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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일본에서의 활동, 국내 입국선교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
들어가는 말
천주교는 선교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선교는 천주교의 박해를 무색하리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독교는 1876년에 있었던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과 1882년(고종 19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부터 본격적인 전래가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 사회 관리들 가운데 김옥균과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의 개화파 인사들은 근대화를 지상의 과제로 삼았으며, 낯선 국가의 종교를 묵인하거나 인정했기 때문이며, 선교사들의 노력과 시대적 요청에 의해 개신교는 빠른 속도로 번저 갔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 연구논문은 이렇게 순조롭게 선교가 된 시대적 배경과 입국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의 외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살펴보고 입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신교를 보다 빨리 정착하게 한 선교정책과 교단의 선교지 분할에 대해 살펴보고 연구를 끝맺음할 것이다.
Ⅰ. 개신교의 수용활동
개신교의 수용의 과정은 그 시기와 지역을 고려할 때 네 가지로 중국․만주․일본․미국으로부터이다. 개신교의 한국수용과정은 구미제국의 동양진출과 시기를 같이 한다. 그들은 먼저 중국과 일본을 문호 개방시켜 무역거래를 트고 외교관과 상인들을 상주시켰다. 이 때를 전후해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전개됐다.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활동의 시작은 19세기로 대부분 서구계통이다. 그 가운데 귀츨라프와 윌리암슨, 그리고 토마스 목사는 한국의 복음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이들의 염원은 만주에 와서 선교를 했던 로스․매킨타이어 등이 성서를 한글로 번역, 번역된 성서를 배포하고 전도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1870년대 말에서 1880년대 초기의 일이다.
만주지역이 진취적인 서북 청년들과 연결됐다면 일본을 통한 기독교의 접촉은 개화파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수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수정은 농학을 공부하러 일본에 가 복음을 접했고, 성서번역과 동경의 한인교회 설립에 공헌이 컸다. 미국교회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
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 선교사(독일,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개신교의 동양선교는 18세기 말에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영국인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인도선교(1793년),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중국선교(1807년), 미국인 저드슨의 버마선교(1812년)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밀른이 1813년에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마카오에 도착했고, 영국 회중교회의 중국선교사로서 매드 허스트가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17년에 말라카에 도착, 모리슨과 밀른을 도와 출판 선교사업을 하게 된다.1
귀츨라프의 한국방문은 산업혁명에 따른 서구세력의 동양진출과 개신교 해외선교와 관계가 깊다. 유태계 독일 태생인 귀츨라프는 모리슨 선교사의 선교담을 듣고 선교에 비전을 두었으며, 1726년 7월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동남아의 바타비아를 향한다. 그곳에서 아내와 사별후 중국선교를 떠난다. 중국에서 모리슨의 집에서 여장을 푼 그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로부터 1천톤급의 군함 로드 함허스트호를 마련하여 중국 북쪽과 한국, 일본 오끼나와 및 타이완 등 항해 계획을 세우고 귀츨라프에게 통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2 이 순방의 목적은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는 것과 그 지방 관민의 통상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는 데 있었다.3 드디어 1832년 2월 27일에 동인도 회사 소속에 선장 린계이를 태우고 타이완, 복주(福州), 영파, 상해 및 산동반도의 위해위를 거쳐 황해 장연지역을 질러 7월 17일에 한국 해안에 도착한다.4 아마도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부근인 듯하다. 그들 일행은 노인을 만나 한문으로 얘기를 나누며, 책과 물건을 주며 접근을 시도했다. 또한 한국인과 물물교환을 원했고, 지방관을 통하여 조정에 청원서를 보내려고 시도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접촉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5
귀츨라프와 린제이는 7월 23일경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古代島) 앞에 정박한다. 홍주만은 1816년 바실 홀(Basil Hall)이 이곳을 측량해서 자신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다. 그들 일행은 그곳에서 홍주목의 관리인 듯한 지방관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 국왕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선물과 함께 국왕에게 보낸다. 한편, 이들은 배에 올라온 조선 사람들에게는 전도문서를 나누어주는가 하면, 지방 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한다.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으나, 국법에 어긋난다고 해서 조선인들은 거절을 표한다. 귀츨라프는 이들 틈에서 약을 계속 나눠주며, 좋은 호응을 얻는 데는 성공한다.6
7월 27일자 린제이의 일기에 ‘양이’라는 조선 사람으로부터 한글 자모를 써 받았고, 귀츨라프가 주기도문을 한자로 써 주었다7고 적고 있다. 8월 9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내려온 특사는 귀츨라프가 보냈던 서한과 선물을 도로 돌려주면서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음을 알려온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관리들로부터 약속 받은 식량을 공급받은 후 조선의 해안을 떠나게 된다. 조선 해안에 머문 기간은 한달 남짓 된다.8
귀츨라프의 한국방문의 성과가 당장 어떤 효과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제주도에 선교관을 설립하자는 구상을 높이 평가되지만, 이것은 상업(교역)이 안되었을 때의 방안이었다. 반면 그가 타고 왔던 로드 암허스트호가 해안을 측량하고 성책을 조사했다는 데서 그의 한국 방문이 본의 아니게 서구세력의 동양침략의 전위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 귀츨라프의 일지를 들여다본다. “어쩄든 이는(한국방문)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 우리는 한국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9
2) 윌리암슨 선교사
1855년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와 활약하게 된다. 과로로 2년 만에 귀국했지만,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로 다시 와 많은 업적을 남긴 선교사이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와 성서공회에서는 영국, 미국보다는 훨씬 늦게 이 해에 처음으로 8명의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게 된다. 윌리암슨은 주로 성서 출판과 반포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조선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지푸(芝罘)를 활동 근거지로 삼고,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에게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설명하게 된다.
