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우리 광이 4대명휘 이상의 선계도先系圖 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광이 4대명휘 이상 先系圖, (세종-성종-세조시의 遁村손자 諱인손어른과 34극원류대감, 공판 충민공, 한원군대감등, 광주이씨 세보/율정세전초보/복암가가장/갑진보분보전말기등) ..................................................................................................... (1대 始祖 할아버지/자성李족,기원전2 --3세기경 )諱자성/내사령.촌주
자성李족은,기원전2 --3세기경 서라벌 근처 진한지역의 서남방 또는 일설 분황사지 인근(자.쇠.선 세거지역에 관해서는 여러지역 원래 서남부 가라지역' 분황사 인근다)등에서의 부족의 이름이다. 고대 삼한 시대에는 사실 성과 이름이 없고 대부분 지역의 이름이나 촌장의 이름을 지칭한 것이다 고재 삼한시대에 변진한 지역에서는 일종의 성읍 국가이었고 자자일촌을 이루는 도시국가인지라 다른 부족이 다른 족을 부를시에 지명또는 유래명으로 불리운 것이다 자성은 철기문명을 사용한 족속이며 유래는 기마족이다 이유는 우리이족이 광주 회안으로 이속한 후에 광주의 습속이 기마민족을 말해준다 이 부족은 (신라 서남부 즉 왜와 남해국가와 통교가 가능한 낙동강의 인근에 후일 정착한 것으로 보아야한다(광주읍지에 광주사람들은 거북점을 치기를 좋아한다고 되어 있다 거북점의 유래는 고대광주사람들이 해안가의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즉. 아라가야일대 신라서남부의 일족- 광주의 염현인근-광주회안이다 자성족(쇠족-철기사용)은 ,기원전 3세기경 부터 우두머리를 선출하였다 이름은 주로 이사금이다 이들의 부족들은, 초기 변진한의 각지의 촌주들이 연맹, 성읍국가를 이루던 초기 국가형태, 자성이족은 서벌 연맹체 구성원 촌의 일족이다. 변진한 지역의 신라는 이민족과 토착민의 결합으로 북방계 즉, 고구려 부여 동예계의 남하, 기마민족의 북방족의 남하, 가야와 남방계의 이주로 혼합되어 김춘추가 남방의 가야계를 흡수한 세력으로 결국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서라벌은 서벌이라는 성읍국가로, 김부식의 사기에는 6촌으로 구성하였다 하나 대부분 학자들은 6촌-20촌 등 그 이상의 촌주들이, 연합한 성읍국가(오늘날 신라 원형)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11대이나 족보는 1대로 하여 시조로한다. 할아버지후손들은 諱자성 ( 始祖 할아버지 내물왕대 諱자성. 내사령)
........................................................................ 우리 족보에 등장하는 李자성은 11대조의 할아버지로 신라 내물왕조에, 諱가 자성 李自成 (촌주-이사금, 內史令)으로, 내사령으로 있었다 내물왕조는 중국식 왕제가 수입된 시기이고, 이때의 내사부는 왕의 조칙을 담당하는 비서부의 기능. 이차돈(거차돈.염촉)은 법흥왕의 신임을 받은 신하로, 내사의 사인 즉 내사 사인으로 임명받아 왕을 근거리에 보좌하고, 나중에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는데 살신한 인물, 신라내사부의 존재가 사료에 나타난다. 내사령은 왕의 조칙등 왕궁 내부의 내부 부서의 대신으로, 진골중에서 임명한 것, 자성이족의 시조님이 내사령으로 있었다는 기록은, 우리 이족이 진골 족이었고, 일정 지분,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씨족임을 알 수 있다. 사가의 내사령 기록은 통일신라시대의 최치원 최몽등 일부들이 내사령으로 추중되는 기록을 보아, 고려초에 이르러여야 공식적으로 불려진 직함이라 할 수가 있다 (고려초기에는 주로 명예직함으로 사용). 이후 일족들은, 신라중앙의 관직과 김씨왕조 옹립에 기여하고 가야의 일부와 연맹이 된 뒤부터는 어느 시기부터 칠원 일대를 장악, 성주(호족장)를 세습한 것으로 전해진다. 칠원일대는 내해왕부터 가야연맹체의 시원이 된 포상8국 칠포국, 칠제국의 나라로, 백제나 왜가 침공시, 서라벌의 군대가 지원 또는 연맹하여 물리친 기록이 있고, 서라벌이 경상대 일대를 장악하고, 주변을 확장, 가야의 일부, 성읍국가들과 연맹, 신라라는 국가로 발돋음하게 되는 출발이 바로 칠원성일대인 것이다. 