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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간 근무했던 아동지킴이 선발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날 저녁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금은 우울했지만 책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과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책은 길과 맞닿아 있으며 책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길이란 무엇인가? 흔히 도로를 뜻하지만 그 뜻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삶의 노정路程을 말할 때 길을 찾는다고 하고, 길이 잘 들었다는 말처럼 익숙해진 것을 말하기도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의 깊이를 측정하는 길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지? 여행이란 길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과 관광은 다르다. 관광은 여럿이 함께 외부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지만, 여행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자신의 내면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고 그를 통해서 내면의 깊이를, 우물처럼 깊고 맑은 시원한 물로 채워가는 것인지 모른다.
책은 사람이 처음 태어난 곳을 말하는 ‘생가’에서부터 장승과 솟대, 서원과 향교, 한옥, 창과 문, 누와 정, 성, 궁, 절, 마애불, 고인돌, 선돌, 다리, 바위 그림, 절터, 성황당, 산신각, 능, 탑, 부도, 비석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이경덕 선생은 ‘문화인류학’교수로 대학에서 종교문화, 신화와 축제, 아시아문화 등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으나,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는 ‘한양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작업을 해왔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전문작가로 활동하면서 문학·철학·인문과학 분야의 탁월한 작품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신의 지문>,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 등 문화와 신화의 관계를 규명하는 책들을 번역하였다. <신화로 보는 악과 악마>, <신화로 보는 인류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 <그리스신화 100장면>,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 신화>, <역사와 문화로 보는 일본문화 기행> 등을 집필하면서 남다른 시각을 보여주었고 2016년 현재는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요즘에는 인위적으로 ‘장승’을 만들어 세우지만 장승의 원래 이름은 ‘벅수’혹은 ‘법수’다. 장승이란 장생에서 온 말로 영생을 뜻하는 불로장생이 그 어원이다. 애초에는 마을에 역귀를 쫓아내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노표路標를 장생이라고 불렀다. 장생이 장승으로 변한 것이고, 조선 말 이후에 노표는 사라졌지만 ‘장승배기’‘장생고개’라는 말은 근대에까지 있었다.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는 아직도 벅수 또는 법수라고 부르는 하루방(제주), 수살, 돌미륵, 신장 등으로 불리는데, 벅수는 신선사상과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 불교의 미륵 혹은 샤머니즘에 기원을 둔 선인仙人이 나타나 구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며 그 선인을 나무나 돌에 새겨서 선인이 지닌 능력으로 지켜달라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 그것이 벅수의 기원이다. 점차 그 유래가 잊혀지면서 그냥 하위 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이 장승이다.
장승이 그렇다면 솟대는 어떤 의미로 세워졌을까? 성격이 다른 의미로 장승과 함께 세워지는 경우가 많은 솟대는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 일보다 개인적인 일을 염원하여 빌면서 솟대와 장승은 함께 묶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지금은 둘의 차이가 불분명해졌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장승이 수평으로 난 길을 이어주고,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면 솟대는 또 다른 길인 땅과 하늘을 잇는 수직의 길을 상징한다. 장승이 보이는 길을 안내한다면 솟대는 보이지 않는 길, 영혼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장승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면, 솟대는 땅과 하늘, 사람과 하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 솟대는 강릉에 있다. ‘진또배기’라 불리는 강릉의 솟대는 인근의 가로등과 건물 곳곳에 솟대가 장식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또 대중가요로도 꽤 알려졌다. 1960년생 ‘이성우’가수가 노래를 불러 한창 인기가 치솟던 중인 2018년 그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그 후 ‘이찬원’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잘 알려진 노래가 되었다.
솟대에 올려진 새는 닭도, 까치도, 독수리도 아닌 오리다. 왜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 즉 저승과 연관 지어 생각했던 것으로 날개를 가진 새는 인간과 하늘세계를 이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농경문화에서 다산의 상징으로 또한 오리를 꼽았으며, 오리는 비와 천둥을 관장하는 새라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오리는 여름에는 멀리 날아갔다가 겨울에 다시오는 철새인데, 철새가 보이지 않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을 것이고 나름대로 상상한 것이 흥부가 다리가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복을 얻는 이야기와 통했다.
서원과 향교의 차이는? 부산에도 명륜동에 향교가 있고, 김해·양산에도 향교가 있다. 서원은 소수서원, 도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꽤 많다. 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자가 되면서 전국에 난립하여 있던 서원 47개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하기도 했다.
