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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77. [역경의 열매] 김영길 <1-20> “공부해서 남주자” 정신을 세계시민의식 교육 모토로
평생 공학도이자 연구자에서 한동대 총장으로 19년 ‘경영’
한동대 초대총장을 지낸 김영길 장로가 지난달 30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66차 유엔 NGO 콘퍼런스’에 참석해 기조 발표를 하고 있다. UNAI제공19년을 한동대 총장으로 재임했다. 돌이켜보면 비전과 사명으로 달려온 세월이었다. 학생들을 만나면 ‘아이 러브 유, 갓 러브스 유(I love you God loves you)’로 인사했다. ‘공부해서 남 주자’ ‘와이 낫 체인지 더 월드?(Why not changed the world)’는 수도 없이 외쳤다. 2013년 12월 마지막 채플 시간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 “미안합니다.”
평생을 과학자이자 연구자로 살아왔다. 그래서 경영자요 지도자로 사는 것이 서툴렀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 품어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학생들이 준비한 ‘깜짝 퇴임 행사’는 잊지 못한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카네이션을 들고 모여들었다. 그날 복도는 학생들이 뿌려준 빨간 장미꽃잎 천지였다.
하나님은 각자의 인생 드라마에서 ‘나’라는 주연배우를 총지휘하고 감독하신다. 인생 무대를 돌아보면 온통 주님의 섭리와 은혜였다. 이제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이 땅 교육 혁신에 대한 갈증이 남아있다.
나는 아직 꿈을 접지 않았다. 내 일생의 꿈은 ‘공부해서 남 주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이다. 한동대 시절은 이 목적을 실행했던 기간이었다. 지금의 교육은 양적인 성장만 강조할 뿐, 먼 미래를 준비하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 절실하다.
요즘 나는 교육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사색을 바탕으로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와의 협력 하에 장대한 스케일의 교육실험을 기획 중이다. 바로 동양의 전통적인 정신문화와 서구의 합리적 정신을 상호 보완해 오늘날 지구촌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복합적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세계시민의식 교육’이다. 한국에서는 ‘세계시민교육’으로 번역되지만 영어로는 ‘글로벌 시티즌십 에듀케이션(Global Citizenship Education)’이다. 시민(citizen)과 시민의식(citizenship)은 다르다.
교육은 사람을 다룬다.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교육은 우리가 만들어 낸 21세기 지구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우리가 변화해야만 우리로부터 초래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나는 지난달 30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66차 유엔 NGO 콘퍼런스’(The 66th UN DPI/NGO Conference)에 참석해 기조발표를 했다. 유엔아카데믹임팩트 한국협의회와 UN이 공동으로 미래 지구촌의 지속적 발전과 번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세계시민교육을 주제로 대회를 연 것이다. UN 창립 이래 교육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를 한국에서 개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 콘퍼런스에서 ‘세계시민의식 교육’을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내가 나고 자란 곳, 경북 안동 지례동 양동댁에서 출발했던 교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 "공부해서 남주자" 정신을 세계시민의식 교육 모토로
* [역경의 열매] 김영길 <2>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가훈… 내 정신의 DNA
* [역경의 열매] 김영길 <3> '일과문' 액자 걸고 실천하신 아버지에 감명
* [역경의 열매] 김영길 <4> 인생의 스승 셋째 형 불의의 사고에 큰 상실감
* [역경의 열매] 김영길 <5> 사진으로만 본 신붓감과 1년 편지교제 끝 결혼
* [역경의 열매] 김영길 <6> '맹물이 포도주로 변했다'에 과학자로서 의문 품어
* [역경의 열매] 김영길 <7> '술취하지 말라' 설교 듣고 양주 30여병 쏟아 버려
* [역경의 열매] 김영길 <8> 국제 세미나에서 창조의 과학적 증거 담대히 제시
* [역경의 열매] 김영길 <9> 주일마다 전국 교회·단체 찾아가 창조론 강연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0> '한동대 총장 초빙' 하나님의 뜻인지 기도로 물어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1> 형님·부모님 별세 … 슬픔 추스를 틈 없이 개교 준비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2> 세상을 재건할 '느헤미야 리더십' 양성의 비전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3> 잇단 고발과 재판이란 '불'로 시련 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4> 학생·교수들 구치소 앞에서 '스승의 은혜' 불러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5> 수갑 차고 이동하면서 '가시면류관 예수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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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영길 <17> 해외에서도 열매 맺은 '공부해서 남 주자' 비전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8> 유네스코 '유니트윈' 프로그램 주관대학에 선정
* [역경의 열매] 김영길 <19> 교육 지경 넓힌 한동대 '세계시민교육' 주도
* [역경의 열매] 김영길 <20·끝> 지난 5월 췌장암 진단… 또 다른 사명 위해 기도
◇약력=1939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미국 미주리주립대 금속공학석사, 뉴욕 RPI 공대 재료공학박사. 미국항공우주국(NASA), 뉴욕 인코(INCO)중앙연구소 근무. 1979∼1995년 카이스트 교수. 1995∼2014년 한동대 총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역임. 현 유엔아카데믹임팩트 한국협의회 회장. 서울 온누리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김영길 <2>'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가훈… 내 정신의 DNA
지례마을의 인격 수양 전통 밑거름… 기독교 신앙 추구하며 과학자의 길
김영길 장로의 본가인 경북 안동군 길안면 지례동 지곡제택 전경. 사진은 수몰 전 모습이다.“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 안동 김씨인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아버지는 자기 이득과 욕심만 차리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는 숙맥불변(菽麥不辨)의 바보일지라도 차라리 정직하고 어질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고 보면 고향 안동의 지례마을은 숙맥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첩첩산중이라 마을 사람들은 “임금도 하마(下馬)를 해야 들어올 수 있다”며 농을 했다. 하도 오지여서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다.
고향집은 350년 연륜이 쌓인 고택이다. 이름하여 지례동 양동댁이다. 경북 문화재 민속자료 58호로 지정돼 있지만 안동 지역의 수많은 고택과 비교하면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옛집이다. 고향집은 조선 현종 4년(1663년)에 건축해 안동군 길안면 지례동 629번지에 있던 것인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겼다.
‘양동댁’은 경주 양동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인 어머니 이귀복님이 수산(秀山) 김병종님의 아들 운전(雲田) 김용대님과 결혼해 안동 지례동으로 시집 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집안 어른들은 ‘예를 안다(知禮)’는 마을 이름처럼 인성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일구며 학문을 벗 삼고 교육을 통해 세대를 이어오셨다.
선친 김용대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심대(心臺) 김세동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2세 되던 해에 20여촌이 넘는 지례의 김병종님 양자로 오게 됐다. 이후 지례에서 4남4녀의 자녀를 낳고 1995년 별세했다. 생가 조부 김세동님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봉 김성일 선생의 12세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왕래했다. 이 때문에 일곱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생가 증조부 김병락님도 일본군 분소 습격 사건 등의 의병활동으로 10년간 옥고를 치렀다. 93년 조부님과 증조부님께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양가 조부 김병종님은 청계대조(김진)의 장남인 약봉부군 김극일 선생의 12세손으로 퇴계의 정신과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성리학자였다. ‘성학속도’ ‘문소가례’ ‘학림통독’ 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안동유림, 나아가 영남유림이 인정하는 당대의 이름 있는 유학자였다.