이후, 신라가 대가야등 경상도 전라도등의 남해안 새력을 흡수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맹관계)하므로써, 비로소, 3국 통일의 국력을 갖춘 것이다 이전에는 사실 마한 백제, 변한 가야, 진한, 고구려에 비하여 약체 집단이었다 . (우리조상의 연원에 대하여는 가라지역 또는 서라벌 지역 촌민의 설이 있으나 휘 자성시조가 내물왕대의 내사령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중앙권부의 신하이자 서라벌지역의 촌주다 할 수 있고 어느 시기에 가야 칠포국을 통합 뒤 부터는 우리 자성일족들이 대대로 漆原城伯(호족장)을 지냈다, 내물왕 시기 이후 가야일부지역이 신라의 통제권 안(또는 교류)에 있던 시기로, 우리 선조들의 세거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삼한시대는 여러 성읍국가가 난립, 각지역을 분점한 마을국가 형태 이다, 서라벌의 6촌장 연맹이 경주부근의 작은 성읍국가 서벌이 된 것이었고 인근의 촌주(이사금=왕)들과 가야의 촌주들이 연맹하여 신라가 된다, 이 시기가 내물왕조 시대이다, 그렇게 부근의 성읍국가를 통합, 지배권을 강화하여, 춘추왕대에 이르러, 당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한 것인데, 백제를 통합하기 까지의 국력의 힘은, 남부 가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시기 이다(김유신과 김춘추의 연맹) 이후 고구려를 통합, 통일신라를 거쳐서 고려로 이어진 것이다. 변진한의 성읍국가들은, 당시 이사금 체제였으나 역사 기록은 소멸되고, 결국 서벌, 신라의 일부로, 후세가 칭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조상은 일응 가야일부일수도 있고, 서라벌 인근의 성읍 이사금 체제일수도 있을 것이다 내물왕대의 내사령으로 보아, 일단 당시의 지위는 촌주(이사금=왕)라고 볼 수가 있다.
(2대 할아버지) 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12 대할아버지이나 2대할아버지로함) (3대 할아버지) 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13 대할아버지이나 3대할아버지로함) (4대 할아버지) 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14 대할아버지이나 4대할아버지로함) (5대 할아버지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15 대할아버지이나 5대할아버지로함) (5대 할아버지후손들은 諱자성 ( 始祖 할아버지 내물왕대 諱자성. 내사령) 성................... (15 대할아버지이나 5대할아버지로함)
諱자성................... (6대 할아버지)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시대,실성이금 (16 대할아버지이나 6대할아버지로함) (7대 할아버지)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시대.눌지매금(417---458) (17 대할아버지이나 7대할아버지로함)
(8대 할아버지)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시대,자비마립간(배부사흔의여,458 - 479) (18 대할아버지이나 8대할아버지로함)
(9대 할아버지)후손들은 내사령공 휘 자성後孫으로 알고 있슴....시대,소지선공부인의여.479-500 (19 대할아버지이나 9대할아버지로함)
(10대 할아버지)諱군린 君麟 이사금.지증왕대?, (20 대할아버지이나 10대할아버지로함)
신라22대,지증왕대(재위500 -514),군린은 군의 린, 신라시대 이사금 촌주의 별칭, 君의 린이다 "신라조정의 신하"로서 高麗조의 內史省의 내사령급 직위의 인물이다 선조들의 이름은 당시 오늘날과 같은 식의 諱를 쓰지 않았다. 오늘나 같은 諱는 統一新羅이후 唐과의 文物交流後의 일이다 (유신,대문등) 당시의 모든 貴族들은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이나 號를 이름으로 사용함, 왕건, 궁예, 견휀도 이와 같다. 그래서 新羅式의 이름인 군린은 歷史에 등장하지 않으나 군린은 높임말의 칭호로 맞다. 우리광이의 선조들이 이렇게 사서와 해석에 전부 맞는데, 이를 傳說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 동방 성씨家에서 우리 자정이족처럼 선조들의 이름이, 당시의 史學的 배경과 맞는 諱의 명은 없다. 실로 놀라운 諱이다. (11대 할아버지)諱는 잊었으나 諱 군린의 子孫으로 알고 있다 .(21 대할아버지이나 11대할아버지로함)