향교와 서원은 요즘의 학교와 같은 것으로 향교는 조선시대 국립학교,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학교다. 이보다 규모가 작은 ‘서당’이라는 사립학교도 있었으며, 우리나라 3대 향교는 강릉학교, 나주향교, 장수향교인데 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현을 모시는 문묘와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소가 있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네 성인, 즉 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인 최치원, 설총, 송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훈,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새채, 김인후, 조현, 김집 등을 모신 대성전이 있고, 명륜당에는 유생들이 공부하고 식사하는 동재와 서재, 서적을 펴내는 존경각 등이 있다.
서원은 남송 시대 주희(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세운 것이 시원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한 ‘소수서원’이 최초 서원이다. 이 서원은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준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두 번째 사액서원은 함양의 남계서원으로 정여창을 배향하고 있다.
한옥의 대문과 문살도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대부분 절집의 문살은 보통솜씨를 가진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하다. 아름다운 문살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절집을 꼽는다면 논산 쌍계사 대웅전, 동학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보전, 강화도 정수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 칠곡 송림사 대웅전 등이다. 이 중 정수사 대웅전 꽃장식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꽃병과 투각기법으로 인해 마치 꽃들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듯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누각은 중층으로 1층에는 우물마루*를 두지 않고 2층에 우물마루를 둔 큰 규모이고, 정자는 누각보다 규모가 작으면서 단층으로 되어 있는데, 생김새들은 4각 6각 8각 등 다양하다. 이들은 실제 생활과는 거리가 먼 공간으로 이들의 다른 이름은 헌·당·대(軒堂臺)라고도 한다. 대부분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져 있으며, 용도는 휴식과 유흥이다. 오래전에 울진 망양정에 갔을 때, 동네 노인들이 누각 위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용도에 맞는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 마루 형식이 우물정(井)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물마루라고 한다. 마루(抹樓)는 한자로 청(廳)이라고 쓰며 한글 발음대로 한자에서 차음하여 ‘抹樓’라고 표기한다.
사람들은 문화재 구경이나 답사가 아니라면 그냥 맹목적으로 절을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복을 빌기 위해서거나 부처님 말씀을 스님을 통해 듣기 위해 가는 것일 것이다. 절과 부처는 윤회와 업의 산실이기도 한데 그에 관한 이야기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 범어사에는 ‘매학’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가졌지만 욕심이 많아 수도보다는 재물에 관심이 많았다. 흔히 말라는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어느 날 매학이 길을 가다가 어느 초가집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들어서자 갓 태어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매학은 문밖에서 산모에게 말했다.
“지금 태어난 아이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아이입니다. 잘 길러주십시오. 10년 후에 아이를 데리러 오겠습니다.”
산모도 방에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자 매학은 약속대로 그 집을 찾아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아이는 매우 영특했다.
어느 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라고 보냈는데 아이는 빈 지게를 매고 돌아왔다. 매학은 하루 종일 놀다 왔다고 화를 냈다. 그러나 아이는,
“나무를 베려고 했는데 나뭇가지에서 붉은 피가 나와서 나무를 할 수가 없었어요”하고 말했다. 매학은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이제는 거짓말까지 한다며 아이를 내쫓았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도를 했다.
아이는 열심히 수도하여 커서 영원 조사(靈源 祖師)라는 훌륭한 승려가 되었다. 하루는 영원 조사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저승에서 범어사의 옛 스승이 죽은 뒤 죄를 묻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영원조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명부로 올라가 보니, 늘 재물 모으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선한 일을 하지 않던 스승이 구렁이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명부에서 돌아온 영원 조사는 그길로 곧바로 범어사로 달려갔다. 과연 범어사의 재물창고에는 구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구렁이는 팥죽을 좋아해서 신자들이 늘 팥죽을 쑤어 준다고 했다. 영원 조사는 구렁이를 향해 넙죽 절을 하고는 독경을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구렁이도 영원조사를 따라 나왔다. 냇가에 이른 영원 조사는 구렁이에게 말했다.
“전생의 탐욕으로 이렇게 구렁이가 되었으니 이제 모든 인연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버리십시오.”
영원 조사는 그렇게 말한 다음 옆에 있던 큰 돌을 집어 구렁이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 순간 죽어가는 구렁이 몸에서 하얀 새 한 마리가 나와 영원 조사의 품에 안겼다. 영원 조사는 새를 안고 금강산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민가에서 하룻밤 묵게 된 영원 조사는 새를 그 집 주인에게 맡기며 일렀다.
