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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풍광과 노마드의 사유
박제천
1.
김진명 시인의 세번째 시집 『유목의 시간』은 여러 가지 장점을 지녔지만 그 중에서 특별한 것은 언어와 사유가 일체화되어 소리내 낭송하다보면 마치 최면처럼 좋은 시에서 맛볼 수 있는 일종의 법열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도 시인이 자연의 생명력을 각종 시편의 모티브로 삼으면서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보상으로서의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스러운 쾌락’ 혹은 희열이며,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데서 발견되는 역설적인 만족일 것이다.
자연의 본질은 생명이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주의 대(大)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다. 이 우주의 대 생명력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면 그것은 곧 브라만, 지고의 신, 진여, 공, 실재, 또는 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의 말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 현명하고 공정하며 상냥한 길의 안내자이다. 이러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크 라캉은 이 언어를 대타자, 혹은 상징계라고 부른다. 이 세계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 질서화되어 있는 곳이므로 상징계라는 극도로 추상적인 체계에 의해 지탱된다. 이 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즉 말을 배우는 순간, 인간은 원초적인 사물성과 실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근원적 소외를 경험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생명력 자체인 실재(實在)가 상징계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언어라는 통로를 거쳐서만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언어활동은 하나의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쓰는 행위 또한 하나의 증상이라고 보는 이유는 실재가 상징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곧 증상이기 때문이다. 말과 이미지를 먹으며 생존하는 존재인 시인은 언제나 잃어버린 장소, 원초적 공간을 그리워하며 노래 부른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충동의 대상들은 말의 편린들에 실리거나 이미지의 옷을 입고 나타나 나르시즘, 욕망, 주이상스로 구성된 리비도의 장을 활성화한다. 그러므로 시 쓰기는 고통의 승화이며 ‘근본환상’이라 불리는 최종적인 기표 연쇄를 통해 이른바 ‘공백의 연안가’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그것은 기표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존재를 언어적으로 분절하는 기표 연쇄의 자동장치인 상징계는 이미 분절되고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그곳에 주체를 출현시키는 행위는 하나의 저항 행위이다. 시인들이 상징계라는 ‘아버지’를 부수고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인 실재계의 ‘어머니’에게로 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원초적 억압과 소외에 대한 저항 때문이다. 김소월의 시가 폭력적인 부성적 억압을 벗어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고 노래 부르며 잃어버린 공간인 그곳, 영원한 생명의 고향인 모성의 세계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시인들은 상징계라는 부성적 억압을 벗어나 자유로운 생명의 언어를 꿈꾼다. 그러므로 시의 이미지들은 상처의 흔적을 재구성한다. 이제 김진명 시의 기표를 따라가면서 그가 도달하려고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탐색해보기로 한다.
2.
흔히 현대인을 일컬어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고 부른다. 노트북 하나 옆에 끼고 도시의 숲을 가로질러 가는 현대의 유목민들과 달리, 시인은 “기타 한 대 둘러메고” 마치 “자유로운 집시”처럼 어디론가 떠난다. “낙엽화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한 점 바람”이 되어 간다고 한다. 그런데 화자의 주머니 속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진이 몇 장 담겨져 있다.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함을 볼 수 있다. “하늘거울”에 하루를 비춰보며 익숙했으나 이제는 사라져가는 “사랑했던 사람”들이 점점 더 멀어져 감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의 정서는 서러움이다. 서러움을 지닌 채로 유목민이 되어 떠도는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은 자의 모습이다. 아마도 그 상처는 “너”를 만나지 못해서인 듯하다. 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거세된 이 세계는 원초적인 사물성과 실체성이 상실된 곳이기 때문에, 인간은 탯줄이 잘리는 순간부터 영원히 잃어버린 태내공간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는 정신분석학자의 말처럼, “너”는 바로 잃어버린 그곳, 원초적 공간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김진명 시집 『유목의 시간』은 우리 삶에 어느새 깊이 자리한 노마드의 자유를 노래한다. 시인의 노마드는 정착민을 벗어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저곳으로 옮겨 사는 이주민의 것도 아니다. 삶은 한곳에 머물러 살되 정신은 자유 분방하게 사막을 돌아다닌다.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의 사유다. 시인의 정신은 집시처럼 바람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돌아다닌다. 익숙한 얼굴과 매일 만나는 삶이지만, 시인의 정신은 수억광년의 별을 지나서라도 너를 만날 때까지 너를 찾아나선다. 노마드의 삶은 외로움이다.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 한 점 구름처럼 멀어져” 가지만 “수억 광년 전의 별”처럼 시간을 타고 다시 찾아온다. 그때까지 시인은 “매일 유목민이 된다.”