諱군린君麟이사금 諱군린君麟이사금 諱군린君麟이사금 (13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군린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23 대할아버지이나 13대할아버지로함) (14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군린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24 대할아버지이나 14대할아버지로함) (15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군린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 (16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군린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17대 할아버지)諱 용수龍壽 이사금, 무열왕대?. (27대할아버지이나 17대할아버지로함)
신라29대,태종무열왕대(재위654--)의 인물(기원7세기) 용수는 용의 수, 신라시대의 이사금 촌주의 별칭이다. 통일신라말의 인물인 고려태조의 왕건의 왕건은 당시 부르는 높임말이다 . 즉 임금의 임금이다, 건은 간의 변형이고 ,간은 한, 간으로, 제사장또는 지도자이다, 징기스칸과 같다. 왕건의 아버지는 龍건으로 용의 건이고, 조부는 作帝건으로, 천제로 모시는作帝의 간이다 그렇다면, 용수는 용의 수, 즉 지방의 우두머리란 의미다. 따라서 이는 촌주의 별칭이다., 신라통일에 기여함 (18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19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20대 할아버지) 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21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22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23대, 향임)(33대향임할아버지이나 23대할아버지로함)
(23대 할아버지)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24)대 할아버지諱용수 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 諱동이,부령,당유학,하여 과거에등과,당 벼슬,귀국. 부령을 지내고.족장에 이르다, , 궁예, 견휀, 기횐, 양길, 김헌창등 왕족들이 봉기하다. (25대 할아버지)諱용수 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諱동이 (26대 할아버지)諱용수 휘는 잊었으나 휘 龍壽의 자손으로 알고 있다諱동이 ................................................................................. (27대 할아버지)칠원공 諱한희 漢希(내사령, 칠원城主). (37대할아버지)칠원공 諱한희 漢希이나 27대할아버지로함)
한산주 정착 (광주이족의 시원)(한산거주 후손들이 여말까지 칠원공이라 불렀다) 당시 한산주 거주 후손들이 신라 선조들의 이거 기록과 행적을 팔면비를에 기록하여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다. 신라 경순왕조에 칠원백,서기910--970,경기 한산 기내에 정착하다,., 독서삼품과로 과거에 진출한 설과 당나라 유학, 당나라 과거에 급제 설이 있다. 독서삼품과는 주로 6두품이하의 관료자제들이 응시한 과거로 급제하면 소수(지방태수) 사지에 이르럿다, 이이만가의 별보초보의 향공기록은, 신라말 과거시험은 지방호족의 자제들을 위한 것으로, 향공생이기에 향공으로 15세에 급제하다로, 보아, 우리 이족은 이때에도 지방호족의 신분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향공생은 고려시대에 나타남, 선조기록은 傳聞이기에 고려조에, 그렇게, 죽헌선생이 말한 것임, 한 희는 통일신라말 이름으로, 한산주에 근거한다, 한산주는 신라가 백제정벌후에 설치한 주로 신주 강주 한산주로 하였다. 당시에 개성도 한산주내의 고을이다. 고려건국후 10여년후 경순왕이 고려애 항복교서를 할때 조정신하와 이한희공은 반대하였다 몇년뒤에 항복교서를 보내고, 몇년후에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다. 이한희이하 우리 이족의 항거는 항복을 결심한 때이고, 우리 이족이 북상한 것은, 경순왕 북상 무렵과 같은 시기이다. 