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繼陽)자 장자(長子) 식(埴)자 선조님은 6세이고 자는 기지(器之)이고 배위(配位)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김한철(金漢哲)공의 따님 의성김씨(義城金氏) 슬하(膝下)에 1479년 장자(長子) 잠(潛)자, 1482년 차자(次子) 하(河)자가 태어나고, 1488년 의성김씨(義城金氏)께서 졸(卒) 하시고 난 후에 송재공(松齋公) 우(堣)자의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월성이씨(月城李氏(父 李時敏))의 한 살 아래인 이질녀인 계(繼)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춘천박씨(春川朴氏(外祖父 月城 李時敏)) 사이에서 1494년 삼자(三子) 의(漪)자, 1496년 사자(四子) 해(瀣)자, 1498년 오자(五子) 징(澄)자, 1501년 육자(六子) 황(滉)자 여섯분의 두셨고, 150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졸(卒) 하시고 육자(六子) 퇴계(退溪)의 귀(貴)로 숭정대부의정부좌찬(崇政大夫議政府左贊)으로 증직되시고, 1502년 41세에 졸(卒) 하셨다.
이때부터 송재 선조님은 가솔들을 어렵게 이끌어 갈 수밖에 없으셨다.
식(埴)자 장자(長子) 잠(潛)자 선조님은 7세이고 배위(配位) 안동권씨(安東權氏) 슬하(膝下)에 1502년에 인(寅)자 태어나시고 1530년에 졸(卒)하시고 인(寅)자 선조님은 배위(配位) 봉화금씨(奉花琴氏) 후계가 없고 1530년에 졸(卒) 하시었다.
식(埴)자 차자(次子) 하(河)자 선조님은 7세이고 자는 청지(淸之) 경원(景源) 배위(配位) 의인(宜人) 함양박씨(咸陽朴氏) 슬하(膝下)에 1512년 장자(長子) 완(완)자, 1515년 차자(次子) 굉(宏)자, 삼자(三子) 성(宬)자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고, 예천훈도(訓導)로 금당실 죽림리 함양박씨(咸陽朴氏) 12세인 부친은 박화(朴華) 母는 甘泉文氏)의 따님으로 장가드시고 우거(寓居) 하시었는데, 문원공(文元公) 제 삼자 산랑공 휘 겸파(散郞公 諱 謙派)로 함양박씨 할머님께서는 13세로 부친께서 죽림리로 이거 하셨으며, 현재 세거 중인 함양박씨는 파는 같으나 1544년에 졸(卒)하신 이후에 이거 하였다.
식(埴)자 삼자(三子) 의(漪)자 선조님은 7세이고 자는 언장(彦章) 배위(配位) 의인(宜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슬하(膝下)에 장자(長子) 선(宣)자, 차자(次子) 헌(憲)자 두 아드님을 두셨고, 충순위(忠順衛)를 지내시고 용궁 대죽으로 이거(移居) 하시고 1532년에 졸(卒) 하시고 대죽파조(大竹派祖)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식(埴)자 사자(四子) 해(瀣)자 선조님은 7세이고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취미(翠微)이고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 슬하(膝下)에 1520년 장자(長子) 복(宓)자, 1527년 차자(次子) 영(甯)자, 1531년 삼자(三子) 교(喬)자, 1534년 사자(四子) 치(寘)자, 1543년 오자(五子) 혜(惠)자 다섯 분의 아드님을 두셨고, 1528년에 대과에 급제 하시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시고, 1550년에 졸(卒) 하시고 백당파조(柏堂派祖)이시다.
해(瀣)자 장자(長子) 복(宓)자 선조님은 8세이고 자는 자앙(子昻) 이고 배위(配位) 평산신씨(平山申氏) 슬하(膝下)에 후계가 없어, 예천 신당 사월에 이거(移居) 하시고, 1545년 북경에 부친을 따라 수행하고 귀로에 황주에서 졸(卒) 하신 후에 제종 형제인 고암공(古巖公) 충(冲)자 선조님이 시양을 하시고 뒤를 이어, 종자(從子)인 미도(味道 ) 선조님이 시양을 하셨다.