내가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과학을 홀대한 것으로 흔히 평가되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유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치국과 평천하에 앞서 ‘인격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 전통을 안고 과학의 길로 나아간 것이었다. 전환기 시대정신에 맞춰 교육을 통해 외래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유연하면서도 과감한 실천 유학 정신에 힘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 정신 역시 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흔히 기독교와 유교는 반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 신앙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특히 퇴계학이 가진 일말의 종교적 메시지(하늘사상)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과학자로서 외국을 넘나들며 세련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내 정신의 DNA는 바로 ‘지례동 양동댁’에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선조들은 지례로 찾아들었을까. 그들에겐 ‘산 속에 홀로 있어도 천하를 생각한다’는 유교적 신념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다. 유교와 전통, 현대와 미래, 교육과 과학 그리고 기독교. 어쩌면 지례동 양동댁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지 모른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3> ‘일과문’ 액자 걸고 실천하신 아버지에 감명
인근에 초등학교 3곳 세우시고 31년간 산골마을 위해 교육 헌신
경북 안동 지례동 본가는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1992년 임하면으로 이전했다. 그 직후 부모님 모습.아버지는 외유내강하신 성품으로, 위기의 순간에도 평상심을 유지할 정도로 심지가 깊으셨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한결 같으셨고, 해학이 넘쳐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셨다. 늘 “아무 일 없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말씀하셨다.
12세에 양자로 온 아버지는 한동안 양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생가 부모님이 그리워 몇 번이나 도망을 쳤다고 한다. 21세 때 조부님이 심부름을 보내셨는데 아버지는 집으로 곧바로 오지 않고, 경성(서울)과 금강산, 평양과 대동강 등으로 여행하고 한 달여 만에 돌아오셨다. ‘가출’ 사건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가 조부님은 한마디 꾸중도 내리지 않으셨다. 과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되 다만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만 받으셨다. 대신 아버지에게 지켜야 할 일과문을 써 주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취침할 때까지 지켜야 할 수칙이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집안을 살피고, 밥 먹기 전에 세수해라’ ‘서책을 가까이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치면서 놀지 말고, 항상 집에 어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라’ ‘친구들과 험한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가에서 놀지 마라’ ‘수시로 밭의 농작물을 둘러보고 집 주위를 살피도록 해라’ ‘밤에는 등불을 켜서 집안을 어둡지 않게 해라’ 등이다.
나는 어렸을 적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방의 아버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쓸고 걸레질도 하고 세숫물을 떠다 드리곤 했다. 사랑방에서는 일과문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보기 좋은 곳에 일과문 액자를 걸어두고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보고 겪은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마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로 결심하셨다. 그것은 교육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신학문 교육을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는 120년 동안 한문만 가르쳤던 지산(芝山)서당을 활용해 국어와 산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글을 배울 곳이 없었던 상황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는 데 헌신하셨다.
이후 일제 당국의 핍박으로 ‘사설학술강습소 지례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면서도 국어와 산수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대대로 내려오던 유산인 토지 800평(2640㎡)을 희사해 설립한 지례학원은 1940년 ‘지례간이학교’로 승격됐고 해방과 함께 ‘길산공립보통학교’로, 그리고 다시 1년 후 ‘길산국민학교(초등학교)’로 승격됐다.
학교 주변에는 벚꽃 대신 무궁화를 심었다. 덕분에 길산학교는 해방 당시 교정에 무궁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학교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 개의 초등학교를 더 설립해 인근 마을로 교육을 확장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당시 지례마을이 공비들의 잦은 출현으로 토벌 작전지역으로 지정돼 학교가 폐쇄 위기를 맞았다. 아버지는 절대 학교 문을 닫을 수 없다며 맞서셨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고초를 겪었지만 마을을 떠나지 않고 교육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지례학원과 간이학교에서 13년간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해방 후에는 19년간 길산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총 31년을 산골 마을에서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한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셨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4> 인생의 스승 셋째 형 불의의 사고에 큰 상실감
한동대 총장 부임 앞둔 시점에 유학과 전공 등 조언해준 분
1994년 4월 15일, 한 일간지에 ‘형제 대학 수장’이란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렸던 사진. 고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총장(왼쪽)과 김영길 장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내 고향집이 전해주는 남다른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바로 나의 셋째 형님, 고(故)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총장이다. 1994년 4월 30일, 사랑하는 형님은 교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가족 내에서는 형님이요, 학계에서는 동료요, 삶의 길에서는 스승과 같은 분이었다.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형님이 계시는 포항에 신설된 한동대 초대 총장 부임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경험을 공유할 동반자를 잃어버린 상실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한동대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비전과 교육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교육, 즉 기독교 영성 교육에 바탕을 둔 영성 지성 인성의 전인교육과 창의적인 학문 교육 실험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호길 형님은 나보다 6세 연상이다. 형님 역시 과학의 길을 가면서 전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형님은 똑똑한 것보다 어진 것을 중시하는 우리 집안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두고 실천했다. 과학자로 시작해 교육자로 생애를 마친 형님은 즉흥적으로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효성이나 우애는 소문난 대로 지극했고, 형편이 어렵거나 도움이 필요한 약자는 힘껏 도와주셨다. 그러나 경우와 이치에 맞지 않고 부당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 앞에서는 불같은 논쟁을 벌였던, 머리는 차고 가슴은 정녕 따뜻한 분이셨다.
형님의 대학시절인 195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대여서, 고학을 하면서 유독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고생스럽다거나 힘들다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한 켤레의 군화와 한 벌의 학생복밖에 없는 가난한 대학생이었지만, 형님은 자신이 가난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는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는 부모님의 가정교육으로 성장했기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형님의 자존감이 건강하셨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미국 유학을 결심할 때도, 전공을 택할 때도 형님의 조언과 도움이 컸다. 그때 형님은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단 기간인 2년 반 만에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대학 로렌스연구소에 있을 때였다. 당시 금속공학은 학문적으로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공업이 발달해야 다른 산업도 발전할 수 있기에 금속재료 분야가 우리나라 미래에 꼭 필요한 분야라고 형님은 조언해 주셨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자랐기에 비행기 제작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고, 형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공을 금속재료공학으로 결정했다.
형님은 내가 한동대 총장 청빙을 받고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권할 수도 말릴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너와 같은 과학자가 나오기까지 수십년이 걸리고, 카이스트에서 더 많은 연구를 함으로써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데, 이제 대학행정을 맡으면 연구를 중단하게 되고 그동안 쌓아온 과학자의 길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손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네가 기독교 정신의 대학 총장으로 청빙을 받았으니, 내가 어찌 말릴 수만 있겠느냐”고 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5> 사진으로만 본 신붓감과 1년 편지교제 끝 결혼
형님이 대신 선본 뒤 좋다고 추천… 처음엔 부모님 명령으로 편지 보내
김영길 장로와 아내 김영애 권사가 1970년 7월 미국 RPI 공대 기혼학생 기숙사 앞에서 찍은 사진. 옆의 차량은 750달러를 주고 구입했던 닷지 승용차.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유교사상을 접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한 이해나 개념은 없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미국 유학 중에 한국에 있던 크리스천 신붓감을 소개받은 후부터다. 1824년 개교한 미국 최초의 공과대학인 뉴욕주 트로이의 RPI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1969년이었다. 부모님이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신붓감을 추천하시며 결혼을 전제로 편지 교제를 하라 하셨다. 마침 잠시 귀국하신 호길 형님이 나대신 선을 보고 오셔서 신붓감이 좋더라며 추천하셨다.