그리고 북상하여 기내에 거주한 우리 이족을 바로 역리로 강계한 것은 아니다, 고려 경종대에 경순왕이 죽고 전국이 통제된 이후 정향 이속된 것이다. (정향이속이란 단어도 조선조에 생긴단어임, 당시 한산주에는 신라 지배층들이 많이 살았다) ......의만(宜晩) 公이 쓴 보초(譜草) 별보권(別譜卷), >>>"한희공은 울면서 경순왕의 항복을 반대하였다." “옛 廣李 선조들을 염현(塩縣)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염현이 바로 지금의 廣州이다.” “한희(漢希)는 나이 15세에 文科에 壯元及第하였고, 그 자손들이 代代孫孫 이어지면서 高官大爵을 끊임없이 지냈다. 그런데 생원공의 조부[휘 文]께서 직도(直道)로 벌을 받아서, 다시 주리(州吏)가 되었다.” 우리 광이가 역리의 신분이 된것은 일부이고, 자자일촌을 이루며 호장으로 오다가, 생원공의 조부 문께서 직도로 벌을 받아 이분의 후손들이 주리로 격하된 것이다. 다만 익강과 익준의 후손분들은 대대로 고관대작을 고려말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래서 생원공의 후손들 파보는 대부분 신라말의 항거로 광주로 정향이속되어 신분이 강계된것을 거론하나 석암탄공의 가승보와 사온주부공의 묘비명, 정곤수 이명징가의 족보, 통판공 초보등을 검토시에 고려에서 신분강계의 언급은 없다(주류에 편입 되지못한 것은 맞다) 이 신분 강계 기록은 오로지 "전래가승 "(이것도 최근의 기록임)와 "둔촌공, 당공가의 가승에서의 언급"일 뿐이다. ................ (29대 할아버지) 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0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1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2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3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4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5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휘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후손으로 알고 있슴
(36대 할아버지)新羅말 高麗初 漢希(방린 향임 당임 존임 호장)의 후손인데 36대조 원래의 휘는 1670년 판단시는 실전됨 後孫들은 諱 漢希 후손으로 알고 있으며 통판공과 사온주부공 생존시에 한희 이름으로 칭함 漢希 고려 중기의 과거 급제설(향공은 고려 중기 귀족의 자제등이 지방 공도 향공생에서 과거를 보고 등관 ....한희공에 대한 것은 우리 조상에 대한 전래되온 것들을 기록한 휘 필행. 휘 후징의 선세사적과 통판공과 율정의 세전초보를 근거한 것으로 당시 광주 거주시 전해오는 전문을 토대로 선조들이 기록한 것이다. 신라 경순왕대의 급제설이 맞습니다. 통판공 초보와 사본주부공 비명에 한희 방린이고 자 자 자 자- 삼익은 전래되온 구전을, 바탕으로 한희 이하를 세계한 것으로, 당시 입으로 전해오는 것을 기록하였고, 이것을 구비로 전승하다보니, 한희 방인 자자자자 한것입니다. 즉 오래된 무렵의 신라말 고려의 인물로 한희인데 세대를 거치다보니 일일이 그전의 이름을 상고할 수가 없어서 그리한 것일 것입니다. 35대 한희, 36대조도 명칭이 한희였을 것이고, 머언 고려초의 인물인데 당시 선조들 머리에 한희가 시조이니 그리 기록하고 이 분은 급제자로 경순왕의 신하이며 항복을 반대하였고, 절의를 높이고, 항거한 신라사람으로 후에 한산주에 정착한 인물이다라는 것입니다. 통일신라 경순왕시대의 신하인 한희공은, 고려왕조 귀속을 반대한 분으로 절의를 높히고 항거하다가 기내에 정착한 분으로 이분의 아들로 후에 방린이 있고, 4대에 이르러, 고려 고종시에 3제분 삼익 어른들이 계시고 이후의 세계는 가승으로 기록한 분들이 고려말 諱 신정한당 전사의 어른들이고, 이분들은 전부 國子監에서 공부를 하던 분들이라, 이미 신라말의 선조, 한희공에 대하여 알고 계셧고,, 아드님이 방린이고 4대는 실전하였으나 이후 삼익어른으로 이어온 것도 알고 계신것으로, 이후 生員공 녹생 인생, 생원공 당, 遁村의 형제, 방귀와 석암탄공등 當代의 兄弟들은 모임이 자주있었는 바(예, 고송정 시회등) " 우리 선조의 원시조는 신라시대 자성이고, 이후 군린 용수이다가 확연하게 新羅말 한희공인데, 畿內에서 자자일촌을 이루어 살았다. 