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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리얼리즘 시의 계보
이 글은 한국 리얼리즘 시의 계보를 작성하는 게 목적이다. 편집자의 청탁 주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청탁 의도를 한국 현대시 가운데서 지난 7, 80년대 시를 대상으로 해서 리얼리즘시의 계보를 작성해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막연히 한국 리얼리즘 시의 계보라고 했을 때 우선 부딪치는 문제가 리얼리즘의 개념을 어떻게 확정지을 것인가 하는 개념 확정의 문제가 생기고, 다음으로 리얼리즘 시의 기점을 어느 시대 누구의 어떤 작품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문제는 사실 많은 준비가 필요한 작업으로 내가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우선 준비도 안 돼 있고 공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계보를 세우는 일은 일종의 문학사를 서술하는 일과도 같다. 이 경우 필연적으로 선택과 배제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선택과 배제에는 물론 글쓰는 이의 문학관이나 미학관이 투영되기 마련이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인 안목으로 글을 구성해 내느냐가 관건이 된다. 풍부한 자료와 선학들의 연구업적과 논평이 필요한 작업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리얼리즘의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7, 80년대 리얼리즘 시 이전의, 가령 리얼리즘 문학이 활성화 됐던 조선 후기 실학파들의 시문학과 192,30년대 카프문학, 그리고 1945-48년 소위 해방공간의 리얼리즘 시를 간단히 살펴보고 본격적인 7, 80년대 리얼리즘 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럼 과연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리얼리즘의 개념을 정의하고자 하면 가장 먼저 부딪치게 되는 것이 리얼리즘개념의 포괄성이다. 흔히 리얼리즘논의에서 회자되는 "나는 리얼리즘이라는 단어의 정의 속에 빠져 허덕이고 싶지 않다", "리얼리즘이란 악명 높을 정도로 간교한 개념" 혹은 "리얼리즘이란 다양한 뱃짐을 운반할 수 있고 보다 우아한 용도로 개량할 수 있는 포용력이 큰 선박인 것이다."라는 말들은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한마디로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함축성과 모호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리얼리즘론의 토착화를 시도한 70년대 리얼리즘논의에 중요한 역할을 한 평론가 염무웅도 이와 관련하여 "리얼리즘이 범세계적인 문학논쟁의 중심적 위치에 놓이게 된 까닭 중의 하나는 이처럼 이 말의 개념이 정착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사용법이 지극히 다양하다는 데서 찾아질 수 있으며" "일정한 정체를 밝혀내어 고정시켜 점유해 버릴 수 있는 물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개념"이요 "발전해 나가는 개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렇듯 광범위하고 유동적인 리얼리즘개념을 다소 도식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정의를 해보면 "전통적인 영웅적, 낭만적 내지는 전설적 소재와 반대되는 평범하고 당대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이" 그려진 것이라는 소박한 정의에서부터 "인간의 삶과 사회현실을 주관적·추상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형상화하는 아이디얼리즘에 대립하여 객관적 현실을 구체적 형상화를 통해, 환언하면 현상을 통해 본질을 드러내고 본질로써 현상을 개괄하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인식하고 형상화하고자하는 인식태도이며 창작방법"이기도 하다는 견해도 있다. 나아가 리얼리즘은 "객관적 현실을 정적이 아니라 동적으로, 부분적 파편적이 아니라 인간 삶과 사회현실의 제 관련 속에서, 말하자면 전체성에서 인식하고 형상화하고자 하는 인식태도이며 창작방법"이라는 온건한 견해에서부터 "리얼리즘론은 현실문제의 현실적 극복을 위한 예술의 역할, 계급투쟁에서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이며, 예술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폭넓은 해명"이며 또한 "특정한 (가변적) 기준을 만들어 내어 부단히 가치평가를 한다는 점에서 규범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 규범들은 지배관계의 맹목적 산물이 아니라 지배관계의 해체를 이룩한다는 전제로부터 일정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개념이라는 현실변혁에 대한 견해까지를 동시에 드러낸 입장도 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리얼리즘이란 결국 당대의 일상적인 현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 현실적 삶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해, 더 나아가 역사발전법칙에 대한 내재적 논리를 부여하고 현실변혁과 계급타파를 완성하는 하나의 문예이론이라 할 수 있다.
리얼리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독자를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보자. 앞서 이야기한 리얼리즘은 부르주아 리얼리즘 혹은 비판적 리얼리즘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문예사조의 흐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게 대두한다.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가들에게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현실에 대한 진지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구체적인 재현의 요구와 사회주의 정신 하에서 노동자의 이데올로기적 변신과 교육에 기여하는" 문학이념으로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정의되었다.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네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이른바 '대중성'(narodnost) '전형성'(tipichnost) '이상주의'(ideinost) '당성'(partiinest)"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예술작품 속에서 '사회주의 당성'이 어떻게 리얼리즘이라는 표현형식으로 옮겨질 수 있는가에 있으며,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구체적 조건들이 표현될 때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적 본질로서의 인간의 단순한 관념적인 자기해방이 아니라 현실적 자기해방이며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현실적인 투쟁방법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미학적 도덕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명석하고 애매하지 않은 미의 기준을 제공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계급의 적으로부터, 한편으로는 관료제와 둔감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사회악에 대한 증오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악들은 '자본주의가 잔존하는 것'이며 정체를 밝혀 처벌되어야"하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든 원저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역사의 발전이해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또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러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공산당의 역할이다. 당파성의 원리를 통하여 사실상 예술가들은 당의 지혜를 인정하고, 당의 정책에 충성할 것을 명하는 당의 권리를 승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의 실제적인 존재유무와 상관없이 당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중요한 언급을 하나만 살펴보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자유로운 문학일 것이다. 왜냐하면 탐욕이나 출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과 근로인민에의 공감(Sympathy)은 그 성원들에게 새로운 힘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문학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몇몇 배부른 여주인공이나 비만증으로 고생하는 '만 명의 상류계층'(upper ten thousand)이 아니라 나라의 꽃이고 힘이며 미래인 수백만 수천만 근로인민에게 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과 살아있는 작업으로써 인류의 혁명사상의 결론을 풍부하게 하고 과거의 경험(원시적이고 공상적인 형태로부터의 사회주의 발전의 완성인 과학적 사회주의)과 현재의 경험(노동자동지들의 현재의 투쟁)사이의 영원한 상호작용을 야기 시키는 자유로운 문학일 것이다.
