 3, 4만원을 하는데 나라 생각은 할줄도 모르고 그 목도리 그 외투를 꿈꾸며 쇼윈도에 어리대는 지식 여성, 무식 여성, 그런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 그 목에 두르고 뽐내는 그 목도리가 사람의 가죽인 줄, 그야말로 사람의 목을 도리고 베낀 가죽인 줄을 모르나? 밍크 한 놈 기르려면 그 기르는 방법이 아주 까다롭고 고급 생선을 냉장을 해 두고야만 먹인다는데, 그 생선은 우리 두메 산골 어린 것들이 먹었더람 토실토실 살갗 곱게 자라 나라의 목걸이 됐을 것이요, 굶어 죽는 것들 나지 않았지. 그럼 당신 목에 감긴 것은 그 어린아기의 가죽 아니냐? 네가 그 생각을 한다면 그 순간에 으악 소리를 지르고 기절을 했올 것이다. 향락을 하고 엔죠이를 할래도 아니된다. 어떻게 되겠나? 잘사는 그 나라들에서는 잘 사니깐, 사회에 터가 잡히고, 물자가 넉넉하니깐,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되겠지만, 이 나라에선 아직도 제 노릇을 못하고, 어떻게 그것이 될수 있겠나? 도사의 면자리, 개천가 다리 밑에 나가면 무엇이 있던가? 어느 야만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더럽고 참혹한 꼴이 이 문화 살림 흉내 내기에 바쁜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전체를 잊고 나만은 잘 살아 보려는 그릇된 생각에 대한 심판아닐까?「못한다! 안돼!」하는 경고 아닐까? 들으면서도 그렇게 하는 죄에 대한 벌 아닐까? 네 양심을 찌르는 쇠끝 아닐까? 지옥 속에 들어 앉아서 엔죠이가 어떻게 되겠나? 즐거움이 잘못이라는 것 아니요 맛이 없다는 말 아니라, 그것은 있어도 전체에만 있다는 말이다. 獨樂樂이 不如與人樂樂이요 與少樂樂이 不如 與衆樂樂이지.1) 혼자 즐거워하는 것이 남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만 하고, 몇 사람이서 즐거워하는 것이 여럿이서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이 눈이 어찌 내 눈이냐? 민족의 눈 아니냐? 이 혀가 어찌 내 혀냐? 나라의 혀 아니냐? 사람인 담에 다 같은 눈이요 다 같은 혀인데 어째서 네 것으로 아느냐? 보는 것이 줄거우되 전 체의 눈으로 보야만 참 보이고 참 즐거운 것이요, 먹는 것이 맛이 있으되 전체의 입으로 먹어야만 참 살이 되고 참 맛이 있다. 맛 을 따르고 맛을 따르기 위해 편리를 찾는, 그저 편리한 방법만을 찾는 당신은 잘못 아닐까?
당신을 꽃이라 했지만
젊은 여성, 당신을 뭐라할까? 당신은 예쁨이지. 아름다움이지. 그럼 당신을 꽃이라 하자. 왜 아름다운 여성이라 꽃 같은 계집이라 하지 않던가? 당신은 빛을 자랑하고 향기를 지니잔 꽃이지. 당신이 그러는 것은 타고난 천성인 이상 잘못이 아니요, 이 문명이 쾌락, 편리를 추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허지만 그러는데는 그 시대적인 의미를 잊고 하면 잘못이 된다.
당초에 현대의 이 문명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전 시대에 대한 반동에서다. 그전의 문명은 적은 수의 계급 사람에 한정이 되어 있었고 길을 먼저 찾은 사람이 매양 잘못하기 쉽듯이 그들은 깨달은 뜻을 추구하기에 급하여 전체 사람의 살림 내용에 대하여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중은 오랜 동안 뜻을 드러내기 위해 강요를 당했고 인간으로서의 살림을 충실히 할 기회가 없었다. 종교, 도덕이 강조되는 반면 생활내용이 무시당했다. 말하자면 어서 목걸이를 만들기에 급하여 한알 한알의 구슬을 다듬기를 등한시했다. 그러던 것이 근세에 와서 지식의 보급으로 인해 민중이 깼고 거기 따라 민중도 전체를 위한 종이 되기 보다는 자기도 인간으로 살기를 요구하는 생각이 커지게 됐다. 그 결과는 개인주의로 향락주의로 편리주의로, 지금 와서 문명의 표어는「복지」라는 것이 돼 버렸다. 복지가 물론 잘못은 아니지만 전체의 뜻, 영원 무한에 대한 보람을 잊고 간판에 그치는 복지인 이상 그것은 잘못일수 밖에 없다. 당신들을 꽃이라 했지만 좀더 자세히 말하면 저자에서 파는 기형적인 꽃이다. 꽃은 본래 들에 산에 자연스럽게 나는 것이요 그래서만 참 아름다운 것인데. 아름다움을 근시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기네의 눈에 맞도록만 길러간 즉 기형적으로 발달한 꽃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탐스럽고 흐들진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체로서의 조화를 잃었고 어느 부분, 더구나 중요한 열매 맺음에서는, 퇴화해 버렸다. 현대의 젊은여성은 향은 잃고 빛만 요란해지며, 빛과 향은 있으되 열매는 없는 개량종(개악종) 꽃이 아닐까?