부모님의 명령(?)대로 그녀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냈다. 워낙 악필인 나는 그 편지만큼은 정성 들여 단정하게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보낸 후에야 겨우 답장을 받았다. 내용은 이랬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혹시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분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고, 우리 집안에도 예수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답장을 썼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살아있는 ‘신(神)’이 참으로 존재하는지 앞으로 연구해보겠소. 우리 가정을 지켜줄 신이 있다면 나도 믿어야하지 않겠소”라며 애매모호한 답장을 보냈다. 노총각으로 결혼도 해야겠기에, 부모님과 형님의 추천을 믿고 나는 사진으로만 본 그녀에게 용감(?)하게 청혼을 했다. 그리고 1년간의 편지 교제 끝에 70년 6월 15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는 하나님과 과학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무신론 과학도였다. 물질세계를 벗어난 영혼이나 영적 세계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며 과학자가 영적 세계를 믿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 전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미국 장로교회를 난생 처음 나가게 됐다. 늘 강의실 맨 앞줄에 앉던 습관대로 나는 맨 앞줄에 앉았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성경을 펴는 것도 모두 생소했다. 그러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에게 설교를 통역해 주어야 했기에 주의 깊게 설교를 들었다. 교회 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마음속 의문은 커져만 갔다.
과학이란 물질세계를 대상으로 새로운 법칙, 질서와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영혼이나 정신세계의 초자연적 현상은 과학 영역을 뛰어 넘는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는 내용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아내에게 말하자, “그렇게 따지지 말고 성경말씀을 무조건 믿으세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아내는 나와 달리 하나님을 무조건 신뢰하는 DNA를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다. 성경의 기적 사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기독교의 도덕률은 유교보다 한 차원 높다는 생각을 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놀라웠다. 유교 도덕률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면서 도덕률이 한 차원 높은 기독교를 믿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1973년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미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만난 NASA 신우회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내게 신앙의 큰 도전이 됐다. 당시 출석하던 클리블랜드 한인교회 교우들의 기도와 교제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6> ‘맹물이 포도주로 변했다’에 과학자로서 의문 품어
NASA 신우회 참석 계기 성경 읽어 “하나님 개입하시면 가능” 깨달아
1974년 4월 미국 NASA 연구실에서 김영길 장로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NASA 시절은 어렸을 때 꿈의 실현, 그 이상이었다. 매주 화요일 점심시간마다 NASA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명망 있는 과학자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신앙은 한낱 어리석은 믿음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결혼 후 5년 동안 교회 출석만 하고 있던 나는 비로소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신약부터 읽으라는 권유에 요한복음을 펼쳤다. 하지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맹물이 포도주로 변했다(요 2:9)는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커다란 난관이었다. 물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화학 방정식이 H2O에서 C2H5OH(알코올)로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구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요 6)은 포도주 사건보다 더 심각했다. 이것은 과학의 기본법칙인 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렇게 비논리적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니. 고민에 빠졌다.
그런 내게 드디어 보이지 않은 영의 세계가 열리며 이런 고민들이 풀리는 계기가 찾아 왔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 등 동물들이 인간세계를 보면 사람들이 차를 운전하고 컴퓨터를 조작하는 것이 온통 기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당연한 과학의 산물이다. 하위 차원의 세계에서는 상위 세계의 모든 일들이 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상위 세계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듯,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사건들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개입하시면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됐다. 비로소 성경의 수많은 기적 사건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요 1:14) 창조주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명령만 하시면 얼마든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로 한 순간,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성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야만 하신 것,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셔야만 했던 것, 피 속에 생명이 있고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히 9;22),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 갚으시고,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롬 5:8). 이 놀라운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는 말씀으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구세주로 영접했다. 이 깨달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이었다. 내 인생의 AD와 BC가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하나님, 제게 이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같은 죄인을 살리려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당하셨군요. 주님! 앞으로의 제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저를 사용하소서!” 나는 비로소 거듭난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생활의 첫 걸음을 떼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7> ‘술취하지 말라’ 설교 듣고 양주 30여병 쏟아 버려
술 버리자 마음 속에서 생수가 콸콸… 인코연구소서 ‘3명’이 성경공부 모임
1992년 미국금속학회 특별회원으로 선정됐을 때,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에 다니던 아들 호민과 함께 한 모습.그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애주가였지만 술을 끊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주도(酒道)를 배운 나는 술을 즐겨 마시곤 했다. 우리 집 홈바에는 각종 양주와 와인들이 즐비했다. 교회에 다녔지만 ‘예수님도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으니’ 하며 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와 함께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내 마음에 큰 움직임이 일어났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설교였다. 신앙생활을 경주하는 자에 비유하셨다. “경주자는 가벼운 옷으로 맨발로 달린다. 몸을 해롭게 하는 술을 즐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거운 옷이나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차고 달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즉시 즐비하게 진열돼 있던 양주 30여병의 뚜껑을 하나씩 따서 싱크대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시원한 생수가 콸콸 터져 나오는 희열을 경험했다.
몇 년 후 항공기와 우주선에 사용되는 제트 엔진용 특수개발 니켈 합금을 연구하는 세계 최대 니켈 생산회사인 ‘인코중앙연구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날 기술 담당 부사장인 레이몬드 데카 박사가 내게 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 종교가 무엇이오?” “크리스천입니다!” “나도 크리스천이오. 나는 다음 주 삼위일체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조언해 줄 수 있겠소?”
이런 만남에 삼위일체를 말하다니, 좀 황당했다. “보이지 않은 4차원의 영적 세계를 보이는 3차원의 물질세계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굳이 설명해 본다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물의 속성과 비교해 볼 수가 있겠지요. 물의 분자 구조는 H O이지만 냉각이 되면 얼음 상태의 고체가 되고, 상온에서는 액체 상태의 물이 되고, 증발하면 수증기 상태의 기체가 됩니다. 이러한 물의 속성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인코연구소에서도 하나님은 연구의 업적을 풍성히 주셨다. 제트엔진 고온재료로 당시 가장 탁월했던 MA6000을 개발, 미국산업연구상 IR-100을 수상하고 미국금속학회 특별회원으로 선정됐다.
인코중앙연구소로 온 지 얼마간 지나서다. 연구소장 비서인 틸리 오스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김 박사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행복해 보이는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궁금해요.” “나사에서 좋은 연구 경험을 쌓은 후, 일하고 싶었던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전부예요?” 순간 나는 중요한 비밀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틸리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것이다. “저는 우리 연구소에서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이 생기도록 25년 동안 기도해왔어요, 김 박사, 우리 둘이 시작합시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도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세 사람이 시작하는 겁니다.”
이튿날, 게시판에 광고가 붙었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 30분. 성경공부 모임 있음. 참석자: 예수님, 김영길, 틸리 오스.”
***[역경의 열매] 김영길 <8> 국제 세미나에서 창조의 과학적 증거 담대히 제시
가족에게 복음 전하겠다는 마음… 해외 유치 과학자 케이스로 귀국
김영길 장로가 1984년 미국 실리콘밸리 전시장에서 반도체 리드프레임 소재인 ‘PMC-102’ 제품을 직접 소개하고 있다.12년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해외 유치(誘致)과학자로서 1979년 1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료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안정된 미국 생활을 두고 귀국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을 모르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간절함이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미국 등 선진국에서 첨단과학 기술 분야의 경험을 쌓은 인력들을 대거 초빙하고 있던 때였다.
카이스트와 키스트(KIST), 국방과학연구소 등으로 초빙된 400여명의 과학자들이 모여 사는 서울 홍릉 과학단지에는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성경공부 모임이 있었다. 연예인교회를 담당하던 고(故) 하용조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인도하셨다.