1865년 가을, 그는 황해를 건너온 두 한국인과 접촉 -그들은 염주와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천주교 신자임으로 추측10- 하여 이들을 토마스 선교사에게 안내하여 토마스 선교사로 하여금 한국에 갈 것을 결심하게 한다. 이때 윌리암슨 선교사는 다량의 한문성서를 제공하여 제 1차 조선 방문길을 돕는다. 윌리암슨은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에도 노력한다. 그는 북중국과 동몽고에 여행하며 성서반포 및 복음선교에 힘을 기울였고, 스코틀랜드인들의 만주 선교에도 개척자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의 만주선교와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의 깊은 관심이 로스와 매킨타이어같은 신실한 후계자를 얻게 한 것이다.
1883년에는 중국내지 선교회 소속의 의료 선교사 다우드웨이트(Douthwaite)가 조선방문 선교를 하게 된 것도 윌리암슨의 요청이기도 하다. 1884년 China's million11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선교부의 한 멤버인 다우드 위이트 씨는 윌리암슨 박사의 요청에 따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일로 한국을 방문했다.”
3) 토마스 선교사
(1) 1차 황해도 해안 전도 : 1865년 8월 31일, 지푸 주재 영국 영사관에 여권을 신청, 9월 4일에 출발하여 이달 13일에 한국 서해안에 도착한다. 그는 2달 반 동안 체재하면서 한국 천주교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며, 윌리암슨으로부터 받아 간 성서를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인다. 다음은 그가 런던선교회 티드만 박사에게 보낸 한국선교 보고서12의 한 부분이다. “이 곳에서도 저는 성경을 전파하며 3일간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이곳 백성은 친절했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서해안에 연한 2개 도를 잘 알며, 장래에 다시 그 백성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다수의 단어와 대화를 표준말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1866년 새임지로 북경이 정해지자 북경에 머물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면서 지난해 자신이 직접 나눠준 성경이 평양까지 흘러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선교열정이 다시 되살아나 한국 선교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때쯤 프랑스 신부학살에 대한 프랑스 함대 원정에 통역으로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게 된다.
(2) 2차 황해도 해안 전도 :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9일, 지푸를 떠나 한국을 향한다. 일주일 후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냈고, 평양쪽으로 강 상류를 따라 올라갔다. 조선측은 그 배가 닿는 곳마다 문정관(問情官)을 파견, 목적지와 항해 목적을 물었다. 통역인 토마스는 문정관에게 천주교 학살을 문책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를 믿으며, 그들의 목적이 야소교를 전파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셔먼호가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것은 한국관민들을 두렵게 했다. 처음엔 땔감과 양식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친절을 보이던 조선측도 중군(中軍) 이현익이 저들에게 붙잡혀 억류당하고 셔먼호에서 대완구(大碗口) 및 조총을 쏘아대자 적극적 대응으로 돌아서게 된다. 긴장의 며칠이 흐르고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모래톱에 좌초13되고 만다. 결국 물과 식량이 떨어지자 약탈 행위까지 불사하였고, 교섭에 나선 조선 관리까지 납치해 셔먼호는 화공세례를 받게 된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당시 27세) 선교사는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순교14당하고 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토마스 목사의 순교와 함께 끝나지는 않았고, 이 배의 행방을 찾던 미국 해군의 노력으로 뒷날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조선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이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그 뒤를 이은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어진다.