생각해보자,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가지와 잎이 있고 열매 맺어야 꽃이지, 어찌 송이만을 똑 따놓아서 꽃이 필 수 있겠는가? 전체를 잃고 아름다움은 없다. 살게하는 아름다움이지 죽게 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병적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전대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쳐 생활 내용의 맛만을 구하여 도시에 몰리는 인간은 자기네의 여성을 향기 없고 열매 없는 기형적인 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신들은 거기 반항하여 여성의 본 면목을 찾아야 한다. 근대화 운동의 하나가 확실히 여권 문제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 운동은 잘못되어 여성을 개인적으론 해방한 못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전보다 더 남성의 노리개가 된 점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당신들은 한번 영화관의 휘장을 바라보기 바란다.
왜 뭐라던가? 한 옛적에는 모권 사회가 있었다지. 그것은 나무의 뿌리 시절이다. 여성의 근본은 모성이요, 어머니는 뿌리다.
그다음 부권 시대가 왔다고 하지. 옛날 부족 사회에 끊임없이 있었던 전쟁이 아마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나무로 말하면 줄기의 시대다. 인정보다 힘이 더 강조되는 시대다. 보이는 것은 당당한 나무통이요, 살리는 힘인 뿌리의 작용은 이제 뵈지 않는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러나 나무가 더 자란즉 가지가 퍼지고 잎이 무성한다. 호주 제도 밑에 근세 사회가 발달해오기까지는 그것 아닐까? 여성의 자각과 활동은 이제 상당해 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참 여성의 시대는 아니다.
참 여성의 시대는 오늘에 와서야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꽃이 활짝 피는 시대다. 밑에서는 뿌리가 되고 중간에서는 진액이 되며 잎에서는 동화작용이 되는 그 힘이 이제 끝에 간즉 찬란하고 향기로운 꽃이 된다. 여성이 정말 여성의 천분을 발휘할 수 있어진 것은 낡은 사회제도에서 여성이 해방된 오늘이다.
그러나 꽃이 나무의 마지막이 아니듯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꽃은 열매 맺자는 것이며 열매 맺어서만 나무는 영원히 살 수 있고, 그리고 열매를 맺으려면, 다시 말해서 참 아름다우려면, 꽃은 떨어져야 하는 것이요, 여성의 아름다움도 열매 맺기 위한 것이며, 열매 맺기 위해 그 아름다움을 버릴 줄을 알아야 한다. 꽃은 피지만 떨어질 줄도 알아야 아름답다. 떨어질 때가 와도 싫다는 듯 지적지적 말라 불어 있는 꽃, 곱긴 고사하고 더럽다. 그리고 곱기는 하면서도 열매 못맺는 꽃일 수록 잘 떨어지지 않는다. 주름살진 얼굴에 화장을 한 것처럼 더러워 뵈는 것이 어디있나. 젊은 여성은 그 아 름다움에 붙어 있지 않아서만 참 아름답다. 어떻게 하면 제 아름다움에 붙어 있지 않게 되나? 열매 맺음으로서다。열매가 영글면 낡은 꽃잎과 향은 남아 있을래도 있을 수없다. 어머니는 화장에 애를 쓰지 않는다. 아들 위해 흘리는 땀, 주름지는 그 주름이 곧 화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참으로 아름답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 이 나라의 도시의 젊은 여성들, 당신들은 만년 예쁘려하고. 만년 엔죠이 하려는 사람들 아닐까? 예쁘면서 그 예쁨을 잘못 쓰는 것 아닐까? 참 예쁨이 뭔지 모르는 것 아닐까? 당신들 속에는 영원을 추구함이 없고 신경 끄트머리만 발랄해서가 아닐까?