“앞으로 당신네들에게 아이가 생길 것입니다. 그 아이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아이이니 내가 10년 후에 다시 찾으러 오겠습니다.”
10년이 지난 뒤 영원 조사는 그 집을 다시 찾아와 아이를 데리고 절로 갔다. 아이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 정진했다. 어느 날 영원 조사는 동자승을 방으로 불러 상좌에 앉히고 큰절을 올렸다. 동자승은 어리둥절해 했다.
“저는 원래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절 잘 보십시오.”
동자승은 스승을 보자 불현듯 전생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업을 알게 되자 자신이 구렁이였을 때 영원 조사에게 맞아 죽은 업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날 밤 동자승은 도끼를 들고 영원 조사의 방을 찾았다. 자기의 업을 풀기 위해서. 동자승이 살금살금 다가가 영원 조사를 향해 도끼를 내려쳤다. 그 순간 벽장문이 벌컥 열렸다.
“스승님 이제 업이 소멸되었습니다.”
동자승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열심히 수도하여 우운 조사(雨雲祖師)가 되었다. 스승을 올바른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 영원 조사는 세상을 방랑하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그곳에 절을 세우니 바로 영원사(靈源寺)*다.
*함양군 마천면에 있다. 해인사(海印寺) 말사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때의 고승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하여 절 이름을 영원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설화에 의하면 영원조사는 원래 범어사(梵魚寺)에서 수행하다가 욕심 많은 스승의 곁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토굴을 짓고 10년 동안 정진(精進)하여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서 흑구렁이로 변한 스승의 업신(業身)을 제도한 뒤 영혼을 인도하여 지리산 토굴로 돌아가다가 한 부부를 만났다.
그는 부부에게 열 달 뒤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7년 뒤에 나에게 데려다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토굴로 돌아와서 절을 지어 영원사를 완성하였다. 찾아온 동자를 제자로 삼아 방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그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렀다. 그 뒤 동자는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오도(悟道)하여 전생의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 있었던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영관(靈觀)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12년간 수도하였고, 청매(靑梅)·사명(四溟)·지안(志安)·상언(常彦)·포광(包光)등 고승 109명이 도를 닦았다고 『조실안록(祖室安錄)』에 기록되어 있다.
여순반란사건 때, 완전히 소실된 뒤 1971년에 중건되어 현재에는 인법당 만이 남아 있다. 문화재는 영암당탑(靈巖堂塔)·설파당탑(雪坡堂塔)·중봉당탑(中峰堂塔)·청계당탑(淸溪堂塔)·벽허당탑(碧虛堂塔)·청매탑(靑梅塔) 등 부도 6기가 있다.
다음은 창원 북면에 소재한 백월산에 등산 갈 때마다 정상의 안내판을 읽게 되는 노흘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다. 신라 시대 둘은 친구 사이로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어느 정도 수도가 이루어지자 둘은 각각 절을 하나씩 짓고 농사를 지으며 수행을 계속했다.
어느 날 둘은 참된 도를 얻기 위해 중이 되었으니 당연히 모든 장애와 구속을 벗고 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두 사람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 수행하기로 결심했고, 그날 밤 두 사람의 꿈에 흰 빛줄기 속에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정수리를 만지는 것이었다. 다음날 서로의 꿈 이야기를 하다가 같은 꿈을 꾸게 되었음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자기들의 수행에 용기를 더해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꿈에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다.
둘은 백월산으로 들어가 노흘부득은 동쪽 고개 돌무더기 밑에 토굴을 짓고, 달달박박은 북쪽 고개에 있는 사자바위에 자리를 잡고, 3년 동안 열심히 수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 무렵 갓 스물 살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자가 달달박박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을 열자 여자는 시 한 수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길 가는 손님 해가 지니 산은 첩첩 저문데, 길은 멀리 막혀 사방이 적막하구나. 이 밤을 절 뜰에서 묵고 가려 하니 자비로운 스님은 성가시다 생각마오.”
달달박박은 대답했다.
“이곳은 깨끗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니 네가 머무를 곳이 못 된다. 지체 말고 냉큼 떠나거라.”
달달박박이 방문을 닫아버리자 아름다운 여자는 이번에는 노흘부득의 암자를 찾아갔다. 여자가 다시 시를 읊었다.
“해 저문 산길을 걸어 아무리 가도 사방은 적막할 뿐,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짙어도 개울물 소리는 다시 새롭네! 잘 곳을 청함은 길을 잃은 탓이 아니라오. 스님의 구원의 길 찾는다면 원컨대 나의 청을 들어주고 내가 누구냐고 묻지는 마오.”
