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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주님의 향기 스크랩 <납작한 마음>
아빠 추천 0 조회 7 14.05.31 13: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Intro)
많은 성인 가운데에서 로마의 수호성인이 누구냐, 오늘 축일을 지내는 가타리나 성녀입니다. 왜 하필 서른 셋 밖에 살지 않았던 젊은 수도자 가타리나가 로마의 수호성인이 되셨는지요? 

교회의 분열시절, 프랑스의 왕권에 의해 교황이 로마에 입성하지 않고 프랑스의 아비뇽이라는 곳에서 약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렇게 분열된 교회를 향해 일치를 호소했던 수도자가 가타리나였습니다. 그녀는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에게 편지를 쓰고 또 교황의 입성을 거부하던 피렌체 사람들과 담판을 벌였지요. 교회사에 전례가 없었던 내적분열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주교가 보편교회의 교황이라는 일치의 기틀을 다시금 세웠기에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지요. 

수도자의 하나로 다시금 교회를 거듭나게 한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 하느님의 눈으로 본다면 이럴 수 없다는 것, 하느님의 시선에서 인간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잠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눈으로 나와 이 세상살이를 잠시 되돌아보도록 합시다.

(강론)

<납작한 마음>

요한 복음이 어려운 이유, 마치 어떤 비문이나 흩어진 암호처럼 구성된 듯 뜬금이 없는 이유는 ‘시점’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4복음서 가운데 특히 요한복음은 기사나 보고서로서의 가치는 철저히 배제합니다. 

최소한 공관복음은 복음서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이방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비로소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고백하게 만들지만, 요한사가는 복음서의 처음부터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시선, 그 차원에서 복음을 써내려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을 그려내면서도 예수는 ‘단수’가 아닙니다. 예수의 모든 행위와 말에는 이미 ‘복수’, 곧 하느님으로서의 시선이 섞여 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이고 그는 하느님의 시점과 차원에서 발언을 합니다. 이것이 뒤섞여 있으니까 어려운 겁니다.

차원이 다른 거지요. 평면적인 사고로는 공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예수, 우리가 믿는다는 신앙, 우리가 희망한다는 부활, 우리가 한다는 사랑 또한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평면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고 희망하고 사랑한다 하면서도 누구는 끝까지 죽일 놈이고 누구는 절대로 용서 못할 놈이며 누구는 곧 죽어도 좋기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공간에서 본다면요, 너나 나나 다 단적인 평면에 줄 하나 끄인, 길고 짧은 것 빼고는 다를 것 없는 ‘납작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공간의 차원, 하늘의 시선, 지금보다는 더 큰 마음... 이것은 납작하지 않습니다. <부피감>, <공간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바닥에 착 붙어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탄식만 쏟아냅니다.

하느님 마음을 보게 된다면, 자비가 정녕 어느 정도인지를 깨달을진데, 내 마음 이거 하나 조차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니, 어이 이 탁한 눈으로 하느님의 차원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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