2. 일본에서의 선교사업
1) 이수정의 개종과 신앙활동
1882년 9월 온건개혁파 양반학사였던 이수정은 당시 조정의 유력자 민영익과의 친분과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게 된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으나,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친구 안종수가 전해준 일본의 기독교인 농학자 쯔다센(律出仙)을 만나보고자 하는 열망이 그를 일본으로 인도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의 배려로 도쿄 외국어 대학의 한국어 교수직을 맡아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보장받은 그는 도착후 곧 쯔다센을 찾았다. 먼저 농사법, 법률, 우편 등 재 문물에 대해 대화를 나눴으나 두 사람의 화제는 산상수훈 등 기독교의 교리와 가치에 모아졌고, 이수정은 여기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미 국내에서 천주교와 기독교에 관한 예비지식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쯔다센으로부터 받은 한문성서를 탐독하며 기독교의 진리에 매료되게 되었고, 1882년 도쿄 축지교회(築地敎會)의 성탄절 예배에 참석하여 큰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1883년 초부터 나가다와 함께 한 체계적 성경공부에서 이수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해 4월 29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 W. Knox) 입회하에 노월정(盧月叮)교회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일본에서 세례받은 한국 첫 개신교 신자이다.)15
유창한 일본어와 정확한 설교, 예술적 작시로 명성이 높던16 이수정은 그해 5월 도코 싱에이교회에서 모인 제 3회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리게 되는데, 당시 모임에 참석하였던 일본 교계 지도자 우찌무라는 당시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17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더 한층 오순절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무엇인가 기적적이요 놀랄 만한 사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온 회중이 다같이 느꼈다.”
5월 12일, 이수정은 한문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요한복음 14장에 근거하여 신인상감(神人相感)의 원리를 ‘등잔의 심지가 타는 것’과 ‘종이 울리는 것’같은 한국적 비유로 표현하였으며, 기독교의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불교의 자력 구원관과 비교, 설명하기도 했다.(이 글은 문서로 남아 있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 고백서이다.)18
복음의 신비를 깨달은 그는 당시 일본에 가 있던 30여 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동경외국어학교교사 손봉구 등 7,8명을 세례 받게 하였고, 이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정기예배를 드리므로 1883년 말 도쿄에 최초의 한인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수정의 또 하나의 공헌은 미국 선교사의 한국 파송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낸 사실이다. 1883년 12월 13일부로 선교잡지인 ‘The Missionary Review'에 한국의 선교적 상황을 소개하고 한국으로의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는 글을 실음으로 초기 한국에 나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동기를 북돋아 주고, 결국 일본 주재 매클레이(R. S. Maclay) 선교사의 한국방문을 이끌어 낸 결과를 가져왔다.
(2) 성경번역과 출판
전도의 사명을 크게 느낀 이수정은 성서의 한국어 번역이 절실함을 깨닫고 성탄절 축하 예배 때 만난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 Loomis)와 헵면, 마라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19 한문신약성서에 한국식 토(吐)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縣吐漢漢新約聖書)와 순한글 복음서인 ‘신약 마가전 복음서 연히’를 번역, 간행하였다. 번역은 1883년 5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먼저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방법으로 시작한 것은 그 경험을 식자층인 유학생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사도행전까지는 6월 초에 완성되었는데 다소 이해가 쉽지 않은 서신서 때문에 6월 21일 경에야 신약 전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1884년 요코하마의 대영 및 외국 성서 공회를 통해 출간되었는데, 복음서와 사도행전만 간행된 것은 한글 성서의 필요가 더 절실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 ‘현토한한 신약전서’는 이 후 국한문혼용성서의 번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한성서의 번역이 끝난 6월 말부터 이수정은 한글성경 번역에 들어갔는데, 첫 번역 대상으로 마가복음이 선택되었다. 이 복음서는 1884년에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되어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히’라는 이름으로 1885년 요코하마의 미국 성서공회에서 1천 부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일본 도착과 때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이 성서가 조선에 들어올 때 언더우드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고, 이 후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송덕조(宋德祚) 등의 공역으로 개정되어 ‘마가의젼한복음셔언히’로 다시 요쿄하마에서 출간되었다.20 이수정은 계속해서 누가복음 등 나머지 성서번역에 착수했지만, 출판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뒷날 루미스에 의해 언더우드에게 전달되어 개정을 보게 된다. 이 무렵 갑신정변의 여파가 일본에 파급되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이수정은 친일의 혐의를 받아 1886년 귀국후 곧 관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백낙준 박사는 이수정이 배교했다는 사료를 공개한 바 있다.21
Ⅱ.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활동
1. 개신교가 빨리 정착하게 된 시대적 배경22
개신교 신앙의 자유는 ①개신교와 우리나라의 첫 접촉인 1832년 독일인 Karl Gutzlaff 목사의 통상 요구23에서 부터, ②1872년 Ross 목사 등에 의해 개신교 전래가 본격화된 시기와 ③1886년 카톨릭은 공인되었으나 개신교는 1888년 예수교 전도 금지령을 받은 시기를 지나서, ④유명무실 해지긴 했으나 금지령이 여전히 존재하던 시기를 지나 ⑤1898년 6월 조선 정부가 북장로회 선교사 W. L. Swallen에게 선교사 자격으로 ‘전도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는 일종의 여행증명서인 호조를 발행할 때24까지 무려 66년이나 걸렸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전부터 작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진행된 Ross 목사 때부터 잡는다면 약 18년이 걸렸다. 이것은 천주교가 1783년의 이승훈 때부터 잡더라도 1886년까지 103년이나 걸린 것을 감안한다면 무척 빠른 시간이다.