인용문에서 명료하게 드러나듯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발전과정을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으로 그려내고 형상화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노동자를 사회주의정신으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켜야하는 혁명적 과제를 떠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나치게 예술이론을 교조화 하거나 또는 리얼리즘이론의 다양한 폭을 고정화시킨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언급할 때 언제나 동반되는 것이 비판적 리얼리즘이다. 80년대 후반, 국내 문단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관계설정을 놓고 논란을 빚은 바 있는 비판적 리얼리즘은 고리끼가 만들어낸 용어로 주로 19세기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사실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합리적 현실인식을 강화시키는 방법론이다.
엥겔스의 '전형적 상황에서의 전형적 인물의 진실한 재현'이라는 리얼리즘 명제를 계승한 비판적 리얼리즘이 발생해서 발전하게 된 역사적 조건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상징되는 근대사회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산업혁명은 그 자체로는 생산력의 급속한 신장을 의미하지만 분업체계를 전체 사회에 파급시키고 대규모 공장을 가능하게 했으며 공장주위에 도시를 형성하게 한 점에서 여러가지 사회변화의 진원이었다. 또 프랑스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개혁하는 일을 지향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두 혁명을 중심으로 일대변혁을 이룬 근대사회는 사회구성이나 사람들의 신분 역할 관계 등이 상대적으로 명확했던 봉건제 사회와는 달리 사람들의 관계가 한층 다양해지고 다변화됐다.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한 상품의 거대한 움직임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사회는 사람들의 관계가 그 물질운동의 이면에 숨겨짐으로써 사회관계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는 이제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미약하고 고립된 존재가 되었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현상 속에서 소외된 개인과 사회현실의 변증법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문학예술의 방법으로 채택한 현실인식과 형상화의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리얼리즘의 특성을 고리끼는 합리주의와 비판주의, 반봉건적 태도와 반자본주의적 태도, 역사주의적 원칙이란 세 가지로 요약했다. 그러면서 고리끼는 비판적 리얼리즘이 기술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부르주아계급의 발전과 와해를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사상이 인도주의에 머물렀고 새로운 사회의 지평을 열어줄 노동자계급을 정확히 그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파악했다.
또한 일본학자 伊東勉에 따르면 비판적 리얼리즘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브르조아지는 지금까지 솔직한 외경으로 보아왔던 모든 활동으로부터 배경을 빼앗았다. 의사 법률가 승려 시인 과학자 등을 브르조아지로부터 급료를 받는 임금노동자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확실히 예술가를 포함한 인텔리켄챠는 브르조아지의 지배체제에 봉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인텔리켄챠는 부르조아 사회의 잔혹과 부패에 분개를 품고 그것을 비판한다. 이렇게 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예술가가 비판적 리얼리스트이다.
또 다른 일본의 평론가인 촌상가륭(村上嘉隆)은 비판적 리얼리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① 비판적 리얼리즘은 부르조아사회의 결점을 비판하는 리얼리즘이다.
② 그것은 지적으로 뛰어난 개인의 판단에 의해 진행된다.
③ 그 개인은 부르조아사회로부터 필요없는 자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④ 그러나 비판적 리얼리즘에 의한 비판은 개인적인 비판으로 그치는 것이며 현재 사회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지향하지는 못한다.
⑤ 비판적 리얼리즘은 사회적 투쟁에 참여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따라서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이라는 개인이 도대체 어떤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면 좋은가 하는 문제에 답하지 못하며, 생활에 목적을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⑥ 그 결과 비판적 리얼리즘은 악을 부정할 뿐 무엇을 바람직한 것으로 긍정해야 하는가 하는 분명한 출구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상의 논의들을 볼 때 비판적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대비됨으로써 보다 뚜렷한 특징을 드러낸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폭로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사실묘사를 위주로 하는 자연주의보다 한 걸음 전진한 게 사실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사회주의적 인간상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데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보다 한 단계 뒤쳐진 논리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비판적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운동의 체험 및 전망과 결합되지 못한 단계의 리얼리즘"인 셈이다.(이상 리얼리즘 논의에 대해서는 김용락 『민족문학논쟁사연구』실천문학사, 1997 참조)
이 글에서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1920, 30년대와 해방공간의 리얼리즘 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지향성이 강하고 반면 1970, 80년대 리얼리즘 시는 비판적 리얼리즘 지향성이 강하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다.
리얼리즘의 개념을 앞의 논의로 일단 정리한다고 할 때 그럼 한국문학에서 리얼리즘 시는 언제부터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하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멀리는 임진왜란(1592)을 겪은 16∼17세기 초의 중세 봉건적 세계관에 반대한 일군의 시인(문인)들인 신흠, 이수광, 허균 등의 국풍 음시설(國風淫詩說)비판이나, 조금 후대로 내려 와 연암 박지원, 박제가의 조선풍(朝鮮風), 조선시(朝鮮詩) 옹호, 그리고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파들이 보여준 '비판의 언어' 등은 모두 당대의 봉건적 지배질서에 반대하면서 국적 있는 조선문학, 지배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의 문학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적 업적으로 존중할 만하다.
가령 다산 정약용의 시 애절양을 보자.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縣門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예부터 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갓난 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범같은 문지기가 버티고 있어/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 갔네//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잠실궁형 이 도한 지나친 형벌이고/ 땅 자식 거세함도 가엾은 일이거든//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이치/하늘 당 어울려서 아들 되고 딸 되는 것//말 돼지 거세함도 가엿다 이르는데/하물며 뒤를 잇는 삶에 있어서랴//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한알 살, 한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한고/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읊노라(송재소 번역)
-정약용 <애절양> 전문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학정 때문에 소도 빼앗기고 마침내 아이 낳은 죄를 자탄하며 자신의 성기를 절단한 남편을 보고 울부짖는 아낙의 절규를 처절하게 그린 이 시는 조선시대 리얼리즘 시의 백미이다. 이 외에도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닭 창자같은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적성촌을 지나며>)로 상징되는 민중들의 가난한 삶의 실상을 그린 다산의 시들은 현대의 리얼리즘론으로 비춰봐도 충분히 리얼리즘적이다. 어쩌면 한국 리얼리즘 시의 가장 첫 머리에 놓아야 할 작품이 아닐까 여겨진다.