김진명의 시는 때로 니체의 글처럼 잠언풍으로 나타나지만, 그 글에서 유목의 사유를 찾아 읽는 들뢰즈처럼 우리 역시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안개가 깊게 내린 계곡과 그 계곡을 환히 읽을 수 있는 “하늘거울”을 통해 낯선 시간을 타고 마침내 “너”에게 도달하는 유목민의 꿈과 마주친다. 김진명의 시를 나지막히 소리내어 읽어보자. 음절과 음절 사이의 침묵을 음미해 보자. 우리는 어느덧 유목의 사유 속에 깊이 가라앉아 한덩이 해처럼 빛나는 우리의 미학정신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유목민, 기타 한 대 둘러메고 하루를 열고 먼지를 풀풀 내며 자유로운 집시가 된다 낙엽화석이 되기 전 그저 한 점 바람이 된다 매일 저녁 어깨엔 노을의 손이 갈래꽃처럼 위로가 된다 주머니에는 익숙한 얼굴 겨우 몇 장만이 사진 속에서 웃을 뿐이다 또 하루가 간다 외로운 길 굽이굽이 바람이 달려간다 안개가 깊게 내리니 계곡은 하늘거울을 마주한 채 오늘을 비춰 본다 내가 만난 사람,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 한 점 구름처럼 멀어져 간다 바람이 서럽다 바람이 서성이며 수억 광년 전 별도 매일 시간을 탄다 너를 만날 때까지 매일 유목민이 된다.
―김진명 「유목의 시간」 전문(이하 김진명 시인명 생략)
좋은 시는 이처럼 읽는이에게 사유의 기쁨을 준다. 그것은 마치 불교제례에서 나비춤을 추는 승려나 나비춤의 한 동작 한 동작에 빠져들어가는 신도들이 자신의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방하착의 순간에 접하는 나비춤의 비상과 같은 법열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나비춤을 바라보며 거기에 공감하고 교감하며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가는 모습을 직절적으로 보여준다. 몸으로 올리는 공양으로서의 춤, 붓다의 가르침을 몸으로 표현하는 승무의 동작을 쫓아가며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추스른다. 삶에서의 고통과 좌절은 마음속에 한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것은 예술을 탄생시키는 바탕이 된다. 한이 극한에 도달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초극적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창조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공백의 연안가’에 이를 때 비로소 ‘근본환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한의 절벽에서 생각이 끊기”게 될 때 비로소 한은 승화되고 예술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시선은 코끝을 향한 채 나비춤을 춘다
흰색 장삼에 황색 청색 녹색으로 여섯 개 대령을 드리고
메마른 땅에 물이 스미듯 나비춤을 춘다
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을 양손에 든 날개짓으로
나비 한 마리가 몸으로 공양을 올린다
방하착放下著 방하착放下著
근심은 내리고 기쁨은 높이고
텅 빈 허공이 나비가 된다
양발은 고무래 정丁자로 돌며
범패梵唄 음악에 맞춰
손을 모으고, 팔을 벌리고,
앉으면서 어르고, 앉아서 연꽃치기를 하고
양 날개 펴들며 선녀처럼 하늘하늘 앉았다
일어서며 반신요배半身搖拜를 하니
한의 절벽에서 생각이 멈추고
그 경계에 나비가 집착을 내려놓으니
나비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텅빈 ㅐ 가슴에 나비가 춤을 춘다.
―「나비춤을 추다」 전문
3.
이 세계는 근원적으로 괴로운 곳이다. 모든 존재가 변해가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남이 있으면 필연코 헤어짐이 있고 구해도 마음대로 구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는 고통스러운 이곳을 사바세계, 곧 ‘참고 견뎌야 하는 땅’ 인토(忍土)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에 번뇌가 사라져서 맑고 고요하다면 그곳은 곧 정토(淨土)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진명 시의 화자는 언제나 “마음의 마당”을 쓴다(「부활」). 김진명 시의 화자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곧 마음을 닦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한 행위는 때론 자연과의 만남이나 예술 작품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등산이나 여행과 같은 신체적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어쩌면 시인에게는 삶의 모든 행위가 마음의 마당을 쓰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자연과의 교감과 찬미, 생명의 연대와 초월, 지난날의 추억과 회감,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유목과 방황에 매달린다.