귀국 이듬해인 1980년 8월에 세계성령복음화대성회가 열렸는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고 김준곤 목사님은 그 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로 ‘창조냐, 진화냐’라는 국제 세미나를 주관하셨다. 해외 강사로는 미국 창조과학회 회장이었던 고 헨리 모리스 박사, 듀엔 기쉬 박사 등이 참여했는데, 한국 측 강사를 아직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CCC 간사였던 고려대 대학원생 심영기(현 인제대 교수)씨가 나를 찾아왔다.
“생물학자 중에 창조론 세미나 강사로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생물학자가 진화론을 반박하고 창조론을 공식적으로 옹호했을 때 학계에서 백안시당할 수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김 박사님께서 강의를 맡아주십시오.”
나는 전공이 달라 적격자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거의 매일 찾아오며 간청했다. 며칠 후엔 아예 창조 및 진화 관련 서적 10여권을 싸들고 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창조의 과학적 증거에 대해 점점 확신을 갖게 됐다. 드디어 정동 CCC회관에서 열린 ‘창조냐 진화냐’의 세미나에서 나는 창조론의 과학적 증거뿐 아니라 진화론의 모순을 담대히 제시했다.
그때 발표했던 논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생명은 이미 존재하는 생명체에서만 나온다. 둘째, 화석 기록은 창세기 1장 말씀대로 각 생명체들이 처음부터 각 종류대로 창조됐다는 말씀을 분명히 증거한다. 셋째, 원자 분자가 우연히 결합해 단세포가 된다는 것은 수학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세미나는 대성황을 이뤘다. 국내 최초의 창조론 세미나이기도 했지만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예상 외로 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언론의 관심도 받았다. 그러나 어떤 기자는 유치과학자로서 연구는 않고 종교 활동만 한다고 비난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모든 소란에서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다. 81년 NASA 재직 시에 이어, 두 번째로 ‘NASA 테크 브리프 상’과 ‘IR-100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통보가 미국에서 때맞춰 왔다. 또 과학기술처의 첫 특성화 과제로 풍산금속과 협력해 반도체 리드 프레임 ‘PMC-102’ 합금을 발명,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게 됐다. 그 제조기술은 독일에 수출돼 건국 이래 ‘한국기술 선진국수출 제1호’의 기록을 남겼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역경의 열매] 김영길 <9> 주일마다 전국 교회·단체 찾아가 창조론 강연
20여명이 한국창조과학회 발족… 기독인들에게 믿음의 확신 심어
김영길 장로(왼쪽)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한국창조과학회 35주년 기념 국제창조과학회 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김 장로는 한국창조과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1980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회관에서 역사적인 세미나를 가진 후, 20여명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모여 정식으로 한국창조과학회를 발족시켰다. 1981년 1월이었다. 창조과학회의 목적은 진화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과학적 증거들을 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초기엔 회원들이 전국에 강연을 다녔다. 어느 해 총신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학생 전도사가 강의를 요청해왔다. “김 박사님,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라도 오실 수 있나요?” 나는 “시간이 허락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답했다. 그의 요청으로 시골 교회를 찾아갔다. 경기도 파주 국도에서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꼬불꼬불 한참을 달렸다. 보이는 것은 초가집들과 몇 채의 전통 가옥뿐, 교회 건물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동네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달린 작은 집이 보였다. 강의하기로 약속했던 그 교회였다.
방에 들어서니 할머니 대여섯 분과 초등학생 몇 명이 고작이었다. 세미나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대신 예수님을 믿게 된 간증을 했다. 전도사님은 “강의 후에 할머니 한 분이 박사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시니 만나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간증을 마치자 할머니 한 분이 내 손을 잡더니 속바지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시골까지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내가 몇 달 전부터 기도로 이 사례금을 준비했으니 꼭 받아 가셔야 합니다.”
사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많은 강연을 다녀봤지만 이처럼 정성과 감동이 가득 담긴 사례금은 처음이었다. 나는 파주에 다녀온 후 창조과학회 임원들에게 제안했다.
“이제부터 강연회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 보고하지 맙시다. 아무리 작은 모임이라도 그 중에 구원받을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해 우리가 도구로 쓰임 받는 것에 만족합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숫자에 있지 않고 그 분이 찾으시는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주일마다 여러 교회와 단체, 그리고 대학 축제 주최 측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창조론 강연은 비기독교인들에겐 도전과 충격을, 기독교인들에겐 믿음의 확신을 주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나는 모인 사람이 소수든 몇천명이든 열정을 담아 강의했다. 세례요한처럼 모양도 없고 형체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소리’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늘 감사드린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수록하도록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쳤다. 89년 1·2차 심사에서는 통과했지만, 3차에서 통과하지 못해 고등학교 교과서 수정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자유롭게 교재 선택이 가능했기에 90년 5월 창조과학회 교수들이 각자의 전공분야별로 집필한 자연과학개론 교재를 출간했다. 이 책은 일부 기독교대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동대에서는 95년부터 모든 학생들이 ‘창조와 진화’ 과목을 필수로 배우고 있다. 올해로 설립 35주년을 맞은 한국창조과학회는 회원 수 800여명 규모로 성장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10> ‘한동대 총장 초빙’ 하나님의 뜻인지 기도로 물어
마침 주일 설교가 ‘부르심과 순종’… “편안한 곳 떠나라” 말씀에 결단
김영길 장로가 1987년 카이스트 합금개발연구실에서 극저온 합금 CAM-1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다.나는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연구실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1994년 1월,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경북 포항에 기독교 정신으로 한동대를 설립하는데 총장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25년 넘게 연구만 해온 나였기에, 대학행정은 먼 얘기였다. 그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말이 맘에 걸렸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에게 큰 도전을 던지던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교회에서 7년 동안 신앙훈련을 받은 분들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십시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뜻을 담고 있는지 그땐 몰랐다. 마침 79년 미국에서 갓 귀국하던 해, 강원도 태백 예수원에서 만난 고 대천덕 신부님의 말씀도 떠올랐다. “순수한 기독교 정신의 새로운 대학이 한국에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카이스트에 막 부임한 때여서 하 목사님의 말씀은 나와 상관없는 얘기로 들렸다. 그런데 막상 총장으로 초빙을 받자 고민이 시작됐다. 아내와 나는 그 전화가 사람의 초청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분별하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카이스트의 안정된 연구 여건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합금개발실의 대학원생 제자들이 낙심할 것도 큰 부담이 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부터 여러 통로로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다.
새로운 대학 모델로서 영성 인성 지성을 융합하는 교육중심 대학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였다. 한동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하고 유능한 글로벌 리더’를 육성한다는 비전을 품고 있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교훈과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하고 있던 때, 하필이면 주일 설교 제목이 ‘부르심과 순종(창 12:1∼4)’이었다. “피조세계가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파송하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안전한 곳, 편안한 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떠나라는 명령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의지해 왔던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철저하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까지 내게 자랑이 됐던 나의 평판, 명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우리 귀에만 들려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확성기처럼 들렸다. 아내와 나는 번갈아 가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목사님은 결론을 맺었다.
