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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30 / 하나님과의 ‘talk about’ (요나4:1-11)
더워지는 계절과 맞물려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올 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어느 주일이었어요.
그 성당에는 대형 선풍기 한 대가 신도 석을 향해 마련되었는데,
그것이 한창 돌다 회전 장치 고장으로 통로에다 헛바람만 보내게 되었지요.
그러자 왼편 좌석의 중년부인 하나가 미사보를 오므리며 나가더니
그 선풍기 목을 제자리 쪽으로 돌려놓고 들어왔습니다.
얼마 안가 바른편 좌석의 젊은 사내가 험한 인상을 쓰며 나가더니
그 선풍기 목을 제자리 쪽으로 돌려놓고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양편에서 번갈아가며 나서기를 세 번,
이번엔 회장인 듯싶은 영감님이 나가 이리 저리 돌려보다 망설이더니
그만 선풍기를 끄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당신 제단 앞에서도 아직 이 꼬라지랍니다.
예수님! 우리는 당신 제단 앞에서도 아직 이 꼬라지랍니다.”
이 시는 故 구상 시인의 「까마귀」라는 시집에 실린 “신도행록”이라는 시입니다.
보면,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시에서 시인이 사용한 ‘꼬라지’라는 말은 ‘꼬락서니’의 사투리로 ‘사람의 모습이나 행색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속어이긴 하지만 ‘아직도 이 꼬라지입니다!’ 라는 이 한마디에는 오늘 날 우리 믿음의 모습과 모든 회개가 다 담겨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다른 사람과 공동체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여전히 나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아직도 이 꼬라지.
예수 믿고도 도대체 손해 보지 않고 살려고 하는 우리는, 아직도 이 꼬라지.
믿음 안에 있다 하면서도 조그만 시험만 와도 옛 모습 그대로 행동하는 우리는, 아직도 이 꼬라지.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진리를 알고도 상대방의 조그만 실수에도 용서 못하는 우리는, 아직도 이 꼬라지.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만 받기 원하는 우리는, 아직도 이 꼬라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꼬라지의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 본문의 요나를 통해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나서 하면 통상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먹혔다가 살아 나온 기적 이야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성경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불순종하여 도망갔다가 혼쭐이 나고 억지로 사명을 감당한 선지자 얘기 정도로 알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서를 통해 진짜로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요나 당시,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수시로 전쟁으로 괴롭히던 강대국이 앗수르였고,
그 수도가 니느웨였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니느웨가 멸망하고 자신들의 삶이 평화롭기를 늘 기도했습니다.
요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요나에게 오셔서는 40일 후에 니느웨를 멸망시키려 하니 그 전에 그들이 멸망 되지 않게 회개시키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요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를 멸망시키려 한다.’ 하실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그들이 멸망 되지 않도록 회개하게 하라.’는 말씀은 용납되지가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요나 혼자서라도 니느웨를 멸망시키고픈 게 평소 맘이었는데, 그런 니느웨를 구원받게 하라니요?
그래서 요나는 말씀에 불순종하기로 마음먹었고,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요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정보는 요나서1:1에 나오는 “아밋대의 아들”이란 말뿐입니다.
아밋대라는 말은 “아멘”,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또 “요나”라는 말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해서 ‘아밋대의 아들’이라 함은 ‘진실을 전하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요나의 아버지 아밋대는 아들에게 왜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을까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아들이 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열망이 “요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문제는 요나가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혹, 앞으로 요나서를 읽게 되시면 ‘요나’를 ‘요~~나!’ 곧 ‘요놈의 나!’ 내지는 ‘아직도 이 꼬라지인 나!’로 여기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요나서를 읽는 우리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나의 불순종이었고,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란 것을!
오늘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고 영혼구원의 열정과 예배의 열심을 잊고 산다면 그런 내가 바로 “요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린 요나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1. 그 첫 번 째가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과 ‘talk about’ 하자. 입니다.
영어를 쓴 이유는 잘난 체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talk about’ 란 말속에는 ‘이야기하다. 말하다. 논의하다. 대화하다.’ 등의 실로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힘들게 살아가던 어느 날 문득 ‘아! 교회 가기 싫다. 기도하고 싶지 않아! 믿으면 뭐하나?’라는 생각이 드신 적은 없으셨는지요?
본문의 요나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불만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밉고 섭섭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그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과 ‘talk about’ 하기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요나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불평이 있을 때도, 심통이 날 때도, 때론 따지고 항의하고 반문하고 하는 모든 경우에서 요나는 하나님과 ‘talk about’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talk about’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talk about’ 한다는 것은 ‘talk about’할 상대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talk about’ 한다는 것은 말 자체로 이미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여기서부터 믿음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 그 어떤 신이 자기에게 와서 불평하라 합니까?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에게 따지라 합니까?
그런데도 그것들이 사람들에게서 신적 대우를 받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신이라면 하나님은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들의 불평도 항의도 심통도 비난도 심지어 짜증과 혈기까지도 다 허용하십니다. 다 받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비록 몸은 고난과 가난과 질병과 문제의 한복판을 지난다 할지라도, 생각과 마음만은 하나님과 ‘talk about’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지금 힘드십니까? 믿는 것도, 세상일도 뭔가 잘 안 풀리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향해 중얼거리세요. 하나님께 말을 거세요. 여러분의 속마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게 하세요.
