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의 추고 함사(推考緘辭)에 말하기를,
“임금의 의관을 묻는 것은 바로 국가의 장사에 막대한 절차이며
또 종묘에서 혈식(血食)하게 하는 영원한 계책입니다.
만일 진선 진미한 곳을 얻지 못하면 어찌 신하로서 전하에게 충성하는 것이 겠으며
선왕께 보답하는 정성이겠습니까.
그리하여 넘어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곳곳을 살폈으나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데, 오직 수원(水原)의 산만은 눈을 들자마자
깜짝 놀라며 상격(上格)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용(龍)의 크기와 풍수(風水)가 영릉(英陵)에 비교해서 조금 못 미쳤지만
참으로 천리에 없는 바요,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땅이어서,
비록 도선(道銑)과 무학(無學)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소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윤강(尹絳), 이원진(李元鎭) 및 여러 지관(地官)들도
하나의 흠도 없다고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모두 나라를 위해 서로 축하했으니, 신이 나라를 위해 쓰기를 원한 것은
여러 사람들과 일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논이 마구 일어나 유독 신에게만 죄를 돌려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
날로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병이 다시 위험해져 정신이
혼미했으므로 상소를 진달하지 못한 채 병조에 정장(呈狀)하여
직명(職名)을 계체(啓遞)해 주기를 청하여 병든 몸을 떠메여 교외로 나갔으니,
이 때는 바로 인산(因山)이 이미 수원으로 정해져
여러 도감(都監)의 역사가 모두 한창일 때였습니다.
따라서 누가 이의가 다시 생겨 분분하게 되리라고 억측이나 했겠습니까.
7월 3일 밤중에 갑자기 건원릉(健元陵) 서쪽 골짜기와 불암산(佛巖山) 아래
화접동(花蝶洞)을 살핀다는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이 그 때는 병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해 부득이 장계를 갖추어
현개 1권, 즉위년(1659년) 8월 30일(무오) 2번째기사
산릉(山陵)의 일 한 가지를 언급하였습니다. 본디 그것이 일반적 규정이 아님을 알았으나,
신은 생각하기를 ‘이루어진 일은 간하지 말아야 하고,
일은 처음 잘 도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기미가 곧 일어나려 하면 마땅히 일찍이 분변해야 한다.’라고
여겼기에 붉은 정성이 복받쳐 반드시 앙달하고자 하였으나 피곤하여 일에 미치지 못했고,
일이 또 갑작스러워 상소를 갖추지 못하고 부득이 방백(方伯)에게 언급하면서 보고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대개 일의 기미가 긴급하면 제때에 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 어찌 반드시 전례에 구애되겠습니까.”
운운하였다. 헌부가 고신(告身)을 빼앗아야 한다고 아뢰니, 상이 이미 파직시켰다는 것으로써 처리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윤선도가 광해조(光海朝) 때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을 참하라고 청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절개를 세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의 무리가 바야흐로 이첨과 서로 알력 관계였는데
선도의 소는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소에 이르기를
“김제남(金悌男) 등이 반역을 한 정상은 분명하여 숨길 수가 없으니,
천지(天地)와 신인(神人)이 함께 죽여야 할 자입니다.
이원익(李元翼) 무리가 병으로 본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굳이 대역 죄인을 비호하면서 우리 성상을 등진단 말입니까.”
하였으니, 이는 소인이 소인을 공격한 데 불과하며 올바른 의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 판서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涪溪記聞)》【부계(涪溪)는 종성(鍾城)의 지명이다.】에 이르기를
“윤선도가 상소하여 이첨의 죄를 논하면서 아울러 승종과 희분이 이첨의 간사함을 알고서도 말하지 않음을 논하였다.
선도는 유가(柳家)와 인척 관계로 그의 뜻을 받아 상소했기 때문에 이런 말로써 그의 흔적을 가리웠던 것이다.
이첨의 무리가 탄핵하여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을 때 내가 부계(涪溪)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윤선도와 친척의 친분이 있어 서로 왕래하였는데, 곧은 말을 하여 죄를 입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고상한 척하는 태도가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공의 상소는 여러 신하는 그냥 두고 유독 유희분과 박승종이 말하지 않은 것만 논하였으니,
역시 쇠퇴한 세상의 말이다.’ 하였다. 이극건(李克健) 역시 상소하여 이첨을 논핵하다가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어
스스로 자신이 유희분과 상의하여 상소했다고 자랑하였다.
내가 우연히 묻기를 ‘공은 윤상(尹相)과 아는가?’ 하니,
이극건이 말하기를 ‘진소할 때 자주 유희분의 집에서 모였으므로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였다.
내가 윤선도와 대화하면서 이극건의 말을 언급했더니, 윤선도는 안색이 변하면서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했다.
반정(反正) 초기에 상소했다가 유배된 유생들이 모두 6품직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지평 임숙영(任叔英)이 말하기를 ‘윤선도의 상소는 유희분의 뜻을 받든 것으로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을 했으니,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입니다. 포상해 발탁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다.
깨끗한 인사들이 이 의논을 옳게 여겼으므로 단지 금오랑(金吾郞)을 제배했다.”
고 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윤선도(尹善道)와는 친척의 친분이 있어 서로 가까웠는데도
기록한 바가 이상과 같으니, 당시 선도의 마음 씀씀이를 대개 알 수가 있다.
선도는 문장에 능하고 술수가 많았는데, 이름 역시 성대히 알려져 효종의 잠저(潛邸) 때 사부가 되었다.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대시(臺侍)를 거쳐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었는데,
가는 곳마다 탐장질을 하였다.
그가 성산(星山)을 다스릴 때 대사간 윤지(尹墀)가 논핵한 말 가운데 이르기를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니 덕(德)을 무너뜨리는 도적이다.”