써버릴 젊음, 아름다움
생명의 길은 버림의 길, 자기희생의 길이다. 하나님이 자기희생을 해서 천지 창조며 만물이요, 만물이 있어서 영광이다. 사람이 자기 희생을 해서 아들 딸이며 가정이며 나라요, 그것이 있어서 빛이 난다. 태양이 타는데 빛이 있고 원자가 파괴되는데 힘의 방사가 있다. 여자는 그 젊음과 아름다움을 버려서만 참 아름다울 수 있고 따라서 영원히 여성적일 수 있다. 누가 있어 말했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라가게 한다고.
우리 옛날에 참 아름다운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아끼는건 띠로 간다」요, 또 하나는「자랑 끝에 불난다」다. 어떻게 보면 여자는 아끼는 것이요, 자랑하는 것인 것 같다. 아끼고 자랑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될 수 있는 것같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여자는 그와는 정 반대다. 아끼는 것이 아니라 내놓고 바치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줍고 겸손한 것이야 말로 여자다. 그 어느 것이 참인가? 물론 뒤의 것이다. 아끼지만 아끼는 것은 한때요 구경에는 내놓아 바치자는 것이며 자랑하지만 자랑하는 것은 겉에서요, 진정 속으로는 부끄러워하고 겸손하다. 아끼지 않는 거야말로 아내요 자랑하지 않는거야 말로 어머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화장을 해도 위에 너울을 쓰고 말이 많아도 뒤에서 소근 소근한다.
그런데 오늘 도시의 여성처럼 수줍음을 다 팔아먹고 자랑하며 바칠 줄을 모르고 욕심만 부리는 것이 어디 있을까? 무릎에도 차지 못하는 스커트를 입고 차간에 앉아, 그래도 인간 본성이 채 없어지지는 못해서, 그것을 잡아다려 덮으려 애를 쓰지만 그것이 어찌 덮어질리 있으며, 정말 부끄럼에서라 할까? 얼굴과 목소리를 되는대로 팔아 먹으면서, 말은 사회활동이라 사랑이라 하지만 그것이 어찌 사랑이며 봉사일까? 그것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생리 적으로만 알고 자기 것으로만 여겨 길이길이 거기 붙어 있고 끝없이 누려보자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젊음은 정말은 아낌없이 써 버리는 데서만 젊음이 되고 아름다움은 정말은 어디다 바쳐서만 아름다움이 된다.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심정은 바치는 심정이다. 신부처럼 수줍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현대 젊은 여성이 젊으면서도 힘이 없고, 아름다우면서도 매력이 없으며,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스럽지 못한 것은 그 젊음, 아름다움을 바칠 줄 모르기 때문이요, 바칠 줄 모르는 것은 바칠 주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저즘께 어떤 젊은이가 말하기를 제 목적은 멋지게 살다 멋지게 죽는 것이다. 하더라마는 저들이야 말로 멋없이 살다 멋없이 죽는 인생들이다. 멋은 틀이 깨지는 데서만, 비극이 있어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요, 비극은 인생의 주인 없이는 아니 된다. 하나님을 앓어버려, 삶의 목적을 놓쳐버리고 죽음의 뜻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할 리가 없고, 제 생명을 버리기 아까워 향락에 붙어 먹으려는 오늘 사람이 멋을 알리가 없다. 오늘의 젊은 여성은 오늘의 인간을 대표하여 그 젊은 아름다움을 안고 썩는 냄새나는 존재다.
실예를 들어 보려나? 양귀비와 심청이가 어느 것이 더 아름답던가? 크레오파트라와 잔다크가 그 누가 더 향기 높던가? 살로메와 마리아가 그 누가 더 정말 성스럽게 여자답던가? 그 먼저 것들은 다 젊은 아름다움을 아끼고 자랑하다가 띠가 되고 불에 타 버린 것 아니며, 그뒤엣 것들은 다 젊음 아름다움을 그때 그때에 생명의 주인을 나타내는 아버지 혹은 임금 혹은 나라 혹은 믿음을 위하여 아낌없이 바쳐 버린 혼들 아닌가? 그러므로 저것들은 아름다운 몸을 가졌으며 영원히 더러워졌고 이들은 그것을 검불같이 살라 버렸으되 그 살라버린 빛 때문에 영원이 아름답고 젊지 않던가?
