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면예배를 금지한 것을 놓고 때 아닌 종교의 자유 논쟁이 제기되었다. 잉글랜드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혁명 등을 거치며 서구에서 주요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근대의 자유주의는 ‘종교’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잉글랜드 명예혁명(1688) 이후 ‘관용령’(Tolerance Act)이 제정되면서 국교회 뿐 아니라, 자유롭게 개인의 신념에 따라 종교를 선택할 자유를 인정받았다. 가톨릭 중심의 중세 질서가 깨지고, 국가가 종교를 선택하는 국교의 등장으로 비국교도들은 여러가지로 차별을 받았다. 청교도혁명, 잉글랜드 혁명, 잉글랜드 내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17세기 잉글랜드의 사회 정치적 분란의 중심에는 청교도가 있었다.
청교도, 퓨리턴… 전광훈씨가 ‘청교도영성훈련원’을 통해 세력 발판을 만들어 또 다르게 익숙해진 단어이다. 칼뱅주의 장로교가 주류인 한국 개신교에서 청교도를 건들면 다친다 (이 글에 장로교 목회자들이 분명 딴지를 걸 것이다에 500원을 건다). 그 청교도의 후예들이 좋아하는 종교의 자유를 삐딱하게 뒤집어 보자.
2.
청교도들은 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갔을까? 교과서적 답변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이다. 메이플라워호는 종교를 탄압하는 잉글랜드를 탈출하여 종교의 자유의 찾아가는 영웅적 서사의 대명사이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아마 그것은 미국으로 간 청교도들의 시각에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메이플라워호를 떠나보낸 잉글랜드의 시각에서는 어떨까?
헨리8세가 이혼문제로 로마와 결별하고 국교회를 성립한 후 여러 곡절 끝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교회를 확립하였다. 하지만 어중간한 (via media) 입장이었다. 잉글랜드 내부에서는 가톨릭적인 요소를 여전히 지키고자 하는 파와 제네바의 칼뱅의 가르침을 강화하려는 청교도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던 엘리자베스 사후 가장 가까운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에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의 장로교 정치의 영향 하에 있던 왕이 잉글랜드 왕으로 오게 되자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드디어 잉글랜드를 제네바 같은 완벽한 신국으로 만들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청교도들에게 충분히 괴롭힘(?)을 당했던 왕은 순순히 청교도들의 청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내의 정치 종교가 분열되었다.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묶을 방책이 필요했다. 그렇다.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답은 ‘국정교과서’였나 보다.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 보급판으로 비치되었던 성경인 제네바 성경은 칼뱅주의 색채가 강했다. 난외주에 ‘적그리스도’는 '교황'이라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뭐가 뭔지 혼이 비정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국왕은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국정 성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 (1604)이다. 이 성경은 잉글랜드에서 오랫동안 사랑 받았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대학교육을 받은 청교도 성직자들이 일선 교회에 배치되면서 그들은 청교도적인 가치를 개교회에 뿌리내리고자 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주일 예배를 드린 후에 주일학교를 실시한 것이었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하지만 요즘처럼 주5일 근무가 아닌 바에 대부분 서민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 주일 오후였다. 그들은 본래 예배 드린 후에 맥주를 마시면서 축구를 하고 주일을 보냈다. 이런 전통에서 마시는 맥주를 church ale이라고 불렀다. 이 오랜 교회 전통을 타락한 것으로 비판하며 금지시켰다. 청교도들은 주일을 엄숙하게 보내는 것을 강조했다.
청교도 성직자들의 정책으로 청교도들과 젠트리 계급 사이의 교회 내 갈등이 생겼다. 단순히 종교 문제가 아니라 사회 갈등이 유발된 것이다. 젠트리들은 청교도들의 정책에 반대하여 국왕에게 청원을 했다.