하였다. 병자란(兵子亂) 때 선도는 왕을 뵈러 간다는 명분으로 바닷길을 통해 강도(江都)로 가면서
관망하다가 중도에서 돌아와 끝내 달려가 문안하지 않았다.
대각의 논계로 인해 옥에 갇혔고 충군(充軍)으로 논죄되었다.
효종(孝宗) 임진년에 이르러 비로소 승지에 발탁되었는데 정언 이만웅(李萬雄)이
“인조(仁祖)의 대상(大喪) 때 3년을 마치도록 달려와 곡하지 않았다.”
는 이유로 논계하려고 했는데, 선도가 먼저 스스로 효종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만웅은 엄한 교지를 받고 지레 체직되었다.
그런데 효종이 옛날의 사부인 송시열(宋時烈)에 대하여 매우 존경하고 복종하여 대우하는 예가 비할 바 없자,
선도가 마음속으로 불평하였다.
또 일찍이 정개청(鄭介淸)을 존경하고 사모하였는데, 개청은 본디 한미하고 천한 사람으로
어려서 중이 되어 풍수설(風水說)을 배워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어떤 사람이 권해서 머리를 기르게 했다. 처음에는 심의겸(沈義謙)을 섬겼고,
또 박순(朴淳)을 만나서 배우기를 원했는데 박순이 가숙(家塾)에 머물게 하고
가르치고 먹이기를 10여 년 동안 친자제처럼 하였다.
사는 집이 무안(務安)에 있었는데 먹을 것은 가난했으나 학문에 부지런하여 선비들이 칭찬하였으니,
이는 모두 박순이 지도한 것이라고 하였다.
박순이 조정에서 배척을 받자 개청은 연루될까 염려하여 정여립(鄭汝立), 이발(李潑) 등과 서로 사귀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박순과 친하게 되었는가?”
물으니, 답하기를,
“그 집에 책이 많기 때문에 젊었을 때 빌려다 보았다.”
하였다. 정여립이 모반하다 죽음을 당할 즈음에 개청이 붙잡혀 국청에 나왔는데, 공초하기를
“일찍이 교정청 낭관으로 있을 때 여립과 동료여서 몇 번 만났기 때문에 얼굴을 알 뿐이다.”
했다. 상이 그 대답을 보고 개청이 적에게 보냈던 몇 통의 편지를 내리고,
한 차례 신장(訊杖)하고 북도(北道)로 유배하였다.
그 후 적의 무리가 또 개청을 데리고 여립의 집으로 가서 풍수를 논하게 하자
국청이 다시 잡아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미 죽고 없었다.
그 사람의 형편없음이 이러한데도 선도는 유학의 종주로 추숭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조정이 그 말을 듣고는 그 사당을 헐어 버리니, 선도는 상소하며 항변했으므로 더욱 조정의 논의에 배척받게 되었다.
파산되어 있던 중 효종의 산릉(山陵)을 고르게 되자, 선도는 수원(水原) 읍내가 천재 일우의 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수원은 경기의 관문으로 후대에 다섯 가지 환란의 근심이 있다는 말이 있는 데다
또 읍내의 동네를 철거해 옮겨야 하는 폐단이 있으며 풍수의 흠으로는 지맥(地脈)이 파괴되어 있고
초목이 무성치 못하여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해(李澥), 이시백(李時白), 원두표(元斗杓) 등이 일찍이 수원부에 재직했던 자들인데
서로 잇따라 진소하였고, 시백은 더욱 정성을 다하여 간곡하게 말하였다.
심지어 산수 비기(山水秘記)에도
“수원에 장사를 지내면 나라 안이 불안해진다.”
는 말이 있다고까지 했다. 인심이 모두 의구심을 품었으나 상이 선도의 말에 선입견을 가지고
반드시 그대로 수원을 쓰고자 하였는데, 대신과 중신이 떼지어 일어나 힘껏 간쟁한 뒤에야 비로소 청을 들어주었다.
뒤에 봉분에 틈이 생겼는데, 영림 령(靈林令) 익수(翼秀)가 몰래 가서 기록해 가지고 상소하여 말했기 때문에
마침내 능을 옮기게 되었다. 익수는 바로 선도의 가까운 친속으로 역적 정창(挺昌)의 사주를 받아
정(楨), 남(柟)과 서로 화응해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사화(士禍)가 일어난 것은 본디 일조 일석의 까닭에서 나온 것은 아니나
근본을 따져 보면 대개 선도를 나문하라고 아뢰어서 더욱 그의 분노하는 마음을 격발하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 뒤에 또 예를 의논하면서 송시열을 모함하기를
“종사(宗社)의 죄인이다.”
라고 했는데, 당쟁을 하는 무리들이 이로 인해 사류를 일망 타진하여,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한 것이 5, 6년이나 되었다.
이경석(李景奭)이 산릉을 논하는 상소 가운데서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일을 해치는 사람이 있어 한 세상을 미혹시키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어지러워지게 된다.”
했는데, 그 말이 매우 맞다. 선도의 무리가 이에 말하기를
“수원이 매우 길한 땅인데, 당시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은 한갓 수원이 경기의 중요한 지역이므로
옮기기 어렵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의 의관을 만세토록 간직할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아, 이경석·이시백·원두표·이후원·이해·송시열·송준길·이상진 등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어찌 여러 지관들만 못하였겠는가.
윤강이 또 진소하기를
“여러 지관들이 수원의 산을 칭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새 산이 수원보다 배나 나을 뿐만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 소를 상고해 볼 만한데 그들의 말이 이러하니, 진실로 많은 말로 분별할 것도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