제주 솔동산 문화의 거리, 이중섭 산책로를 걷는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흰 소가 길섶에서 튀어오를 것 같다 두 아들과 게를 잡던 자구리해변 그 바람 그 하늘 그 바다가 행복이었던 그 시절 여전히 그리운 바다가 하얗게 물거품을 부순다 문섬과 섭섬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범섬을 불러 본다 삼형제 바위가 정다운 제주도, 두 눈 가득 찬란한 제주 바다를 보며 거친 바위틈에서 가장 큰 외로움을 그린 그 사람, 오늘따라 철썩철썩 바다가 사람 같다.
―「이중섭 산책로」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제주도를 여행하는 도중, 솔동산 문화의 거리에 자리한 “이중섭 산책로”를 걸으며 불운했던 화가 이중섭에 대해 생각한다. “그 바람 그 하늘 그 바다가 행복이었던” 순간들은 시대와 상황의 변화로 인하여 잔인하게도 사라져 버리고 그림그리기라는 주이상스, 즉 고통 속의 희열을 위해 “가장 큰 외로움”을 그렸던 한 예술가를 그리워한다. 가난 때문에 부인과 자식들을 일본에 보내고 홀로 바닷가를 거닐며 절절한 그리움을 그렸던 예술가 이중섭을 떠올리며 시인 또한 “두 눈 가득 찬란한 제주 바다를 보며” 자신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토로한다. 삶이란 이처럼 근원적으로 괴롭고 외로운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고통스러운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므로 그러한 고독과 한에 남달리 익숙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시가 다음의 시다.
하늘에 번개가 쳤다
내 마음에도 번개가 쳤다
대추나무가 번개를 맞았다
쩍 갈라지는 대추나무 소리와 함께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당신과 나의 얼음벽처럼
구름과 대지가 끓어올라 전기가 터져버렸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온 누리가 엎드렸다
시간이 무너지고 무無가 되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도장을 팠다
도장 찍을 때마다 번개가 번쩍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당신과 내가 하나된 내 마음의 번개입니다.
―「번개 도장」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번개”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고통의 절정, 한의 극한, 절실함의 극점에 이른 순간의 느낌을 전달한다. “시간이 무너지고 무(無)”에 이를 때 즉 ‘공백의 연안가’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예술적 창조의 계기가 시작됨을 보여준다. “당신”은 바로 영감의 순간, 일상의 타성에 젖은 시인의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번 시집에서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이중섭의 그림, 자코메티의 조각, 바하와 베토벤의 음악, 소동파의 시와 미당시집 등 매우 다양하고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지식은 대타자의 주이상스이며, 기표의 개입에 의해 형성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지식들과의 만남이라는 삶의 계기들을 통하여 시인은 자신의 마음의 ‘공백’에 이르고 창조의 길로 나아간다.
4.
범종의 소리가 부처의 음성이라면, 그 소리를 들은 뭇 생명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자연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 그 자체이고 언제나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는 우리 마음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이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기 위해 시인은 다양한 소리의 탐구를 보여준다. 시는 곧 시인의 영혼의 소리이고, 구원을 갈망하는 음성이다. 생명의 근원인 “심장의 고동소리”이기도 한 그 소리는 어쩌면 아득히 먼 시원의 장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닐까? 시인이 시 「오」에서 근원의 소리에 가까운 “오”라는 음에 감격하며 “천상에서 내려온 별똥별”에 비유하는 것도 그 소리가 영혼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탐구하는 “중심의 하모니” 혹은 근원의 소리, 자연의 소리는 어떠한 모습일까? 시 「흔들리는 부레」에서 화자는 클래식 기타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하의 곡을 연주하면서 “중심의 진동”을 느끼기도 한다.