노흘부득은 이 시를 듣고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곳은 여자들이 들어와 더럽힐 곳은 아니지만, 중생의 뜻을 따르는 것 또한 자비로운 도를 닦는 일이라 생각되오. 더구나 궁벽한 산골 어두운 밤에 어찌 괄세를 하겠소.”
밤이 깊자 노흘부득은 마음을 깨끗이 하고 벽에 등불을 희미하게 낮춘 다음 나직하게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밤이 깊었을 때 여자가 노흘부득을 불렀다.
“내가 공교롭게도 아이를 낳으려고 하니 스님이 짚자리를 깔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노흘부득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촛불을 밝혔다. 그런데 이미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는 목욕을 시켜 달라는 것이 아닌가. 점입가경이었다. 노흘부득은 난처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함지박을 가져다가 여자를 앉히고 물을 끓였다. 노흘부득은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자의 몸을 씻겨주었다.
얼마 후 물에서 향기가 물씬 풍기며 물이 금빛으로 변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흘부득에게 여자는 그 물에 목욕하기를 권했다. 노흘부득은 마지못해 옷을 벗고 함지박 안으로 들어가 몸을 닦았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살빛에 금빛이 돌았고 옆을 보자 부처가 앉는 연화대가 보였다. 아름다운 여자는 웃으며 그곳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관세음보살인데 대사가 도를 성취하도록 도우러 왔소.”
그 말과 함께 관세음보사살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편, 달달박박은 노흘부득이 어젯밤에 틀림없이 계율을 어겼을 것이라 생각하고 놀려주기 위해 노흘부득 암자를 찾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흘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부처가 되어 환한 빛을 내고 있는게 아닌가. 달달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노흘부득은 달달박박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달달박박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만 부처님을 만나고도 도를 이루지 못했구나. 스님은 마음이 어질어 도를 깨달은 거요.”
노흘부득은 웃으며 말했다.
“함지박에 아직 물이 남아 있으니 자네도 목욕을 하게나.”
달달박박은 노흘부특이 시키는 대로 함지박으로 들어가 몸을 닦았다. 그러자 영원히 죽지 않는 무량수 부처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두 스님은 그곳에서 설법한 다음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설화의 원문은 《삼국유사》권 제3 탑상 제4 백월산 이름의 유래에 전한다. 【원문】 卷 第三 塔像 第四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白月山两聖成道記云“白月山在新羅仇史郡之北(古之屈自郡, 今義安郡) 峰巒竒秀, 延袤數百里真巨鎮也.”古老相傳云“昔唐皇帝甞鑿一池, 每月望前月色滉朗, 中有一山, 嵓石如師子隠映花間之影, 現於池中. 上命畫校勘 工啚其狀, 遣使搜訪天下, 至海東見此山有大師子嵓. 山之西南二歩許有三山, 其名花山(其山一体三首, 故云三山).與啚相近. 然未知真僞以隻履懸於師子嵓之頂使還奏聞. 履影亦現池. 帝乃異之賜名曰白月山, (望前白月影現, 故以名之) 然後池中無影”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다 (옛 굴자군(屈自郡)으로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이다) 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는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이다.”고 하였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 당(唐)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에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그] 그림자가 못 가운데 나타났다. 황제는 화공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그리게 하고, 사신을 보내 천하를 돌면서 찾게 했는데, 해동(海東)에 이르러 [이] 산에 큰 사자암(師子嵓)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산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었는데, 이름이 화산(花山)(산의 몸체는 하나지만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이라고 하였다)으로서 그림과 서로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진위를 알 수 없었으므로 신발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두고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그] 신발의 그림자가 역시 연못에 나타났다. 황제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이름을 백월산이라고 지어 주었더니(보름 전에 흰 달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 뒤에는 연못 가운데에 그림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출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창원 백월산|작성자 낭만도사
근대에도 우리나라에 풍장이라는 특이한 장례법이 있었듯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장례법이 있는 모양이다. 티베트에는 5가지 장례법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몸을 잘라 물에 뿌려서 물고기 밥이 되게 하는 수장, 불에 태우는 화장, 땅에 묻는 토장, 천장이라고 하는 조장까지. 티베트는 불교 나라로 그 나라의 서열 1위와 2위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에게만 가능하다는 탑장도 있다고 한다.
