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문학의 만남 원문보기 글쓴이: 글길
*
『세설신어』는 후한(後漢) 말에서 동진(東晉) 말까지 약 200년간 실존했던 제왕과 고관 귀족을 비롯하여 문인ㆍ학자ㆍ현자ㆍ스님ㆍ부녀자 등 70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독특한 언행과 일화 1,130조를, 「덕행(德行)」편부터 「구극(仇隙)」편까지 36편에 주제별로 수록해 놓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내용은 상당히 방대하여 당시의 문학ㆍ예술ㆍ정치ㆍ학술ㆍ사상ㆍ역사ㆍ사회상ㆍ인생관 등 인간생활의 전반적인 면모를 담고 있다. 따라서 중국 중고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필독서이다.
우선 문학예술의 측면에서 『세설신어』는 그 자체로도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훌륭한 산문작품이다.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과 같은 수사학적인 유미주의가 극성하던 당시의 문학 풍토에서 이처럼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은 한 줄기 청신한 바람이었다. 인물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언어는 고도의 간결미와 함축미를 지니고 있어서 위진 시대 언어예술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세설신어』에는 문학적으로 다듬어진 수많은 고사성어가 산재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도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등용문(登龍門)'ㆍ'난형난제(難兄難弟)'ㆍ'점입가경(漸入佳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세설신어』는 중국 고전소설사상 '지인소설(志人小說)'1)이라는 독특한 유파를 정립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모방작들을 만들어 내면서 이른바 '세설체(世說體)' 필기소설의 비조로 존중받고 있다.
학술사상의 측면에서 『세설신어』는 위진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사조인 현학(玄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현학은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철리를 논하는 학문으로 주로 청담(淸談)의 형태로 표현되었는데, 청담의 주된 내용은 『역경』ㆍ『노자』ㆍ『장자』의 이른바 '삼현(三玄)'을 기본대상으로 하고 여기에 불학(佛學)과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성행했던 인물품평이 더해졌다.
『세설신어』에는 하안(何晏)ㆍ왕필(王弼)과 같은 청담 대가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청담의 다양한 주제와 방법 등이 집약되어 있어서 청담의 보고라는 명성을 얻고 있으며, 인물품평을 통해 드러난 수준 높은 사유 활동의 면면은 중국미학사상 한 장을 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당시의 문사들은 현학과 청담에 능해야만 비로소 명사로서 행세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려면 청담 논변과 현학적인 언어 응대가 집약되어 있는 『세설신어』와 같은 책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세설신어』는 '명사들의 교과서'가 되었던 것이다.
사학의 측면에서 『세설신어』는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기록인 만큼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 당나라 때에 정사인 『진서(晉書)』의 열전을 편찬할 때 『세설신어』의 기록을 토대로 삼았던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또한 영가(永嘉)의 난2)을 비롯하여 왕돈(王敦)ㆍ소준(蘇峻)ㆍ환현(桓玄)의 난 등 진대에 발생했던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밖에 수많은 위정자들의 통치행위와 문벌적인 지배 계층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 도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풍수ㆍ미신ㆍ점술 사상과 오석산(五石散)이라는 일종의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하던 지식인들의 풍습 및 결혼에 대한 풍속 등이 반영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회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몹시 혼란했던 시대를 살았던 당시 지식인들의 다양한 처세태도나 인생관도 접해볼 수 있다.
『세설신어』는 문헌학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이다. 양(梁)나라의 유효표(劉孝標)가 주(註)를 달 때 4백여 종에 달하는 서적을 인용했으나 오늘날 그 대부분이 없어지고 『세설신어주』를 통해서만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유효표의 『세설신어주』는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이선(李善)의 『문선주(文選注)』와 함께 역대 중국의 4대 명주(名注)로 손꼽힌다.