팔월, 용문산 사나사 계곡을 오르면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산꼭대기에서 내려온 바람이 지휘봉을 잡으면
소나무 삼형제는 콘트라베이스로 여름을 연주한다
나는 온 몸으로 숲의 향기를 맡으면서
소프라노 계곡소리에 맞추어 알토를 노래하고
코로 흥얼대면 나비도 캐스터네츠를 치고
작은 나무들은 바이올린을 열심히 켠다
지글지글 해가 타오르면
검은 양복을 입은 매미는
테너로 등장하니 산이 찢어진다
팔월, 용문산 사나사 계곡에는
『전원교향곡』이 울려퍼진다
전생에 내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전원교향곡」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한여름에 사나사 계곡을 오를 때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으로 듣는다. 그것은 본래부터 원래 자연의 일부인 시인이 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처럼 마음이 기쁘고 평화로움을 보여준다. 그곳은 곧 마음의 본지풍광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지휘를 하면 “소나무”는 “콘트라베이스” 소리처럼 깊고 그윽한 저음으로 다가오고 계곡물 소리가 “소프라노”로 노래하면, “작은 나무”들은 “바이올린”을 열심히 켜고 시인은 거기에 호응하여 “알토”로 흥얼거린다. 재미있는 것은 “나비”를 캐스터네츠로, “검은 양복을 입은 매미”를 “테너”로 빗대어 매우 감각적인 비유를 보여줌으로써 시 읽는 재미를 더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시인의 시심이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순수한 동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지막에 시인은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식물들과 동물들이 “전생에 내 친구들이 아니었을까”라고 하여 연기론적 친밀감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는 삼라만상이 다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속적 세계관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다. 다음의 시에서도 이러한 연속적 세계관에 기반한 소리에 대한 탐구는 이어진다.
알타이산 아래 몽골초원에서
한 사람이 코와 혀를 분리한 흐미 창법
자연에 숨겨져 있던 태고의 소리로
새 소리, 물소리를 자유자재로 낸다.
(중략)
양의 젖을 짜는 아낙네의 마음의 소리
몽골 초원에 마른 풀이 살아나는 소리
나의 목젖을 울리는 땅의 숨소리
어미의 마음을 타는 마두금 악기 소리
강물소리를 연주하는 초르 악기 소리
알타이산 아래 몽골초원에는
바위에 부는 바람 같은 태고의 소리
산에서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평화의 선율,
흐미Khoomei로 퍼지고 있다.
―「태고의 소리」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은 자연에 숨겨져 있던 “태고의 소리”로 물소리, 새 소리, 염소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자유자재로” 내는 “흐미 창법”을 소개하고 있다.
몽고의 전통 창법인 흐미는 “산후우울증”에 걸려 새끼에게 젖을 물리지 않는 어미염소로 하여금 다시 새끼에게 젖을 물리게 할 정도로 만물을 감화시켜 상처를 치유하는 소리이다.
그것은 고된 노동으로 지친 아낙네의 “마음의 소리”이며, “마른 풀이 살아나는” 생명의 소리이며, 시인의 “목젖을 울리는” 대지의 소리이기도 하다. “강물 소리를 연주하는 초르”의 소리이자, “어미의 마음을 타는 마두금”의 소리인 그것은 범종 소리처럼 울리는 태고의 소리이자, 영혼의 소리이며 “평화의 선율”이다.
5.
생명은 파동이다. 욕망과 의지의 파동이다. 뭇 생명은 대자연의 파동 안에서 춤춘다. 생명의 리듬에 따라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늙어가듯이 대자연은 성실하게 때를 맞추어 싹 틔우고 꽃 피운 다음 열매를 맺는다. 이러한 대자연의 성실함을 『중용』에서는 ‘능구(能久)’라고 표현했다. 괴테는 자연의 그러한 성실함을 ‘자연은 확고하다. 그 걸음걸이는 정확하고 예외는 극히 드물다’라고 한 바 있다.
가녀린 목숨 하나가 동면을 깨고
얼어붙은 땅을 치열하게 뚫었다
나도 어둠을 뚫고 꽃대를 세운다.
―「얼음새꽃, 복수초」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은 때가 되니 어김없이 “동면을 깨고” 일어나 꽃을 피우는 자연의 엄격한 질서와 생명의 의지를 내세워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는 “가녀린 목숨”일지언정, “얼어붙은 땅을 치열하게 뚫어”내는 강렬한 생명의 의지를 추앙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시인 자신의 마음도 겨울의 암울했던 “어둠을 뚫고 꽃대를 세우”는 새로운 다짐과 의지를 갖게 됨을 피력한다. 자연은 W. 하베이의 말처럼 ‘신이 쓴 위대한 책’이다. 인간은 거기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힘을 얻는다.