그런데 한희공은 유명자라 선조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명명백백 내려오다가 중간의 분들은 유명한 분이 없어서 실전되고,자자자子 오다가 高麗고종대에 廣陵 삼익에 이른 것이다. 우리들은 漢山州의 李氏다 라는 사실로 高麗말, 광릉에서 사실때. 율정공家의 국자감생원 인생 녹생과 둔촌공家의 둔촌, 십운공家의 십운공, 석암탄공家의 석암탄공 등이 공히 알고 계신 것이다. 우리 이씨의 휘가 중간 실전이 되는 것의 이유는, 신라시대의 분들로 자성 군린 용수 한희공은 유명이었으나 한희공 이후는, 고려 복속을 거부한 관계로, 이후 유명 분들이 나오지 못하여 고려 태조 이후 고려고종시까지 분들은 실전이 되었다. 원래 한희공은 신라분으로 대대로 칠원지역의 성주이었는데 한산으로 이주 모두들 염현 일대에서 살았다. 지금의 광주부이다. 즉, 李를 창흥한 사람은 신라 내사령공 자성이고 군린, 용수이고, 신라말 고려초 한산주의 한희이다 란 것이 구전으로 내려온 것. 통판공.사온주부공은 고려말 분이다.전래 가승을 통판공이 기록한 것이 소위 통판공초보 율정초보이다 광이 대종회는 이를 공식 인정. 이어져야 할 것이다. 율정공께서, 어히 거짓을 기록하겠는가? 율정은 정치책략의 현장에서 고고히 성품을 유지한 분으로, 팔극조정의 둔촌가 사람들과 공판 두신과 한원군등이 모두 존경한 분이다. 세종 성종조의 분들로 광이친족으로 존경을 받은 율정공의 세전초보를 무려 300년이 지난 뒤에 스스로 상국장상이라는 직함 명예로, 이의 고거가 없다는 하원공 혼자만의 단정의 하나로, 이를 ..뭉갠다는 것은, 웃을 일이 아닌가. 어히하여 감히, 세종-성종시 율정을 잘아는 遁村의 손자 諱인손 어른과 八克 대감과 공조판서 斗信 대감과 석암탄家의 한원군 대감의 신뢰를 받은, 율정공 기록을, 거짓이라 단정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증빙으로 후에 사온주부공 묘비석에, 한희-방린의 가승이 나오지 않았던가,
(37대 할아버지)諱방린,방의 린으로, 호장 군주의 별칭이다. (47대할아버지이나 37대 할아버지 촌주 방린이다) (38대 할아버지)諱방린의 諱방린의 후손으로 향임 당임 존인 호장으로 불려짐 (39대 할아버지)諱방린의 후손으로 향임 (당임 존인 호장) 군주로 불려짐 (40대 할아버지)諱방린의 후손으로 향임 당임 존인 호장으로 불려짐 (41대 할아버지)諱방린의 후손으로 향임 당임 존인 호장으로 불려짐 ................................................................ ..
(42대 할아버지) 삼곤系公(諱익준,익비,익강의 參兄弟), 廣陵參益어른 (52대 할아버지 삼곤계공(諱익준,익비,익강의 삼형제)이나 42대할아버지로함 .
(광릉삼익,광릉삼현,합문지후.호장,령동정),고려 고종대,각각 합문지후 호장과 령사동정을 지냄 ********** (42대 할아버지) 제1자諱 益俊(합문지후)의 후손...현재실전
********** (42대 할아버지) 제2자諱 益庇(영동정)의 후손/ 지금의 둔촌공/십운과공후손들 (43대 할아버지)諱문 (44대 할아버지)諱름.諱위 (44대 할아버지)諱름의 후손--- 諱신,諱정 (45대 할아버지) (1) ............제1자諱신-- 諱사달--- 諱직--- 諱금동,의동 .....................................諱금동 --- 諱주 .... (1) ............제2자諱정--- 諱미장--- 諱탕--- 諱세 --- 諱구--- 諱영
(44대 할아버지)諱위의 후손--- 諱한,諱당 (45대 할아버지) ............제1자諱한--- 諱녹생,인생 ---- (46대 할아버지)....................諱녹생--- 諱밀--- 諱지---諱관인,관의 ....................................................諱관인---諱지 ....................................................諱관의---諱점,퇴,지 ........................諱인생--- 諱돈--- 諱의---諱경빈---諱시생 (45대 할아버지) ............제2자諱당---諱인령,원령,희령,자령,천령 (46대 할아버지) (1)...................諱인령---諱조---諱동인 (1)...................諱원령(집)---諱지직,지강,지유---諱장손,인손,예손,맹손,일원,중원,정원,계원, (1)...................諱희령---諱홍순 -- 홍복기 -- (1)...................諱자령(건)---諱연동---諱봉로--諱두신 .(1).................諱천령--- ...................... ....................... ......................