개신교가 이렇게 빨리 정착된 데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알맞은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외적으로는 이미 개화한 일본과 서구 열강들 사이25에서 쇄국정책의 실패의 결과로 약소국을 벗아나지 못한 위기의식 속에서, 내적으로 전통적인 유교와 불교의 쇠퇴와 동학혁명을 인한 사회적 혼란26이 겹쳐져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도 대다수의 민중들이 빈민층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의식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쇠퇴해가는 조선을 구할 새로운 그 무엇을 바라게 만들었다. 먼저, 조선의 개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서구세력과 분리될 수 없는 기독교에 대한 적극적 수용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보수파와의 갈등을 인하여 자신의 세력 유지를 위해 그러한 노력은 더욱 가중된다27. 한편, 주로 의주 상인들로 구성된 국경 무역을 통한 부를 축적한 학식과 지식을 겸비한 사람들은 불안한 사회를 구할 새로운 사상을 바라는 가운데 만주 지역에서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28. 또한, 빈민층인 대다수의 민중들은 현실적인 필요를 인하여 선교사들의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한 간접 선교에 노출된다.
이러한 조선 사람들의 마음은 미국의 제 2차 대각성운동과 백인우월주의적 대외팽창주의29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된다. 절대적인 필요가 공급을 만날 때, 그 어떠한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상황은 사람으로써는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이었다. 많은 오해와 핍박30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가 굳건히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만들어 놓으신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한국 기독교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은 최초로 상주 선교사들이 입국이다. 이들은 단기선교가 아닌 장기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1883년 10월에 코넥티커트(Connecticut)州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신학교연맹대회에는 장래의 한국개척 선교사가 될 두 사람이 참석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호레이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요, 다른 한 사람은 헨리 G.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였다.31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는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들은 한국교회의 장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입국하기 전에 한국은 기독교의 기반이 다져지고 있었다.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은 짧은 기간동안 일시적으로 방문하여 성경을 전해주고 갔으며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접하고 영접한 후에 다시 한국에 입국해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일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이수정이다. 일본에서 개종한 이수정32의 한반도 선교에 대한 미국교회에의 간곡한 호소는 1884년 3월 「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실려 세계교회의 관심을 급속도로 모았다. 또한 관서지방의 성서보급을 통해 민중층의 개신교선교를 지원한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는 급속히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실상에 놀라며 본국과 세계교회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국내 개신교의 요청에 의해 미국 장로교회가 맨 먼저 반응을 보여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한국주재 미국공사관의 官醫(관의)로 파송하였다.33
알렌은 의사와 선교사와 외교관을 두루 거친 사람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의 생명을 구해 임금의 신임을 받고 1885년 한국국립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887년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관 소속 서기관이 되었다. 알렌박사는 1889년 선교본부로부터 재임명을 받았으나 또 다시 1890년 8월에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었다. 1897년에는 주한미국공사겸 총영사로 승진되었고, 1901년에는 特命全權公使(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1905년까지 한국에 주재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쳐서 고종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34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에 관심과 기도를 하고 있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격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1884년 7월 28일 장로교본부의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는 한국최초의 선교목사로 임명을 받아 그 해 일본에서 이수정으로부터 언어훈련을 받고 1885년 4월 5일 그리던 한국 땅에 발을 내딛었다.