『세설신어』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사실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처음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최치원(崔致遠)이 그의 시에 『세설신어』의 이야기를 전고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미 통일신라 시대에 전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 시대 이규보를 비롯한 여러 문인ㆍ학자들이 즐겨 애독하고 그들의 시문에 폭넓게 수용한 예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풍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국내의 한문학 연구에도 매우 유용한 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진다.
고개지(顧愷之)는 사람의 초상을 그리면서 간혹 몇 년 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고장강이 말했다.
"자태의 미추(美醜)는 본래 그림의 오묘한 점과는 무관하니, 정신을 전하여 진영(眞影)을 그려내는 것[傳神寫照]은 바로 이것 속에 있지요."
-「교예(巧藝)」편
위의 이야기는 중국 화론(畵論)의 근간이 되는 '전신론(傳神論)'의 근거이다. '전신사조(傳神寫照)'는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대상의 본질까지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생동감 넘친다는 뜻으로, 문학작품의 묘사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중국의 고전 텍스트 중에서 이 '전신'의 필요성이 가장 크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세설신어』이다. 그 이유는 『세설신어』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 인물에 대한 묘사와 품평이기 때문이다.
『세설신어』는 전체가 모두 인물품평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물품평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다. 즉 전체 1,130조의 이야기를 36가지의 키워드로 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품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 인물품평은 당시 유행하던 청담의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로서, 종종 인물의 일생을 좌우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대했다.
『세설신어』에는 인물품평에 관한 다양한 유형과 방법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 품평어는 고도로 함축된 언어예술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품평의 실제방법은 품평자가 대상인물의 본성ㆍ재능ㆍ식견 등 제반 특성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품평하는 경우, 대상인물의 특성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비유하여 품평하는 경우,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대상인물에 대하여 그들의 언행ㆍ재능ㆍ품덕ㆍ위의(威儀)ㆍ진퇴 등을 통하여 서로의 우열과 고하를 비교하여 품평하는 경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세설신어』의 인물품평 특성은 청담이 풍미하던 당시의 시대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의 미학적 심미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미의식에 대한 촉진은 자연스럽게 섬세한 감수성을 발달시켰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음악ㆍ건축ㆍ회화ㆍ서법ㆍ문학론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각종 문화 교류 및 충돌을 통해 '역동적인 제2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로 평가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세설신어』는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그리 녹록한 책이 아니다. 그 짧은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는 철학적인 사고의 깊이와 숨가쁜 역사의 호흡을 비롯하여, 곳곳에 숨어 있는 비유와 암시, 유머와 기지, 조롱과 독설,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품평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등장인물 내면의 심리상태 등등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객이 악령(樂令: 樂廣)에게 "손가락은 [어떤 물체에 결코 진정으로] 이르지[닿지] 못한다"는 논제에 대해서 물었다. 악령은 더 이상 그 문구를 해석하지 않고 다만 주미(麈尾) 자루로 안석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르렀소?"
객이 말했다.
"이르렀습니다."
곧 이어 악령이 주미를 다시 들고 말했다.
"만약에 진정으로 이르렀다면 어떻게 떠날 수[떨어질 수] 있겠소?"
이에 객이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고 감복했다. 악령의 말이 간결하면서도 뜻이 잘 통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문학」편
'지부지론(旨不至論)'은 위진 시대에 유행하던 청담 논변 가운데 하나로 『장자(莊子)』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지부지'는 어떤 사람이 일정한 시간ㆍ장소ㆍ위치에서 생각하는 사물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물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풀이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전체적인 맥락에 근거하면, 손가락이 어떤 물체에 진정으로 닿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논한 것으로 보인다.4)
사안(謝安)이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잠시 후 사현(謝玄)이 회수(淮水)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 사안은 서찰을 다 보고 나서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바둑판을 향했다. 손님이 회수에서의 승패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조카 놈들이 적을 대파했다는군요."