근·현대에 와서 1920, 30년대 식민지시대 문학운동의 구심체였던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1925-35)문학, 해방공간의 조선문학건설본부(45.8.16)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45.9.17)중심의 진보적 문학운동과 이 과정에서 생산된 시 역시 리얼리즘 시 계보의 앞 머리에 갖다 놓아도 이견이 없을 정도이다.
이 시기 리얼리즘 시 몇 편을 읽어보자. 먼저 카프시기의 시를 보면
아, 그들의 흘리는 땀방울이/세상을 만들고 다시는 움직인다./가지런히 뛰는 네 가슴속을 듣고 들으면/그들의 헐떡이던 거룩한 숨결을 네가 찾으리라.//땀 찬 이마와 맥풀린 눈으로/괴로운 몸 움막집에 쉬러 오는 때다./사람아 마음의 입을 열어 그들을 기리자./하느님 무덤 속에서 살아옴에다 어찌 견주랴.//거룩한 저녁 꺼지려는 이 동안에 나 혼자 울면서 노래 부른다./사람이 세상의 하느님을 알고 섬기게스리 나는 노래 부른다
- 이상화 <저무는 노을 안에서-勞人의 劬苦를 읊조림> 부분
덜컥 덜컥 덜컥/공장의 기계가 돌아갑니다/무수한 직공의 피묻은 기계가/소리를 지르며 돌아갑니다//덜컥거리는 기계소리/그것은 가련한 일군의 울음소리입니다/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그것은 그들의 한숨의 모임입니다//비오는 어느날, 공장의 창문이 열리면서/핏기없는 얼굴 하나이 가냘픈 손으로 턱을 고이고/지나가는 비단옷 입은 행인을 내여다보다가/창안에 호령소리, 그의 얼굴은 사라집데다//지금의 공장은 그렇게 고생이라니/언제나 웃음소리 그곳에서 새여나오리까/“사람은 일해야 마땅하고, 일하면 반드시 먹는다”고/이웃집 선생님은 가르칩데다
-박팔양 <공장>(1926) 전문
굴뚝도 없는 공장/밤낮 문이 닫혀있는 공장/공장이랄까.....여보세요 말이 안 나요/아침이면 여섯시 밤이면 아홉시/들고날 때 쳐다보면 별과 달밖에/해라고는 보지도 못하였지요//이 공장은 털구덩이/노루털 개털 사슴털 토끼털을 조각 뜨는/산골의 털공장입니다/우리들의 몸에선 짐승내가 나고/얼굴은 황달이 들었습니다/여보세요 당신들은 산골의 이 공장은/일도 안 하는 줄 아시지요/그러나 우리들은 벌써 칠 년째나 다녔습니다/칠 년째.....에 얽혀 다녔습니다/장마 때는 무르팍까지 다리를 걷고/공장에를 다녔지만/아는 이란 없을 겁니다
-박세영 <산골의 공장-어떤 여공의 고백> 부분
이 밖에도 리얼리즘시의 계보에 줄을 세울만한 시인들이 많다. <현해탄>을 비롯한 초기 임화의 작품들, <농군행진곡>의 박아지, <정지한 기계>의 권환, <港口>의 이용악, <首府>의 오장환의 시들은 이 시기 리얼리즘 시의 절창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카프를 중심으로 생산되던 리얼리즘 시들은 1935년 카프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되면서 잠시 휴지기에 들어갔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다시 분출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문학건설본부(45.8.16),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45.9.17)을 중심으로 한 활동들이다. 이 시기에는 소위‘전위파시인'으로 불린 김상훈, 유진오, 이병철, 김광현, 박산운과 상민 등은 전위적 리얼리즘 시를 비롯 많은 시들이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리얼리즘 시를 몇 편 보자.
땟국에 절은 헤어진 부루스와/뒷축 물러난 고무신으로/나는 지금 삶의 물결을 뚫고/걸음 바삐 공장으로 간다//자가용 자동차에 실려/미끄러지듯 3달아나는 기름진 신사에겐/나는 아예 뜨이지두 않을 게다/누런 여우털에 쌓여 냄새 풍기며/고운 맵시 보이려 나온 계집은/낯살 찌푸리며 길을 비킨다/값진 비단옷이 더럽다는구나
-상민 <여직공> 부분
드높은 洋館을 걷어차고/가난뱅이의 살림에 한숨을 담어가는/ 아 나는 네가 부럽다//잠든 듯 고용히 아기의 빰을 어루만지다가도/단비를 몰아와 메마른 밭고랑에물을 뿌리다가도/성나면 번덕이는 칼날이 고목가지를 부러뜨려/우레 번개 아래 親日派 가슴 조리고/동족의 피를 빨든 도적의 떼 주문을 외우게 하는/만년을 두고도 한결같은 젊은 바람아/내 창백한 눈물과 친숙한 버릇을 버리고/함부러 내달아 부대치는/바람아 너의 마음이 되지 못하느냐/아츰저녁 까마득히 바라보는/붉은 기빨을 하늘 높이 날려주는/구름 모서리 헤치고 태양이 여기 있다고 일러주는/새새끼떼 날려 태산을 넘기고/불우한 겨레의 피묻은 함성을 전해주는/바람은 낡은 역사책의 냄새나는 페-지를 넘긴다
-김상훈 <바람> 부분
곡식이 익어도 익어도 쓸데없는 땅/모든 人民이 등을 대고 돌아선 땅//물줄기 도리혀/우리들 입술 찾어 흐르기도 하고/흘러도 그러하나/벌써 모래 가득찬 아가리/황토에 널리기도 한 땅-//다못 아는 것은 땅은 영원히/우리들의 것이기/숲을 찾는 바람같이 달려갈 歷史이기/백번 천번 어미네 품속같은 흙/갈어 갈어 창끝 번득이듯/보삽 어루만지는/손가락 매듭만이 굵어진 것을//황소 소 너는/언제까지 어질기만 하랴느냐
-설정식 <태양없는 땅> 부분
이 밖에 토지개혁을 다룬 <그날의 할아버지>의 백인준, <추풍령>의 박산운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이후 남한 문단은 반공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통제 아래 놓이게 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50년대 시가 주로 실존이나 난해한 모더니즘으로 흐른 것 이런 사회 정치적인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흔히 50년대 문학은 6.25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냉전구도의 확립으로, 이후 한반도 전역에 끼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적 영향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6.25가 한국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고은은 "6.25문학이야말로 한국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인 진단이 될 수 있으며 6.25가 문학적으로 제 2의 개화기 였"다고 공언하고 "6.25 이전까지의 문학은 이른바 城隍堂文學"으로 이는 문학적 주변성 문학적 후진성에 다름 아니다는 주장으로 6.25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에 주목했다.(고은『1950년대』청하,1989)
김윤식은 6.25의 문학적 고찰을 논하는 자리에서 다음 세 가지 항목을 그 영향으로 들었다. 첫째는 남한만 해도 220만 명이 넘은 귀환동포로 상징되는 민족의 재편성과 맞닿아 있는 '民族語의 재편성', 둘째는 휴머니즘 회복과 죽음과 살육이 공적으로 승인된 현장성의 전쟁문학의 등장, 셋째는 동족살육의 비극이 환기시키는 깊은 죄의식의 각인이 바로 그것이다.(김윤식『한국현대문학사』일지사, 1976) 일반적으로 이러한 영향들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은 50년대 문학을 실존주의문학, 휴머니즘문학 일색의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50년대에는 리얼리즘 시라고 부를 만한 뚜렷한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시인은 <목마와 숙녀>라는 센티멘탈한 시로 알려진 박인환과 <휴전선>의 박봉우 시인 정도이다. 박인환은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본가에게> <인도네시아 인민들에게 주는 시> <남풍> 등의 작품을 써서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리얼리즘 시를 남기기도 했다. 박봉우는 1956년에 당시로는 획기적이게 조선일보에 <휴전선>이라는 시를 발표해 분단현실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너희들의 마니페스토의 결함을 지적한다/그리고 모든 자본이 붕괴한 다음/태풍처럼 너희들을 휩쓸어 갈/위험성이/波長처럼 가까워진다는 것도//옛날 기사가 도주하였을 때/비행장에 궂은 비가 내리고/모두 목메어 부른 노래는/밤의 末路에 불과하였다//그러므로 자본가여/새삼스럽게 문명을 말하지 말라/정신과 함께 태양이 도시를 떠난 오늘/허물어진 인간의 광장에는/비둘기 떼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박인환 <자본가에게> 부분
