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전 어느날
김광한
세월을 많이 한 사람들일 수록 세상의 기록이 많아 진다. 그 기록은 기억과 추억으로 나뉘어 지는데 대체로 기억이란 나쁜 쪽에 많고 추억은 좋은 것들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것은 또한 많은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단테와 베아트리제의 만남은 신곡(神曲)을 낳았고 괴테와 샐롯테와의 정신적 만남은 젊은 벨텔의 슬픔이란 작품을 만들었다.오래 산 사람들 가운데 추억이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보다 더 알차게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추억은 뿌리깊은 아련한 마음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있기 때문이다.
1966년 그해 여름, 나는 경기도 양주군 퇴계원에 소재한 모 자동차 부대에서 사병계(士兵係)를 보고 있었다.상병(上兵)시절이었다.그때 한창 월남전이 불붙어서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군 부대가 참전을 하기로 했었던 시기이다.어느날 내 조수로 나보다 10살이나 위인 윤이병이라는 경상도 금릉군(지금 김천)출신의 신병이 들어왔다.그런데 내가 속한 부대가 월남 차출을 명받았다.군수지원부대중 하나로 일개 자동차 대대를 창설해서 파병하는 것이라 제대를 일년정도 앞둔 나로서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되었다.그것이 십자성 부대였다.당연히 주특기 특성상 윤이병이 차출이 되었고 윤이병은 나의 조수였다.그런 윤이병은 밤새도록 내 옆에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자면서 속으로 흐느껴 울었다.가끔씩 그의 잠꼬대가 들려왔다.
"여보 당신 나 없어도 살수 있겠어? 아이들 잘 키워줘.재혼하지 말고 살아서 올께"
이미 그는 고향에 결혼한 처자식이 있었고,처자로 인해 군대 에서 탈영 하면서 생업인 고추장사를 하다가 어느날 살그머니 대구 시내 나갔다가 그만 헌병의 불심검문에 걸려 헌병대 영창에 갔다 나와 억지로 재입대한 노병(老兵)이었기에 그의 울음을 듣는 내 마음도 여간 편치가 않았다.
그때는 베트남에 가기만 하면 모두 죽는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실제 전사한 유해가 정의와 구국의 용사란 이름으로 속속 김포공항으로 화장돼 운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이튿날 밤새도록 고민끝에 나는 중대장에게 윤이병을 빼고 나를 넣어달라고 했다.물론 일종의 영웅심과 객기가 있었고 약간의 윤이병의 처지를 동정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중대장은 나를 보더니 제대할 날도 얼마남지 않았고 또 "거기 가면 죽어"하면서 극구 만류를 했다.서울 출신의 대학물을 먹은 내가 미래가 불확실한 그곳에 가기에 인물이 아깝다고 생각한 것같다.내 주장을 계속 굽히지 않자 중대장은 후회하지 말라고 하며 나를 파월 명단에 넣고 대신 윤이병을 빼주었다.그후 윤이병은 부대에서 나를 보면 슬슬 피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생각때문인 것같았다.그 며칠후 우리는 경기도 마석에서 파월부대 창설을 마치고 화천의 오옴리라는 곳에서 6주간 고된 훈련을 마치고 십자성부대 일진으로 백마부대와 함께 부산 삼부두에서 미국 상선을 타고 월남으로 떠났다.지금은 비행기로 다섯시간이면 갈곳을 일주일이 걸렸다.그곳 이야기를 하면 길어 생략한다.일년반 동안 나트랑 캄란 퀴논 투이호아란 곳에서 지내다가 귀국해서 복교를 했고 중앙대에서 69년도에 졸업을 했다.남들보다 군대 생활을 1년정도 더한셈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90년도 여름 어느날 우리 회사의 거래처 되는 분의 모친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경기도 부천의 심곡동이란 데를 갔는데 상주(喪主)인듯한 어떤 낯모를 60중반쯤되는 노인이 나를 유심히 눈길을 집중했다.그러다가 말문을 열었다. 혹시 퇴계원 부대에 계시던 김상병님이 아니냐고 했다.한참 생각하다가 그렇다고 하니까 이 노인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큰 절을 올리려 두손을 번쩍 드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그 손을 잡고 그러시지 말라고 만류했다.그가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때 탈영병 윤이병입니다, 기억하실런지 모르지만 김상병님은 제 은인이십니다"
하는 것이다.그는 만기 제대를 하고 개인택시를 지금까지 몰고 있다고했다.참으로 기묘한 인연이었다.살아가면서 여러번 삶의 애환을 겪고 보니 그 윤이병의 그후 이야기를 잊게 되었다.그는 내 삶의 한 페이지에 잠깐 나왔다가 들어간 사람이었지만 그의 나에 대한 생각은 평생을 부담과 짐으로 안고 지냈던 것같다. 오히려내가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당시 나는 젊은이들이 흔히 갖는 객기가 그를 아끼는 마음보다 더 컸는데 평생 짐을 안고 살아왔다니 죄송할뿐이다.,그 윤이병 아직 살았으면 80 중반의 상노인이 됐을 것이다.나도 어느듯 칠순이 중반을 지나고 있다. 아 세월은 이렇게 빠르단 말인가? 살아가면서 내 능력이 미침이 되는 선에서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주면 그 손의 따뜻함이 상대에게 평생을 가는 경우가 있고 모질게 대한 사소한 언행은 상대로 하여금 평생동안 앙금과 상처로 남을 수가 있다.겸손하라.그대가 뭐가 잘났는가? 동시대에 태어나 한번쯤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인연이고 인연을 중히 여기는 것은 신의 선물인 것이다.
첫댓글
선생님은
참 멋진 사나이!
이십니다!
정말 멋진 싸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