식(埴)자 오자(五子) 징(澄)자 선조님은 7세이고 자는 경청(景淸) 호는 이옹(伊翁)이고 又호는 신야(莘野) 배위(配位) 의인(宜人) 봉화금씨(奉花琴氏) 슬하(膝下)에 1521년 장자(長子) 주(宙)자, 1527년 차자(次子) 건(騫)자 두 아드님을 두셨고, 찰방(察訪)을 지내시고 신야정파조(莘野亭派祖)이시며 1582년에 졸(卒) 하시었다.
식(埴)자 육자(六子) 황(滉)자 선조님은 7세이고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배위(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김해허씨(金海許氏) 슬하(膝下)에 1523년 장자(長子) 준(儁)자, 1527년 차자(次子) 채(寀)자, 1531년 삼자(三子) 적(寂)자 세 아드님을 두셨고, 1534년에 급제를 하시고 문순공(文純公)으로 제수 받으시어, 1611년 동국18현(東國18賢)의 한분으로 종묘(宗廟)에 배향(配享)되시고, 이에 진성이씨는 18집의 선정(先正)집 계열로 칭하여지고, 문묘(文廟)에 도산서원 외 세 개의 서원에 배향 되셨으며 상계파조(上溪派祖)이시며 1570년에 졸(卒) 하시었다.
계양(繼陽)자 차자(次子) 우(堣)자 선조님의 자는 명중(明仲)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며,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월성이씨(月城李氏) 이시민(李時敏)공의 따님 사이에 1502년에 장자(長子) 수령(壽笭)을 낳으시고 이녀(二女)를 낳으셨는데 맏사위는 창녕인(昌寧人) 조효연(曺孝淵) 호는 위재(韋齋)이고 군수(郡守)를 지내고 정우당(淨友堂) 조치우(曺致虞)의 아들이다. 둘째 사위는 고창인(高敞人) 오언의(吳彦毅) 호는 죽오(竹塢)이며 현감(縣監)을 지내고 삼우당(三友堂) 오석복(吳碩福)의 아들이다.
손자는 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 증손자는 죽유(竹牖) 오운(吳澐)이다.
1492년 생원이 되고 149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하시고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고, 1499년 가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고 1500년 여름에 대교(待敎)로 승진 겨울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셨다.
1501년 7월 성균관전적 겸 남학교수(成均館典籍兼南學敎授)에 제수되고 8월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고, 겨울에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제수되셨다.
1504년 정월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고 2월에 병조정랑 지제교(兵曹正郎 知製敎)에 제수되셨다.
1505년에 여름 겸 사헌부장령(兼 司憲府掌令)에 제수되고 7월에 춘추관교사관(春秋館敎史官)을 겸하고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으로 옮겨가고 9월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지제교(知製敎)겸 춘추관교사관(春秋館敎史官).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에 재수되셨다.
1506년 여름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 옮기고 7월 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지제교겸춘추관수찬관(知製敎兼春秋官修撰官)으로 승진, 9월 금상(今上)께서 즉위하니 녹공(錄功)되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가선대부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嘉善大夫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이 되셨다.
겨울에 노모가 연로 하다는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제수 되었는데, 근무 평가 성적이 높아서 책과 옷의 안감과 겉감을 하사받아 포장(褒獎)이 되고, 임기가 끝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 되셨다.
1509년 공의 나이 41세 겨울, 호조참판겸도총부부총관(戶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에 제수 되고, 1510년 여름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고 겨울에 외직으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가시고
이에 관동행록(關東行錄)이 만들어 졌다.
1511년 겨울 임기가 끝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512년 봄, 노모 봉양을 위하여 해직을 청하고 예안의 옛집으로 돌아 오셨는데, 곧이어 기력이 쇠진 해 지시고, 가을에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셨다.
1513년 봄,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셨고, 온계에 선인께서 심은 소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숲을 이루어서 높고 빼어난 것이 아낄 만하였다.
공이 그 곁에 집을 지어 서재를 열고 날마다 경서와 사서를 연구하시며 자질(子姪)들을 가르치셨다.