티베트에서는 보편적인 화장법인 땅에 묻는 토장은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죄를 지은 죄수들이나 땅에 묻고, 오히려 야만적이라고 비난받는 조장은 널리 행해진다. 조장은 그들의 사정을 모르면 끔찍한 장례법이다. 조장사인 승려가 죽은 사람의 몸을 잘라놓으면 기다리고 있던 독수리가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 먹는다. 그리고 남은 뼈는 빻아서 가루로 만든 뒤 그 나라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참파(미숫가루와 닮은)를 섞어 놓으면 독수리들이 그것마저 말끔하게 먹어 치운다.
그리고 독수리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티베트 사람들은 독수리의 시체나 배설물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음 삶을 위해 더이상 필요 없는 죽은 몸은 깨끗이 하늘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보편화 되어 있는 토장을 티베트에서는 왜 하지 않을까 궁금하다면 그것은 환경 때문이다. 춥고 건조해 시체를 묻어도 잘 썩지 않기 때문인데, 티베트 사람들은 시체가 썩지 않는 것을 불길하게 생각한다. 사람은 죽은 지 49일 만에 환생한다고 믿으며 죄수가 아니면 토장은 하지 않는 것으로 환생을 믿는 티베트인에게 토장은 끔찍한 저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반도에는 세계 고인돌의 50%가 집중되어 있다고 하는데, 남방식·북방식·개석식이 그것이다. 남방식은 땅밑에 판돌이나 깐돌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다음 지상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고, 북방식은 지상에 판돌로 돌방을 만든 뒤 주검을 넣고, 그 위에 넓은 덮개돌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남방식을 기반식, 북방식은 탁자식이라고도 한다. 개석식은 남방식과 비슷하지만 받침돌이 없는 것으로 이는 그 지방에 맞는 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조금 특이한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불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산신각이다. 본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신각이지만 인기는 꽤 높다. 산신각에 모신 탱화는 보통 노인과 호랑이다. 가까이 느껴지는 호랑이지만, 우리가 단군의 후예라면 곰과 가까워야 할 텐데 왜 호랑이일까? 그런가 하면 부여 무량사 산신각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그가 죽은 뒤 산신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산신은 삼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삼신은 환인, 환웅, 단군을 말한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이름들로 곰은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으나, 정작 인내하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지만 그 후의 곰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대신 호랑이가 한자리를 차지했는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은혜 갚은 호랑이 등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호랑이를 모신 산신각에서 우리는 무엇을 비는가? 인내심이 부족해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에게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빈다.
아마도 그것은 호랑이가 하지 못했던 그것. 그러니까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염원을 버릴 수 없었던 것에서 호랑이를 떠올리며 호랑이가 여전히 사람의 일을 염탐하면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믿는 때문이 아닐까.
산신각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독성각, 삼성각 등. 독성은 혼자서 깨우침을 얻은 성인을 말하는데, 그 기원은 인도지만 한국에 오면서 산신 혹은 칠성처럼 단군신앙의 불교적 변이를 보인다. 삼성각은 세 명의 성인을 모신 곳으로 산신, 칠성, 독성을 말한다.
하여튼 절에 가서 볼 수 있는 산신각과 명부전은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대변해 주는 곳이다. 불교가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에는 죽으면 선악과 상관없이 뒷산에 묻히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되었지만, 불교가 들어오고부터는 죽음 뒤에는 시왕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고 삶의 잘잘못을 가리게 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왕과 왕후가 죽으면 땅에 묻고 릉陵이라 부른다. 추존한 왕의 무덤도 릉이라 부른다. 왕세자나 세자비, 왕세손과 세손비, 왕후가 아닌 왕의 생모인 빈,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부모 무덤은 원園이라 부른다. 왕족이면서도 빈, 왕자, 공주, 옹주 무덤은 그냥 묘라고 부르고, 임금을 지낸 광해군과 연산군은 릉은 커녕 원도 아닌 그냥 묘다.
왕의 무덤으로 보이지만 주인을 알 수 없을 때는 총塚이라 부르고 발굴된 대표적 유물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데, 경주의 천마총, 금관총 등이다. 또 분墳은 무덤의 주인도 모르고 능처럼 크지 않지만 귀족과 같은 힘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을 말한다.