아펜젤러는 최초로 고종의 선교윤허를 받은 미국의 감리교회에 의해 1884년 10월부터 맥클레이목사의 주도아래 한국선교사업을 착수하고 그 이듬 해인 1885년에 미국선교사들과 함께 입국하게 되었고 이들은 각각 교육과 의료선교를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선교정책을 세웠는데 이들은 1891년에 중국 지푸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네비우스(John Nevius)목사의 선교전략을 제공받아 한국에 맞게 새롭게 전략을 채택하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대해서는 따시 설명하기로 하겠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자료를 검토한 결과 한국에서 선교사들의 주된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 지을 수 있다.35 그 중 첫 번째는 의료사업이었고, 두 번째는 복음의 전파였으며, 세 번째는 교육이었다.
1) 의료사업
의료선교는 미국 장로교회가 파송한 알렌(Horace Newton Allen)에 의해 시작되었다. 민영익의 생명을 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정부의 허락을 받아 1885년 2월에 최초의 국립병원인 廣惠院(광혜원)을 설립하였다. 광혜원은 그해 4월 23일에 濟衆院(제중원)이라 개칭하였다.36 이는 네비우스의 선교전략을 바탕으로 한국 장로교선교부가 작성한 선교전략중에 “의료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찾게 되고, 또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施藥(시약)만 가지고서는 별 효과를 낼 수 없다”고 제정한 선교전략이 말해주듯 한 나라에서 선교하기 위해 좋은 도구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의료사업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1885년 4월 10일 병원 안에 의료교실을 개설해 알렌과 헤론의사는 실용의술을 가르치고 언더우드목사는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37
이 시기의 의료사업은 네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국립병원 내의 의료와 의학교육, 국왕과 왕정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치료, 그리고 외국 거류민을 위한 일 등이었다. 감리교회 선교부는 1885년 9월 10일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스크랜톤(Dr. Scranton)의 주도하에 의료사업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국에 와서 처음 2,3개월 동안은 광혜원에서 알렌과 함께 일하다 자신의 사저에서 따로 병원 일을 보았다. 스크랜톤은 1886년 6월 15일에 정동에 건물을 마련하고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施病院(시병원)을 개원하였다.38
의료사업은 장로교와 감리교 뿐만 아니라 호주 장로교에서는 1896년에 부산에서 같은 해에 평양에서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의료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890년에는 성공회도 인천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2) 교육사업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장래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착안한 사업 중에 한 가지가 바로 교육이다. 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상호협조하였다.
선교사들의 교육사업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1885년 11월에 미국 公使(공사)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 설립 허가를 얻어서 이듬 해인 1886년 6월에 2명의 학생으로 정식시작한 培材學堂(배재학당)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교육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스크랜톤(Mrs. M. F. Scranton)부인은 1886년 5월에 최초의 여학교인 梨花學堂(이화학당)을 1886년 초에는 언더우드가 儆新學校(경신학교)를 각각 설립하였다.39
기독교학교의 설립 목적은 기독교 선교와 교육개화사상이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봉건사상에 사로잡힌 한국인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일본식민지 통치하에서 전 민족을 살릴 실력 있는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함에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제학당의 설립목적을 “근대문명의 지식을 주고 과학을 하게 하여 실력 있는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사회나 학교나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지도자를 육성하는데 있다.”고 하였다.40
또한 이화학당의 설립목적은 첫째가 보다 나은 한국인 양성, 둘째가 한국인의 긍지를 갖도록 함, 셋째가 예수의 인격에 의한 완전한 인격 陶治(도치), 넷째가 모범적 주부를 목적으로 하였다.41
숭실학교의 건학정신은 ‘敬天愛人(경천애인)’이었고, 영성과 지성, 그리고 덕성이 조화된 교육으로 교회의 일꾼과 사회의 지도자를 배양하려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교육의 기초를 두었다.42
貞洞女學堂(정동여학당)43의 교육이념은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받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인 사랑정신을 가르치고 배우는 기독교 전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초창기 교시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였다.44
또한 손인수는 그의 책 ꡔ서울교육의 배경, 서울교육사(상)ꡕ에서45 “기독교학교의 설립목적은 기독교 교육과 인간가치의 증진, 여권신장, 그리고 신식 생활방식을 보급시키는데 두었다. 다시 말하면 전도와 개화, 그리고 남녀평등과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손인수는 계속 기독교학교의 설립목적에 따른 교육이념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46
첫째, 선교의 방법, 신자들의 기독교적인 훈련, 유능한 敎役者(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둘째,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전달하여 이 나라를 개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미션학교의 설립은 기독교 교육의 실시와 더불어 서양문명에 계몽되고자 하는 국민의 여망에 응하려 함이었다.
셋째,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慣行(관행)과 舊態(구태)를 버리고 이 나라의 신생과 함께 새 정신, 새 능력을 지닌 새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세워졌다.