그러다가 1960년 4. 19혁명이 일어나면서 문단에도 지형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혁명 직후에 발간된 4월 혁명 기념시집 『항쟁의 광장』『학생혁명시집』에는 혁명열기에 충만한 많은 시들이 실려 있다. 특히『학생혁명시집』에는 이름 없는 학생들의 리얼리즘 시가 많이 실려 있어 당시 시단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지만, 이후 5. 16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반공, 군부정권의 도래로 리얼리즘 시가 큰 줄기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1960년대 문학은 4.19혁명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9가 정치, 경제, 문화 등 한국사회의 전 분야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4.19는 애초 정당성을 잃고 독재체제로 치닫는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 민중운동으로서의 국민주권회복운동으로 출발했다. 이승만의 독재체제가 횡포를 부릴 때마다 야당 정치인들에 의한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의 반독재운동은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의 결성으로, 민주당의 창당으로(1955. 9. 18), 국민주권옹호투쟁회의 발족으로,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의 결성으로 이어졌으나 직접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4.19가 폭발한 직접적 동기는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이 저지른 파렴치한 선거부정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운동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주의운동이었다. 대한제국 시기부터 국민주권주의운동이 일어났으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중단되었고 식민통치 아래서는 그것이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8.15 공간'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더 높았다. 이승만 정권의 성립과정과 6.25전쟁 과정을 통해 이 요구는 다시한번 억눌렸다. 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이승만 정권의 변태적 독재체제 아래서 청년·학생층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다시 높아졌다.
미국의 경제원조 감소로 산업이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져서 전쟁 중의 독재체제 및 반공체제 강화에 눌려 있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성화 됐다. 그밖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마저 약화되어 4.19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 타도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186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는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국민학생·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완성된 4.19는 결국 "민주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의 이념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이며, 그것은 민족의 대다수 구성원인 민중이 참여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립적이며 정치적으로 자주적이며 문화적으로 독자적이며 도덕적으로 품위 있을 뿐 아니라 민족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이 4.19민주혁명의 근원적인"(김진균 『한국문학의 현단계』창비, 1984) 이념이라는 평가를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4.19도 그 이듬해 정치군부에 의한 5.16군사 쿠데타로 단명하게 끝나고 만다. 5.16은 4.19가 우리역사 위에 열어놓았던 여러가지 민주적 가능성을 봉쇄하고, 구체제를 지속시켰다는 의미에서 두고두고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 4월 혁명이 가장 중요하게 제기한 민족통일의 요구, 정치적 민주화의 요구, 사회개혁의 요구들을 일방적으로 탄압하면서 출발한 5.16 쿠데타는 개혁의 요구를 상부에서부터 해결, 아니 무력화하려는 '수동혁명'일지언정 4월 혁명의 연장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16은 이승만 정권 이상의 강력한 국가권력을 창출하여 반공정책을 강화하는가 하면 대외적으로도 더욱 굴욕적 자세를 취하는 등, 민주주의 세력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5.16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성장한 독점자본가들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고 점차 구자유당계 인사, 나아가 과거 친일 경력을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준 점에서, 단지 5. 16에서 근대화의 추진, 경제성장의 성취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일면적인 파악이 될 수 밖에 없다. 5.16쿠데타가 4월 혁명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은 근대화 정착을 추진하기 전에 이미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감지되었다.(박태순. 김동춘 『1960년대 사회운동』까치,1991)
5.16에 의해 탄생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구체제의 온존을 가능케 했을 뿐 아니라 지나친 대외 의존적, 수출 지향적 경제성장정책을 편 결과 60년대를 지나 70년대 중반에 이르면 사회전반에 그 모순적 영향력이 극대화되었다. 따라서 여러 사회문제를 야기 시켰고 우리사회에 본격적인 노동자 빈민문제를 대두시켰다.