사안은 안색이나 행동거지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아량」편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수에서의 승패'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회수에서의 승패'는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때 전진(前秦)과 벌인 '비수대전(淝水大戰)'을 말한다. 전진의 부견(苻堅)은 383년에 남쪽의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는데, 당시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謝安)은 동생 사석(謝石), 조카 사현 등을 앞세워 이에 맞서지만 그들은 숫자적으로 전진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배수(背水)의 진(陣)을 치고 필사의 각오로 싸운 동진군은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전쟁은 동진의 운명을 결정짓는 너무나도 중요한 한판 승부였다.5)
다음으로 사안의 침착한 언행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사씨 일족의 운명은 물론이고 동진 국가 전체의 흥망이 달려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안은 태연히 바둑을 두었으며, 손님이 전쟁의 승패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그저 남 얘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이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6)
하지만 사안은 그러한 기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당시 명사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였던 '지신(至愼)'의 사회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 '지신'은 어떤 일에 대한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호오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신중을 기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지신'의 태도는 위진의 사인들이 격렬한 왕권쟁탈의 와중에서 화를 피하고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처세방법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사안(謝安)은 당초 동산(東山)에 은거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중에 엄명이 자주 이르자 하는 수 없이 비로소 환온(桓溫)의 사마(司馬) 벼슬에 나아갔다. 그 때 어떤 사람이 환온에게 약초를 선물했는데, 그중에 원지(遠志)라는 약초가 있었다. 환온이 그것을 들어 사안에게 물었다.
"이 약초는 또한 소초(小草)라고도 하는데 어찌하여 한 물건에 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이오?"
사안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동석해 있던 학륭(郝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것은 매우 알기 쉬운 일입니다. 산 속에 있으면 원지가 되지만 세상에 나오면 소초가 되는 것이지요."
사안은 심히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이에 환온이 사안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학참군(郝參軍)의 대답은 악의는 없지만 매우 그럴 듯하구먼."
-「배조」편
이 이야기는 학륭이 '원지'와 '소초'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 약초를 빌려 사안의 출사(出仕)를 은유적으로 풍자한 것으로, 자칫하면 불미스런 악감이 생길 뻔한 상황에서 환공이 분위기를 해학적으로 이끌어 무마했다. 이처럼 해학은 자칫 독설에 빠지기 쉬운 풍자의 날카로움을 무마해 주고, 풍자는 자칫 농담으로 흐르기 쉬운 해학의 경박함을 막아준다. 이 밖에도 『세설신어』에는 명사들의 기지에 넘치는 언변과 방탄스런 행동에 배어 있는 냉소 등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위진인의 유머감각이 살아 숨쉬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평했다.
"하후현(夏侯玄)의 맑은 인품은 해와 달이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고, 이풍(李豊)의 흔들거리는 모습은 옥산(玉山)이 장차 무너지려는 것과 같다."
-「용지」편
이 이야기는 하후현의 인품과 이풍의 술 취한 모습을 자연물에 비유하여 묘사한 것으로, 그 비유의 대상 자체가 바로 그 인물의 특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술 취한 사람의 모습을 멋스럽게 표현하는 데 쓰이는 '옥산장붕(玉山將崩)'이라는 성어(成語)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왕람전(王藍田)은 성질이 급했다. 한 번은 계란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찔렀으나 잡히지 않자 버럭 화를 내며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계란이 땅에서 떼굴떼굴 굴러가면서 멈추지 않자 곧장 땅으로 뛰어 내려가 나막신의 굽으로 밟았으나 역시 밟히지 않았다. 왕람전은 극도로 화가 치밀어 다시 땅에 있는 계란을 주워 입에 넣고 이로 콱 깨문 뒤에 뱉었다.
-「분견」편
이 이야기는 왕람전의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를 그의 사소한 행동을 통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다소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계란을 '젓가락으로 찌르고' '신발로 밟고' '입으로 깨무는' 점층적인 묘사가 인물의 조급한 성격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왕융(王戎)은 좋은 오얏나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팔 때 다른 사람이 그 씨를 얻게 될까봐 걱정하여 항상 씨에 구멍을 뚫었다.
