次梅菊軒全子垂 夢奎 韻
藥圃 鄭琢
移梅兼種菊。
精舍又臨溪。
叢壓霜葩重。
枝疏月影低。
徑從陶老出。
詩到放翁題。
倚檻人如玉。
歲寒風味齊。
[출처] 藥圃先生續集卷之一 / 詩
매국헌 전자수 몽규 의 시에 차운하다
약포 정탁
매화 옮기고 국화도 심었는데
정사는 시냇가에 임해 있네
떨기 이룬 국화 송이 서리 머금어 무겁고
성긴 매화 가지 사이로 달빛이 내려앉네!
도연명이 오솔길에서 나오고
방옹이 시를 짓는 듯하네!
난간에 기대선 옥 같은 이
세모의 추위에도 풍미는 똑같네!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장재호 (역) | 2013
● 용궁전씨
全夢奎→ 全緈 → 全以性
● 정탁 [ 鄭琢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 · 응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 곽재우 · 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했다. 문집에《약포문집》저서에《용만문견록》이 있다.
본관 청주(淸州). 자 자정(子精). 호 약포(藥圃) ·백곡(佰谷). 시호 정간(貞簡).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1568년(선조 1) 교리 겸 춘추관기주관(校理兼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 ·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1581년 대사헌 때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의 불화로 이조참판에 전직되었다. 그 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재차 대사헌이 되고, 1589년 우찬성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찬성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로 피란하였다. 이듬해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하고, 1594년 우의정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노령으로 전장에 나가 독려하려는 것을 왕이 말렸다.
1599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거쳐 1603년(선조 36)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1597년 이순신이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을 변호하는 1298자의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로 이순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예천(醴泉)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에 《약포문집》 저서에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탁 [鄭琢]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