******** (42대 할아버지) 제3자諱 益康(영동정)의후손, 오늘날의 석탄공 암탄공후손들 (43대 할아버지)諱성우---諱잠 (44대 할아버지)諱잠--- 諱전사 (45대 할아버지)諱전사--- (46대 할아버지)諱방귀---(47대 할아버지)諱양중,양몽 .........................석탄공파 (1)諱양중 --- -------諱우생,수생 ......................................諱우생--- 수철,석철 ....................................................諱수철---諱 손,諱 소(개위 명)----휘수언,순언,온언,성언,성윤조,권견,갑엄,諱창언,정승희 ....................................................諱석철---諱 붕,난--諱사윤,諱사성 ......................................諱수생(춘여)---諱景哲(士賢)----諱 蔭---諱乙富 ..........................암탄공파 (1)諱양몽--- --------諱술생,적생,진손,영손 .........................................諱술생--- 諱원근--- 諱사방ㅡㅡㅡ諱숙침 .........................................諱적생---諱 인민--- 諱사(俠)---諱季命 ..........................................諱振孫--- 諱潤根--- 諱枝綱,枝直,高常忠,----諱明仁.明良 ..........................................諱영손--- 諱난근,배근,석근--- 諱신헌, 諱성헌----諱維成,維恒,金龜秀,維興 .
아, 우리는 하늘의 후손(李, 天孫)들이라, 스스로도 한울 한빛(李自成)으로, 중천을 이루어 높게 누리는 (君隣 ) 일족, 귀한 이름 (龍壽), 신라,벌에 창흥하였으니, 홀로서 높이올라 (漢希), 방방을 빛내고(邦隣) 이제는 돌아와, 만대 자손을, 구가한다.(鄕堂存邦任)
근원(益)으로 돌아가도, 益의 俊庇康이라, 배움(文)의 學文함이자, 정성의 도움을, 드리는 정리(誠祐)-誠에 이르르는 것으로, 꽃들로 가득한-菻한 정의 엮음(菻,萬代지친의 精神), 굳게 드내인 위엄(蔚)으로(蔚,謹勅의 遺訓), 山 휘돌아 밝히니(岺.어짐의 遺訓), 날마다 믿음의 신뢰, 청절한 마음 (信淨), 漢山을 중심(漢)으로, 방방을 다스리(唐,全斯)노라. (漢주를 지배 全斯한다. 즉 나라 주인, 唐은, 나라란 뜻이다)
오, 李族이여라, 사방에 이르고(四達) , 의로움의 기백 (*長) , 푸르고 창연하니 (綠生 인생), 이는 어짐을, 근본으로하는 (仁元) , 세상일 빛내 오르는 희망 스스로도 진리에 오르는(希自天) 핏속같은 유지(齡)는 방방곡곡 귀하신 님들(方貴) 힘써 합하여(養) 진리(養中)와 도덕의 세상(養夢) (즉 나라에 충성하고 조선을 받들고 자신을 키워 우리 이씨 세상을 이루는) 기루는 것이리,
*李는 고대 제정일치시대, 통치자로 동이족의 성으로 하늘의 아들로 백이다, 河伯과 같다 ,동이족의 특징은 천손사상으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관리는 이로 제사장은 단으로 칭한 것으로 중국만주와 한반도의 성씨중 대부분 지방관을 지낸 시조는 이로 칭한 것이다 통치자의 이름이 전래된것, 성씨 참조 양중(養中)의 중은 진리란 의미이고, (養夢)몽은 목표지표 도덕이란 뜻이다. (養)양은 힘쓰다 기루자의 의미
道德,鏡의 世上,養 힘쓰다 모아서 이루다), 우리 이족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이루자는 뜻, 광이호송산 전설의 3번 개국흥복설과 같다 --광주이씨 역사연구실에서 이민영 올림
출처 이차돈의 내사사인, 다음백과 - 이차돈 사망 527(법흥왕 14) 국적 신라, 한국 〈삼국유사〉에 인용된 일념(一念)의 〈촉향분례불결사문 髑香墳禮佛結社文〉에 의하면 성은 박씨이며 아버지는 알 수 없고, 할아버지는 아진종랑(阿珍宗郞)으로 습보 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그러나 같은 책에 인용된 김용행(金用行)이 찬한 아도비문(阿道碑文)에는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가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居次頓)·염촉(厭觸 : 또는 猒觸)·이처(伊處)·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순교 당시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의 직책에 있었다. 빛나고 착실한 사람으로서 심지가 곧고 심중(深重)하며 의로움에 분발하는 용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는데 귀족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이 왕과 함께 그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불교를 융성시키고자 했으나 왕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비록 제가 죽더라도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는 왕과 비밀리에 약속한 뒤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하들의 논란이 분분했다. 왕이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지금 승려를 보니 깎은 머리에 옷차림이 누추하고, 하는 이야기가 괴이하니 이를 좇으면 후회가 있을 것이므로 죽을 죄를 짓더라도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차돈은 "비상한 사람이 있은 뒤에 비상한 일이 있다. 