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은 올바르다.”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예수님의 심판이 올바른 까닭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지 행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 가지 증거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당신 활동입니다.
두 번째는 당신은 구세주로 가리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의 증거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예고한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세 가지 증거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사랑을 활동으로 이어받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증거를 살아갈 때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다져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에게로 건너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당신 생애 전체의 의미를 보여 주는 최고의 사랑이 죽음을 통해 증거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세 사람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눈먼 사람, 사마리아 여인, 라자로입니다. 이 세사람을 통해 죽음과 부활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바리사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이와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의 시력이 점점 나아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라는 분”이라고 하였다가, 다음에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죽음입니다. 은총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밝히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가능한 부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시는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에게 친히 신앙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신앙의 갈증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갈증이 이방인 여인의 갈증으로 이어졌고, 그 목마름은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절규하심으로 완성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던 라자로의 소생은 더 큰 증거를 내놓습니다. 여동생 마르타의 고백은 앞서 보였던 많은 이들보다 보다 커다란 믿음으로 비추어집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돌무덤 돌을 치우라 하셨을 때, 마르타는 냄새가 난다고 반대했습니다. 굳건한 믿음을 고백한 마르타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서 흔들리는 일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사순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평생의 과업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이 과업을 투쟁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을 키우고자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합니다. 이 투쟁은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를 묶어 놓고 괴롭히는 다른 많은 죽음에서, 곧 죄와 불행과 깨어진 관계들에서도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 신비 속에 잠겨 들어야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건너가는 길은 모든 사람을 이끌어 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고, 새롭게 살아난 이들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선포한 이들에게 주어진 기쁨의 해방이며, 성경 말씀을 통해 예고하신 분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약속이 새롭게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부활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시다’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