넷째, 남녀평등과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이같은 미션학교의 설립이념에 따라 전통사회의 젊은 여성들은 학교교육을 통하여 남녀평등이라는 휴머니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다섯째, 미션학교는 근대교육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데도 그 설립목적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미션학교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과 국가관념을 이해시켰으며, 특히 우리 글인 한글에 의해 여러 교과목의 교수는 민족의 기대를 갖게 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학교들의 설립목적을 살펴보면 대부분 ① 신앙 안에서 ② 개화와 계몽을 통해 ③ 한국인이 자기 나라와 문화에 대해 긍지를 갖도록 하여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 없이 자주적․자율적으로 자신과 사회, 그리고 민족의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자유․평등인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은 지극히 유교중심 사상이었고, 한문을 중시하는 시대였다. 그러기에 학문은 대부분 양반계층의 전유물이었고, 교육은 과거급제를 통해 개인의 부의 축적과 출세지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기에 기독교학교의 설립목적은 모든 백성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도록 가르치는,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민주주의의 일원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논자가 살펴본 바에 의해 다시 한 번 기독교학교가 교육이념에 끼친 영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서양교육을 통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한문과 주자학에 의해 보다 좁은 의미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양교육을 통해 세계관이 넓어 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평등사상이다. 양반과 서민, 백정 등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교육받을 마음만 있다면 똑같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기에 양반만이 지식인이던 시대에서 벗어나 서민과 상놈 계층도 나라를 생각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평등은 계급에서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성차별을 타파하고 여자에게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셋째는 민족의식이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선교를 떠난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민족의식이다. 선교사들은 선교와 말씀을 전하다보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문화와 민족의식을 알게 모르게 전달하고 강요하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에서도 초기 우리 나라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민족심을 심어 줌으로 나라를 생각하도록 도와주었다. 이것은 기독교학교에서 배출된 많은 의사와 열사, 그리고 민족적인 지도자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는 교육을 받는 목적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한문숭배시대에는, 또한 조선사회에서는 교육을 자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학교는 순수한 목적을 두고 교육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다섯째로는 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지도자를 배출해 내었다는 것은 우리가 묵인할 수 없는 위대한 영향이자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계 사학을 설립했다는 점도 큰 업적이다.
여섯째로는 官公立學校가 부실했던 때에 개화교육의 선각자가 되었고, 민주적이며 인간주의적인 교육사상의 도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함양한 것이다. 그리스도 정신이라 함은 사랑과 섬김, 그리고 실천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훌륭한 사상과 덕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지휘고하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셔서 이 당에 오시고 그의 생활과 사역을 통해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당하심으로 저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선물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믿고 따르고 실천한다면 양반과 서민, 배운자와 배우지 못한자, 남성과 여성,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고 연합하며,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3) 복음전파
선교사들의 주된 사역은 복음의 전파와 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다. 선교사가 이 두 가지 일 중에 한 가지도 실행하지 못하면 선교사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은 상주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부터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자국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은 자생하고 있는 신앙공동체를 복음적 교훈으로 지도 관리하는 일과 민족계몽과 근대화를 지원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소통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가장 효율적인 전도방법을 강구하던 중, 성경번역과 기독교 소책자 및 전도지 같은 것을 발간하여 나누어 주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47 효율적인 복음전파를 위해 이들이 한 사업 중에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교회의 설립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자국인인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의 전도로 세워진 소래교회였지만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교인으로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에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그 외의 교단에서도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48 이들은 교회와 책자 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1896년 현재 전국의 세례교인이 777명으로 성장하였으며, 1897년에는 장로교인 약 3천여명과 북감리교인 약 2천여명으로 성장하였다.49
4) 성경번역