내가 들으니 불교의 이치는 오묘하여 불가불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왕은 "너 혼자만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양쪽을 좇을 수가 없다"고 하여 죽이려 했다. 이차돈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내가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가지만 의리(義利)를 일으키려 한다. 부처가 만일 신통력이 있다면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목을 자르자 머리가 하늘을 날아 금강산(金剛山 : 경주 북쪽)에 떨어지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났으며,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기묘한 꽃들이 내려오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해를 금강산에 장사지냈다. 또 이후로는 불법을 받들고 귀의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로써 신라에 불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향전 鄕傳〉에 의하면 이차돈은 왕과 비밀리에 약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절을 짓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순교 당시 이차돈의 나이는 22세 또는 26세로 전한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529년(법흥왕 16)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신라 최초의 불교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천경림에 짓기 시작해 544년(진흥왕 5)에 완성했다. 절을 지을 때 사용된 재목을 모두 천경림에서 구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재래신앙이 행해지던 장소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흔히 이차돈의 순교와 동시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간주하지만, 그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즉 〈삼국유사〉에서는 흥륜사를 짓는 것이 527년 에 비로소 시작하여 534년에 천경림을 베어내어 공사를 일으켰다고 했고, 〈고승전〉에서도 534년에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내고 절을 지었는데 이것이 신라 창사(創寺)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하는 것은 신라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이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이미 묵호자(墨胡子)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 와서 불교를 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사실이 전한다. 이는 신라 귀족들의 폐쇄성이라든지 재래신앙의 강고함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교의 공인은 기본적으로 신라의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과정과 함께 이해되고 있다. 즉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보다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이념이 필요했고, 불교는 그에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다원적인 귀족세력을 강력한 왕권 아래에 두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 상대등(上大等)이 설치되어 귀족세력과 왕권의 완충역할을 맡게 되는 것도 불교가 공인된 직후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후 불교는 왕실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법흥왕과 왕비는 만년에 승려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설화는 불교가 융성한 뒤에 꾸며진 신비한 내용이지만, 불교 수용을 전후한 시기의 왕실과 귀족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왕실의 내인(內人)들이 명복을 빌기 위해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는데, 집집마다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여러 사람이 도를 행하여 불교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817년(헌덕왕 10)에 그의 순교장면과 함께 사적을 새긴 6각석당(六角石幢)이 경주 백률사(柏栗寺)에 세워졌다. 이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라왕실계보, 신라왕실은 족내혼이기에 여기서 나타난 혈통도가 전부사실이 아닐수 있습니다(사가들의 통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