“떠나는 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아브람처럼 하나님 말씀(창 12:4)만 따라가야 합니다. 부르심에 순종하고 떠나는 자의 앞에 평탄한 길만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는 한동대 총장직을 수락하기로 결단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11> 형님·부모님 별세 … 슬픔 추스를 틈 없이 개교 준비
대학 이사장님 기업 마저 조업 중단, 개교 백지화 위기… 새벽마다 교회로
한동대는 고난 속에서도 1995년 3월 7일 개교했다. 당일 개교식에서 초대총장 김영길 장로가 ‘하나님의 대학, 21세기형 새로운 대학, 새로운 교육’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김 장로 오른쪽 뒤편은 선친 모습총장직 수락 이후 나는 서울과 대덕, 포항을 오가며 새로운 기독교 정신의 대학에 대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품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포항으로 내려가 포스텍 총장 관사에 머물며 호길 형님과 대화하며 조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인 1994년 4월 30일, 청천벽력 같은 형님의 비보를 들어야 했고, 6개월 후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1년 사이 사랑하는 가족을 차례로 잃은 나는 슬픔을 추스를 틈도 없이 한동대 개교 준비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해 6월, 나는 신임 교원 청빙을 위해 미국 도시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아내로부터 대학 이사장님의 기업이 불의의 사고로 조업을 중단하게 됐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왔다. 귀국 하자마자 설립 이사장님을 만났다.
“김 박사님, 내년 개교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혹시 김 박사님께서 학교를 맡아 줄 기독 실업인을 찾을 수 있다면, 또는 기독교계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다면 학교를 계속 하십시오. 저는 모든 계획을 백지화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연한 그의 말이었다.
한동대 총장으로 초빙 받았을 때의 망설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갈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설교를 통해 수차례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내와 나는 새벽마다 교회로 달려가 강대상 앞에 엎드렸다.
“너는 기업이 잘되면 학교를 잘 하실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학교를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느냐? 너는 창조론 사역을 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입으로 선포하고 다녔는데, 이제 어떻게 삶으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겠느냐” 하며 주님은 묻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개교를 진행시키셨다. 마침 기독실업가인 A그룹 L회장 일행이 학교 현장을 돌아봤다.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터라 연락이 오기만을 학수고대 했다. 그러나 4개월 후인 10월 말쯤, 학교를 맡을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개교 준비는 막바지에 있었고 교수 청빙도 끝난 상태였다. 점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하용조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개교 인가에 필요한 교육부 예치금 30억원 중 일부를 온누리교회에서 후원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한동대는 94년 12월 2일 교육부 최종 개교 인가를 받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교의 비전은 선명했다. ‘하나님의 대학, 21세기형 새로운 대학, 새로운 교육,’ 드디어 첫 신입생 원서를 마감하는 날, 400명 모집에 4872명이 지원하는 입시돌풍을 일으켰다.
1995년 3월 7일 개교 이후로 학교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연달아 터졌다. 2년 사이에 이사장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일부 지역 인사들로부터 시작된 시립대학으로의 전환 요구, 그리고 이어지는 고소·고발 사건들은 환난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97년 외환위기와 겹치며 고금리 이자를 주고도 돈을 융통할 곳을 찾기 어려웠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12> 세상을 재건할 ‘느헤미야 리더십’ 양성의 비전
21세기 앞둔 문명적 전환기에 개교… 하나님의 뜻 따른 대학 정체성 확립
김영길 장로 부부가 1996년 5월,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 브린모어여대 졸업식에서 딸 종민(가운데)씨와 함께하고 있다.한동대 개교준비를 하던 1994년, 국내에는 159개의 대학이 있었다. 나는 ‘또 하나의 대학을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했다. 한동대 1회 졸업생이 사회로 진출할 즈음에는 21세기 글로벌 경제시대로 세상이 완전히 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94년은 월드와이드웹(www)이 개발돼 인터넷이 상용화된 시점이었고, 산업화 시대에서 지식 정보화 시대로 진입하는 원년이었다. 또 95년은 국가 간 무역 협약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바뀌며 글로벌 경제시대가 열리던 때였다. 이렇게 인류의 문명사적 전환기인 95년에 한동대가 개교하는 것이었다.
총장 제안을 받은 이후로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한동대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시대적 요청이었다. 그리하여 영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21세기의 느헤미야’와 같은 리더십 양성을 목표로 교육 비전과 프로그램을 세우게 되었다.
한동대는 실제 교육 과정에서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 국내 대학으로는 파격적 실험을 실시하는 일종의 교육 벤처 ‘사건’을 일으켰다. 국내 최초의 무감독 양심시험제도, 무전공 무학과 입학 및 복수 학위 제도, 전교생 생활관 입소 및 팀 담임 교수제도, 전교생 전산교육, 한자교육 및 영어강의 등이었다. 2001년 개교한 미국식 로스쿨(HILS)은 국내 대학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신개념 교육으로, 지금까지 미국 변호사 300여명을 배출했다.
이런 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가 하나님의 은혜였다. 둘째로는 한동대가 신생대학이어서였다. 95년 한동대 인성교육의 가장 기본이 됐던 무감독 양심시험을 치르는 명예 제도를 구상할 때는 미국 브린모어여대에 재학 중이던 딸 종민이가 자기 학교의 명예제도(Honor code)에 대해 설명해 준 것이 도움이 됐다. 한동의 양심시험제도는 말과 지식, 시간 물질에 대해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정직하게 사는 법을 훈련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개교 이후 집에 있던 액자 2개를 학교에 걸었다. 본관 기도실에 걸린 ‘나는 빚진 자라’는 액자는 미국에서 성경공부를 가르쳐주신 고 김동명(LA한인침례교회) 목사님이 로마서 1장 14절 말씀을 손수 붓글씨로 써주신 것이다. 나는 진실로 ‘복음에 빚진 자’였고,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기에 ‘학업에도 빚진 자’였다. 귀국해서 이 액자를 집 서재에 걸어놨더니, 하루는 아버지가 보시고 “너희들은 빚이 얼마나 있느냐. 빚진 것이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여 놓았느냐”고 하셨다. 그 후 나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쓴 액자도 학교 본관에 걸어 놓았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이타적이어야 한다. 이 두 글귀를 통해 한동인들이 외치는 ‘공부해서 남주자’와 ‘와이 낫 체인지 더 월드(Why not change the world)?’ 구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새사람 되게 하신 복음의 빚진 자들임을 일깨워 주고, 나아가 한동인들이 조국과 민족, 열방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기꺼이 손해보고 희생하는 삶.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갖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13> 잇단 고발과 재판이란 ‘불’로 시련 주신 하나님
학교 운영 어려워지면서 잇단 송사… 징역 2년 선고로 구치소에 수감돼
2000년 3월, 한동대 교무위원들이 어려운 학교 상황을 놓고 비전광장에서 기도하고 있다.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김영길 장로.하나님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고난과 시련이라는 거룩한 ‘불’을 사용하신다. 믿음의 선진들인 요셉 다니엘 에스더 예레미야 바울과 사도들은 이 불을 통과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각각 자기 온도에 맞는 불시험을 겪거나 통과한다. 불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주님의 계획에 포함돼 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2001년 5월 11일. 경북 포항 대구지법 포항지원 법정. “피고는 여러 차례 법정 출석을 기피했으며, 목적 없이 해외 출장을 자주 해 해외도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고 죄질이 나쁘므로 징역 2년, 부총장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며, 법정구속을 명한다!”
판결을 내린 후 판사는 나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판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외도주 우려’ ‘업무상 공금횡령’ ‘증거인멸 우려’ ‘정당한 사유 없는 의도적 법정 기피’. 이런 단어들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교도관 두 사람이 다가와 나에게 수갑을 채웠다. 차가운 감촉이 손목에 느껴졌다.
