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법운지法雲地와 지바라밀>
-불교의 혼란은 인재人災이지 불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래도 불교
이 보살이 이러한 더 나아가는 마음을 다시 내느니라. ‘내가 만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해탈도에 머물게 하지못하고 내가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면, 이것은
나의 본래의 소원에 어긋나는 것이니, 마땅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와 무여열반을 얻게 한 뒤에
성불할 것이니라. 왜냐하면 중생들이 나에게 청하여서 발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생에게 청하지 않은벗이 되어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만족하여 온갖 지혜를
이루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수승하니 일체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연고며, 내가 가장 높으니 위없는
지도하는 지위에 있는 연고며, 내가 가림을 여의었으니 중생의 끝이 없음을 아는 연고며,
내가 이미 판단하였으니 본래의 소원을 성취한 연고며, 내가 좋은 변화가 되나니 보살의
공덕으로 장엄한 연고니라. 내가 좋은 의지가 되나니 삼세의 부처님들이 거두어 주시는
연고니라.’
공덕림 보살의 이 말씀으로 마무리하게 된 것은 필자나 독자들에게 ‘큰 행운’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나는 화엄경을 스승으로 삼으며 한국불교에서 말해지는 거의 모든 주제들에 대해
‘의심’으로 참구함을 공부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에 선사들의 천편일률적인
‘주인공’ ‘참 나’등의 표현이 얼마나 분별심을 유발하는 이중적 언어인지 그 병폐를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식’ 했다는 수많은 선사들의 입에서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언어가 반복되는
것은 ‘한 소식’이 자기 소식이 아니라, 주로 중국 당시대의 혜능慧能과 조주趙州 같은
선사의 ‘묵은 소식’에 의지하기 때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불제자인 출가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외면하고, 특정시대에 유행한 수행을 받드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간화선을 수행하는 선사들이
무의식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무식해도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간화선 아니면 사도邪道라는 말을 위빠사나 등이 일반화된 지금은 공공연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그 말에 이의를 다는 것 자체가 수행법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조계종의 정통 수행법이 곧 보조 이후 한국불교에 정착된
강력한 간화선임을 부정하거나, 간화선 자체가 문제가 있는 수행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한국불교의 패가敗家적 망신은 간화선으로 불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데 실패했음은
물론, 혜능을 부처보다 앞세운 선사들 때문에 경전을 무시하는 오만함이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승가로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바라밀
수행마저 망각해 버린 데서 오는 당연한 과보라고 생각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본래 별 볼일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폭설이 잔뜩 내려 있는데 서리가 내려 봐야 무슨 표시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설상가상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어려운 일이나 불행이 겹쳐서 일어나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을 이렇게 이해하면 눈을 우습게 아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오류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내용이 갖는 오류도 대단히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고 제가 말하고 있는 불교가 소승불교입니까,
대승불교입니까? 대승불교입니다. 분명히 대승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대승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100년 후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불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모든 오류와 착각을 바로잡고 긍정적인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 하겠습니까? 이 일에 대한 사명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작금의 불교의 혼란은 흔히 세속에서 표현하듯이 승가의 문제인 인재人災이지
불법의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승가의 폐단이 드러남으로써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날 징조가 보입니다.
또한 불법은 화엄경의 「십지품」 같은 인류 최고의 가르침이 연구되고 더욱
발전되어,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갈등과 모순들을 해결하는 진리의 창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도 불교’ 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