성경번역은 개신교의 선교와 복음증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사역이다. 우리 나라에 개신교가 빠른 속도로 정착하거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한가지가 바로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부터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에 입국한 선교사들도 의료와 교육 사업을 우선적으로 착수하면서 성경번역도 즉각 착수했다. 1887년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성경번역 사업에 착수했다. 1890년 「누가복음젼」과 「보라달로마인셔」를 서울 미이미교회 인쇄소에서 나왔지만 사투리가 너무 많아서 1892년 「마태복음젼」이 나왔다. 그리고 1893년 종래의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개편하여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두었고 그 밑에 번역자회를 두어 체계적인 성경번역원칙을 갖고 번역에 착수했다.50
Ⅲ. 선교정책 및 지역 분할
1. 선교정책
초기에 선교사들은 서울을 거쳐 지방의 임지로 파송되었다. 선교사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은 선교지에 대한 정보들을 입수하며 한국어 공부에 힘썼다. 초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대체로 지역을 탐색하기 위해 여러 지역으로 여행에 나섰다. 그러다 선교 후보지가 선정되거나 선교지역에 대한 파송이 결정되면 그곳을 선교지부로 하여 상주하게 되는데, 복음, 의료, 교육에 종사하는 선교사들이 팀을 만들어 그곳에 파견되어 해당 기관을 세우고 선교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상주하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편 이웃 마을에도 순회하면서 전도하였다. 순회지역에 믿는 사람이 생기면 기도처소를 만들고 신앙공동체를 결성하였다. 이 공동체가 자라 교회로 성장하면 그 교회를 이끌어갈 대표자를 세웠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선교사들에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많은 좌절들이 있었고 수고한 만큼의 열매도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890년 6월 중국 산동반도에서 1854년 이래 30년 이상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uis) 목사가 미국에 가는 길에 서울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2주간을 서울에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3, 4차례 깊은 회합의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선교사들은 그의 강연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가 쓴 선교 정책에 관한 저술들을 탐독하며 그의 선교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선교 방법을 받아드리기로 하고 그 방법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 선교정책을 네비우스 방법이라 부르는데 그 골자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광범위한 순회를 통한 선교사 개인 전도
(2) 자립선교: 모든 신자는 가르치는 자인 동시에 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다. 모든 개인이나 단체는 교회발전과 확장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
(3) 자립정치: 각 교회는 그 택한 무보수의 전도사 밑에서 치리받도록 하며 여러 교회를 돌아보는 조사는 각 교회가 봉급을 분담하도록 한다. 조사는 후일 목사가 되도록 한다.
(4) 모든 교회는 신자들에 의하여 자급하되 설립 초로부터 순회 조사의 봉급을 담당하도록 한다.
(5) 신자들을 성경반 지도자와 순회 조사의 지도 아래 조직적인 성경연구를 하도록 한다.
(6) 성서의 교훈에 따라 엄격한 훈련과 치리를 한다.
(7) 다른 교회와의 협조와 일치, 특히 같은 지역의 교회와의 일치 협조를 힘쓴다.
(8) 소송사건이나 또 그와 비슷한 일에 있어서 타교회에 간섭하지 않는다.
(9) 그 외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나 일반적으로 돕도록 한다.51
이 네비우스 방법은 한국인 신자들이 자립성을 강조하고 배양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교회가 정말 자기 자신들의 교회라는 실감을 갖게 하고, 또 교회의 경제적인 안정과 독립성을 추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뒤 1893년 1월에 장로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선교사 공의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선교정책이하 할 수 있는 10가지를 수립되게 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상류계급보다는 근로계급을 상대로 해서 전도하는 것이 났다.
(2)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찬 소녀들을 전도하는데 특별히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은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3)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세우고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여 많은 효과를 거들 수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이런 학교에서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내보내도록 한다.
(4) 앞으로 한국인 교역자도 이런 곳에서 배출된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5)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회개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노력을 다 기우려 명석한 성서 번역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6) 모든 종교서적은 순수히 한국어로 쓰도록 한다.
(7) 진취하는 교회는 자급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선교부의 보조를 받는 사람을 줄이고 자급하고 바치는 개인을 늘여야 한다.
(8) 한국의 대중은 동족의 전도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돼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가서 전도하기 보다는 소수의 전도자를 철저히 훈련시켜야 한다.
(9) 의료 선교사들은 병실에서나 또는 환자의 집에서 오랫동안 친절히 치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가르치고 본을 보여 깊이 마음에 박히게 할 수 있다. 시약소만은 효과가 별로 없다.
(10) 지방에서 와서 오랫동안 치료받은 환자들은 그 고향까지 찾아가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절한 대접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전도자를 위하여 넓은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52
이 정책은 한국 교회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데 공헌한 결정적인 선교 정책이 되었다. 이 정책으로 교회에 하층 계급과 부녀자층이 많이 늘게 되었다. 그리고 반봉건, 개화 사상에 많은 진보를 주게 되었고, 한글전용을 강조함으로 한글 문화에도 이 정책은 크게 공헌 하였다. 그러나 선교정책의 주 대상이 하층민, 부녀자층화 한다는 항이 한국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주는 반면에 교회의 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적 견해도 있게 되었다.