나는 당시 기존의 학교 부채뿐 아니라 새로 건립한 기숙사 건축비 결제용 어음이 계속 돌아오는 바람에 부도를 막으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마침 그 무렵 교육부가 처음으로 시행한 교육개혁특성화대학 평가에서 한동대가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돼, 13억원의 국고 지원금을 받게 됐다. 교직원들이 3개월째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그해 연말 밀린 급여부터 우선 지급했다. 그 후 곧바로 들어온 후원금으로 그 국고 지원금을 다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로 국고금전용혐의로 형사고발을 당했다. 3개월간 밀린 월급 때문에 노동법 위반으로도 고발을 당했다. 연이어 학교 소송에 관계된 변호사 비용을 총장 개인이 지급하지 않았다고 업무상 공금 횡령으로 또 다시 고발됐다. 수없는 검찰 조사와 재판을 줄줄이 받았다. 그러다 마침내 나와 행정부총장은 각각 징역 2년과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이 됐다. 현직 대학 총장과 부총장의 법정 구속은 한국 대학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날 곧바로 경주구치소로 호송됐다. 철창 버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믿기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학생들, 교직원들, 학부모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구치소에 도착해서는 교도관의 지시대로 입고 온 옷을 벗어 보따리에 넣었다. 한쪽 구석에 쌓인 옷더미에서 내가 입을 죄수복을 고르고 있는데 교도관이 소리쳤다. “아무 거나 입어요. 다 똑같으니까 골라봤자 소용없어요.” 형이 확정된 기결수에게는 청색 옷,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에게는 갈색 옷이 제공된다. 나는 갈색 옷을 입었다. 구두를 벗고 흰 고무신으로 갈아 신었다.
“안경을 벗으시오! 교도소 규율에 따라 금속테 안경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족이 면회 올 때 플라스틱 안경을 가져오라고 하시오.”
나는 수감번호 ‘433’이라고 쓰인 판을 들고, 벽 앞에 서서 정면과 측면 사진을 찍었다. 수감자들이 반드시 찍어야 하는 사진이었다. 죄수복을 입을 때도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었다. 안경마저 압수되고 나니 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플라스틱 숟가락과 그릇 두 개를 받아들고 교도관을 따라갔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14> 학생·교수들 구치소 앞에서 ‘스승의 은혜’ 불러
1800명 찾아와 카네이션 놓고 가… 교도관, 학생들 성숙한 행동에 감탄
2001년 5월 15일 스승의 날 한동대 학생들과 교수, 학부모들이 경주구치소에 수감된 김영길 장로를 위해 카네이션을 들고 ‘스승의 은혜’를 부르고 있다.감방에 들어서자 뿌연 안개 속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때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벽을 향해 돌아앉으시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했다. 잠시 후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제 바로 앉아서 육하원칙에 따라 이름 주소 직업 죄목을 말하시오!” 소위 감방 신고식이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자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것 가지고 구속될 일은 아닌데, 뭔가 잘못된 것 아니야?” “현직 대학총장을 구속하다니” “거, 한동대, 문제 있는 학교야!” 저마다 의견을 말했다.
감사하게도 감방 동료들은 나를 배려해줬다. 감방에는 두 개의 작은 밥상이 있었는데 감방장은 내 밥그릇을 상 위에 올리도록 허락했다. 청소 당번도 면제해줬다. 밤 9시. 취침 시간. 작은 방에서 35명이 칼잠을 자야했다. 다들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바깥 얘기를 한 마디씩 하자고 했다. 나는 노래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고향의 봄’을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감방 식구들도 나직이 따라 불렀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노래를 부르며 지금은 수몰된 내 고향을 생각했다. ‘내 나이 예순 둘. 나는 지금 어쩌다 이곳에 와 있는가.’ 그날 밤, 나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영혼’이었다.
수감 나흘째는 스승의 날이었다. 그런데 한 교도관이 다가와 물었다. “총장님, 소식 들으셨나요?” “구치소 안에서 어떻게 바깥소식을 듣겠습니까?” 교도관이 말을 이었다.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 한동대 학생들이 이곳에 온답니다. 지금 교도관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 중이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걱정됩니다.” 나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우리 학생들은 성숙하고 지혜롭습니다”하며 안심을 시켰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과 학생 대표들이 면회를 왔다. 나를 보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총학생회장이 말했다. “총장님, 밖에는 학생들과 교수, 학부모 등 약 1800명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일로 조금도 분노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강의 시간에 충실히 임하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아라.”
그날 오후 그 교도관이 밝은 얼굴로 다시 왔다. “총장님, 학생들이 교육을 정말 잘 받았네요. 가지고 온 카네이션들은 구치소 정문 앞에 수북이 쌓아놓고 갔는데, 떠난 자리에는 휴지 조각 하나 떨어진 게 없었어요. 교도관 생활 20년 동안 이런 감동은 처음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수감 생활 일주일이 지나면서 방식구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그들에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써주면서, 식사 때마다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법정에 출두할 때도 한 사람씩 기도를 해줬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했다. 수감 4주째 고등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기 위해 대구교도소로 이감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든 감방 동료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해 줬다. 나도 울고 그들도 울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5∼7)
***[역경의 열매] 김영길 <15> 수갑 차고 이동하면서 ‘가시면류관 예수님’ 묵상
독방에서 한동대 위한 찬송가 개사… 중요혐의 무죄 판결 53일 만에 석방
김영길 장로가 2009년 한동대 효암채플에서 ‘한동의 종소리’를 함께 부르고 있다.“총장님, 최근 탈옥수 사건 때문에 수갑을 두 개씩 채워야 하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경주구치소를 떠나 대구로 향하는 철창버스 안에서 호송교도관이 말했다. 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을 묵상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시다니 얼마나 억울하고 외로우셨을까. 죄인인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가시면류관을 쓰고 조롱과 채찍을 받으며 고통 당하셨는데, 죄인인 나는 교도관의 위로까지 받으며 편안히 버스를 타고 가는구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만 흘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대구에서는 구치소가 아닌 기결수들이 있는 독방에 수감됐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말씀도 묵상했다. 아내가 보내준 복음성가를 한 장, 한 장 차례로 부르다가 ‘사랑의 종소리’(한동대 학부모 김석균 작사·작곡)를 ‘한동의 종소리’로 개사해 불렀다. 언젠가 출소하면 한동대 채플에서 학생들과 교수들이 함께 이 찬양을 부르고 싶었다.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한동대 크게 사용하소서….”
나는 그 감방 안에서 평생 정직함과 일용할 양식만 구했던 아굴의 기도를 깊이 묵상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7∼9)
한동대는 개교할 때부터 가난하게 태어나 재정적 궁핍함을 끊임없이 겪고 있었다. 한동대의 재정은 지금도 그리 넉넉하지 않다. 물론 학생 수를 늘리면 학교 재정 형편은 나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학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교수와 학생 간의 멘토링, 양질의 전인교육을 위한 정예부대로 만들기 위해 정원을 최소화했다.
한동대가 하나님의 대학으로 뿌리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가난과 환난을 통해서였다. 한동대는 고난의 위대함과 유익함이 있는 대학이 분명하다. 지독한 가난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하나님의 대학에 이렇게 돈이 없는 것이 더 큰 기적”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한동대가 가난하다면, 학교의 장래는 분명 소망이 있는 것이다. 사람과 돈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학교를 이끌어 가실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학교 후원회인 ‘갈대 상자’ 회원들을 통해 재정을 공급하셨다. 우리는 이를 수없이 경험했다.