4.19와 5.16이후의 1960년대의 중요한 정치·사회적인 사건을 보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62.1.13)하였고, 김종필-오히라의 메모합의로 청구권문제와 1963년 봄까지 한일문제에 타결할 것을 합의 했으며(11.12), 1963년에 들어와서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12.17), 1964년에는 야당 및 재야 각계 대표 200여명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3.6)했으며 이에 대응해 정부가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소위 '6.3 사태'가 일어났다. 이어 한국-월남 정부가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부대 파견에 관한 협정을 체결(10.13)했으며 역사학회와 문인 82명이 한일협정 비준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분지]의 작가 남정현이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7.19). 1960년에 정부는 경제성장율 연 7%를 기조로 하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공표(6.29)했으며, 삼성의 한국비료 사카린원료 밀수사건이 정치적인 쟁점으로 떠올라 재벌의 도덕성문제가 새삼 회자되었다. 1967년에 국내외 교수 및 예술가 등 315명이 포함된 '동백림' 사건이 터져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윤이상, 이응로 등이 불법체포, 강제송환되는 사건으로 인해 국제적 물의가 빚어지기도 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든가 예술은 토대를 반영하는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의 일반적인 명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60, 70년대의 이러한 상황은 60, 70년대 식의 리얼리즘문학을 낳기에 충분한 토양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60년대는 미완성으로 끝난 4.19의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광장'의식과 5.16쿠데타의 폐쇄적이고 반역사적인 '밀실'의식이 사회전반에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리얼리즘시는 이런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60년대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인은 신동엽과 김수영이다. 여러면에서 대조되는 이 두 시인은 60년대 현실을 민족적인 관점에서, 또는 모더니즘 관점에서 치열하게 성찰했다. 신동엽은 반외세적인 관점에서 <진달래 산천> <껍데기는 가라> 장시 <금강>을, 김수영은 혁명의 고독함을 노래한 <푸른 하늘을>을 비롯해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미농인찰지> <풀>을 비롯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신동문은 <내 노동으로>, 황명걸은 <한국의 아이>, 조태일은 <보리밥> <식칼론> 등을 발표하여 60년대 리얼리즘시단을 형성했다.
당시 쓰여진 시를 보면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면서 혁명을 노래했던 김수영은 소시민성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면서 일상성에 대한 추구를 이어가고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치면서 외세에 휘둘리는 민족현실을 직관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가로 놓여 있다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부분
이슬비 오는 날./종로5가 서시오판 옆에서/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는 郡像 속에서 죄 없이/크고 맑기만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그렇지./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그의 누나였을까./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신동엽 <종로5가> 부분
내 노동으로/오늘을 살자고/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머슴살이 하듯이/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돌이킬 수 없는/젊은날의 실수들은/다 무엇인가./그 여자의 입술을/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그 눈물을 달래던/내 어릿광대 표정은/다 무엇인가./이 야위고 흰/손가락은/다 무엇인가./제 맛도 모르면서/밤새워 마시는/이 술버릇은/다 무엇인가./그리고/친구여/모두가 모두/창백한 얼굴로 명동에/모이는 친구여/당신들을 만나는/쓸쓸한 이 습성은/다 무엇인가./절반을 더 살고도/절반을 다 못 깨친/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미련을 되씹는/이 어리석음은/다 무엇인가./내 노동으로/오늘을 살자/내 노동으로/오늘을 살자고/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신동문 <내 노동으로> 전문
건방지고 대창처럼 꼿꼿하던/푸른 수염도 말끔히 잘리우고/어리석게도 꺼멓게 익어버린 보리밥아/무엇이 그렇게도 언짢고 아니꼬와서/나를 닮은 얼굴을 하고/끼리끼리 붙어서/불만의 살갗을 그렇게도 예쁘게 비비냐/무릎을 꿇고 허리도 꺾어/하염없이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너는 너무도 엄숙해서/농담은 코끝에서 간지러움으로 피고/가슴 속엔 더운 북풍이 인다.
-조태일 <보리밥> 부분
실제로 70년대에 와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한 조태일의 경우도 60년대 말에 <보리밥>과 같은 시를 썼다. 이 시는 60년대 모더니즘, 난해시가 주류를 이뤘던 문단현실에서 매우 이례적인 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가난의 대명사에다가 촌스러운 보리밥이 시의 제재로 등장한 것 자체가 당시 민중의식의 성장이 문학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신동문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최초라 할 수 있을 만큼 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아마 딜레탕티즘으로 상징되던 명동에 창백한 모습으로 모여 어릿광대같은 표정을 짖는 생활을 청산하고 노동하면서 살자는 다짐으로 읽히는 이 시는 60년대 노동의식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시대상황과 문단현실은 70년대의 본격적인 리얼리즘시의 잉태를 예비한 풍부한 영양소를 가진 전 단계였다.
이후 70년대에 들어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를 신경림, 고은, 김지하, 문병란, 이시영, 정희성, 김명인, 김준태, 이동순, 하종오 등의 시에서 볼 수 있다. 70년대의 사회·정치적 상황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60년대부터 진행된 근대화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급격히 증대되고 특히 70년대에는 자본집중에 따른 경제규모의 확대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실질임금 상승은 같은 기간의 노동생산성의 증가율에 크게 못 미침으로써 소득분배의 불균형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둘째, 10월 유신 독재체제가 성립되면서 '보수대연합'이 해체되고 일종의 '시민대연합' 대두되면서 첨예화된 사회적 갈등은 유신독재 타도의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끝으로 1927년 7.4공동성명을 기점으로 분단극복과 제국주의적 지배관계의 해소를 위한 민중해방의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1970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이었던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많은 지식인 학생들에게 충격을 줘 이들로 하여금 민족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했고 문학인들도 냉엄한 민족현실에 눈을 뜨게 하였다.
이런 사회 역사적 현실이 70년대 리얼리즘시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70년대 리얼리즘시는 신경림과 김지하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지하는 담시 <오적>을 발표해 문단 뿐 아니라 사회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신경림 역시 민중의 애환을 그린 사실적으로 그린 시들을 창작과비평 등에 발표함으로써 70년대 리얼리즘시의 기틀을 닦는다. 여기에다 이전까지 유미주의 시를 쓰던 고은까지 가세함으로써 리얼리즘시가 문단의 대세를 형성하게 된다.
김지하는 판소리와 같은 민족적, 민중적 형식을 빌린 담시 <오적> 외에도 민중적 현실을 날카로운 정치적 입장에서 풍자 비판한 <서울길>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와 같은 시를 발표해 문단 안팍의 주목을 받았다.