2. 지역의 구분
한국에 정착한 개신교는 19세기에 이르러 8개 이상의 교파가 선교활동을 하게되었다. 지금까지 세계 선교 역사에서 보여 주듯이 한 지역에 여러 교단이나 단체들이 들어 갈 때 사역에 대한 갈등과 경쟁의식 그리고 지역 분할에 대한 갈등은 달갑지 않게 있어 왔다. 한국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런 선교의 거점으로서 지역을 분할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먼저 장로교단에서 있어 왔다. 좀 늦게 들어온 침례교나 성공회 등은 지역 분담 같은 작업에는 별 생각을 안하고 있었으나,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사이에 또한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사이에는 이러한 움직임이 진행되었다.53
이런 분할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이유는 서울이나 대도시에 선교부가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주의 장로교 선교부가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확보한 경우 외에는 선교사들이 대부분 서울에 먼저 들어가 머물며 선교지역을 정하는 상태였다. 그것은 서울에는 외국 공관들이 있었고, 선교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먼저 서울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결과 서울이나 대도시에는 선교부들이 중첩적으로 포진하여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었고, 지역들이 중복이 되어 진출하게 되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복음의 소식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선교사들은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 각 교단 선교부끼리의 선교지 조정 등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때 아펜젤러의 제안에 의해 1888년 봄에 선교 지역을 분할해야 한다는 의견이 미 북감리교와 미 북장로교사이에 거론되었던 것이었다. 감리교를 대표하고 있던 아펜젤러는 함께 전도여행을 하며 가깝게 지내던 장로교의 언더우더와 선교지역 분할에 대한 협의를 계속 진전시켰다.
이펜젤러는 한국에서 두 교파가 선교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상이성을 인정하면서 공통된 바탕으로 일할 것과 서로 나란히 일할 것, 그리고 서로 협조하고 서로를 자극할 것 등을 기초로하여 선교지역을 나누어 독특한 교리들과 통치 형태를 가질 수 있도록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교지역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제안은 일부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함경도와 평안도를 나누는 문제, 송도 평양 의주 등 대도시는 두개의 선교회를 둘 수 있도록 하되 의료사업과 인쇄 등은 공동으로 하고 학교 사업의 경우도 두 선교회가 각각의 학교를 세우지 말자는 등의 제안을 하였다.54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본격적인 계약이 이루어진 것은 1892년 6월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합의한 주요 골자를 보면 첫째, 인구 5천명이 넘는 개항장이나 도시는 공동 선교 구역으로 한다는 것. 둘째, 인구 5천명 이하인 경우에는 먼저 시작한 선교부가 우선권을 갖도록 하되 그 선교부가 6개월 간 사업을 중단할 경우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셋째, 아직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선교회의 경우, 아직 점유되지 않은 지역에서 착수하도록 권고한다는 것, 넷째, 선교회가 변경된 경우 이전의 교인들은 교파 소속을 옮길 수 있으나 녹명된 교인들은 담임 교역자로부터 추천장을 받도록 할 것, 그리고 다른 교회의 규칙을 존중한다는 것 등이었다.55 이 협정으로 인해서 첫째 조항을 따라 서울. 평양. 원산 등지는 공동 선교 지역이 되었다.
맺음말
선교사들의 입국은 우리 나라에 여러 가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첫째는 1876년 첫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이후에 성서와 전도지를 통해 형성된 민중층의 신앙공동체를 관리하는 지도력을 제공한 것이며, 두 번째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근대화를 지향하는 조정과 일부 개화파 지식인들의 요구에 부흥하는 계몽과 사회개선을 이룩한 점이다.56 그리고 세 번째 평가는 한글 보급에 기여함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이다. 성서보급과 신문 등을 통해 한글은 자연스럽게 보급하였고, 또한 서민층을 겨냥한 선교에 의해 무지하던 이 나라의 백성들이 깨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계급타파와 남녀평등같은 평등사상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이웃사랑과 섬김 등을 신앙생활이 기본으로 삼고 있기에 구한말에 있던 양반과 상놈의 주종관계와 남존여비의 구습을 타파하고 남녀평등과 만민평등사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한미 조약을 맺게 하시고 스코틀랜드인을 통해서 만주쪽으로, 미국인들을 통해서 일본쪽으로 가게 하심으로 어떻게 하든지 복음이 한국에 전달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하시고 사람들을 선발하여 보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수와 잘못까지도, 세상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까지도, 세상 사람들의 핍박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막지 못하였다.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가르침을 거울과 경계로 삼아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 계획이 우리 민족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모든 이들이게 복음이 전파되어 지는 것임을 믿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순종은 단순한 열정 가운데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계획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조금씩 드러나고 이루어질 때마다, 아차하며 후회하거나 심지어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체 그냥 흘려버리는 자가 아니라, 아주 작은 하나에서부터 사도바울과 같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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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Kosin52/3zk1/271?docid=597045859&q=%BA%B9%C0%BD+%C0%FC%B7%A1+%B0%FA%C1%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