-「검색」편
이 이야기는 항상 씨에 구멍을 뚫었다는 뜻의 '항찬기핵(恒鑽其核)'이란 4글자로 왕융의 인색한 본성을 명쾌하게 묘사했다. 이처럼 『세설신어』는 대상인물을 묘사함에 있어서 단지 몇 글자만으로도 그 사람의 특성을 명쾌하게 드러내는 데 뛰어난 표현역량을 보이고 있다. 『세설신어』의 언어묘사는 이러한 간결하고 함축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성어와 경구로 정착된 것이 많다.
유담(劉惔)이 강관(江灌)을 평했다.
"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잘 한다."
-「상예」편
달변이나 능변(能辯)의 재주는 없지만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강도군을 유윤이 한 마디로 평가했다. "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잘 한다." 더 이상의 말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세설신어』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인물묘사 수법과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언어기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얕은 언사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세설신어』는 진정으로 맛있는 말과 멋있는 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우리의 사유수준을 한층 높여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윤기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참으로 적절하다 하겠다.
나는 산중의 『육조단경(六祖壇經)』에 견주어질 세속의 한 책이 바로 이 『세설신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하나 하나가 촌철살인의 붓끝에서 핀 꽃송이 같다. 문자 그대로 '소설(小說)'의 활화석(活化石) 같다. 무수한 책이 쏟아져 똥 무더기처럼 쌓이는 이 시대에, 짧은 이야기가 실린 긴 『세설신어』는 그 자체가 혹독한 꾸짖음이다. 글 팔아먹고 사는 자들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5세기 찰중의 죽비다. 내가 밤참 먹듯이 아껴 가면서 읽는 이 『세설신어』의 깊은 생각과 검박한 말 쓰임새가 우리 문학에 편입되었으면 참 좋겠다.
1. 『세설신어』와 같은 책이 나오게 된 시대배경은 무엇인가?
위진 시대에는 당시 유행하던 노장사상과 불학을 중심으로 한 현학(玄學)의 영향을 받아 정치와는 동떨어진 순수한 철학적 담론인 청담의 기풍이 일어났는데, 동한(東漢) 말에 성행했던 정치담론인 청의(淸議)의 정치적 성격에서는 벗어났으나 인물의 품격ㆍ기질ㆍ언행에 대한 품평은 오히려 더욱 성행하여 개인 명예의 성패가 종종 한 마디의 평어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따라서 인물의 품평이 집약된 서책의 필요성이 자연히 대두되었는데, 『세설신어』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나온 것이었다.
2. 『세설신어』의 주제별 분류 체재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다양한 인물고사를 36가지의 주제별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지만, 동일한 인물에 관한 고사가 여러 편에 흩어져 있어서 개인의 전체적인 면모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점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3. 『세설신어』 「문학」편의 '문학' 개념은 오늘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세설신어』가 창작될 당시의 '문학'이라는 개념은 오늘날과는 달리 사실상 학술과 문학의 통칭으로 쓰였다. 한(漢)나라 시대 말기 이래로 사람들의 사상성이 점차 해방됨에 따라 인물의 개성과 정감을 직접 표현한 문학이 갈수록 사람들의 중시를 받아 독립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른바 '문학자각'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문학」편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영향을 받아 학술과 문학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 104조 중에서 제65조까지는 학술에 관한 것이고 그 이후는 문학에 관한 것이다.
4. 우리나라에서 판각된 『세설신어』 판본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 때의 왕세정(王世貞)이 증보한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가 널리 유행하여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로 판각되었고, 『세설신어보』의 각 등장인물을 성씨별로 재편집하여 판각한 『세설신어성휘운분(世說新語姓彙韻分)』이 있다. 『세설신어성휘운분』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판본이다.
유의경,『세설신어』중에서.
*문학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