이것이 하나님과의 ‘talk about’ 입니다. 들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두 번 째로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요나가 하나님과 ‘talk about’ 하긴 했지만, 요나도 한 때는 하나님과의 ‘talk about’을 단절할 생각까지 했더랬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하나님의 길과는 180도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이 못 보게 배 밑창으로 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들릴까봐 아예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요나가 의지하고 있는 배와 요나가 가고 있는 바다 길을 뒤흔들어 버리셨습니다.
만약에 요나가 이 불순종의 자리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 불순종하던 자리, 영적침체에서 헤매던 자리, 죄짓고 방황하던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인생이 끝났다 할지라도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요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싫다는 요나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앞서 하나님과 ‘talk about’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셔야 할 것은 그 ‘talk about’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고,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talk about’ 할 수 있는 자리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을 벌려주셨고, 하나님이 초청해 주신 자리가 ‘talk about’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고, 그 기회에 하나님과 ‘talk about’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살고 있는 자리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광풍이 몰아치고 죽을 위기에 처한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어떤 경우에서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뿐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는 요나가 만난 풍랑도 축복입니다. 요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풍랑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몰아치는 거친 파도 소리는 요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시간, 풍랑 만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내가 탄 배가 깨지는 고통 중에 나온 분이 계십니까?
지금의 고난이 세상이 주는 시험이라도 괜찮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는 인생에게는 하나님이 앞에서도 길을 막습니다. 뒤에서도 잡아당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인생에게는 하나님이 곁에서 동행해 주시면서, 앞장 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인생의 법칙’입니다. 이게 ‘믿음의 효과’입니다.
아시지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괘씸죄를 적용해서 없던 고난과 괴롬으로 우리를 해꼬지 하시는 건 아니라는 것을!
시험과 해꼬지는 늘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하나님이 그것들을 막아 주시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게 될 뿐입니다.
보시면 요나에게서 처음엔 바람이 산들산들 불더니 어느 순간 광풍으로 변했습니다. 시작은 찰랑찰랑했던 파도가 일순간 엄청난 풍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늘 처음엔 조그마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늘 있던 인생의 어려움들이지요.
그러다간 한 순간에 그것들이 큰 고난과 괴롬으로 변해버립니다.
기억하세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늘 주의할 것은 ‘회개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talk about’에서의 우리의 첫 시작은 언제나 회개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회개의 시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세상의 광풍을 만나 죽도록 얻어터진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 불 때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먹장구름 만나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아직 세파가 찰랑찰랑할 때 주님 앞에 나오는 여러분이시기를 빕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만약에 신앙 안에서 누군가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저와 여러분일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해 놓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작정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포기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믿음과 기도와 순종을 미루고, 언젠지 모를 그때까지, 포기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인생의 풍랑 앞에서는 고집 부리지 마세요.
흔들리는 사업의 배 안에서, 건강의 적신호 때, 가정이 위기 앞에 흔들릴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으세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어떤 내용이든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과 ‘talk about’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앞서 ‘요나’를 ‘요~~나!’로 이해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만 그러자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앗수르는 지독하게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한 나라나 한 도시를 쳐들어가면 모든 사람, 모든 시설과 재산 모두를 아예 불살라 버렸습니다.
포로들을 끌고 가는데 그냥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코에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어 맨 앞에서 한 사람만 끌면 모두가 딸려오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쓰러지거나 반항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막 모래 바닥에 콧구멍만 밖으로 나오게 하여 묻어 햇볕에 말려 죽였습니다.
오죽하면 앗수르가 쳐들어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아예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앗수르의 ‘앗’자만 들어도 ‘악’하고 비명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나라와 민족이 망하고 죽길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마음으로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을 거야. 아니 절대로 구원받아서는 안 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지옥 제일 밑바닥에 예약된 사람일거야 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전혀 잘못됐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들도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본문의 1절은 어떻습니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서를 읽다 보면 요나는 한 번도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니 단 한 번, 회개를 선포한 후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기 위해 언덕에 올라갔다가, 한 낮 사막의 살인적인 햇빛에 괴로워하던 중, 그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박 넝쿨이 자라 머리를 덮어 그늘을 만들었을 때,
그 순간만큼은 요나가 기뻐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4장 6절입니다. “요나가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뻐하지 않던 요나,
그러다가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일에 비로소 기뻐하는 요나.
이런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요~~나!’의 모습은 아닐런지요?
그런데 요나가 그토록 죽고 망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린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게도 그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믿노라 하면서도 아직도 이 꼬라지인 나를 향해, 하나님은 내가 죽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망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 못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살리고 구원하시기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우린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고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모두 속에, 첫째로 하나님이 잘되셔야 합니다. 또한 내 가족과 이웃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잘 되길 바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가족과 동료, 교우와 이웃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이해하고 사랑하고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믿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어제까지는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오셨든 이제부터는 매 순간을 하나님과 ‘talk about’ 하시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축복 속에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