신경림은 산업화과정에서 분해되어가는 농촌공동체의 소멸과 민중의 애환을 민요적 서정에 실어 형상화 했다. 고은은 60년대 낭만적 유미주의에서 벗어나 가파른 민족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고은은 <김경숙>같은 역사적 인물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해 이후 80년대 <만인보>의 기틀을 이 시기에 다지기도 했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족/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아장창/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예가 바로 재벌, 국회위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간땡이 부어 남산만 하고 목질기기 동탁배꼽 같은/천하흉폭 五賊의 소굴이렸다
-김지하 <오적>부분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중톳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끝발나던 금광시절 요리집 얘기 끝에/음담 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벌써 여니레째 비가 쏟아져/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잡업복과 뼈속까지 스미는 곰팡내/술이 얼근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국수내기 나이롱뻥을 치고는/비닐 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텅 빈 공사장엘 올라가 본다/물 구경 나온 아낙네들은 우릴 피해/녹슨 트럭터 뒤에 가 숨고/그 유월에 아들을 잃은 밥집 할머니가/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서형은 바람기 있는 여편네 걱정을 하고/박서방은 끝내 못 사준 딸년의/살이 비치는 그 양말 타령을 늘어 놓는다.
-신경림 <장마> 전문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우리 모두 숨끊고 활시위를 떠나자/몇 십 년 동안 가진 것/몇 십 년 동안 누린 것/몇 십 년 동안 쌓은 것/행복이라던가/뭣이라던가/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허공이 소리친다./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이윽고 과녁이 피뿜으며 쓰러질 때/단 한번/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돌아오지 말자/돌아오지 말자/오 화살 조국의 화살이여 전사여/영령이여
-고은 <화살> 전문
그해 여름 너에게 말했다/와이에이치 공장의 무더위 속에서/노동 위에는 아무것이 없다고/나는 너에게 외쳐댔다/거짓말이었다/노동 위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버티고 있다//그해 여름 마포에서 너는 죽었다/내가 죽였다/내가 죽였다/네 죽음은 감옥에서 거리에서 내 원칙이었다/너를 깡그리 잊을 수 없어서/울지 않으려고 술도 담배도 끊어 버렸다//그러나 오늘은 무엇인가/70년 전태일/79년 김경숙/과연 80년대는 무엇인가/너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토록 위선인가/차라리 너를 잊어야겟다/김경숙/너는 내 원칙이 아니라 원죄이구나/너를 깡그리 잊어야겠다/일제시대 평양노조 강주룡의 옥사여/그것까지도 잊어야겠다/아니다 아니다/김경숙/너를 가슴에 품고 일어서야겠다
-고은 <김경숙> 전문
이들 외에 문병란은 <함평물고구마> <직녀에게>를 김준태는 <참깨를 털면서>와 같은 시를 써서 대지의 생명력, 분단문제 등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기 시작했다. 이시영은 <정님이> <후꾸도>같은 서사가 있는 이야기시로 민중현실을 노래했고, 정희성은 <불망기>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통해 군사 독재정권의 가파른 정치현실에 대해 비판했으며, 이동순은 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상실한 수몰민의 애환을 노래한 <물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리얼리즘시의 두께를 넓혔다. 김명인은 <동두천>과 <베트남>시를 통해 외세문제를, 하종오는 <청량리역전> 등을 발표해 도시빈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형상화 했다.
나는 땅이다/길게 누워 있는 빈 땅이다/누가 내 가슴을 갈아엎는가/누가 내 가슴에 말뚝을 박는가//아픔을 참으며/오늘도 나는 누워 있다./수많은 손들이 더듬고 파헤치고/내 수줍은 새벽의 나체 위에/가만히 쓰러지는 사람/농부의 때묻은 발바닥이/내 부끄런 가슴에 입을 맞춘다.//멋대로 사랑해버린 나의 육체/황토빛 욕망의 새벽 우으로/수줍은 안개의 잠옷이 내리고/연한 잠 속에서/나의 씨앗은 새순이 돋힌다.
-문병란 <땅의 연가> 부분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싯푸른 사과들/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어릴 적 우리 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 주며/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못줄을 잘 못잡았다고/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남의 잡 제삿밤에 단자를 갔다고/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 아침에도/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은 걷어와/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이시영 <후꾸도> 부분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일이 끝나 저물어/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나는 돌아갈 뿐이다/삽자루에 맞긴 한 생애가/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샛강바닥 썩은 물에/달이 뜨는구나/우리가 저와 같아서/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전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두고두고 포성에 뒤집히던 산천도 끝없이/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 3부인/남편은 출정중이고 전쟁은/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초등학교에까지 밀어닥쳐/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시션 박스/속에서도 가랑이 벌려 놓으면/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김명인 <베트남 Ⅰ> 부분
70년대 리얼리즘시의 풍부한 자양분을 이어받은 1980년대의 시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세 의존적이며 억압적이던 유신정권이 YH사건, 부마사태 등의 민중들의 저항과 일부 유신세력들의 하극상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소위 '10·26'으로 무너지고 80년 초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던 민주화의 열기가 사회 전 분야에서 타오르자 일군의 신군부들이 준동하였다. 정치권력에 욕심이 있던 정치군인들의 사주에 의해 일요일이던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생들에 대한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폭력에 의해 야기된 사태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으로까지 발전하는 최악의 결과를 빚었다. 당시 사망자 수가 189명이라고 7월 22일 최종보도 했으나 항간에는 민간인 사망자가 2천 명이고 부상자가 2만여 명이라는 소문이 떠돌 만큼 사태가 참혹했던 이 사태는 5월 27일 전남도청을 계엄군이 접수하면서 끝나고 곧이어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였다.