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의 길라잡이 / 20 죽음의 뜻
원제 : Talking with God (하나님과 이야기 나눔)
by Mrs, Gwyne Dresser Mark (귀네 드레서 마-크 여사 지음)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14:19)
우리가 존재의 영적 차원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최종적으로 그곳에 머무는 것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When we have learned to feel at home
at the spiritual level of existence,
we are freed from undue reluctance toward finally being there to stay.)
지상의 삶에서 가장 큰 사건은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대학을 졸업하는 것처럼
더 큰 활동을 위한 준비와 시작을 완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생명은 끝이 없으며
우리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존재의 더 넓은 지평을 향해
생명 저편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서의 첫걸음입니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영원에서의 우리의 쓰임새를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며
죽음은 우리를 그 씀씀이가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질병은 전환(transition)의 수단으로써(자연계에서 영계로 옮겨가는)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나 질병 없이 편안하고 쉽게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멸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에 관한 죽음을 생각하기를 꺼려하거나
사망 소식을 듣고 너무 슬퍼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단지 일시적 관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삶의 주류(主流)를 향한 전진이라고 알면
그것이 찾아올 때는 일종의 모험과 기대함을 가지고 받게 될
멋진 경험으로서 그 추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지성이 클수록 그것은 더 풍족한 미래를 내포합니다.
아이가 가지는 내일에 대한 첫 이해를 시작으로 하여 영원토록
인간의 마음은 다가올 것들에 자신을 연관시키려 시도합니다.
어린아이 때에는 부드럽게 보호되고,
어릴 때와 청년기를 통해서는 현명하게 양육되고
어른이 되어서는 많은 훈련에 복종하고
이처럼 인간의 성품은
긴 세월을 거쳐서 겨우 성장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영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주님의 지상 과업의 클라이맥스는
죽음 너머에 있는 삶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죽음 너머에 있는 삶 위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그리고 동료들과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이 두어져 있습니다.
삶이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면 중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는다면
동료들에 대한 사랑을 그토록 어려운 교훈으로 배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언제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이 무슨 중요성이 있을까요?
죽음 너머에 있는 삶에 대한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풍성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주목할 만한 과학자이자 신학자인
‘에마뉴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는
25년간의 초감각적 경험을 통해 영원한 존재와
그 놀라운 환경의 실상에 관해 방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 보다 덜 광범위하지만 그것과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충분한 증거가 있습니다.
죽음은 전진(前進)에 불과합니다.
모든 인생은 우리가 ‘탄생’이라고 부르며 대단히 기뻐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많은 변화를 통해 그려집니다.
곧 요람에 무심히 누워 있다가 앉고, 기기 시작하고, 걷고,
학교에 들어가고, 취직하고, 혼인하고, 아이를 가지고..
이 모두는 더 큰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든 다른 이에 대한 그리움(missing)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려 한다면 그는 이기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섭리에 의하여
매우 적당한 때에 각자에게 찾아오는 죽음으로부터
누군가를 붙잡아 두려는(hold back) 것은 얼마나 더한 것일까요?
죽음은 사실상 완전한 치유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정리이며
인간에게 가능한 최대의 자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독한 질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치유가 건강한 육체적 삶으로의 복귀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영계의 더 높은 생명의 수준으로의 해방을
의미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마다 이 해방이 준비될 때 주님은 그것을 준비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집이나 다른 도시에 있을 때
왜 그리움이 더 해야 하며,
육체적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이 없고
지속적으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왜 그리움이 덜 해야 하는 것일까요?
(Of course we miss those whom we love, but why any more than
when they are in another house or a different town?
Why not less, since those who are free of material obstructions
have no barriers from time and space and can be with us continually.)
비록 우리가 그들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느끼는 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영적 치유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만일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안다면
전적으로 죽음을 제거하는데(eliminate)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이 출생만큼 보편적인 경험이며
마찬가지로 신성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결코 죽지 않는다면
지상의 상황은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까요?
확실히 우리의 적은
죽음이 아니라 흔히 그 앞에 오는 질병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멸과 섭리에 대한 외관상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노인들일 뿐
다른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은 ‘살아갈 많은 것들이 있을 때’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연속성,
즉 죽음 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그러면서도 보다 더 자유로운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 준비 되었을 때,
즉 첫 번째 존재 단계에서 더 이상의 훈련이 필요 없거나
더 이상의 훈련을 받을 수 없을 때
우리가 옮겨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진보와 필요들은 개별적인 사안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다섯 살에 피아노를 칠 수 있고
어떤 아이들은 배우는 데 몇 년이 걸리고
그래서 하나는 일찍 전환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한 세기 동안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의 지혜와 섭리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결코 죽음에 대한 탄원이 광적으로 되어서는 안 되고
대신 주님의 임재를 위해 손을 뻗쳐야 하며
기도하는 자가 평온과 능력의 영기로 둘러싸이도록 해야 하고
사역하는 천사들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모든 길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래 지속되는 병약함의 고통과 장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모든 도움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육체적 회복이 질서에 맞는 것이라면
그러한 기도는 그 회복을 위한 통로를 활짝 열어줍니다.
