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우리들은, ‘상식’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고,
또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합니다.
상식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상식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다. 그 일은 상식에 어긋난다. 그 결정은 상식을 벗어난 결정이다.
그 사람은 상식이 부족하다. 상식이 없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라. 저 사람은 상식이 풍부하다.
라는 표현들은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상식이지만,
신앙 안에서는 달리 해석되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상식을 벗어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신앙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신앙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서 개입하시는 것을,
신비 라고 이야기하고, 오묘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이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이,
우리의 상식과 달라서 입니다. 그 방법은 심지어,
단순히 상식과 다르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러한 방법 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신비들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며,
회당장의 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신 복음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을 직접 만나지 않으시고도
그 종을 치유해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는
회당장 야이로 의 말을 듣고도,
당신 말씀만으로, 그의 딸을 고쳐주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회당장의 집으로 서둘러 가지도 않으시고, 길에서 만난 여인을
치유해주시느라, 시간을 지체하시기 까지 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그 여인에게, '내가 급한 일이 있으니, 잠시 후 다시 너를 만나겠다.' 고 하거나
그 여인을 치유해 주신 후 더 하실 말씀이 있더라도,
일단 여인을 치유해주고, 서둘러 회당장의 집에 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이 아닌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단순히 상식을 벗어난 방법이 아니라, 상상할 수조차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서두르시지 않는 동안, 회당장의 딸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회당장의 그 간절함을
이해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회당장의 딸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만의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회당장의 딸은 죽었고, 회당장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딸을 살리기 위해 서두르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그 딸을 고쳐주실 능력이 없어서,
일부러 서두르지 않고, 죽은 후에야 도착했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원망을, 그러한 오해를 살 줄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통곡하던 사람들이,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간청에도 서두르지 않아, 결국 딸이 죽게 되었다며 예수님을 원망했을 회당장이,
딸을 다시 살아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회당장 딸의 죽음을 목격했으니,
딸이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자,
우연히 살아났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죽음까지도 지배하신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입니다.
물론, 복음이 전하는 이 사건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활동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예수님께서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찾는 행복을 늘 염두에 두시며,
결국 우리에게 그 행복을 안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늘 우리를, 우리가 찾는 행복을, 당신 마음 속에 품고 계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원하는 바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감사드리며, 인내로이 기다릴 수 있는 은총을
좋으신 하느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결국’ 좋으신 분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