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해방 이후의 분단된 조국에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된 자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맥락 위에서 파악해야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직되지 않은 민중의 자연발생적이고 고립 분산적인 봉기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확인과 아울러 "확고한 과학적 인식아래 대중 속에 뿌리박은 운동의 건설"(『한국민중사연구』풀빛, 1980)을 전 부문운동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정치·사회적 현실을 기반으로 문학이론 논쟁도 활발했는데 가령 시민적 민족문학론, 민중적 민족문학론, 노동해방문학론, 민족해방문학론이 '민족문학주체논쟁'이라는 이름으로 그 개념조차 확정되지 않은 입론들을 현란하게 제기하면서 논쟁을 했다. 이와 더불어 지역문학, 농민시, 노동시, 교육시, 여성시운동이라는 각 부문별 시 쓰기와 문학운동이 활발했는데, 이는 시인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부문운동의 문학화를 통해 전체 민중민족운동에 이바지하려던 일종의 문학운동적 전략이었고 이런 전략이 80년대 리얼리즘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80년대 리얼리즘시는 비판적리얼리즘과 사회주의리얼리즘 논쟁 속에서 발전해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성을 획득했지만 미학적 차원에서의 성과여부에 대해서는 유보중이다. 참고로 80년대 주류를 형성했던 민중문학의 특징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기층계급의 생활정서와 이들의 역사의식의 형상화 작업, 둘째 기층민중의 궁극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이란 통일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통일론에 대한 관심이 문학에서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셋째, 이 두 가지를 위해서는 당연히 당대주의적 반역사성을 띤 지배계층과 대립관계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80년대 민중문학의 형식상 특징은 재래식 문학양식으로서의 시 소설 평론 등의 서구적 분류에서 탈피한다는 점과 또다른 주요 특징으로는 문학성이나 이론만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문학이었다는 점이다. 즉 민중문학이란 운동개념으로 해석해야 되며 이 점은 곧 민중문학이 강력한 조직과 단체를 형성한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 오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도 끊임없이 자기 성장을 해온 민주 민중세력이 80년 초 소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던 민주화 열기로 살아나오자 신군부세력이 또 다시 준동하여 광주학살의 참극을 연출하였다. 문학 역시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70년대 내내 우리문학과 문화의 중심적인 토론의 장 역할을 해오던 문학계간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1970년 창간)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대화> 등이 강제 폐간되었다. 이들 잡지의 폐간은 어떤 의미에서 참된 우리 문학의 공백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 공백을 메우려는 여러가지 문학적 시도들이 80년대 문학 활동으로 이어져, 소위 말하는 무크운동, 동인지운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전교조 같은 조직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문학적 사회적 현실은 80년대 리얼리즘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반외세 통일지향의 김남주, 문익환, 반계급 노선의 박노해, 백무산, 정인화, 박영근, 교육운동시의 김종인, 배창환, 도종환, 김진경, 농민시에 고재종 ,이중기, 홍일선, 김용택, 여성문제에 대한 페미니즘 시인 고정희, 김경미 등이 리얼리즘시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 아울러 80년대 리얼리즘시는 비판적리얼리즘과 사회주의리얼리즘의 논쟁 속에서 발전해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성을 획득했지만 미학적 차원에서의 성과여부에 대해서는 유보중이다.
“조국은 하나다”/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남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조국은 하나다//이제 나는 쓰리라/사람들이 주고 받는 모든 언어 위에/조국은 하나다라고/탄생의 말 응아응아 위에도 쓰고/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 위에도 쓰리라/조국은 하나다라고/갓난아기가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엄마엄마 위에도 쓰고/어린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행동/아장아장 위에도 쓰리라/조국은 하나다라고//나는 또한 쓰리라/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조국은 하나다라고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부분
개똥같은 내일이야/꿈 아닌들 안 오리마는/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 한 듯한/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그러니 벗들이여!/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놓고/진주 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벗들이여!/이런 꿈은 어떻겠소?/155마일 휴전선을/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달아/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합장을 지내는 꿈,/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부분
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어린이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작업복을 입었다고/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공장장님 로얄살롱도/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한참 피를 흘린 후에/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기계 사이에 끼여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놓고/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차마 손만은 꺼내주질 못하였다
-박노해 <손 무덤> 부분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쓰일 데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살아있는 노동의 밥이//목숨보다 앞선 밥은 먹지 않으리/펄펄 살아오지 않는 밥도 먹지 않으리/생명이 없는 밥은 개나 주어라/밥을 분명히 보지 못하면/목숨도 분명히 보지 못한다//살아있는 밥을 먹으리라/목숨이 분명하면 밥도 분명하리라/밥이 분명하면 목숨도 분명하리라/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살아있는 노동의 밥을
-백무산 <노동의 밥> 전문
김남주는 <학살> <민중> <조국은 하나다>를 발표해 반외세 자주통일에 대한 열망과 광주학살의 참상을 정치적이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표출해 리얼리즘정치시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다. 문익환은 목사이면서 통일운동가로의 염원을 <꿈을 비는 마음>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통해 드러냈다.
박노해는 <지문을 부른다> <머리띠를 묶으며> 등을 발표해 열악한 80년대 노동현실을 폭로했고, 백무산은 <노동의 밥> <경찰은 공장 앞에서>와 같은 시를 써서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일깨웠다. 이들의 시는 80년대 사회주의리얼리즘 논쟁 속에 편입됨으로써 새로운 미학적 차원을 보여줄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고재종은 광주에 거주하면서 <빈들> <설음에 대하여> 등을 발표해 꾸준히 농민시와 서정시를 추구해왔고, 이중기는 <식민지 농민>을, 홍일선은 <보리를 밟으며> 등을 통해 이제는 거의 완전히 분해돼 전체 인구의 7%대로 떨어진 암울한 농촌현실을 구준히 환기시켰다.