김진명 시인의 감성은 순수하고 투명하여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그 축제와 향연에 동참하여 시적 상상을 전개한다. 철학자 존 듀이가 ‘생명이란 환경에 대해서 작용하는 행동을 통하여 자기를 갱신(更新, renewal)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듯이, 김진명은 ‘신의 묵시록’인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묵시록’인 예술로서의 시를 창조하려고 한다.
가파도 청보리 익어갈 때면
제주 하늘이 노을에 기대어 시를 쓴다
하늘과 바다가 하루 종일 닿아 있고 싶어
그 이별을 노을로 붉게 풀고 있다
누구라도 방파제에 걸터앉아 수평선을 보면
그리움 풀어헤친 시인이 된다
바람 타고 떠도는 방랑시인이
붉은 하늘이 되어 외로운 바다를 쓰고 있다.
청보리 익어갈 때면
제주 하늘이 노을에 기대어 시를 쓴다
하늘은 바다를 품은 시인이다.
―「하늘은 시인이다」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제주 하늘”에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시적 몽상에 젖어 든다. 하늘과 바다가 헤어지기 싫어서 노을이 붉게 진다는 재미난 상상을 한다. ‘신의 예술’인 자연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그곳’을 그리워하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은 자신을 “바람 타고 떠도는 방랑시인”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방랑시인은 언제나 외롭다. 화자는 그 외로움을 자연현상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유월의 바람 따라, 수국 세상이 온다
절정과 절정이 다투고 있는 수국 밭에
수국들이 권투선수처럼 한 치라도 더 뽐내려
꽃봉오리 달린 꽃대를 쭉쭉 뻗는다
꽃대들의 잔치에 초대받은 나
(중략)
수만 개의 꽃이 꽃을 등에 업은
하얀 빛 하늘 빛 축제의 향연
꽃대들의 잔치에 초대받은 나
정작 나는 눈이 멀고
수만 마리 꽃나비가 시를 쓴다.
―「유월의 수국」 부분
생텍쥐페리는 그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이 얼마나 신비로운 승화(昇華)인가’라고 감탄한 바 있다. 시인은 위의 시에서 “절정과 절정이 다투고 있는” 수국밭이라는 자연의 공간에 초대받고 놀라운 생명의 향연에 황홀해 한다. 그것은 곧 “하얀 빛 하늘 빛 축제의 향연”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놀라움에 시를 쓴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승화’의 순간이라 할 만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꽃은 핀다
당신을 사랑한 미스 김이
담벼락 너머로 입술을 쭉 내밀고
보라빛 라일락 향기를 당신에게 던집니다
전쟁 중에도 미스 김 라일락은 경계를 넘습니다
밤하늘 별들도 서성이는 밤이면
미스 김은 담벼락 가득 뜬눈으로
보랏빛 향기만 밝히고 있습니다.
타자수였던 미스김
또도도독 또도독 드르륵
또도도독 또도독 드르륵
오월마다 미스 김 라일락이
당신 담벼락을 넘어갑니다.
―「미스 김 라일락」 전문
베르그송이 그의 명저 『창조적 진화』에서 언급한 바처럼 생명은 전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극한 상황에서 생명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렬해지므로 “미스 김”이 “담벼락 너머로 입술을 쭉 내밀”듯이 언제나 우리의 경계를 넘어 유혹해온다. 시 「자목련과의 탱고」에서는 그것이 좀 더 관능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탱고 한 번 추실까요?”라며 제안해오는 것이다.
6.
김진명 시의 화자는 속세에 살면서도 탈속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욕망을 마음껏 펼치려 하는 공간에 살면서도 화자는 늘 욕망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욕망이 야기하는 탐욕의 번뇌가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 개방하려는 시스템이다. 돈만 있으면 욕망의 해방이 가능한 세계 안에서, 자본가는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 위해 끊임없이 유혹한다. 광고라는 치밀한 장치를 통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한 유혹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를 넘어” 훅 들어오곤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러한 공간을 잠시 벗어나거나 마음속의 탐욕을 내려놓는 일이다.
나는 부처가 되고싶어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본다
처음엔 호흡을 얕게 하고
점점 깊이 있게 호흡을 한다
심장만한 보리수 이파리들도 함께 명상을 한다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가을에
가부좌를 틀고 빈 마음으로 있다
왜 죽을 목숨이 태어나는 걸까
뼈 없는 시간과 공간에 앉아
방황하는 풀과 물이 있는 곳으로
나를 힘들게 이끌어 가려 한다
가시덤불이 보이고 번뇌가 따라온다
오늘, 이걸 내려놓을 수 있을까.