절에는 탑이 한둘은 꼭 있는데 화순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이라하여 불상과 탑이 수도 없이 많다. 탑은 산스크리스트어 스투파에서 유래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흙과 돌로 쌓은 건축 또는 묘를 의미하지만, 원래 탑은 불교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부터 인도 사회에 존재했으며 부처가 열반하자 분묘를 만들고, 그때부터 많은 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석가모니에게서는 많은 사리가 나왔는데 그것을 인도 여덟 나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리를 여덟 개로 골고루 나누어 가졌으나 그로부터 100년 후 아소카 왕이 출현하면서 나누었던 사리를 다시 한곳에 모아 8만 4천 개로 분리해 전국에 사리탑을 세워 봉안하게 했다. 본격적인 불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탑은 나무로 만든 목조탑, 벽돌로 만든 전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만든 모전석탑, 돌로 만든 석탑, 청동으로 만든 청동탑 등으로 나뉘는데, 화순 쌍봉사 대웅전(보물 165호)은 유일한 목조 삼층탑이지만 지금 것은 1984년 화재로 재건한 것이다. 전탑은 안동지방에 주로 남아 있고, 모전전탑은 분향사 탑과 제천 장락동 7층 전탑(보물459호)가 남아 있다.
장중하고 아름다우며 신라의 3대 보물로 꼽히던 황룡사 9층목탑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고 말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하려했으나 신라의 3대 보물 때문에 단념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탑이 사라진 이유는 석탑의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릉이 왕이나 왕후의 무덤, 원은 왕족의 무덤, 탑은 부처의 무덤이라면 부도는 스님의 무덤이다. 어떤 사람이 절을 찾을 때 일주문 지나 본당에 이르는 길과 부도를 보면 절을 다 보았다고 했듯이 이말은 시작과 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승려의 죽음은 특이하기도 한데 이름난 고승이라면 더욱 그렇다. 고승이 치매 걸려서 죽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고승의 죽음은 거의 신비에 가깝다. 대개 죽음을 예견하고 주위를 정리한 뒤에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부도 중에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국보57호)와 구례 연곡사 북부도(국보54호)와 동부도(국보53호)다. 철감선사 부도는 신라 경문왕 때 만들어졌으며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부도 하단에는 여덟 마리의 사자, 몸통에는 사천왕상과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가릉빈가는 사람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상상의 새로 히말리아 눈 속에서 태어나 산다고 한다. 그 새는 목소리가 아름답고 극락정토에 사는 새라고 해서 극락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가릉빈가가 장식에 사용된 것은 통일신라 이후라고 한다. 이것이 새겨진 대표적인 부도는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 연곡사 북부도, 동부도 등인데, 머리와 팔은 사람의 모습이고 새의 날개와 발을 가졌으며 손에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도 있다고 한다.
부도탑의 기단부에는 십이지상과 사천왕상, 팔부신중이 많이 조각되어 있는데, 사천왕은 절의 천왕문 안에 주로 있는데 지국천, 증장천, 광목천, 다문천을 말한다. 사천왕이란 사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위로는 제석천을 받들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거느린다. 원래 모습은 귀신이었지만 중국을 거치면서 무인으로 변했다. 당초 귀신들의 왕이었지만, 불교에 귀의해 수호신이 된 것이다.
지국천은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손은 허리에 대거나 보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고, 증장천은 오른손으로 용을 잡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다. 광목천은 오른손에 삼차극, 즉 삼지창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으며 다문천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팔부중은 천, 용,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라, 긴나리, 마후라가를 말하는데 천은 팔부중 전체를 이르고, 용은 물속에 살면서 비를 내리고 얼굴과 몸은 사람이지만 뱀꼬리를 하고 있다. 야차는 사자, 코끼리, 호랑이, 사슴, 말, 소, 양 등으로 나타내고, 사람으로 나타낼 때는 얼굴을 두세 개로 표현하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건달파는 원래 음악의 신이었으나 무장 복장에 머리에는 사자관을 쓰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흔히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을 ‘건달’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했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인 삼두육비로 칼을 들고 있어 무섭다. 엉망을 뜻하는 아수라장은 여기서 유래했다. 가루라는 사람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한 형상이거나 새의 모양으로 표현했다. 긴나라는 짐승인지, 또는 새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거나, 말머리에 사람 몸인 경우도 있는 등 일정하지 않다. 마후라가는 주먹을 쥐어 가슴 앞에 대고 춤을 추는 듯하면서 뱀이 있는 관을 쓰고 노래하는 형상으로 이들은 부도에도 법당의 탱화로도 그려진다.
부도는 죽음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을 아니라 곧 시작이다. 부처가 살아 있을 때 그의 말이 지금처럼 세계적인 종교로 믿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람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고 나서야 비로소 바른 평가를 얻을 수 있고 또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곡사 동부도,아래는 북부도
김천 갈항사 삼층석탑-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