초겨울 볕 여린 들에 선다/이제 그 가슴에 비울 것 다 비우고/저 홀로 은은한 들판에 선다/이 논 저 논의 짚벼눌만은 저리 단정한데/저기 용수배미 갈다 어제 낮참/뒷산 양지뜸에 묻힌 남평영감 생각난다/흙에서 왔다 흙에서 살다/올 거둔 햅쌀밥 먹고 흙으로 돌아간/그 영감 성성하던 백발이 저기/댄들막의 갈꽃으로 일렁인다/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마른 풀잎이 날고 지풀이 날고,/논두렁의 늦은 들국 몇 송이가 눈물겹다/우리네 힘든 일엔 때가 있고/우리네 독새풀 같은 삶도 때 되면/필경 허허로운 평야로 순명 다하는 것/곧이어 저 들에 보리씨 싹터 올지니/내일은 저 산밑 찬샘논 가는 만근이/그간 서른도록 장가 못 가 안달이더니/남원 처녀 데려와 새살림 차린단다/그리움 안고 지고 초겨울 빈들에 서니/흙으로 가고 오는 사람들의 역사가/정정한 눈물로 그리워 보이고/저다지 넉넉 평평한 들 아니면 결코/우리네 삶 뜻도 없을 진실이 보인다/그 진실이 오래오래 빈 들에 서게 한다
-고재종 <빈 들-농사일지26> 전문
한때 우리가 버렸던 무덤과 그 무덤으로 가는 길이/아직도 우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았네./그때, 우리가 버렸던 낫과 호미가/해 거르지 않고 잡풀들 다스려 온 것도 알겠네./알겠네, 무엇이 집안을 다스리게 하는지/풀씨 흩날리는 무덤 곁에서/이제 다시금 알겠네./죽어서도 조상들은 후손을 버리지 못하고/살아갈수록 후손은 조상을 잊지 못하네./모든 길은 무덤으로 이어져 있고/무덤에서 서울까지도 갈 수 있겠네./그 무덤 앞에서 꼿꼿한 동방의 흰수염을 보았네./지극히 아름다운 눈물 몇 방울 콧등 찡하게 했었네.
-이중기 <선산에 와서> 전문
80년대 변혁운동이 활성 하되면서 많은 교사문인들이 교육현실의 모순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80년대의 교육운동은 4.19직후의 교원노조운동에 젖줄을 대고 가까이 80년대 초반의 한국 YMCA중등교육자 협의회(1982), 한국글쓰기연구회(1983), 흥사단 교육문하연구회(1984) 등 교육운동의 초보적 단계에서부터 <민중교육> 사건(1985), ‘5.10교육민주화선언’(1986), ‘평교사회’(1987) 등의 조직운동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전국교직원노동조합>(1989)을 결성했다.
이 교육운동의 목표는 독재권력 하의 반민족적, 비민주적인 교육현실을 극복하고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교사들의 참교육에 대한 열망은 1989년 여름 전교조 가입교사 1천5백여 명의 해직으로 나타났고 교육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교사 시인들이 교육현실의 모순을 노래한 많은 교육시를 썼다. 대표적인 시인으로 배창환, 도종환, 김종인, 김진경 등을 이들은 모두 해직되었다. 이들은 이후 <교육문예창작회>(1989)를 결성하기도 했다.
곳곳에서 가로막는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우리는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삼삼오오 모여든 제일백화점에서부터/온갖 비상한 수단을 다해 모여든 이 곳/고색 창연한 명동성당 본당 뒤 돌바닥 광장/우린 쓰러지러 왔다. 죽으러 왔다./결코 걸어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왔다.//마지막 수업을 하며 나는 애써 웃었지./부끄러움의 양심으로 가장 괴로워했던 사나이/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간다던/윤동주의「서시」를 가르치며..../십 년 세월, 얼마나 부끄러이 살아왔던가./십 년 교단, 얼마나 괴로이 몸부림쳐왔던가./이제는 나 당당하네/사랑으로 가르치는 이 길/이제는 나 떳떳하네/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네..../이 작은 교사의 양심 한 조각.
-김종인 <단식농성장에서-저들의 미친 칼 아래 모가지를 꼿꼿이 세우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부분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비바람 속에서도 다시 피던 봉숭아잎이 안개비에 젖고/뒤뜰에 열지어 선 해바라기들도 모두 고개를 꺾었구나/세월의 한 굽이가 이렇게 파도칠 때마다/다 못 나눈 정만 흥건히 담아둔 채 어린 너희들의 가슴에 잔물지는 아픔을 심는구나/나는 다만 너희들과 같은 아이들 곁으로/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달래도/마른 버짐이 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이며/아직도 다하지 못한 나의 말을 자꾸 멈추게 하는구나/우리 꼭 다시 만나자/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이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하나 되어 다시 만나자.
-도종환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전문
내 그리운 친구들이 백묵을 잃고/무더기로 일터에서 잘려나갈 때/나는 아이들과 보충수업을 하고 있었다/선풍기 하나 없이 푹푹 찌는 브록크 교실에/탈수된 빨래처럼 이리저리 널리어 앉은 아이들 앞에/하얀 백묵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썼다 지우며/국한문 혼용체 국어수업을 하고 있었다//내 어린 누이들이 이 땅에/살아남기 위하여/단지 이곳에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일당 삼천원짜리 일터에서 싸우다 돌아오지 못할 때/나는 시간당 오천원, 방학중 보충수업을 하고 있었다
-배창환 <보충수업> 부분
김종인은 <흉어기의 꿈> <아이들은 나에게 한 송이 꽃이 되라하네>에서 어촌의 빈궁과 모순된 교육현실에 대해 비장미가 넘치는 교육시 썼다. 도종환은 <접시꽃 당신>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을 써서 사랑에 대해, 그리고 해직 교사의 아픔에 대해, 배창환은 <잠든 그대> <백두산 놀러가자>에서 억압된 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는 현실을 질타하고 분단현실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다.
80년대 한국 현실에서 여성은 소위 민족모순, 계급모순, 성모순이라는 3중의 억압 아래서 고통받았다. 이런 현실에 대해 고정희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여성문제를 우리사회에 환기시켰다.
여자식으로 바둑판을 놨다가/남자식으로 수를 두는 날들이 있었다/여자식으로 씨를 뿌렸다가/남자식으로 씨를 뿌렸다가/남자식으로 추수하는 날들이 있었다/여자식으로 뿌리를 내렸다가/남자식으로 꿏피는 날들이 있었다/남자식으로 또 여자식으로/커다란 대문에는 빗장을 지르고/담장을 넘어가는 가지를 잘랐다/이 온전한 평화/이 온전한 행복/그러나 어느 날/여자식으로 사랑을 꿈꾸며/남자식으로 살아가는 날들이/우아한 중년의 식탁 위에/검고 무서운 예감을 엎질렀다/어둡고 불길한 예감 속에는/산발한 유령들이 만찬을 즐기고/사랑의 과일들이 무덤으로 누워/피묻은 달을 하관하고 있었다/먼데서 어른대는 황혼의 그림자/적막속에 흔들리는 지상의 척도...//왜, 왜 사느냐고 메아리치는 강변에/여자 홀로 바라보는 배가 뜨고 있었다
-고정희 <위기의 여자> 전문
-<시와 반시> 2006.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