―「방하착」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초월한 붓다가 되고 싶은 마음을 피력한다. “방하착(放下著)”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의 용어로 내려놓는다는 의미이다. 화자는 보리수 아래 앉아 붓다가 했던 명상과 호흡을 따라 해 본다. 세상은 매정할 정도로 무상하여 사랑했던 피붙이들조차도 때가 되면 우리 곁을 떠난다. 시인은 “아버지 돌아가신 가을”에 슬픈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세계의 근원적인 무상과 생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의문을 던져 본다. 하지만 “가시덤불”과 같은 괴로운 번뇌가 따라온다. 시인은 “오늘, 이걸 내려놓을 수 있을까”라고 탄식하며 마음속의 번뇌를 내려놓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토로한다. 그래서 세속의 모든 것들을 온전히 내려놓고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가신 한 스님을 떠올린다.
당신은 무명초 머리를 깎고
삶도 죽음도 초월한 채
무명옷 한 벌 입고
후박나무 아래 빈 의자만 남겼습니다
주인 잃은 흰 고무신 한 켤레만
빈 의자를 바라보며 풍경소리 듣습니다 /
불 속에 책과 욕심을 던지고
빈 의자는 좌불한 채로 있습니다
불일암 대숲 수백 개의 찬바람이
마음손을 흔듭니다
섬진강 매화를 향해 앉아.
―「묵언 수행」 부분
위의 시에서 화자는 “빈 의자”라는 오브제를 통해서 참된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다 간 스님을 회상한다. 그는 “후박나무 아래 빈 의자”와 “흰 고무신 한 켤레만” 남기고 떠났다. “불 속에 책과 욕심을 던”져버리고 “섬진강 매화를 향해 앉아” 수행했던 스님은 “불일암 대숲”에서 “찬 바람”이 되어 화자에게 손을 흔든다. 시인은 말을 멈추고 “묵언수행”을 하며 자신은 따라 하기 어려운 그러한 삶을 동경한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생명의 샘’이자 ‘신이 쓴 위대한 책’인 자연을 향해 다가간다.
용문산 제일 낮은 계곡에서
물방울 한 개가 삼보일배를 한다
나도
탐욕 한걸음
노여움 두걸음
어리석음 세걸음
몸의 죄가 한 걸음
입의 죄가 두 걸음
생각의 죄가 세 걸음
(중략)
시간이 무너지고 내가 무無가 되며
백운봉에 다다르니 무념무상無念無想
내가 용문산이 된다
―「삼보일배三步一拜」 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은 지극한 마음으로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삼보일배”를 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소에 찌든 마음을 비우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죄들을 씻으며, 진리의 화엄세계인 자연 속으로 다가간다. 그렇게 속세의 번뇌들을 내려놓고 경건하게 걸어가다 보니 세속의 “시간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간을 만나게 되고, 아집(我執)으로 가득했던 나를 비우니 내가 “무(無)”가 되어 “백운봉”에 닿았을 때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평온한 상태, 불가에서 말하는 평상심(平常心)에 이르는 경험을 피력한다.
김진명 시인의 감성은 순수하고 투명하여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그 축제와 향연에 동참하여 시적 상상을 전개한다.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화자는 대자연의 성실함과 끈기에서 ‘신비로운 승화’의 순간을 만난다. 무상한 세월의 쓸쓸함과 상실의 아픔을 노래하며 “마음의 마당”을 쓸던 시인은 자연에서 위로를 받으며 아픔과 고독을 달래주는 근원의 소리를 탐색한다. 숨겨져 있던 태고의 소리를 탐색하며 시심을 불태우던 시인은 대지의 소리이자 치유의 소리인 “흐미 창법”을 만난다. 그의 시는 속세에 살면서도 탈속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욕망을 마음껏 펼치려 하는 공간에 살면서도 늘 욕망을 내려놓는 연습 속에 시인은 언젠가 무욕과 무념무상의 평상심에 이를 것이다. 바라건대 본지풍광과 노마드의 사유가 접점을 이루면서 김진명의 시가 더욱 치열한 상상력과 완미한 서정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