그러나 전환이 임박해있다면(transition is at hand)
그러한 기도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진행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질병은
(죽음을 향한)신성한 안배의 그릇이 아니라
무질서 한가운데 있는 인간을 위해 운용하게 된 섭리에 사용됩니다.
기도는 종종 죽음에 앞서
육체의 호전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이것은 전환의 준비로서 영적인 강화가 반영된 것이거나
아니면 평온함과 고요함을 줄 수 있는 따뜻한 기도의 영기로 인해
이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It has been observed that prayer often seems to
bring a physical improvement preceding death.
This could be the reflection of a spiritual strengthening
preparatory to transition.
Or the improvement might be a relaxation in the warming sphere
of prayer which can give serenity and calm.)
그 사람 자신, 또는 그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영을 불안과 우울에서 해방하는 것은
그를 그의 육체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이 이제 곧 완전한 영적인 삶으로 나아가려 할 때
그는 자기 주변에 흐르는 사고와 감정에 특히 민감합니다.
죽음에서 그를 지키려는 자들의 슬픔과 노력은
그가 가는 길을 힘들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나 두려움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그에게 따뜻함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떠나려는 집과 그가 곧 보게 될 빛나는 세계를
연결하는 창과 문들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참고 : 스베덴보리 증언
순진하고 선 안에 있던 태고(太古)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영이 해방되기 위한 준비가 된 때에는
그때로 몸에서 벗어나서 갔다.
오늘날에도 병고를 거치지 않고 그처럼 되어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몸은 덮개나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몸이 그 영에서 떨어져 나와 이른바 죽음이라는 상태가 되어도
사람은 역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는 달라지지 않는다.
자연적인 것이나 또 이 세상적인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들어오는 아주 겉의(외적/外的) 것이다.
사람은 먼저 너절한 것을 걸치고, 그의 몸은 그것들로 되어 있지만
그는 죽음으로 그것들을 벗는다.
사람은 안의(내적/內的) 것에 관해서는 죽을 수 없게 창조되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밖에 걸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선용을 하는데 쓸모가 있다.
이 몸을 벗게 되면 그의 영혼은
온통 영적인 세계에 영의 몸을 입고 들어가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산다.
영은 완전히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
물질적 형체는 혼자서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적 형체가 그러한 것이다.
사람은 죽고 나서도 사람인 것은 변함이 없다.
사람은 죽은 후에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애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몸, 얼굴, 말, 감각 따위를 가지고 있고,
저 자신에게는 전혀 살아있을 때와 다름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는 생전과 같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지(意志)한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제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죽은 후에도 가지고 가기 때문에
땅 위에서 걸쳤던 몸이 죽은 것에 불과한 죽은 후에
그 중에 무언가를 홀로 잃게 되는 일은 없다.
그래도 사람의 생명은 영계와 자연계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천계에 사는 자는 보고 듣고 하는 것이 훨씬 날카롭고
그 생각도 훨씬 현명하다.
또 죽은 후에 각 사람의 형체는
그 사람이 신령진리를 내적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온 만큼에 따라서 그 만치 아름답다.
만약 사람이 선한 인생을 살았다면
몸이 속사람을 더 섬길 수 없게 되었을 때,
병을 앓는 일 없이 땅 위의 몸에서 옮겨갔을 것이다.
인류가 창조된 후에 자연계를 떠나온 모든 이는 영계에 있다.
어려서 죽은 모든 이는 모두 천계에 들어간다.
죽은 어린아이 모두는
그들을 시중드는 천사들에게서 키워지고,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제각기의 성미(성향)에 따라서 교육을 받는다.
이 어린아이들이 이지와 지혜로 키움을 받으면
그들은 천사가 되는데
그 때 그들은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고, 어른으로 보인다.
사람의 영에는 늙은 나이란 없다.
몸 또는 바깥쪽 사람이 늙으면
사람이 영은 나이와 함께 완성되기 때문에
생명의 새로운 시기를 맞는다.
늙은 것은 천계에서 젊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