나는 53일간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가 2001년 7월 4일 보석으로 석방됐다. 그해 12월 28일, 대구고등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중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일부 혐의에만 벌금형을 선고했으며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재판은 종결됐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역경의 열매] 김영길 <16> 53일간 수감 중 국내외서 석방 탄원·후원 봇물
“불미스럽게 보일 사건을 아름답게… 하나님의 고단수 홍보작전”
김영길 장로가 설명하는 신트로피 법칙 도표53일간 옥고의 날들은 내 인생 최고 시련의 시기였지만 축복이기도 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히 경험하는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한동인들도 함께 감수해야 했던 시험과 역경, 강도 높은 연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롬 8:28) 분이심을 하나님은 신실하게 입증해 보이셨다.
수감 생활 동안 미국과 전국 각지에서는 한동대를 위해 수많은 중보자들이 일어섰다. 미국 각지에서 석방 탄원 서명을 받기 시작했고 이 탄원 서명서를 정부와 법원에 제출했다. 또 국내외로부터 후원금이 답지했다. 모두 46억원이었다. 어느 교수가 말했다.
“총장님, 계산해보니 두 분의 하루 몸값이 약 8000만원입니다. 두 분은 그 안에서 고생하셨지만 학교를 생각하면 좀 더 그 안에 계셨어야 하는데요.”
주요 일간지와 방송 등 언론도 학생들의 스승의 날 행사 이후 이 사건에 대해 우호적으로 보도해 주었다. 이런 반전을 보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총장님, 이건 하나님의 고단수 홍보작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보기에는 불미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건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신트로피(Syntropy)’ 드라마였다. 무질서의 ‘엔트로피(entropy)’란 말은 익숙하지만 신트로피는 과학자들에게도 생소한 단어다. 신트로피는 그리스어 ‘신트로포스(syntropos)’에서 유래한 단어로 ‘에너지의 흐름을 모으다’라는 뜻이다. 질서에서 무질서 상태로 향하는 엔트로피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엔트로피는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자연의 물질세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붕괴되고 쇠퇴하고 부패하여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게 된다. 예를 들면, 금속은 녹이 슬고 연기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바위는 모래로 풍화되고 나무는 썩어 분해된다. 엔트로피는 에너지가 흩어져 소멸하고 무질서도(度)가 증가되어 혼돈, 부패하게 된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는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위해 근본적인 세 가지 관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정립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세 가지 관계는 모두 단절됐고 이후 무질서와 혼란이 증가되는 엔트로피 현상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이 변화되려면 우리의 생각이 변해야 한다. 내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새로워져야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중력의 법칙과 은혜의 법칙이다. 중력의 법칙은 자기를 위해 더 큰 힘, 더 많은 돈, 더 큰 명예를 추구한다. 그러나 은혜의 법칙은 남을 위해 나의 것을 주는 것이다. 이 변화를 이루시는 신트로피 드라마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공부하는 목표는 하나님 은혜의 법칙을 따라 ‘공부해서 남 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교육의 궁극적 목표도 엔트로피에서 신트로피로 바꾸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역경의 열매] 김영길 <17> 해외에서도 열매 맺은 ‘공부해서 남 주자’ 비전
15년 전 캄보디아 찾은 선교 동아리 전문대까지 설립해 여태껏 교육봉사
김영길 장로 내외가 지난 3월 한동대 졸업생들이 세운 캄보디아 시엠립 NIBC대학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두메산골에서 태어난 나는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봤고, 커서 어른이 되면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키웠다. 열 살 때였다. 그리고 1994년 한동대 개교 준비를 하면서 나는 또 한 번의 꿈을 꿨다. 지역 한계를 벗어나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비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해서 남 주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만 한동대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공부해서 남 주자’고 외치며 타인의 유익 구하기를 원했다. 글자가 ‘나’에서 ‘자’로 바뀔 때 한 사람의 인생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개교 20여 년이 지난 지금 공부해서 남 주는 한동인들의 이야기는 수없이 쌓여가고 있다.
2001년 한동대 건설도시환경시스템 학생 몇 명이 지도 교수와 함께 캄보디아 시엠립 앙코르와트를 방문했다. 이들은 선교 동아리 ‘NIBC(Not I But Christ)’ 회원들로 앙코르와트의 문화재 성벽 보수 공사 디자인 설계를 위해 자원봉사 차 간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가지고 간 컴퓨터를 들고 주 정부 사무실을 찾았다. 컴퓨터 교육을 제안한 것인데 관리들은 처음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매일 찾아가자 주 정부 관리들 하나둘씩 컴퓨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학생들은 해마다 방학이면 그곳을 찾았고 학생들의 도움과 공로를 인정한 시엠립 주 정부는 아예 NIBC에 학교 부지까지 제공했다. 학생들은 한 학기나 1년을 휴학하면서 유치원 건물을 지어주고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중엔 졸업 후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아예 자리를 옮긴 한동인들도 10여명이나 된다.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시엠립에는 3개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그리고 전문대학이 설립됐고 한동인들은 변함없이 교육 봉사를 하고 있다.
한편 NIBC 정신으로 뭉친 40여명의 졸업생들은 2009년 베트남 호치민 시에 ‘한동건설’을 창립, 베트남 저소득층을 위한 중저가 아파트를 짓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호치민과 다낭에 1000여 세대의 아파트를 건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나는 지난 3월 호치민과 시엠립을 방문해 졸업생들을 만났고 이들의 삶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창업자 중 한 명인 김규철(98학번, 공간환경시스템 전공)군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 다닐 때 총장님과 교수님들이 안전하고 편한 자리를 포기하고 선교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오신 것을 보면서 ‘저분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침 받은 대로 따라갔습니다. 집에서는 왜 계속 선교지만 다니냐며 반대도 있었지만 학교는 저의 삶과 NIBC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환경 보존 운동가로서 사막지대에 나무를 심는 스마트폰 어플을 개발한 트리플래닛 대표 김형수(06학번)군도 언급하고 싶다. 그가 만든 앱은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과 G20 공식 앱으로 선정됐다. 국제비영리단체 ‘엠트리’를 만든 최영환(99학번)군은 ‘희망의 붓’ 프로젝트를 통해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청년들의 재능 기부를 받아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미술교육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역경의 열매] 김영길 <18> 유네스코 ‘유니트윈’ 프로그램 주관대학에 선정
파리서 협약식 체결 현지 언론 주목… 르 피가로, 기자 보내 한동대 취재도
김영길 장로(왼쪽)가 2007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유니트윈 프로젝트 주관대학 선정 협약식’에 참석하고 있다.나는 2005년 5월 서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아시아 지역 본부 회의에 참석해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교육부로부터 받았다. 그 자리에서 한동대의 개발도상국 인재 양성 사례를 발표했다. 한동대는 2002년부터 몽골 재경대(IFE)와 경영, IT, 국제법을 연계하는 공동학위 MBA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었다. 유네스코는 1992년 선진국 대학들과 개발도상국 대학들 간의 네트워킹을 통해 지식 격차를 줄이는 프로그램인 유니트윈(UNITWIN·University Twinning & Networking)’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나 실제로 선진국이 개도국과 협력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강연을 마치자 유네스코 본부의 유니트윈 담당자는 “한동대가 유니트윈의 매우 좋은 사례”라며 프로그램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해가 지나도 유네스코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한 직원이 “북경 주재 유네스코 아시아 사무실에서 한동대 서류가 몇 개월째 보류되고 있다”며 알려 주었다. 나는 답답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 프로그램은 개도국 젊은이들에게 지식 전수와 함께 복음의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교육부가 주관하는 ‘2006 글로벌 HR(Human Resources) 포럼’이 열렸고, 유네스코 교육담당 사무부총장인 피터 스미스 박사가 강사로 내한했다. 그와는 구면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몬테레이 캠퍼스) 초대 총장 재임 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역시 학교 건축 문제로 고발 당해 법정을 들락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 같은 처지”라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마침 그에게 제안서를 보여주며 유니트윈 프로젝트가 지연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좋은 제안서를 왜 북경 사무실에서 보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즉시 유네스코 본부 국장에게 지시해 추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동대는 유니트윈 프로젝트의 개도국 역량 강화 프로그램의 주관대학으로 처음 선정되었다. 드디어 2007년 4월 5일 나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유네스코 사무총장과 협약서에 사인을 했다. 프랑스 언론들도 이 협정에 주목했고 ‘르 피가로’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한동대는 21세기 교육 패러다임에 가장 적합한 국제화 교육을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니트윈 주관대학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르 피가로’는 3주 후 한동대에 기자를 보냈다. 기자는 학교 캠퍼스에서 개도국 유학생들을 취재했다. 기사는 4월 27일자에 ‘교육과 가치관을 통해 가난은 더 이상 숙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제목과 함께 게재됐다. 가나 유학생 타굴 군은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나의 조국 가나를 살리는 꿈을 이루는 나라입니다.”