모든것의 어머니요 주인이다
이제 우리 집, 우리 나라, 우리 믿음은 아주 위태한 지경에 들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우리 생명의 주인, 곧 전체가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치기를 요구하고 명하는 것 아닌가? 사람이 죽게 되면 피를 옮겨 넣어야지, 우주적 생명의 선이 가늘어진 이때에도 피를 옮겨 넣어야 한다. 니체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죽었다 했거니와 하나님이 만일 죽었다면 그것은 사람이 살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한 없이 바쳐 우주와 만물을 기르는 이거니와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려면 또 만물이 한 없이 자기들을 바쳐서만 될 수 있다.하나님은 만물 중에서도 두엇보다 더 가장 즐겨 사람이 기꺼이 바치는 혼을 먹고야 산다. 이것이 한 옛적부터 누가 가르친 것을 모르게 제사가 인생 살림의 근본이 되어 온 까닭이다. 누구가 아니다, 생명 스스로가 안 것이다.
그럼 오늘에도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심 봉사 집이 위태할 때 심청이가 자기를 바쳤듯이 불란서가 망하게 됐을 때 잔다크가 자기를 바쳤듯이, 이스라엘의 종교가 말이 못됐을 때 마리아가 돌탕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를 바쳤듯이 우리도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 바치면 당 현종의 집 같이, 크레오파트라의 나라 같이 유태의 종교 같이 될 것이다.
그럼 오늘 우리의 가장 합당한 제물은 무엇일까? 무엇을 바치면 눈먼 봉사 같은 우리집이 밝아질까? 저문 저녁의 놀맨거 같은 우리나라가 바로 될까? 살로메의 손에 든 쟁반 위에 눈 뻔히 뜨고 말 없는 세례요한의 머리 같은 우리 종교 도덕이 도로 살아 날 수 있을까? 제물을 고르는 표준은 가장 젊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깨끗한데 있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젊은 여성, 당신을 내놓고 또 어디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나라가 살아날 수 있는 참된 제물이 있을까?
그러기에 당신을 불러 남편은 말하기를 집사람이라 아니하던가? 집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집의 주인이다. 집을 지키잔 것이 당신의 사명이다.
그러기에 당신을 빌어, 씨들은 제 나라를 불러 어머니 나라라 하며, 학생들은 제 배움의 동산을 불러 어미학교라 하지 않던가? 나라는 당신 것이요, 교육은 당신의 것이다. 나라를 낳고 기르는 것이 당신의 천직이다.
그러기에 모두 당신에게로 돌리어, 인생이 그 도덕의 뿌리 믿음의 꼭지를 말할 때는, 정의 여신, 운명의 여신, 어머니교회 하지 않던가? 종교는 여자, 더구나 젊은 여성의 종교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당신의 책임이다.
젊은 여성아, 그 살이 꽃 같으며, 그 숨이 향 같고, 그 목소리가 꾀꼬리 같고, 그 움직임이 시냇물 같은, 아름다운 혼아, 집도 나라도 교회도 다 영원한 네 님의 상징이다. 전체의 대표가, 나무의 뿌리가, 땅 속에서 붙어 줄기 가지로 잎을 통해 하늘에 닿았고 그 꽃 그 열매를 통해 영원에 들어갔듯이, 당신은 인간 사회,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하늘나라에까지 그 고갱이가 되어있다. 신은 네 님을 위해 몸바쳐 섬기지 않으려나? 그 계집종이 되지 않으려나?
당신은 희생이 되지 않으려나? 당신의 젊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자랑 없이 즐겨 바치지 않으려나? 당신의 치마로 그 오시는 갈을 쓸지 않으려나? 당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지 않으려나? 당신의 몸, 마음을 다 불살라 그의 영원한 제단 앞에 불길이 되지 않으려나?
이것은 물론 쓴 말이다. 잘못을 하고 그 값으로 벌의 쓴 잔을 마신 사람의 말이 어찌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쓰니만큼, 달콤하지 않으니만큼 그 속에 비교적 거짓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아직도 피지 않은 꽃인가? 그러면 이 말로 잘못을 면할 것이요, 당신이 혹은 이미 다 핀 꽃인가? 그러면 이말로 잃었던 것을 도로 찾아 영원의 처녀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 피를 아끼지 마라. 그리하여 다 죽게 된 우리 수난의 여왕, 우리 엄마를 살려내자.
1) 맹자 등문공 상 獨樂樂 不如與人樂樂 與少樂樂 不如 與衆樂樂(독락락 불여여인락락 여소락락 불여 여중락락)
여상 1966 2월호
저작집30; 7-263
전집20; 없음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