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연중 제14주일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복음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자신들처럼, 나자렛 이라는 평범한, 혹은,
내세울 것 없는, 조그마한 고을 출신 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로부터 지혜로운 가르침이 선포되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과 출신성분은 같으나,
자신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한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선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이시기 때문에,
존재 자체로, 우리를 압도하는 힘을 지니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지혜로운 말씀이 솟아나고,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향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가르침 외에,
’하느님의 개입과, 그 개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예언자 자격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예언자가, 예언자로서 선포하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조차,
내 입맛에 맞으면 환영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까지도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 의지‘ 없이, 인간은, 아무런 존재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통해,
’행복을 선택’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존재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24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가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 체험‘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 체험’의 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개입을 무조건 환영하고,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까?
만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기적을 일으키시어,
많은 재물이 생겨나게 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선물하셨다면,
복음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아마도, 고향 사람들이 너도 나도 발벗고 나서,
내가 예수님과 더 친하다며, 예수님과의 친분을
경쟁적으로 과시하였을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고향 출신 중
가장 환영받는,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토록 사랑하십니다.’ 라는 사실을
선포하셨는데, 그들은,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돈을 주세요’ 라고
예수님께 응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환영받고 인정받는 것‘을 마다할 리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돈‘을 원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돈‘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느님만이, 오직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만이
그들이 찾는 참 행복을 주실 수 있다'는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찾는 돈 은,
그 돈이 없어서, 그들이 굶어 죽을 정도가 아닌 이상,
오히려, 그들을,
참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고, 칭찬받고자,
고향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일을 차마 하실 수 없었고,
그러한 일은,
사십 일을 단식한 당신을 위해서,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셨던 모습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올릴 때,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라는 진리 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 하시다.‘라는 진리 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나 뿐인 외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참 행복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셨던 모습에서 드러난 것처럼,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적어도 그 때는,
복음이 쓰여졌던 2천 년 전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어떻게 까지 하시는지?‘를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복된 때이고,
하느님의 그 사랑을, 하느님의 그 전지전능하신 사랑을
온 마음으로 느끼고, 하느님을 알아가게 될
감사한 순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셨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에게 주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를
마음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그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냐, 그렇지 않느냐? 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감사드리며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라는 진리를
내 입으로 선포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