비록 병이 심하여 고단 하더라도 그만 두거나 잊은 적이 없었으며, 더러는 술을 가져오게 하고 시를 읊조려 스스로 시름을 떨치셨다.
하여 귀전록이 만들어 졌다.
송재문집(松齋文集) 귀전록(歸田錄)에
移家閱藏書(이사한 뒤에 장서를 훑어보다)
屋近携來易 집이 가까워서 옮겨 오기 쉬웠으니,
分籤檢在亡 분류한 찌기를 보며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하네.
傳家氈幾世 집안에 전하는 청전이 몇 대나 되었나,
辟蠹述生香 좀 벌레 물리치는 운초가 향기 풍기네.
縱未同陸曬 비록 학륭이 배 쬐었던 일 같지는 못해도,
猶云免魯忘 외려 노나라 사람의 잊어버림은 면할 수 있네.
笭乎知汝託 령아 너에게 하는 당부를 알겠느냐,
舊業莫嬉荒 노느라 학문을 망쳐서는 안 되느니라.
이 시를 보면 선조님의 자손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1514년 정월,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2월, 논의하는 자들이 반정 당일에 관한 일을 주워 모아 녹훈과 품계를 삭탈 하였다.
9월, 공이 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하니 상께서 수교로 위로하는 답을 내렸다.
1515년 6월,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재수 되시고, 이해 봄에 청량산을 유람하며 상 청량암에 우거 하셨다.
1516년 가을, 고과(考課)에서 상등으로 평가받아 가선(嘉善)의 품계를 받으셨다.
1517년 공의 나이 49세 겨울, 11월8일에 병을 앓으시다가 관아에서 숨을 거두시니, 16살의 아들 수령이 상구를 모시고 돌아와 예안현 온계리 수곡에 자리한 선영 곁에 장사를 지냈다.
次旌善東軒韻
衝雪東來傍水行 눈길 뚫고 동쪽으로와 물가로 가니,
人家無瓦邑無聲 인가에는 기와 없고 고을엔 성이 없네.
炊忙村婦寒溪汲 밥 짓기 바빠서 촌 아낙이 찬 냇물 길어 오고,
日暮歸雲半嶺橫 날 저물어 돌아가는 구름 반쯤 고개에 걸렸네.
呵喝此行煩客路 벽제하는 이 행차 객로를 번거롭게 하는데,
次口何事合民情 다음에는 어떤 일로 민심에 부합 할까.
桃源日入無多景 무능도원에 한번 들어오니 빼어난 경치 없고,
只有漆山共我淸 그저 칠산(칠정)이 있어 내 맑은 정취를 함께 하노라.
마지막 구절 칠산(漆山)은 계산으로 잘못 해석되어, 칠산 이란 (희.노.애.락.애.오.욕)을 칭 함이니, 칠정에 대한 다스림이 대단 하신 것이다.
위의 뒷 구절은 시를 읊으신 후의 심경이다
密雪迷客前 싸락눈이 내려 나그네 앞을 헷갈리게 하고
雲山失舊靑 구름 낀 산은 푸른 옛 빛을 잃었다
行吟索句 다니면서 읊조리며 시구 찾아야지
登眺欠臺亭 누 ,대에 올라가서 만은 부족하며
臘白笛嘉瑞 섣달 많은 눈에 嘉瑞 곡조의 피리소리
檀動暗馨 향나무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고
庭空風易到 뜰이 비어 바람 쉽게 불어오니
朝醉午先醒 아침에 취한 술이 정오도 오기 전에 깨는 구나
위의 시는 송재 선조님의 유묵으로 문집에 오자가 표기되어 바로 잡아야 할 것 같다.
후손들이 습유하여 올릴 때 차구(次口)를 자(咨)자로 잘못 보아서 다른 한 글자를 삽입하였고, 그 아래 문장은 시가 아니고 앞에 시를 적으신 후에 시란 것은 가만히 앉아서 읊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적으신 것을 시로 판단하여 운율을 생각하여 유묵의 글자를 무시하고 다른 글자를 삽입하여 시로 만들었으니 바로 잡은 것이다.
嘉瑞(가서):조선 세종 때 창제된 신악 발상(發祥)11곡 중 열 번째 곡명