6·25전쟁 직후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유네스코가 인쇄한 무상 교과서로 공부했다. 이제 우리는 과거 국제 사회에서 받은 빚을 개도국에 갚아야 한다. 한동대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와 협력해 조국과 민족을, 그리고 세계를 위해 지경이 넓혀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사 54:2)
***[역경의 열매] 김영길 <19> 교육 지경 넓힌 한동대 ‘세계시민교육’ 주도
유니트윈 이어 UNAI 허브대학 지정… 한국, 글로벌 인재 양성 선진국 도약
지난해 5월 21일 열린 제2차 유엔아카데믹임팩트 서울 포럼에서 김영길 장로가 강연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오른쪽에,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왼쪽편에 앉아 있다.근래 지구촌에는 전례 없는 국제적 테러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또 온실가스 증가로 기후변화 등 생태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혼란은 한 개인이나 국가가 해결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협력하여 글로벌한 해결책으로 풀어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은 세계를 무대로 상호 간의 경계를 허물고 그 배운 바를 실천하는 세계 시민을 길러내야만 한다.
사실 이러한 창조적 시민을 기르는 ‘세계시민교육’은 1995년 한동대가 개교할 때부터 시작되었고 열매도 거두었다. 2007년 4월 5일 한동대가 유네스코의 ‘유니트윈 프로젝트’ 개도국 역량 강화 프로그램 주관 대학으로 선정된 것이 놀라운 하나의 증거였고, 2011년 1월 유엔아카데믹임팩트(UNAI)가 한동대를 고등교육 역량 강화 유엔 글로벌 허브대학으로 지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하나의 통로를 여는 역사였다.
UNAI는 2010년 11월 18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의해 발족된 유엔의 전략적인 글로벌 이니셔티브이다. 이렇게 한동대의 지경을 넓혀주신 하나님은 2014년 1월 말 한동대 총장직에서 퇴임한 후, 나에게 전 세계를 향한 다른 차원의 역할을 맡겨 주셨다. 포항의 한 작은 대학이 전 지구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처럼, 한국이 유엔의 국제화 기틀 아래서 각국의 대학들과 연계되어 글로벌 인재 양성에 힘쓰는 교육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UNAI는 전 세계 대학 및 학술연구기관들이 유엔과 제휴하고 교육을 통해 글로벌 과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유엔 3대 목표인 평화 및 개발, 인권을 달성하는데 비전을 두었다. 유엔이 오랜 역사 속에서 교육을 세계와 싸우는 검으로 삼은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2015년 9월 26일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s)를 선언하면서 세계시민교육을 중요한 아젠다로 포함했다. 마침내 2015년 11월 30일 UNAI를 세계시민 교육 선도기관으로 유엔 총회에서 결의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전을 달성하시려고 때마다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 주셨고, 참으로 전혀 뜻밖의 귀한 분의 기부로 UNAI 사무실도 마련해 주셨다. 또한 국내 60여개의 대학을 회원으로 2013년 외교부 산하 사단법인 UNAI 한국협의회를 창설하게 하셨고, 나에게는 회장직을 맡겨 주셨다.
“그들은 오랜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사 61:4)
UNAI 한국협의회는 그동안 두 차례 서울 포럼을 개최하였다. 특히 두 번째 포럼에는 반기문 사무총장과 유네스코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이 함께 참석하였는데, 유엔과 유네스코 양 기관이 함께 교육 문제로 세계시민교육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이슈였다.
오는 11월 초에는 세 번째 세계 포럼을 계획하고 있다. 세계시민교육을 고등교육 차원에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세계시민의식을 증진하고, 전 세계 대학들이 세계시민교육을 실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새로운 교육비전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길 <20·끝> 지난 5월 췌장암 진단… 또 다른 사명 위해 기도
한동대 20년은 하나님 뜻을 이루는 역경과 소망이 점철된 보람찬 세월
김영길 장로가 2014년 2월 한동대 초대 총장에서 퇴임하고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역경의 열매’를 마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지난날을 회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국민일보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사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형편에 있었다. 지난 5월 중순, 건강검진 중에 췌장암 초기 진단을 받고 충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재를 잘 마치게 되었다.
이번에 나의 삶 전체를 조명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동대를 통한 고난과 함께 나의 믿음을 성숙 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매회 원고를 보면서 아내와 나는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같이 울기도 여러 번 했다.
내 인생의 BC와 AD가 갈라지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후로 주님은 세 가지 사역을 시작하도록 맡겨주셨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항상 나보다 앞서 가셨다. 1980년 과학주의 시대에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하는 한국창조과학회를 시작하는 도구로 부르셨고, 1995년 하나님의 대학 한동대를 시작하는 초대총장으로 불러 주셨으며, 2010년 유엔아카데믹임팩트(UNAI)를 통해 글로벌 인재 양성의 사명을 시작하도록 부르셨다.
한동대 20년은 교육자로서의 새로운 꿈, 새로운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기간이었다. 내 나이 올해 77세가 됐지만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사명을 감당케 하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바라기는 정직하고 물질을 추구하지 않는 ‘거룩한 바보’ 리더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제 교육자로서 현장은 떠났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차원으로 주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계획과 사명을 품게 하셨다. 포항 남송리 3번지의 작은 대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유네스코의 주관대학으로 지경을 넓혀 주셨고, 2007년에는 OECD와 대학 간 합의각서(MOA·Memorandum Of Agreement)를 체결해 지금까지 10여명의 한동대 재학생들이 인턴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중 어떤 학생은 OECD에 취업도 하게 되었다.
더욱 감사한 것은 2010년 11월 발족된 UNAI에서 글로벌 허브대학으로 한동대를 지정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글로벌 인재 양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실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동대가 새로운 방안을 구체화한 것이다.
앞으로 나의 비전은 ‘UNAI 그레이스(GRACE·Globally Responsible Advanced Citizenship Education)’ 센터 건립을 통해 선진화된 글로벌 시민교육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20여년 전 현실적으로는 전혀 실현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었기에 오늘의 한동대가 존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GRACE 센터에 대한 비전을 주신 분도, 또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 33:2)
한동대 20여년은 고난과 역경 기쁨 소망이 점철된 기간이었다. 한 번도 안식년이나 휴가가 없었다. 숨 가쁘게 달려오기만 했다. 그러나 참으로 보람된 세월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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