제임스 1세는 1617년 관련 신학적인 논제를 서술한 “스포츠의 서” (Book of Sports)를 작성, 반포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주일 오후에 맥주를 마시고 축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잉글랜드 내에서 자신들이 꿈꾸는 종교국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자’는 극단적인 청교도들은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그로부터 3년 후 (1620) 청교도 내 분리주의자들이 탄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으로 출발했다. 물론 그들이 챙겨간 성경은 제네바 성경이었다. 미국으로 간 분리주의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꿈꾼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언덕 위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유례없는 경찰국가로 바뀌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따라온 1세대들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문제는 2세대, 3세대들이 부모 세대와 생각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간의 애정도 종교에는 못 당하는 모양이다. 청교도들은 회심을 체험하고, 청교도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그 서약대로 살고자 하는 자녀들에게만 완전한 시민권을 주었다. 반대하는 자들은 ‘거주하는 이방인’ (resident alien)이 되었다. 자연히 교회 구성원의 수는 줄어들었다. 할 수 없이 1662년 불완전 언약(Half-way Covenant)을 체결하여 이 규정을 완화해야 했다.
3.
이런 종교적 신념에 따른 타자화는 마녀사냥까지 연결된다. 마녀사냥은 근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생겨난 주목할 병리현상의 하나이다. 마녀는 중세에도 있었지만 마녀사냥은 근대적 현상이다. 그 마녀사냥이 단일한 지역으로 가장 크게 횡행했던 곳이 뉴잉글랜드 메사추세츠였다. 1692~1693년의 ‘세일럼’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은 극작가 아서 밀러가 쓴 ‘도가니 (Crucible)’로 재현되었다. 1996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아서 밀러가 이 작품을 쓸 당시 미국은 매카시의 '마녀사냥' 광기가 휩쓸고 있었다.
종교적 순정 (purity)이 지나치면 광기가 된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puritan)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들을 죽였고,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 청교도들은 국왕을 죽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흐름이 대서양을 사이에 둔 이 두 나라에 칼뱅주의 장로교가 생각보다 세력이 크지 않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 한 이유이다.
17세기 잉글랜드 청교도는 그렇게나 무섭게(?) 주일성수를 주장했다. 그 와중에서 내전(1642~1651)도 일어나고, 왕도 죽였다(1649). 긴 혼란은 명예혁명(1688)으로 끝났다. 혼란 끝에 제정된 관용령이 종교 자유의 이정표로 불리는 이유이다.
관용 없이 내달았던 신대륙의 청교도 역시 유지될 수 없었다. 미국 독립혁명으로 탄생한 수정헌법(1791)은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교 설립을 금지하였다. 종교적 신념이 잘못된 권위로 오도될 때의 위험을 인식한 것이다.
4.
장로교 전통이 강하게 뿌리내린 한국 교회 정서에서 청교도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마뜩찮겠지만, 우리는 너무 일방의 얘기만 들어왔다. 성에 차지 않아 떠난 것인지, 탄압을 받아서 자유를 찾아 떠난 것인지, 어떤 것을 판단할 때 기본은 ‘양쪽 말을 다 들어보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이념은 종교 선택의 자유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종교의 자유의 핵심은 개인의 신앙이 국가나 공권력에 의해 억압받지 않아야 함은 물론, 나의 신앙으로 타인의 신념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면 안 된다는 것도 포함된다. 종교에서 사회적 감수성이 무너질 때 자신의 것만 절대화하여 타자를 억압하게 된다. 예배에 목숨 건다는 표현이 상황에 따라서 공포스러울 수 있는 이유이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개신교 지도자를 원하는 이들은 마치 고대 유대의 제사장, 율법사들마냥 행세한다.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이 보호되어야 하는만큼이나, 타인의 자유와 신념, 그리고 안전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의 인식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천박한 자들에게 분에 넘는 힘이 주어졌을 때 폭력으로 분출된다.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종교의 자유를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펌글
Jongwon Choi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교수.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유럽중세사 공부. 캠핑과 카약타기를 즐기는 자칭 매닝파크 (E.C.Manning Park)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